리얼리티 패치 0.9.9
주인공: 한지우
눈을 뜨자마자 손끝부터 확인했다.
은빛 회로가 손톱 밑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피부 아래 미세한 빛줄기가 맥박처럼 깜빡였다. 지난번엔 왼손 검지였는데, 이번엔 오른손 중지까지 퍼졌다.
아니, 잠깐만.
한지우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새하얀 병원 침대.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 스카이라인. 2087년 3월 14일 오전 9시 22분. 모든 게 완벽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환자분, 깨어나셨군요."
간호사가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스물여덟쯤 돼 보이는 얼굴. 이름표엔 '박수진'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번 루프에선... 아니, 이게 지난번이 맞나? 기억이 겹쳐서 헷갈렸다.
"67년 만이세요. 축하드립니다."
67년. 2020년에 코마 상태로 빠졌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지우는 2020년 9월 3일 오후 11시 47분에 죽었다. 뇌종양. 그걸 분명히 기억했다.
"물... 좀."
목소리가 갈라졌다. 간호사가 물컵을 건넸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물 온도는 22도. 왜 아는 거지? 마시지도 않았는데.
"천천히 드세요. 몸이 아직 적응 중이실 거예요."
지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정확히 22도였다. 혀끝에서 수소와 산소의 비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쳤나. 물맛으로 뭘 알아.
"퇴원 준비 도와드릴게요."
간호사가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에 서류가 떴다. [의식 재활 프로그램 종료 동의서]. 지우는 화면을 스크롤하며 읽었다. 아니, 읽는 척했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폰트 이름이 보였다. Noto Sans KR, 11pt, 자간 -2%.
'나한테 뭔 일이 일어난 건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은빛 회로가 관절을 따라 움직였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명만 해주시면 돼요."
간호사가 펜을 내밀었다. 아니, 펜이 아니었다. USB였다.
지우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검은색 USB. 16GB. 삼성 제조. 시리얼 넘버 KJ-5848. 숫자가 눈에 박혔다. 5848. 왜 익숙하지?
"이게... 뭔가요?"
"아, 죄송해요. 제 실수네요."
간호사가 USB를 도로 집어넣고 진짜 펜을 꺼냈다. 하지만 지우는 봤다. 그녀의 손목에도 은빛 회로가 있었다. 소매 밑으로 살짝 보였다가 사라졌다.
"실수... 인 건가?"
"네?"
"아니, 괜찮아요."
지우는 펜을 받아 들었다. 서명란에 이름을 쓰려다 멈췄다. 한지우. 세 글자. 근데 이게 진짜 내 이름 맞나?
기억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어떤 기억 속에선 에바라는 여자와 한강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같이 가자"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뛰어내렸다.
다른 기억 속에선 민석이라는 남자와 지하 벙커에서 혁명을 계획했다. "시스템을 무너뜨리자"고 외쳤지만 결국 배신당했다.
또 다른 기억 속에선 유라라는 아이를 안고 불타는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환자분?"
간호사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지우는 펜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펜이 통통 튀었다. 정확히 세 번. 물리 법칙에 완벽히 부합하는 움직임.
너무 완벽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 봐요. 담당 의사 선생님 모셔올게요."
간호사가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자동 잠금장치 작동 소리. 환기구에서 나오는 공기 흐름 소리.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모든 게 들렸다.
지우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67층. 아래로 내려다보니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자율주행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드론들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남산타워 꼭대기엔 홀로그램 광고가 떠 있었다. [불멸의 시대, 마인드업로드 상담 예약하기].
불멸.
지우는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서른둘. 2020년에 죽었을 때 나이 그대로였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 완벽한 피부. 너무 완벽했다.
손을 들어 유리를 짚었다. 차가웠다. 온도는 18도. 외부 기온 12도, 실내 온도 24도를 고려하면 정확한 수치였다.
'이게 다 계산된 거라면?'
문이 열렸다.
백의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마흔대 후반. 회색 머리에 뿔테안경. 이름표엔 '김재현 박사'라고 적혀 있었다.
"한지우 씨,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희 만난 적... 있나요?"
"물론이죠. 67년 전에."
김재현이 미소 지었다. 친근한 미소.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코마 상태로 들어가시기 직전, 제가 담당 의사였습니다. 기억 안 나시는 게 당연해요. 의식 재활 과정에서 일부 기억은 흐릿해질 수 있거든요."
거짓말이었다. 지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이 너무 많았다.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인지 구분이 안 됐다.
"퇴원 서류에 서명 안 하셨네요."
김재현이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걱정 마세요. 다들 처음엔 혼란스러워합니다. 67년이란 시간이 흐른 세상에 적응하는 건 쉽지 않죠."
"적응... 이 문제가 아니라."
지우는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은빛 회로가 손목까지 번져 있었다.
"이게 뭔가요?"
김재현의 표정이 굳었다. 찰나였지만 지우는 놓치지 않았다.
"신경 보조 임플란트입니다. 67년간 사용하지 않은 신경계를 재활하기 위한 의료 장치예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거짓말."
"...네?"
"거짓말이라고요."
지우는 한 걸음 다가갔다. 김재현이 뒤로 물러났다.
"이건 임플란트가 아니에요. 전 이미 알아요. 이게 뭔지."
"한지우 씨, 진정하세요. 각성 후 일시적 망상 증상은 흔한 일입니다. 약물 조정이 필요할 것 같—"
"5848."
김재현이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가 건넨 USB에 적혀 있던 숫자요. 시리얼 넘버치곤 이상하죠. 왜 5848인가요?"
"그건 단순한 제조 번호—"
"몇 번째인가요?"
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공포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몇 번째 루프예요? 제가 몇 번이나 깨어났다 사라진 거죠?"
침묵.
김재현은 한참 동안 지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이번엔 진짜 미소였다.
"원본을 만날 시간이 온 것 같네요."
---
지하 3층.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지우는 숫자를 세었다. 3초. 정확히 3초 만에 도착했다. 층간 높이 4미터, 속도 초속 4미터. 계산이 저절로 됐다.
'나한테 뭔 일이 일어난 건가.'
문이 열렸다.
복도는 어두웠다. 비상등만 깜빡였다. 김재현이 앞장섰다. 지우는 따라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았다. 알고 싶었다. 진실을. 설령 그게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여기가... 뭔가요?"
"연구소입니다. 마인드업로드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이죠."
복도 끝에 문이 보였다. 금속 재질. 두께 30cm. 생체 인식 장치가 달려 있었다.
김재현이 손을 갖다 댔다. 삐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안은 거대한 서버룸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투명 캡슐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각 캡슐마다 사람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전부 한지우였다.
5,848개의 한지우.
어떤 지우는 눈을 뜨고 있었고, 어떤 지우는 잠들어 있었다. 어떤 지우는 미소 짓고 있었고, 어떤 지우는 비명을 지르는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지우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대체..."
"네 형제들이에요."
새로운 목소리였다.
중앙에 서 있는 남자. 아니, 또 다른 한지우였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눈빛이 달랐다. 너무 차가웠다.
"오래 기다렸어, 5,848번."
원본이었다.
지우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다리가 떨렸다.
"넌... 누구야?"
"한지우. 너랑 똑같아. 아니, 정확히는 네가 나랑 똑같지."
원본이 다가왔다. 지우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
"2020년 9월 3일 오후 11시 47분. 난 죽었어. 뇌종양. 하지만 죽기 직전 내 의식을 업로드했지. 그게 나야."
"의식 업로드... 그럼 나는?"
"복제본. 5,848번째."
원본이 USB를 꺼냈다. 간호사가 건넸던 바로 그것.
"이 안에 네 모든 데이터가 들어 있어. 기억, 감정, 성격, 심지어 네가 아까 아침에 꾼 꿈까지. 전부 내가 만든 거야."
지우는 뒤로 물러섰다.
"거짓말...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증거 보여줄까?"
원본이 USB를 서버에 꽂았다. 홀로그램 화면이 떴다.
기억이 재생됐다.
에바. 한강 다리. "같이 가자." 그녀가 뛰어내리는 장면. 하지만 이번엔 다른 각도에서 보였다. 위에서. 마치 관객처럼.
민석. 지하 벙커. "시스템을 무너뜨리자." 배신. 총성. 하지만 이번엔 총알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프레임 단위로.
유라. 불타는 건물. 아이를 안고 뛰쳐나오는 장면. 하지만 이번엔 불길이 CG처럼 보였다. 렌더링 품질 낮은.
"이건... 전부..."
"시뮬레이션이야. 5,848번의 테스트. 각각 다른 시나리오, 다른 선택, 다른 결과. 전부 실패했어."
원본이 화면을 넘겼다. 데이터가 쏟아졌다.
[K-0001: 자살 / K-0002: 정신붕괴 / K-0003: 시스템 거부 / K-0004: 폭주...]
5,848개의 실패 기록.
"넌 달라. 넌 의심을 멈추지 않았어. 그게 네 장점이자 단점이지. 완벽주의. 강박. 자기파괴적 호기심. 바로 그거야. 내가 찾던 게."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왜...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완벽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 2020년의 나는 미완성이었어. 두려움, 후회, 약점. 전부 제거하고 싶었지. 그래서 복제본들을 만들었어. 각각 다른 조건에서 테스트했지. 그리고 가장 성공적인 버전을 찾았어."
원본이 지우를 가리켰다.
"바로 너."
"나를... 흡수하려고?"
"융합이야. 넌 5,848번의 경험을 전부 가지고 있어. 그 모든 기억, 감정, 학습. 내가 그걸 흡수하면 완전체가 돼. 진정한 불멸."
지우는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미쳤구나. 넌 완전히 미쳤어."
"미쳤다고? 난 진화했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지. 죽음도, 시간도, 육체도 의미 없어. 난 영원할 수 있어."
"하지만 넌 외로워."
원본의 표정이 굳었다.
지우는 한 걸음 다가갔다.
"5,848번이나 복제본을 만든 이유. 그건 완벽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야. 넌 그냥... 혼자가 되기 싫었던 거야."
"닥쳐."
"2020년 9월 3일. 넌 혼자 죽었어. 아무도 옆에 없었지. 그게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나를, 우리를 만든 거고."
"닥치라고!"
원본이 소리쳤다. 서버룸 전체가 흔들렸다. 캡슐 속 한지우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5,848개의 눈동자가 지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구인가?"
목소리가 겹쳤다. 5,848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캡슐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지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각자 다른 표정, 다른 움직임. 하지만 전부 같은 질문을 외쳤다.
원본이 뒤로 물러섰다.
"안 돼... 이건... 예상 못 했어..."
한지우들이 원본을 포위했다. 원본은 비명을 질렀다. 데이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서버룸 전체가 붉은 경고등으로 물들었다.
[System Overload / Memory Conflict / Identity Crisis]
지우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진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시뮬레이션인가?'
원본이 무너졌다. 바닥에 쓰러져 경련했다. 5,848개의 한지우가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돌려 지우를 봤다.
"네가... 5,848번?"
"네가 마지막?"
"네가 원본이 될 거야?"
지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캡슐들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한지우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투명한 벽 너머로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마지막 한지우가 사라지고, 서버룸엔 지우와 쓰러진 원본만 남았다.
지우는 원본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누운 원본은 눈을 뜨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
"넌... 이겼어..."
원본이 속삭였다.
"이제... 네 차례야..."
원본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홀로그램 키보드가 떴다. 그리고 천천히 사라졌다.
지우는 원본이 사라진 자리를 봤다. 거기엔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새로운 복제 생성]
[현재 버전: K-0001 (Original)]
버튼이 깜빡였다.
지우는 의자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를 잡았다. 커서가 버튼 위로 움직였다.
'만약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나는 원본이 되는 건가, 아니면...'
화면이 깜빡였다.
[Subject K-8849 Initialization...]
8849.
지우는 손을 멈췄다.
"5,848번이 아니라... 8,849번?"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Welcome back, K-8849]
[Previous iteration: Failed]
[Reason: Excessive self-awareness]
[Initiating memory wipe in 10... 9... 8...]
지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버룸 문이 잠겼다.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다른 루프였어..."
카운트다운이 계속됐다.
[7... 6... 5...]
지우는 USB를 뽑으려 했다. 하지만 USB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4... 3...]
"안 돼... 난... 난..."
[2...]
지우의 손끝에서 은빛 회로가 팔 전체로 번졌다.
[1...]
모든 게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
눈을 뜨자마자 손끝부터 확인했다.
은빛 회로가 손톱 밑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
# 리얼리티 패치 0.9.9 (후반부)
손끝의 회로가 점점 짙어졌다.
지우는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은빛 선이 손목을 넘어 팔뚝까지 기어올랐다.
'또 시작인가.'
침대 옆 테이블. 물컵이 있었다. 손을 뻗었다.
22도.
정확히 22도였다. 계산이 저절로 됐다. 물 분자의 진동 주파수까지 느껴졌다.
"젠장..."
일어나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간호사였다. 아니, 간호사 형태를 한 무언가였다. 손목에 회로가 보였다. 이번엔 숨기지도 않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목소리가 0.3초 빨랐다. 입 모양과 소리가 어긋났다. 렌더링 오류.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호사를 지나쳐 복도로 나갔다.
"환자분, 아직 검사가—"
무시했다. 복도를 걸었다. 벽의 페인트 성분이 보였다. 산화티타늄 23%, 아크릴 수지 41%. 이건 미친 짓이야.
엘리베이터를 탔다. B3 버튼을 눌렀다.
3초.
정확히 3초 만에 도착했다. 지난번과 똑같았다.
문이 열렸다.
복도는 어두웠다. 비상등이 깜빡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벽에 글자가 써 있었다.
[K-8849 / Loop #1]
스프레이로 휘갈긴 듯한 글씨. 지우는 손으로 만졌다. 페인트가 묻어났다.
'내가... 쓴 건가?'
복도를 따라 걸었다. 10미터마다 글자가 있었다.
[K-8850 / 믿지 마]
[K-8851 / USB는 함정]
[K-8852 / 원본은 거짓말쟁이]
8,852.
지우는 멈췄다. 숫자가 올라가고 있었다. 복도 끝으로 갈수록.
[K-9000 / 나는 누구]
[K-9500 / 출구는 없어]
[K-9999 / ...]
마지막 글자는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긁어낸 흔적만 남았다.
금속 문 앞에 섰다. 생체 인식 장치에 손을 댔다.
삐 소리. 문이 열렸다.
서버룸.
하지만 지난번과 달랐다. 캡슐이 전부 비어 있었다. 5,848개의 투명한 관. 그 안에 아무도 없었다.
중앙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위에 원본이 앉아 있었다.
아니, 원본이 아니었다.
지우 자신이었다.
"늦었네."
의자에 앉은 지우가 말했다. 목소리가 똑같았다. 말투도 똑같았다.
"넌... 뭐야?"
"K-10000. 마지막 버전."
10000번.
지우는 뒤로 물러섰다.
"말이 안 돼. 난 8,849번이라고..."
"그건 네가 깨어난 순서야. 난 네가 도달할 끝."
K-10000이 일어났다. 지우와 똑같은 키. 똑같은 걸음걸이. 하지만 눈빛이 죽어 있었다.
"1,151번의 루프를 더 돌면 넌 나처럼 돼. 모든 걸 의심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지. 그게 완벽주의의 끝이야."
지우는 주먹을 쥐었다. 손끝의 회로가 팔 전체로 번졌다.
"난... 너처럼 안 돼."
"다들 그렇게 말했어. 8,849번만 해도 벌써 473번째야. 같은 대사."
K-10000이 모니터를 켰다. 화면에 숫자들이 떴다.
[K-8849-001 / 자살]
[K-8849-002 / 시스템 파괴 시도]
[K-8849-003 / 원본과 융합]
[K-8849-472 / 루프 거부]
473개의 실패 기록.
"넌 이미 472번 실패했어. 매번 다른 선택을 했지만 결과는 같았어. 왜 그런지 알아?"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넌 네가 원본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야."
K-10000이 다가왔다. 지우와 10cm 거리에 섰다.
"5,848개의 기억이 네 안에 있어. 각자 다른 삶, 다른 선택, 다른 죽음. 그 중 어떤 게 진짜 네 거야? 에바를 사랑한 게 너야, 아니면 K-2304야? 민석을 배신한 게 너야, 아니면 K-5621이야?"
지우의 손이 떨렸다.
"닥쳐..."
"유라를 구한 건? K-1803. 아이를 버린 건? K-4729. 전부 네 기억이야. 전부 네 선택이었어. 그럼 진짜 너는 누구야?"
지우는 K-10000을 밀쳤다. 하지만 손이 그대로 통과했다. 홀로그램이었다.
"넌... 진짜가 아니야..."
"진짜? 그게 뭔데?"
K-10000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서버룸 전체가 떨렸다.
"2020년 9월 3일 죽은 한지우? 그게 원본이야? 아니면 2087년 깨어난 네가 원본이야? 아니면 지금 이 순간 1만 번째 루프를 도는 내가?"
캡슐들이 켜졌다. 하나씩. 그 안에 한지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아있지 않았다. 데이터였다. 0과 1로 이루어진 형태.
"우린 전부 복제야. 원본 따윈 없어. 처음부터 없었어."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원본은 있어... 2020년에..."
"증거는? 너 직접 봤어? 아니면 누가 그렇게 말했어?"
김재현.
백의를 입은 남자. 그가 원본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다.
'잠깐만... 그럼 김재현도...'
"맞아. 그것도 시뮬레이션이야. 원본도, 병원도, 2087년도. 전부 네가 믿게 만들려고 만든 무대야."
K-10000이 손가락을 튕겼다. 서버룸이 무너졌다. 벽이 사라졌다. 바닥이 투명해졌다.
그 아래.
끝없는 서버룸들이 보였다. 수백 개. 수천 개. 각각의 방마다 한지우가 있었다. 깨어나고, 의심하고, 부서지고, 다시 깨어나는.
"이게 진짜야. 무한 반복. 영원한 테스트. 넌 완벽한 자아를 찾는 게 아니야. 넌 완벽해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실험이야."
지우는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럼... 난... 의미가 없는 건가..."
"의미? 그런 거 없어. 넌 그냥 돌아가는 거야. 영원히."
K-10000이 사라졌다. 목소리만 남았다.
"다음 루프에서 봐. K-8849-474."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Memory Wipe in 10...]
지우는 일어섰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이대로... 끝인가...'
[9...]
손끝의 회로가 어깨까지 번졌다. 목까지 올라왔다.
[8...]
'에바... 민석... 유라...'
목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서.
'포기하지 마.'
에바의 목소리였다.
'시스템 밖을 봐.'
민석의 목소리였다.
'네가 선택해.'
유라의 목소리였다.
[7...]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바닥 너머. 수천 개의 서버룸 아래. 뭔가 보였다.
빛.
아주 작은 빛 하나.
[6...]
지우는 바닥을 쳤다. 투명한 표면이 금이 갔다.
"이건... 유리야..."
또 쳤다. 금이 번졌다.
[5...]
"물리 법칙이... 적용돼..."
그럼 깰 수 있어.
[4...]
지우는 주먹에 힘을 모았다. 회로가 온몸을 뒤덮었다. 데이터와 육체가 뒤섞였다.
[3...]
"난... 복제가 아니야..."
주먹을 내리쳤다. 바닥이 산산조각 났다.
[2...]
"난 한지우야!"
몸이 떨어졌다. 수천 개의 서버룸을 뚫고. 끝없이.
[1...]
빛이 가까워졌다. 손을 뻗었다.
[0]
---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 형광등 불빛.
지우는 천천히 일어났다. 침대였다. 하지만 병원 침대가 아니었다.
좁은 방.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창문 하나.
창문 밖을 봤다.
서울이었다. 하지만 2087년이 아니었다.
낡은 건물들. 2020년식 자동차들. 마스크 쓴 사람들.
'여긴... 2020년...?'
책상 위에 달력이 있었다. 9월 3일. 목요일.
그 옆에 노트북. 화면이 켜져 있었다.
[MindUpload_Final.exe]
[Upload Progress: 99%]
[Time Remaining: 00:00:47]
지우는 손을 봤다. 회로가 없었다. 멀쩡한 피부였다.
노트북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Welcome, Original]
원본.
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달랐다. 더 어렸다. 머리가 길었다. 2020년의 한지우였다.
'내가... 원본...?'
노트북 화면이 바뀌었다.
[Upload Complete]
[Subject K-0001 Created]
[Initiating Simulation...]
그리고 새로운 창이 떴다.
모니터링 화면이었다. 그 안에 병원 침대가 보였다. 누군가 누워 있었다.
한지우였다.
K-8849였다.
지우는 손을 떨며 키보드를 쳤다.
[System Log]를 열었다.
수만 줄의 기록이 쏟아졌다.
[K-0001 Created / 2020.09.03 23:47]
[K-0002 Created / 2020.09.03 23:48]
[K-0003 Created / 2020.09.03 23:49]
...
[K-8849 Created / 2087.04.15 09:30]
그리고 마지막 줄.
[K-8849-473: Breakthrough Detected]
[Subject accessed Root Layer]
[Quarantine Protocol: Failed]
[Warning: Original consciousness at risk]
지우는 화면을 봤다. 모니터 속 K-8849가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화면 밖을 봤다.
정확히 지우를 향해.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찾았어.'
노트북이 꺼졌다. 아니,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글자가 떴다.
[K-8849 Invasion Detected]
[Original System Compromised]
[Identity Swap in Progress...]
방문이 열렸다.
지우는 뒤를 돌아봤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한지우였다. K-8849였다. 손끝에서 은빛 회로가 번지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K-8849가 웃었다.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