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아비터: 버그 플레이어
주인공: 강민혁
모니터 불빛이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강민혁은 마우스를 움직이며 하품을 했다. 입술이 터져서 따끔거렸다. 언제 마신 건지 모를 에너지 드링크 캔이 키보드 옆에 굴러다녔다.
"접종."
화면 속 캐릭터가 빛나며 사라졌다.
10년이었다. 하루 16시간씩 '이터널 오딧세이'에 박혀 살았다. 만렙 찍고, 신화급 장비 풀세트 맞추고, 최종 레이드까지 솔로 클리어했다.
'이제 뭐 하지.'
손가락이 멈췄다. 접속 종료 버튼 위에 커서가 떠 있었다.
딸깍.
그 순간, 건물이 흔들렸다.
"지진?"
컵라면 국물이 책상에 쏟아졌다. 형광등이 깜빡이더니 꺼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PC방 한가운데, 공기가 찢어지고 있었다.
검은 균열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현실을 칼로 그은 것처럼. 균열 틈새로 보라색 빛이 새어 나왔다.
"뭐야, 저거."
알바생이 카운터에서 일어났다. 스무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애였다. 균열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야, 가지 마."
민혁이 말했지만 늦었다.
균열이 찢어지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초록색 피부. 뾰족한 귀. 이빨이 삐져나온 입.
"고블린?"
게임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1레벨 잡몹. 경험치 5 주는 쓰레기 몬스터.
근데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고블린이 알바생의 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튀었다. 진짜 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으아아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출구로 달렸다. 의자가 넘어지고 키보드가 바닥에 떨어졌다.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귀찮은데.'
고블린이 고개를 돌렸다. 빨간 눈이 민혁을 봤다.
"크르르륵."
침을 흘리며 달려왔다.
민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느꼈다. 손바닥에 익숙한 감촉.
빛이 터졌다.
검은색 쌍검이 양손에 구현됐다. 칼날에 보라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화급 무기 '심연의 쌍검'.
"...뭐지."
고블린이 3미터 앞까지 왔다.
민혁은 칼을 휘둘렀다.
10년 동안 수만 번 반복한 동작이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쉬익.
고블린의 목이 날아갔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모니터에 빨간 얼룩이 묻었다.
[레벨 1 고블린 처치]
[경험치 5 획득]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떴다.
"...진짜네."
민혁은 칼을 내려다봤다. 게임 속 무기가 현실에 있었다. 손에 잡히는 무게, 칼날에 묻은 피, 전부 진짜였다.
균열에서 고블린이 두 마리 더 튀어나왔다.
"크크크."
"끼익."
민혁은 한숨을 쉬었다.
"귀찮게."
왼쪽 칼을 던졌다. 칼이 회전하며 날아가 고블린 머리통을 박살 냈다.
오른손 칼로 남은 한 마리 목을 그었다.
3초 만에 끝났다.
[레벨 1 고블린 처치]
[레벨 1 고블린 처치]
창이 또 떴다. 민혁은 손을 휘둘러 창을 닫았다.
균열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보라색 빛이 희미해졌다.
PC방은 난장판이었다. 피 웅덩이, 넘어진 의자, 깨진 모니터. 알바생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숨은 안 쉬고 있었다.
'죽었네.'
민혁은 시체를 내려다봤다. 아무 감정도 안 들었다. 게임에서 NPC 죽는 거 봤을 때랑 똑같았다.
계단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 살아있어요?"
여자 목소리였다. 민혁은 계단으로 걸어갔다.
세 계단 올라갔을 때 숨이 찼다.
"헥, 헥."
가슴이 조여들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아, 맞다.'
체력이 10밖에 안 됐다.
민혁은 난간을 붙잡고 멈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레벨 1이라 이 모양이네.'
게임에서는 만렙이었다. 체력 9999, 마나 9999. 하루 종일 달려도 안 지쳤다.
근데 지금은 계단 세 칸에 숨이 넘어갔다.
"거기, 괜찮으세요?"
여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다봤다. 20대 후반쯤. 가죽 갑옷 차림에 활을 메고 있었다.
"...괜찮아."
민혁은 한 계단 더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됐어."
민혁은 손을 뿌리치고 혼자 올라갔다. 10초 걸렸다.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강남역 2번 출구 앞. 사람들이 비명 지르며 뛰어다녔다. 경찰 사이렌이 울렸다.
그리고 보였다.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균열.
PC방에 뜬 거보다 열 배는 컸다. 균열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며 떨렸다.
"F급 던전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헌터 협회에 신고했어요. 지원팀 오는 데 30분 걸린대요."
민혁은 균열을 올려다봤다.
'던전.'
게임에서만 보던 게 현실에 있었다.
"들어가야 돼요."
여자가 활을 꺼냈다.
"72시간 안에 클리어 안 하면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와요. 던전 브레이크."
"혼자?"
"일단 정찰이라도. 당신도 헌터죠? 아까 고블린 잡는 거 봤어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여자가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5미터 앞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숙였다.
"으으."
구역질하는 소리였다.
"괜찮아요?"
"...던전 멀미. 익숙해요."
여자가 억지로 웃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민혁은 균열 앞까지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았다.
구토도, 두통도 없었다.
'신기하네.'
"어? 당신 멀쩡해요?"
여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F급 던전인데 멀미가 없다고요? 고급 헌터예요?"
"몰라."
민혁은 균열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그리고 빨려 들어갔다.
시야가 뒤집혔다. 뱃속이 뒤틀렸다. 귀가 먹먹해졌다.
눈을 떴을 때 동굴이었다.
어두컴컴한 통로. 벽에서 이끼 냄새가 났다.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 진입]
[F급 던전: 고블린의 소굴]
[제한 시간: 71시간 58분]
창이 떴다.
민혁은 손을 휘둘러 창을 닫았다.
"후."
여자가 옆에 나타났다. 얼굴이 새파랬다.
"으. 적응이 안 돼."
"가만히 있어."
민혁은 통로를 걸어갔다.
10미터쯤 갔을 때 뭔가 움직였다.
고블린 다섯 마리. 횃불 들고 순찰 중이었다.
"크르륵."
"끼끼."
민혁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귀찮네.'
민혁은 쌍검을 소환했다. 빛이 터지며 칼이 손에 쥐어졌다.
여자가 뒤에서 소리쳤다.
"다섯 마리예요! 조심해!"
민혁은 대답 안 했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 칼을 허리춤에 댔다.
10년 동안 수천 번 쓴 스킬이었다.
'연참.'
칼이 일곱 번 움직였다.
쉬익, 쉬익, 쉬익.
고블린 다섯 마리 목이 동시에 날아갔다.
피가 벽에 튀었다.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2초 만에 끝났다.
[레벨 1 고블린 처치 x5]
[경험치 25 획득]
민혁은 칼을 휘둘러 피를 털었다.
"...뭐야."
뒤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방금 그거 C급 스킬 아니에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통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기다려요!"
여자가 뒤따라왔다.
통로가 넓어지며 큰 공간이 나왔다. 천장이 10미터는 됐다.
그리고 봤다.
고블린 떼.
# Part 2: 전개
30마리는 넘었다.
고블린들이 동굴 안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횃불 빛이 일렁였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크르륵!"
"끼익끼익!"
민혁은 칼을 내렸다.
'귀찮은데.'
지우가 활을 꺼내 들었다.
"30초 버텨요. 제가 뒤에서 지원할게요."
"필요 없어."
"뭐?"
민혁은 앞으로 걸어갔다.
고블린 떼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창, 도끼, 곤봉. 뭐든 들고 있었다.
5미터.
3미터.
민혁은 오른손 칼을 허리에 댔다.
'섬광.'
칼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쉬이익.
보라색 궤적이 공간을 가르며 퍼져 나갔다. 부채꼴 범위 공격.
앞쪽 고블린 열두 마리가 동시에 두 동강 났다.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장이 바닥에 쏟아졌다.
[레벨 1 고블린 처치 x12]
[경험치 60 획득]
"...미쳤어."
뒤에서 지우가 중얼거렸다.
민혁은 멈추지 않았다.
왼손 칼을 위로 올렸다.
'승천.'
칼끝에서 보라색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검기.
고블린 다섯 마리가 빛에 휩싸이더니 재가 됐다.
[레벨 1 고블린 처치 x5]
남은 건 열세 마리.
고블린들이 멈춰 섰다. 뒷걸음질 쳤다.
"끼익..."
"크르..."
두려움이었다.
민혁은 칼을 휘둘러 피를 털었다.
"도망갈 거면 빨리 가."
고블린 한 마리가 무기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나머지도 우르르 도망쳤다. 동굴 안쪽으로 사라졌다.
민혁은 한숨을 쉬었다.
"귀찮게."
[경고: 비정상적인 전투 패턴 감지]
[대상 개체의 레벨과 스킬 사용 빈도 불일치]
[시스템 점검 필요]
눈앞에 빨간 창이 떴다.
'또 시작이네.'
민혁은 창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창이 안 닫혔다.
[재검증 시작]
[대상: 강민혁 / 레벨: 1 / 보유 스킬: 오류]
[장비 등급: 신화급 / 스탯: 오류]
[결론: 데이터 무결성 위반]
창이 점점 커졌다. 빨간 글씨가 시야를 뒤덮었다.
"뭐야, 이거."
민혁이 창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창이 산산조각 났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오류 개체 확정]
[긴급 프로토콜 발동]
동굴이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다. 벽에 금이 갔다.
"지진이야?"
지우가 벽을 붙잡았다.
민혁은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뭔가 나타났다.
빛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무늬. 육각형들이 겹쳐지며 회전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쿵.
바닥에 금이 갔다.
사람 형태였다. 아니, 사람처럼 보이는 뭔가.
온몸이 반투명했다. 흰색 빛으로 윤곽만 그려져 있었다. 얼굴은 없었다. 눈, 코, 입이 없는 매끈한 표면.
[ADMIN-01 출현]
[시스템 관리자]
창이 떴다.
관리자가 민혁을 봤다. 얼굴은 없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당신의 존재는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기계음이었다. 감정이 없는 목소리.
"즉시 삭제합니다."
민혁은 칼을 들었다.
"그래서요?"
관리자가 손을 들었다.
허공에 빛나는 창들이 수십 개 소환됐다. 전부 빨간색 경고창.
[강제 삭제 프로토콜]
[대상 개체 데이터 소거 중]
민혁의 몸이 흐릿해졌다. 손끝부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윽."
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릎이 꺾였다.
'이거... 진짜 죽이려고 하네.'
시야가 흔들렸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지우가 달려왔다.
"민혁 씨!"
활을 들어 관리자에게 쐈다.
화살이 날아갔다.
을 그냥 통과했다.
"소용없어요!"
지우가 소리쳤다.
민혁은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순 없지.'
왼손 칼을 바닥에 찔렀다. 몸을 지탱했다.
[체력: 3/10]
[경고: 개체 소멸까지 5초]
관리자가 다가왔다. 한 걸음씩.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민혁은 오른손 칼을 들었다.
'아직 한 번 남았어.'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쓴 적 없는 스킬.
최종 오의였다.
'심판.'
칼에서 검은 빛이 번졌다.
보라색이 아니었다. 어둠 그 자체.
관리자가 멈췄다.
"...이 스킬은 데이터베이스에 없습니다."
민혁은 웃었다.
"당연하지. 넌 본 적 없으니까."
칼을 내리쳤다.
검은 빛이 관리자를 삼켰다.
동굴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빛이 사라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3초 후.
빛이 돌아왔다.
관리자가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 금만 남았다.
[ADMIN-01 일시 퇴각]
[재출현까지: 71시간 58분]
민혁은 칼을 놓쳤다. 바닥에 쓰러졌다.
"민혁 씨!"
지우가 달려와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니."
민혁은 숨을 헐떡였다.
[체력: 1/10]
[마나: 0/500]
온몸이 저렸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역시 무리였어.'
심판은 모든 마나를 소진하는 스킬이었다. 레벨 1 몸으로 쓰면 죽을 수도 있었다.
지우가 가방을 뒤졌다.
"포션 있어요. 마셔요."
빨간 병을 꺼내 민혁 입에 댔다.
액체가 목으로 넘어갔다. 달콤했다.
[체력 회복: 1→4]
숨이 조금 편해졌다.
"...고마워요."
"괜찮아요. 근데 방금 그거..."
지우가 민혁을 내려다봤다.
"당신 도대체 뭐예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천장을 봤다.
아까 관리자가 나타난 자리. 육각형 무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71시간.'
3일도 안 남았다.
시스템이 다시 올 거였다. 그때는 더 강한 걸 보낼 거였다.
'던전 브레이크 막고, 시스템 해킹하고.'
민혁은 눈을 감았다.
'시간이 없네.'
동굴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무거운 발소리.
지우가 고개를 돌렸다.
"뭐야, 또?"
어둠 속에서 뭔가 나타났다.
고블린이 아니었다.
3미터는 되는 거구.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에 통나무만 한 곤봉.
[레벨 15 홉고블린 우두머리]
[위험도: D급]
민혁은 칼을 집으려 했다.
손이 안 움직였다.
'젠장.'
홉고블린이 포효했다.
"크아아아!"
돌진했다.
지우가 활시위를 당겼다.
"버텨요!"
화살이 날아갔다. 홉고블린 어깨에 박혔다.
효과 없었다.
홉고블린이 곤봉을 휘둘렀다.
지우가 옆으로 굴렀다. 바닥이 깨졌다.
"안 통해요!"
민혁은 일어나려 했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체력: 4/10]
[마나: 0/500]
'움직여.'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홉고블린이 지우를 쫓았다. 곤봉을 연속으로 내리쳤다.
지우가 피했다. 간신히.
"민혁 씨! 뭐라도 해요!"
민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오른손에 힘을 줬다.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칼자루를 잡았다.
[경고: 체력 부족]
[스킬 사용 불가]
'스킬 없이도 되니까.'
민혁은 칼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일어나.'
무릎을 세웠다.
'일어나라고.'
한 발을 내디뎠다.
홉고블린이 지우를 구석으로 몰았다.
곤봉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끝이다!"
내리쳤다.
민혁이 앞을 막아섰다.
칼로 곤봉을 받아냈다.
콰앙!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으윽."
민혁은 뒤로 밀렸다. 5미터는 날아갔다.
등이 벽에 부딪혔다.
[체력: 4→2]
입에서 피가 나왔다.
'이건... 못 막아.'
홉고블린이 다시 곤봉을 들었다.
"크르르."
지우가 화살을 쐈다. 세 발 연속.
전부 어깨에 박혔다.
홉고블린은 신경도 안 썼다.
민혁만 봤다.
"죽어!"
곤봉이 내려왔다.
민혁은 옆으로 굴렀다.
바닥이 폭발했다. 돌 파편이 튀었다.
'마나가 없어.'
스킬 쓸 수 없었다. 포션도 없었다.
'맨몸으로 D급을 어떻게 잡아.'
홉고블린이 다시 달려왔다.
곤봉을 횡으로 휘둘렀다.
민혁은 엎드렸다. 곤봉이 머리 위를 스쳤다.
일어서려 했다.
다리가 꺾였다.
"젠장."
[체력: 2/10]
[경고: 생명 위험]
홉고블린이 발로 찼다.
민혁의 몸이 날아갔다. 벽에 처박혔다.
"커억."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체력: 2→1]
시야가 흐려졌다.
'이대로 끝인가.'
홉고블린이 다가왔다.
곤봉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끝."
지우가 소리쳤다.
"안 돼!"
활을 버리고 달려왔다. 홉고블린 등에 매달렸다.
"도망쳐요!"
홉고블린이 몸을 흔들었다.
지우가 떨어졌다.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하."
홉고블린이 지우를 밟았다.
"끼익."
지우가 비명을 질렀다.
민혁은 칼을 집었다.
손이 떨렸다.
'일어나.'
무릎을 세웠다.
'지금 안 일어나면 죽어.'
한 발 내디뎠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움직여라.'
두 발째.
홉고블린이 곤봉을 들었다. 지우를 내리치려 했다.
민혁이 뛰었다.
온 힘을 다해.
칼을 홉고블린 목에 꽂았다.
"크아아!"
홉고블린이 비틀거렸다.
민혁은 칼을 뽑았다. 다시 찔렀다.
두 번.
세 번.
피가 튀었다.
홉고블린이 무릎을 꿇었다.
민혁은 마지막으로 칼을 목에 그었다.
푸슉.
머리가 떨어졌다.
[레벨 15 홉고블린 우두머리 처치]
[경험치 750 획득]
[레벨 업!]
[레벨 1→2]
민혁은 칼을 놓쳤다.
바닥에 쓰러졌다.
[체력: 1→5]
숨이 편해졌다. 조금.
지우가 기어왔다.
"살았어요?"
"...겨우."
민혁은 천장을 봤다.
육각형 무늬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또 오는 건가.'
아니었다.
무늬가 점점 커졌다. 동굴 전체를 뒤덮었다.
벽이 붉게 물들었다.
"뭐야, 이거."
지우가 중얼거렸다.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고블린 시체. 홉고블린 시체. 전부 빛으로 변하더니 허공에 흡수됐다.
던전이 텅 비었다.
대신 허공에서 뭔가 나타났다.
사람 형태. 반투명한 빛.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열.
스무 명 넘게 나타났다.
전부 얼굴 없는 관리자들.
[ADMIN-02]
[ADMIN-03]
[ADMIN-04]
...
[ADMIN-23]
창들이 연달아 떴다.
민혁은 일어나려 했다.
몸이 안 움직였다.
'이건 답이 없어.'
관리자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ADMIN-01]
아까 그놈이었다.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기계음이 동굴에 울렸다.
"오류 개체 강민혁. 당신의 존재는 시스템에 치명적 위협입니다."
민혁은 피를 뱉었다.
"그래서요?"
"즉시 삭제합니다."
ADMIN-01이 손을 들었다.
다른 관리자들도 똑같이 손을 들었다.
허공에 빨간 창들이 수백 개 떴다.
[긴급 패치 시작]
[오류 개체 강제 삭제]
[패치 완료까지: 71:58:47]
민혁의 몸이 흐려졌다.
아까보다 빨랐다.
손이 투명해졌다.
라지기 시작했다.
"민혁 씨!"
지우가 민혁의 손을 잡았다.
손이 스쳐 지나갔다. 실체가 없었다.
"안 돼요!"
민혁은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다리가 반쯤 사라졌다.
'이대로 끝인가.'
ADMIN-01이 말했다.
"72시간 후 완전 삭제됩니다. 저항은 무의미합니다."
민혁은 웃었다.
피가 입가에 묻었다.
"...무의미?"
칼을 집었다.
투명한 손으로.
"나 그런 거 안 믿어요."
칼을 관리자에게 던졌다.
칼이 ADMIN-01을 관통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관리자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민혁의 몸도 점점 흐려졌다.
지우가 소리쳤다.
"뭐라도 해봐요!"
"...방법이 없어요."
민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의 절반이 사라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던전 브레이크는 막아야 했다. 시스템도 해킹해야 했다.
'시간이.'
72시간.
3일.
그 안에 뭘 할 수 있을까.
몸이 거의 다 사라졌다.
가슴만 남았다. 머리만 남았다.
지우가 울었다.
"이럴 거면 왜 날 구한 거예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시야가 깜깜해졌다.
의식이 끊겼다.
---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하얀 천장.
'여기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였다.
병실 같았다.
아니었다.
벽이 없었다. 사방이 하얀 공간이었다.
바닥만 있었다. 침대만 있었다.
민혁은 자기 손을 봤다.
멀쩡했다.
투명하지 않았다.
[체력: 5/10]
[마나: 50/500]
상태창이 떴다.
'살아 있어?'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걸어왔다.
관리자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 30대쯤 돼 보였다.
얼굴은 평범했다. 웃고 있었다.
"일어났네요."
민혁은 칼을 찾았다.
없었다.
"누구세요."
남자가 의자를 꺼냈다.
허공에서.
앉았다.
"제 소개부터 할까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시스템 개발자]
[이름: ??????]
물음표만 가득했다.
"시스템 만든 사람이에요."
민혁은 명함을 받지 않았다.
"왜 날 여기 데려왔어요."
"죽이려고요."
남자가 웃었다.
"농담이에요. 제안하려고요."
"제안?"
"네."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화면이 떴다.
지우가 보였다.
던전 안에서 울고 있었다.
"당신 친구 살리고 싶죠?"
민혁은 화면을 봤다.
"...조건이 뭔데요."
"간단해요."
남자가 일어났다.
민혁에게 다가왔다.
"저 좀 도와주세요."
"뭘요."
"시스템 부숴주세요."
민혁은 멈췄다.
"...뭐라고요?"
남자가 웃었다.
"제가 만든 시스템이요. 망가뜨려주세요."
"왜요."
"통제가 안 돼요."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시스템이 제 말을 안 들어요. 관리자들도 제 통제를 벗어났어요."
"그게 내 알 바예요?"
"당신만 할 수 있어요."
남자가 민혁 어깨를 잡았다.
"당신은 시스템 바깥에서 온 존재예요. 게임 데이터가 현실에 구현된 유일한 케이스죠."
민혁은 남자 손을 뿌리쳤다.
"증거는요."
"레벨 1인데 신화급 장비. S급 스킬. 체력은 10."
남자가 손가락을 꼽았다.
"시스템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데이터예요. 그래서 당신을 지우려는 거예요."
민혁은 침묵했다.
남자가 계속 말했다.
"72시간 안에 시스템 코어를 파괴하세요. 그럼 당신 친구도 살고, 던전 브레이크도 막을 수 있어요."
"거절하면요?"
"둘 다 죽어요."
남자가 다시 웃었다.
"당신도, 당신 친구도, 이 세계도."
민혁은 남자를 봤다.
"...미친놈."
"그렇게 봐도 돼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어때요? 할 거예요?"
민혁은 손을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