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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약 14분

역사는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주인공: 강서연

모니터가 깜빡였다.


"어어, 어어어?"


서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었다. 복원 프로그램 화면 속, 조선 중기 호적 문서 조각이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한다.


글자들이 녹아내리듯 흘러내리더니 다시 뭉쳐 이상한 문양을 만든다.


"야, 야 이거 왜 이래—"


책상 위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며 나갔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지하 사료복원실 특유의 곰팡내가 갑자기 사라지고, 대신 뭔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야 이거 서버 과부하인가... 아니 근데 이 냄새는 뭐지.'


화면 속 문서 이미지 위로 낯선 마당 풍경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초가지붕, 장독대, 흙바닥.


서연의 눈앞이 두 겹으로 갈라졌다. 모니터와 마당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이게 무슨 홀로그램—"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새까매졌다.


...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건 등짝에 닿는 흙바닥의 서늘함이었다.


'어 뭐지, 나 실험실 바닥에 누워있나.'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손끝에 걸리는 감촉이 이상했다. 서연은 자기 소매를 내려다봤다.


무명천. 누렇게 바랜, 거친 삼베 느낌의 저고리.


"어 이거 뭐야, 나 코스프레했나? 아니 언제?"


멍하니 마당을 둘러봤다. 초가지붕 처마 밑으로 빨래가 널려있고, 장독대 여러 개가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발밑에는 낡은 짚신 한 켤레.


'와 세트가 완전 리얼하네. 학과에서 무슨 체험 행사 했었나? 근데 나 언제 잠들었지.'


옆에 놓인 대나무 빗자루를 손가락으로 톡 튕겨봤다. 딱딱한 감촉이 손끝에 그대로 전해진다.


"어... 이거 진짜 나무네."


장독 뚜껑을 열어보니 된장 냄새가 훅 올라왔다. 인공적인 냄새가 아니었다. 발효 냄새 특유의 깊고 시큼한 그 냄새.


'이상하다. 이거 진짜 만들어놓은 세트라고 보기엔 너무 정교한데.'


서연은 팔뚝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아야. 어어 이거 뭔가 좀 쎄한데."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은 복원실, 모니터 이상 현상, 그리고 정신을 잃은 것. 지금 상황은 초가집 마당.


'실험 부작용인가. 뭐 그 장비 전자파 이상하다고 조교가 그랬었는데. 환각 증세 같은 건가.'


애써 태연하게 결론을 내렸다. 침착하게, 이건 다 뇌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라고.


"그래, 환각이야 환각. 침착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면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당을 벗어나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


골목을 따라 걷던 서연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담벼락에 붙은 방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흰 무명 저고리에 짚신, 상투를 튼 남자들, 쪽진 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들.


'와 저 복식 완전 고증 미쳤다. 저 저고리 깃 모양 봐, 저거 완전 16세기 스타일인데.'


방문에 적힌 한자를 읽어내려가던 서연의 눈이 커졌다.


세금 관련 공고, 그 아래 적힌 연호.


'... 이거 명나라 가정제 연호잖아. 이 시기면 조선 중종이나 명종 때인데.'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환각이라기엔 너무 구체적이었다. 이 정도로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는 세트는 지금 대한민국에 없다.


'설마.'


주변 사람들의 말투를 다시 들어봤다. 억양, 어휘, 종결어미. 전부 사극에서나 듣던 그 말투였다. 그것도 어설픈 사극톤이 아니라 진짜 자연스러운.


'이거 진짜네. 나 진짜 조선에 온 거야.'


머릿속에서 학위논문, 세미나, 지도교수 얼굴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 자리를 채운 건 흥분이었다.


"헐, 대박, 이거 완전 진짜잖아!"


목소리가 너무 컸다. 지나가던 사람 몇 명이 흘끔거렸지만 서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야 이 방 좀 봐봐, 가정 연호 쓴 거 보니까 명종 때 맞네! 명종이면 문정왕후 수렴청정 시기잖아, 을사사화 터진 지 얼마 안 됐을 때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이 시기가 완전 개판이었거든? 윤원형이 권력 잡고 있을 때라 관직 매매가 판을 쳤고, 지방 수령들 수탈이 심해서 백성들 살기 진짜 힘들었어. 근데 몇 년 안 있으면 을묘왜변 터지거든, 전라도 쪽에 왜구 침입—"


"...뉘시오?"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갓을 쓴 젊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서연을 훑어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 저 사람 뭔데 저렇게 쳐다봐.'


"아, 저요? 저는 그냥 지나가던—"


"방금 한 말들, 어디서 들으셨소."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연은 그제야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전부 이상한 걸 보는 눈이었다.


'아. 아 이거 큰일 났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저잣거리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상황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 시대에 여자가 저렇게 정치 얘기를... 그것도 왕실 얘기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침착해, 서연아. 여기서 삐끗하면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어.'


남자가 한 발 다가섰다.


"그런 말투, 그런 지식. 어디서 배운 것이오. 사대부가 규수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오만."


서연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표정을 순식간에 바꿨다. 방금까지의 들뜬 얼굴은 사라지고, 조용하고 차분한 눈빛만 남았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목소리 톤도 완전히 달라졌다. 느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소녀는 먼 친척 댁에 몸을 의탁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릴 적 아비에게서 글을 배우며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조금 아는 것뿐인데, 경솔했습니다."


남자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먼 친척이라 함은."


"청주 이가입니다. 아비가 일찍 세상을 뜨고 나서 그쪽 어른께 신세를 지러 가는 길입니다."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과 본관이 술술 나왔다. 서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매끄러웠다.


'다행이다. 대충 시대극에서 주워들은 걸로 버텨야지.'


남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도윤이라 하오. 이 마을 훈장 댁에서 잠시 글을 봐주고 있소."


"강서... 아니, 이서연이라 합니다."


이름을 말하려다 급히 고쳤다. 도윤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지만 서연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실수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


그날 저녁, 도윤은 훈장 몰래 창고에 들어가 낡은 족보를 뒤졌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종이 뭉치 사이에서, 청주 이가의 계보를 찾아 손끝으로 짚어 내려간다.


"청주 이가라... 이런 이름의 규수는 없을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문득 멈췄다.


족보 위로 촛불 그림자가 흔들렸다.


도윤의 손끝이 종이 위 한 줄에서 굳었다.


"...이럴 리가."


그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창고 밖에 쪼그려 앉아 있던 서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서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슬쩍 문을 밀었다.


"저기요, 뭐 찾았어요?"


도윤이 화들짝 놀라며 족보를 덮으려 했다. 서연의 눈이 그보다 빨랐다.


'어, 저 페이지 뭐지.'


호기심이 몸보다 먼저 움직였다. 서연은 창고 안으로 성큼 들어가 도윤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니 뭘 그렇게 놀라요, 저 그냥 궁금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렇게 바랜 종이, 붓글씨로 적힌 계보. 그 사이, 낯선 이름 하나.


강서연.


숨이 턱 막혔다.


'어. 어어. 이게 왜 여기.'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한자로 정확히 적힌 강, 서, 연.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몇 자가 더 적혀 있었다.


*생몰년 미상, 명종 십년경 홀연히 나타나 종적을 알 수 없음.*


'이거 뭐야. 이거 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금까지 위장 신분을 지어내던 침착함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도윤이 서연을 쳐다봤다. 그 시선이 이제는 의심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그대가... 이 이름을 아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을 얼버무리려던 서연은 멈췄다. 발뺌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흥분으로 뛰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이건 제 이름이에요."


도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주 이가라 하지 않았소."


"거짓말이었어요."


"강서연"이라고, 이번에는 또렷하게 말했다.


침묵이 창고 안을 채웠다. 촛불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도윤은 족보와 서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그 페이지로 시선을 떨궜다.


"이 족보는 백 년도 더 된 것이오."


서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백 년 전 족보에... 내 이름이 왜.'


"명종 십 년이면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이 명종 십 년이오."


그 말이 귓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지금이... 지금이 그때라고?'


서연은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홀연히 나타나 종적을 알 수 없음. 그 문장이 마치 오늘 벌어질 일을 미리 적어둔 것 같았다.


'설마 이게... 나에 대한 기록이라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환각이라 믿고 싶었던 순간은 이미 지나갔다. 이건 환각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무언가였다.


'내가 여기 온 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거야?'


도윤이 족보를 조심스레 덮으며 서연을 응시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목소리에 아까와는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온 것이오. 왜 이 이름이 백 년 전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오."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몰라요. 나도 진짜 모른다고요.'


속으로 외쳤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진실을 말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창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훈장 어른이오."


낮게 속삭이며 서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숨으시오, 지금 당장."


서연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기 직전,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창고 구석, 낡은 짚더미 뒤로 몸이 밀렸다.


숨죽인 서연의 귓가에 도윤의 속삭임이 스쳤다.


"소리 내지 마시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짚더미 틈으로 훈장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도윤아, 게 있느냐."


"예, 훈장님. 족보를 정리하다가—"


목소리가 완벽하게 평온했다. 방금 전까지 떨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와, 저 사람 뭐야. 순간 연기하는 거 봐.'


엉뚱한 감탄이 스쳤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밤이 늦었다. 불도 아껴야 하는데 여기서 뭘 그리."


"곧 정리하고 나가겠습니다."


발소리가 다가왔다. 서연은 숨을 완전히 멈췄다.


'제발, 제발 그냥 가.'


짚더미 사이로 훈장의 발이 지나쳤다. 등불이 창고 안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서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갔어요?"


"...갔소."


도윤이 짚더미를 걷어내며 손을 내밀었다. 서연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잡아준 손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괜찮소?"


"네, 네 괜찮아요."


애써 웃어 보였지만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도윤은 그런 서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족보를 집어 들었다.


촛불 아래 펼쳐진 페이지, 그 위의 이름 석 자가 여전히 선명했다.


"이 이름의 주인은."


도윤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백 년 전, 어느 문서 하나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소."


서연의 눈이 커졌다.


"...문서요?"


"정확히는, 불에 타다 만 호적 조각이라 하더이다. 이상한 글씨가 적혀 있어 훈장님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게 했소."


등골을 타고 뭔가 서늘한 것이 흘러내렸다.


'불에 탄 호적 조각... 그거 설마.'


서연의 머릿속에 복원실 냄새가 스쳤다. 타는 냄새, 흔들리던 조명, 손끝에서 바스러지던 문서 조각.


'내가 만졌던 그 문서잖아.'


숨이 가빠졌다. 그 문서를 만진 순간 여기로 왔다. 그런데 그 문서가 이미 백 년 전에도 존재했다고, 그것도 자신이 남긴 물건으로.


'그럼 나는... 이미 한 번 여기 왔었다는 거야?'


도윤이 그런 서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 표정을 보니,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으신 모양이오."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 문서, 지금 어디 있어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도윤이 족보를 덮으며 낮게 말했다.


"훈장님 방 안, 잠긴 함 속에 있소. 아무도 손댈 수 없게 봉인해 두었다 들었소."


"그거 지금 당장 봐야 해요."


"지금은 안 되오. 훈장님이 계시는데—"


"봐야 한다니까요!"


무심코 목소리가 커졌다. 도윤이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눈짓했다.


서연은 입을 다물었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문서를 다시 만지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얼어붙었다.


'아니면 완전히 갇혀버릴 수도 있어.'


도윤이 촛불을 들고 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만 물러가시오. 내일, 훈장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빨랐다.


"도윤 도령! 큰일 났습니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관아에서... 관아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근래 저잣거리에서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는 계집을 찾는다고—"


사내의 시선이 서연에게 꽂혔다.


말이 뚝 끊겼다.


'어. 잠깐.'


서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도윤이 재빨리 사내와 서연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자는 아무 상관 없는—"


"그 옷차림."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 있었구려."


바깥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촛불이 크게 흔들리다, 훅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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