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왕관의 소년
주인공: 한서윤
태준의 집 앞에서 돌아온 밤, 나는 노트를 펼쳤다.
민준혁이 요구한 건 노트가 아니야.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원한 건 증거의 소멸이 아니라 내 반응. 내가 얼마나 아는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재는 거였다.
'측정이었어.'
손끝이 차가웠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생각을 지워줄 것 같았지만, 태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태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
다음 날 아침, 태준은 평소처럼 교실에 들어왔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시선이 나를 피했다. 가방을 의자에 걸 때도, 창가로 고개를 돌릴 때도, 내가 있는 방향을 보지 않았다.
'회피 패턴.'
가슴이 조였다.
1교시가 시작되고 태준은 책을 펼쳤지만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책 모서리를 반복해서 눌렀다 떼었다.
나는 노트에 적었다.
*강태준. 오전 9시 12분. 시선 회피 7회. 손가락 떨림.*
그리고 펜을 멈췄다.
'이건 관찰이 아니야.'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
점심시간, 복도에서 학생회 총무가 나를 불렀다.
"한서윤? 회장님이 학생회실로 오래요."
심장이 한 박자 빨라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학생회실 문을 열자 민준혁이 창가에 서 있었다.
"앉아."
그는 웃지 않았다.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민준혁이 차를 따라 내 앞에 놓았다.
"마셔. 캐모마일이야."
"...감사합니다."
나는 컵을 들지 않았다. 민준혁은 내 맞은편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어제 강태준 집에 갔다며."
숨이 멎었다.
"...예."
"뭐 하러."
"걱정돼서요."
"걱정?"
민준혁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한서윤, 넌 특별해."
"...예?"
"대부분은 보고도 못 보거든. 그냥 지나쳐. 근데 넌 보고 기록하잖아."
그가 내 노트를 가리켰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노트를 가슴에 안았다.
"그 능력, 아까워. 그냥 혼자 끙끙대기엔."
민준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우리 학교에 학교 폭력 예방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해. 학생 주도로. 교사들도 찬성했어."
"...그게 저랑 무슨."
"네가 필요해."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관찰 능력 있잖아. 넌 애들 사이 미묘한 변화도 캐치하고. 그런 애가 있으면 사전에 문제를 막을 수 있어."
'이건 회유가 아니야.'
내 손이 노트 모서리를 꽉 쥐었다.
'테스트야. 내가 어디까지 순응하는지 보는 거야.'
"...생각해볼게요."
민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 거절은 안 하네."
"아직 판단할 정보가 부족해서요."
"정보?"
"프로젝트 구체적인 내용이요. 제 역할이 뭔지도 모르는데 답할 순 없잖아요."
민준혁이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역시 너답네. 좋아, 천천히 생각해. 근데."
그가 일어서며 창밖을 봤다.
"참, 강태준 학생 과거에 대해 알고 있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모르는데요."
거짓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민준혁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래? 그럼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왜요?"
"친구라면."
그 말에 숨이 막혔다. 민준혁이 문을 열어줬다.
"가봐. 점심 다 지나가겠다."
나는 학생회실을 나왔다. 복도가 너무 조용했다.
***
태준을 찾았다.
교실에도 없고, 급식실에도 없었다. 옥상 문을 열자 담배 냄새가 났다.
태준이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왜 왔어요."
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연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이제 저랑 안 엮이는 게 좋을 텐데."
나는 난간 옆에 섰다.
"그건 제가 정해요."
"...민준혁 만났죠."
"어떻게 알아요?"
"총무가 데리러 오는 거 봤어요."
태준이 담배를 비볐다. 손끝이 떨렸다.
"뭐래요, 그 새끼."
"프로젝트 제안받았어요. 학교 폭력 예방."
"...미친."
태준이 웃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말이 돼요? 가해자가 예방 프로젝트를?"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거절 안 했어요."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왜요?"
"패턴이 보여요. 민준혁 선배는 저를 구슬리는 게 아니라 측정하고 있어요. 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바람이 불었다. 태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럼 위험하잖아요."
"이미 위험해요."
나는 노트를 꺼냈다.
"선배가 강태준 학생 과거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 했어요?"
"모른다고요."
"왜요?"
"모르니까요."
태준이 난간을 꽉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알고 싶어요?"
"태준 씨가 말하고 싶으면요."
침묵이 흘렀다. 태준이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
목소리가 작았다.
"전학 왔어요. 아버지 일 때문에. 근데 거기도 민준혁이 있었어요."
"...같은 학교였어요?"
"형이었죠. 1학년 차이. 거기서도 학생회장이었고."
태준이 하늘을 봤다.
"처음엔 잘해줬어요. 신입생 챙겨준다고. 밥도 사주고. 근데."
그가 말을 멈췄다.
"어느 날 싸움 났어요. 제 짝이랑 3학년 애랑. 민준혁이 중재한다고 둘을 불렀는데."
"...뭐가 된 거예요?"
"제 짝이 옥상에서 떨어졌어요."
심장이 멎었다.
"사고 처리됐어요. CCTV 없는 곳이었고, 목격자도 없었고. 민준혁은 오히려 피해자 가족 위로했죠."
태준의 손이 떨렸다.
"근데 전 봤어요. 그날 복도에서. 민준혁이 그 애 손목 잡고 올라가는 거."
"...경찰한테."
"말 못 해요."
태준이 나를 봤다. 눈빛이 깨져 있었다.
"증거 없어요. 그리고 그 애 부모님이 합의했어요. 학교에서 거액 받고."
나는 노트를 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그래서 전학 온 거예요?"
"도망친 거죠."
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근데 여기도 있더라고요. 민준혁이."
바람이 차가웠다. 태준이 내 노트를 봤다.
"...이거 진짜 무서운 거 알아요?"
"뭐가요?"
"이건 무기예요."
그가 노트를 가리켰다.
"한서윤, 당신이 쓴 거 전부 증거가 될 수 있어요. 날짜, 시간, 행동 패턴. 이거 법정 가면."
"맞아요."
나는 노트를 펼쳤다.
"그래서 민준혁 선배가 원하는 거예요. 자기를 겨눌 수 있는 칼을 부러뜨리려고."
태준이 난간에서 몸을 돌렸다.
"그럼 왜 안 도망쳐요? 저처럼."
"도망쳐서 끝났어요?"
태준이 입을 다물었다.
"안 끝났잖아요.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바람이 멎었다. 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왜요?"
"저 때문에 위험해졌잖아요."
나는 노트를 덮었다.
"제 선택이에요."
***
방과 후, 교실로 돌아왔을 때 내 책상 위에 봉투가 있었다.
분홍색 봉투. 이름도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봉투를 열었다.
사진이 쏟아졌다.
상담실 문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서윤. 고1. 주 증상: 대인 기피, 감정 표현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손이 떨렸다.
다음 장에는 내가 상담 선생님 앞에서 우는 사진이 있었다. 언제 찍은 거지.
마지막 페이지.
# 유리 왕관의 소년 — 전개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한 줄만 적혀 있었다.
*'네가 왕따당한 이유, 궁금하지 않아?'*
민준혁의 필체였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식었다.
'어떻게.'
상담 기록은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법으로 보호받는다.
그런데 이게 여기 있다.
누군가 내 과거를 팔았다.
심장이 귀를 두드렸다.
***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핸드폰이 울렸다.
민준혁이었다.
"받았어?"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네."
"놀랐지?"
"왜 이러세요."
"왜긴. 네가 안 들어서."
민준혁이 웃었다.
"프로젝트 제안 거절할 생각이잖아. 보이더라, 네 눈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이걸로 협박하시려고요?"
"협박? 아니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택지를 준 거지. 넌 똑똑하니까 알아서 고를 거야."
"...무슨 선택지요."
"첫 번째. 프로젝트 들어와. 네 노트 내용도 공유하고. 그럼 이 서류는 없던 일로."
숨이 막혔다.
"두 번째?"
"거절해. 그럼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낭독회 할게. 네 상담 기록."
전화기를 쥔 손이 떨렸다.
"...선배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왜긴. 네가 위험하니까."
민준혁이 한숨을 쉬었다.
"한서윤, 넌 모르는 척하면서 다 보잖아.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지금은. 근데 나중엔?"
그가 웃었다.
"네 노트에 내 이름 몇 번이나 나와? 열두 번. 날짜랑 시간까지 기록했더라."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제 봤지.'
"학생회실 올 때 책상 위에 두고 갔잖아. 잠깐 봤어."
민준혁이 말을 끊었다.
"일요일 밤까지 연락 줘. 그때까지 답 안 오면 월요일에 보자."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람이 차가웠다.
***
토요일 아침.
핸드폰에 메시지가 떴다.
태준이었다.
— 괜찮아요?
손가락이 굳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답장은 다르게 나갔다.
— 네. 걱정 마세요.
거짓말이었다.
세 시간 뒤,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태준이 서 있었다.
"...왜 왔어요."
"거짓말 티 나요."
태준이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다.
"아침 안 먹었죠?"
나는 봉투를 받았다. 삼각김밥이었다.
"들어와요."
거실로 들어온 태준은 소파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민준혁한테 전화 왔죠."
"어떻게 알아요?"
"표정이요."
태준이 내 얼굴을 봤다.
"어제보다 더 안 좋아요."
나는 김밥을 뜯었다. 입맛이 없었다.
"프로젝트 들어오래요. 아니면 상담 기록 공개한대요."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미친 새끼."
"월요일까지 답 달래요."
"그럼요?"
나는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목이 메었다.
"모르겠어요."
"거짓말."
태준이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서윤, 당신 지금 계산하고 있잖아요."
심장이 뛰었다.
"...뭘요."
"어떻게 하면 최소 피해로 빠져나갈지."
태준의 눈이 나를 뚫었다.
"그런데 답 안 나오죠? 이번엔."
숨이 막혔다.
그가 맞았다.
'계산이 안 돼.'
어떤 선택을 해도 민준혁이 이긴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그의 꼭두각시가 된다.
거절하면 전교생 앞에서 부서진다.
태준이 내 손을 잡았다.
"같이 도망쳐요."
"...뭐?"
"전학 가요. 둘이."
그의 손이 뜨거웠다.
"여기 있으면 당신 망가져요. 저처럼."
나는 손을 빼려 했다. 태준이 더 세게 잡았다.
"한서윤."
목소리가 떨렸다.
신 혼자 견디지 마요."
나는 그의 눈을 봤다.
진심이었다.
'이 사람, 진짜 도망치려고.'
입술이 말랐다.
"안 돼요."
"왜요?"
"그건... 도망이잖아요."
태준이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맞아요. 도망."
그가 내 손을 놓았다.
"근데 살아남는 게 먼저 아니에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준이 일어섰다.
"일요일 밤까지 시간 있죠. 그때까지 생각해요."
"...태준씨는요?"
"저요?"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이미 정했어요."
"뭘요?"
태준이 돌아봤다.
"당신이 어디 가든 따라갈 거예요."
문이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식은 김밥을 봤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우리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한서윤?"
여자 목소리. 오지은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준혁 오빠가 그러던데. 너 아직도 고민 중이래?"
심장이 식었다.
"그게 선배랑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 있지. 나도 프로젝트 팀이거든."
오지은이 웃었다.
"월요일 되면 재밌겠다. 네가 운 거 다들 볼 수 있으니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선배는 왜 저한테 이래요."
"왜긴. 네가 거슬리니까."
오지은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맨날 혼자 앉아서 노트에 뭐 적고. 아무도 안 쳐다보는 척하면서 다 훔쳐보고."
"저는 안 그랬어요."
"거짓말. 태준이도 네 노트에 있더라?"
숨이 멎었다.
"...언제 봤어요."
"오빠가 사진 찍어줬어. 고맙더라."
오지은이 낄낄 웃었다.
"있잖아, 한서윤. 네가 태준이 좋아하는 거 다 알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맞아. 네 노트 보면 딱 나와. '강태준, 3교시 쉬는 시간, 창문 보며 한숨. 표정 어둡다.'"
오지은이 내 기록을 그대로 읽었다.
"이게 관찰이야, 스토킹이야?"
전화기를 쥔 손이 떨렸다.
"저는 그냥..."
"그냥? 좋아하니까 쳐다본 거지."
오지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근데 있잖아. 태준이는 너 안 좋아해. 불쌍해서 챙겨주는 거야."
"...그만해요."
"왜? 아파? 그럼 프로젝트 들어와. 안 그럼 월요일에 이것까지 공개할 거야."
"뭘요?"
"네가 태준이 스토킹한 기록. 전부."
전화가 끊겼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끝이야.'
어떤 선택을 해도 난 부서진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도, 거절해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민준혁이었다.
"지은이한테 전화 왔지?"
"...네."
"미안. 쟤가 좀 오버했나 봐."
민준혁이 한숨을 쉬었다.
"있잖아, 한서윤. 나쁜 뜻 아니야."
"그럼 뭔데요."
"보호하려는 거야. 너를."
나는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보호요?"
"그래. 네가 혼자 있으면 위험해. 그러니까 우리 팀으로 와."
민준혁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들어오면 지은이도 건드리지 말라고 할게. 네 기록도 안전하게 보관하고."
"...대신요?"
"대신 네 관찰 능력 좀 빌려줘. 학교 문제 있는 애들 찾는 데."
숨이 막혔다.
'이용하려는 거잖아.'
민준혁이 말을 이었다.
"일요일 밤 열한시까지. 그때까지 답 없으면 월요일에 봐."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놨다.
거실이 너무 조용했다.
시계 소리만 똑딱거렸다.
***
일요일 저녁.
태준한테 메시지가 왔다.
— 결정했어요?
나는 답장을 쓰다 지웠다.
다시 쓰다 지웠다.
열 번쯤 반복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태준이었다.
"...
문을 열자 태준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왜 답장 안 해요."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들어와요."
태준이 현관에 섰다. 신발을 벗지 않았다.
"결정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이요."
"거짓말."
그가 한 발짝 다가왔다.
"이미 정했는데 말 못 하는 거잖아요."
목구멍이 조였다.
"태준 씨."
"네."
"...전학 가면 끝나요?"
태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모르겠어요."
"그럼 왜."
"그래도 여기보단 나으니까요."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한서윤, 당신 월요일 되면 못 걸어요. 복도에서."
손목에 닿은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전교생이 쳐다볼 거예요. 수군거리고. 그거 견딜 수 있어요?"
나는 그의 손을 봤다.
'못 견뎌.'
입술이 열렸다.
"...민준혁 선배 말이 맞아요."
"뭐가요?"
"저 위험해요. 누가 다치게 만드니까."
태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소리예요."
"태준 씨도요. 저 때문에 또."
말이 끊겼다. 태준이 내 어깨를 잡았다.
"한서윤."
그의 눈이 내 눈을 붙들었다.
"그거 민준혁이 심은 거예요."
"...뭐가요."
"죄책감. 당신 혼자 짊어지게 만드는 거."
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새끼 수법이에요. 피해자가 가해자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
손목에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웠다.
"당신 잘못 없어요."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있어요."
"없어요."
"있다고요!"
소리가 터졌다. 태준이 멈췄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저... 초등학교 때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친구 하나 있었어요. 단짝."
태준이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 애가 반에서 따돌림당했어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손톱이 손바닥을 팠다.
"근데 저는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른 척했어요."
"...한서윤."
"무서웠어요. 나까지 당할까 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애 혼자 급식 먹고, 혼자 화장실 가고. 저는 옆반 애들이랑 놀았어요."
태준의 손이 떨렸다.
"한 달 뒤에요. 그 애가 전학 갔어요."
목소리가 잠겼다.
"인사도 안 했어요. 저한테."
눈물이 턱을 타고 흘렀다.
"그게 제 잘못 아니에요?"
태준이 나를 안았다.
"...아니에요."
"맞아요."
"아니에요."
그의 품이 따뜻했다. 비 냄새가 났다.
"당신 열 살이었잖아요."
"그래도."
"열 살짜리가 뭘 어떻게 해요."
태준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건 어른들 잘못이에요. 선생님들."
나는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옷이 구겨졌다.
"...미안해요."
"왜요?"
"이러려고 온 거 아닐 텐데."
태준이 웃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아요."
그가 나를 놓았다. 눈이 빨갰다.
"저도 울고 싶었거든요."
***
열한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민준혁이 정한 마감 시간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태준은 한 시간 전에 갔다.
'내일 결정 말해요. 같이.'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노트를 펼쳤다.
민준혁 이름 옆에 별표를 쳤다.
'이 사람은 왜 날 원하는 거지.'
관찰 능력? 그건 핑계다.
'뭔가 더 있어.'
페이지를 넘겼다. 태준 기록이 나왔다.
— 강태준. 민준혁 앞에서만 움츠러든다.
— 민준혁은 태준을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 중학교 옥상 사건. 목격자 태준.
손가락이 멈췄다.
'증거.'
태준이 증거다.
민준혁은 태준을 통제해야 한다. 입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원하는 거다.
'태준 감시용.'
늘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럼 내가 거절하면.'
민준혁은 다른 방법을 쓸 것이다.
더 세게.
핸드폰이 울렸다. 민준혁이었다.
— 시간 됐네. 답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어떻게 쓰지.'
— 한서윤, 농담 아니야. 지금 답 안 하면.
메시지가 또 왔다.
— 월요일 아침 조회 때 방송으로 틀어줄까? 네 노트.
심장이 두 번 뛰었다. 세 번째는 건너뛰었다.
'방송실.'
민준혁은 방송부 부장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봤다. 열한시 십 분.
'지금 가면.'
학교는 비어 있을 것이다. 일요일 밤이니까.
재킷을 걸쳤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
학교 정문은 잠겨 있었다.
후문도 마찬가지.
나는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CCTV 사각지대.'
작년에 관찰했던 곳이다. 축구부 애들이 담배 피우러 넘어가던 자리.
벽돌이 튀어나온 부분을 밟았다.
손이 담 위에 닿았다.
'올라갈 수 있어.'
몸을 끌어올렸다. 팔이 후들거렸다.
담을 넘어 교정에 착지했다.
무릎이 시큰했다.
본관 건물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창문마다 불이 꺼져 있었다. 3층만 빼고.
'방송실.'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건물로 뛰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누가 열어뒀다.
'민준혁.'
계단을 올랐다. 발소리가 울렸다.
3층 복도.
방송실 앞에 섰다.
문틈으로 빛이 샜다.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들어가면 끝이야.'
아니면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숨을 참았다.
문을 열었다.
민준혁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앞에.
화면에는 내 노트 사진이 떠 있었다.
"늦었네."
민준혁이 웃었다.
"근데 왔잖아. 착한 애."
나는 문을 닫았다.
"그거 어떻게 구했어요."
"뭘?"
"제 노트 사진."
민준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지은이 찍었지. 네가 사물함에 넣어둔 거."
손톱이 손바닥을 팠다.
"왜 저예요."
"응?"
"왜 하필 저냐고요."
민준혁이 의자를 돌렸다. 나를 마주 봤다.
"궁금해?"
"네."
"태준이 때문이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쟤 요즘 이상하거든. 너 만나고 나서."
"...뭐가요."
"말 안 들어. 예전엔 내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민준혁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네가 뭔가 한 거지?"
"아무것도 안 했어요."
"거짓말."
그가 일어났다.
"태준이 변했어.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확인하려고. 네 노트."
"그게 답이에요?"
"응. 넌 위험해."
민준혁이 웃었다.
"태준이한테."
목구멍이 조였다.
"...무슨 뜻이에요."
"넌 태준이를 바꿔. 그게 문제야."
그가 내 어깨를 잡았다.
"태준이는 그대로 있어야 돼. 내 옆에. 조용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근데 네가 망치고 있잖아."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이 망친 거 아니에요?"
민준혁의 눈이 커졌다.
"뭐?"
"중학교 옥상. 태준 씨 때문에 덮은 거 맞죠?"
그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태준 씨가 목격자니까. 당신 비밀 아는 유일한 사람."
민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뭐가요."
"넌 진짜 위험하네."
그가 노트북을 닫았다.
"그래. 맞아. 태준이 입 막으려고 네가 필요해."
책상 서랍을 열었다. 뭔가를 꺼냈다.
USB였다.
"여기 네 초등학교 상담 기록 전부 들어 있어."
민준혁이 USB를 흔들었다.
"그 친구 이름도. 전학 간 이유도."
입술이 말랐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