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비급을 주운 폐물 공자
주인공: 연서진
검이 발밑에 떨어졌다.
쇠 부딪는 소리가 대련장에 퍼졌다. 연서진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검자루를 잡으려 했는데 미끄러졌다.
'손아귀 힘이 부족했나.'
"푸하하!"
백무진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야, 진짜 개웃기네. 검도 못 잡아?"
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서진은 허리를 굽혀 검을 주웠다. 손잡이가 땀에 젖어 미끄러웠다.
"저, 그게..."
"그게 뭐? 변명이라도 하게?"
백무진이 성큼 다가왔다. 연서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어깨도 넓었다.
"이론적으로는 검의 무게 중심을 고려했을 때, 손목 각도가..."
"닥쳐."
백무진이 검을 낚아챘다. 연서진의 손에서 다시 검이 빠져나갔다.
"폐물 주제에 이론? 웃기지 마."
대련장 구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연서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닥의 흙먼지만 보였다.
"서진아."
다른 목소리였다. 부드러웠다.
소운하가 걸어왔다. 흰 도복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는 언제나 깨끗했다.
"괜찮아? 손 안 다쳤지?"
"...예. 괜찮습니다."
"휴, 다행이네."
소운하가 한숨을 쉬었다. 연서진을 보는 눈에 연민이 어렸다.
"무공 재능이 없는 건 네 잘못이 아니잖아. 너무 자책하지 마."
'자책은 안 하는데.'
연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근데 솔직히 안타깝긴 해. 문주님의 아들인데..."
소운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변 제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차라리 서고지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거기선 다칠 일도 없잖아?"
백무진이 코웃음 쳤다.
"그게 제격이지. 폐물은 책이나 읽어야지."
연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겠습니다."
등을 돌렸다. 대련장을 벗어났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발걸음을 빨리 했다. 웃음소리가 멀어졌다.
서고까지 백 보 남짓.
연서진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틀리지 않았는데.'
검의 무게 중심은 정확히 계산했다. 손목 각도도 맞았다. 문제는 손아귀 힘.
내력이 없으니 근력도 약했다.
서고 문을 밀었다. 낡은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연서진은 문을 닫았다.
혼자였다.
주먹을 펴지 않았다. 손바닥에 초승달 모양 자국이 패였다.
"...쓸모없네."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책장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먼지가 햇살에 반짝였다. 발소리만 들렸다.
서고 깊숙한 곳.
금서각 입구가 보였다. 쇠사슬로 봉인된 문. 연서진은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문주의 아들이라 받은 유일한 특권.
금서각 출입 허가.
자물쇠가 찰칵 열렸다. 문을 밀자 삐걱 소리가 났다. 안은 어두웠다.
촛불을 켰다. 노란 불빛이 책장을 비췄다.
"오늘은... 뭘 볼까."
연서진은 책장을 훑었다. 온통 고서뿐이었다. 무공 비급도 있었지만, 그가 익힐 수 있는 건 없었다.
내력이 없으면 무용지물.
"이론 연구나 하지, 뭐."
책 한 권을 꺼냈다. <청운검법 삼식 해설>. 먼지를 털어냈다.
책장을 넘겼다. 검초가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식은 중심을 낮추고...'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서 검의 궤적이 그려졌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촛불이 반쯤 타들어갔다. 연서진은 책을 덮었다. 눈이 침침했다.
"벌써 이 시간이네."
하품이 나왔다. 책을 제자리에 꽂으려다 멈췄다.
책장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연서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촛불을 들고 책장에 다가갔다.
벽이 보였다. 평범한 나무 벽.
하지만 공기가 달랐다.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운.
"이론적으로는..."
중얼거리며 벽을 두드렸다.
똑똑.
공명음이 울렸다.
"...속이 비었어."
심장이 빨리 뛰었다. 연서진은 책장을 밀었다. 무거웠다. 온몸에 힘을 줬다.
끼익.
책장이 옆으로 밀렸다. 먼지가 확 쏟아졌다. 기침이 나왔다.
"콜록, 콜록!"
눈을 비볐다. 촛불을 들어올렸다.
벽에 틈이 보였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정도. 연서진은 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웠다.
밀었다.
벽이 안으로 밀렸다.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헐..."
입이 벌어졌다.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좁았다. 한 사람 겨우 들어갈 크기.
안에 제단이 있었다. 그 위에 책 한 권.
핏빛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이게 뭐야."
연서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무거웠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제단에 다가갔다. 촛불을 가까이 대자 천의 색이 선명해졌다.
# 천마비급을 주운 폐물 공자 (2/3)
핏빛 천이 촛불 아래서 번들거렸다.
연서진은 손을 뻗었다. 손끝이 천에 닿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으윽!"
손을 움찔 빼려 했지만 늦었다. 손바닥이 천에 달라붙었다.
차가움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혈관을 따라 기어가는 느낌.
'이론적으로는... 이건...'
생각이 끊겼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났다.
눈앞이 일그러졌다. 촛불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 건 자신이었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은 여전히 천에 붙어 있었다.
"놔... 놔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때 천이 스르륵 풀렸다.
저절로.
핏빛 천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이 드러났다.
표지는 검었다. 새까맣게.
글자가 보였다. 붉은색으로 쓰여 있었다.
천혈.
"천마... 혈경?"
입술이 말랐다. 침을 삼켰다.
책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연기처럼.
연서진은 책을 집어들었다. 무거웠다. 손이 떨렸다.
첫 장을 넘겼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재능 없는 자여. 이것을 펼쳤다면 이미 늦었다.'
"...뭐?"
'혈경은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를 위한 것.'
연서진의 눈이 커졌다.
'내력 없는 자. 단전 막힌 자. 천재들에게 짓밟힌 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희에게 재능은 필요 없다. 오직 피와 의지만 있으면 된다.'
손이 더 떨렸다. 책장을 넘겼다.
운기 행로가 그려져 있었다. 복잡했다. 일반 무공과 달랐다.
'단전을 거치지 않는다... 혈관을 직접 사용해?'
연서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어. 단전이 막혀도 혈액은 흐르니까.'
다음 장을 넘겼다.
붉은 글씨로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첫 운기 시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피가 끓고 뼈가 뒤틀린다.'
"..."
'견디지 못하면 죽는다. 견디면 천마가 된다.'
연서진은 책을 덮었다. 숨을 내쉬었다.
"미친..."
중얼거렸다. 손이 떨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기대인가?
'폐물은 책이나 읽어야지.'
백무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차라리 서고지기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소운하의 부드러운 목소리.
연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책을 다시 펼쳤다.
첫 번째 운기법.
혈마초식.
"...해보자."
책에 적힌 대로 자세를 취했다. 가부좌. 등을 곧게 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검지와 중지를 세웠다.
심호흡.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천천히 내쉬었다.
'혈액의 흐름을 느껴라. 심장에서 시작해 온몸으로 퍼지는 맥박.'
눈을 감았다.
쿵. 쿵.
심장 소리가 들렸다.
혈관 속을 피가 흘렀다. 따뜻했다.
'첫 번째 혈. 백회혈을 자극하라.'
정수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따끔.
뭔가 찌르는 느낌.
'두 번째 혈. 인중혈.'
코 아래 홈에 집중했다.
찌릿.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세 번째 혈. 단중혈.'
가슴 한가운데.
쿵!
심장이 크게 뛰었다.
"으윽!"
신음이 새어나왔다. 가슴이 뜨거웠다.
'참아.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혈을 연결하면...'
다음 혈로 의식을 옮겼다.
기해혈. 배꼽 아래.
콰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억!"
비명을 삼켰다.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불탔다. 혈관이 터질 것 같았다.
'견뎌... 견디면...'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눈을 떴다.
손등 혈관이 검게 변했다. 부풀어 올랐다.
"헉... 헉..."
숨이 가빠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오래 걸렸구나."
목소리가 들렸다.
연서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남자 목소리. 낮고 차가웠다. 머릿속에서 울렸다.
"누... 누구?"
"천마."
심장이 멎을 뻔했다.
**"정확히는 천마의 잔재. 혈경에 깃든 의지."**
연서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찾지 마라. 나는 네 안에 있다."**
"내... 안?"
"혈경을 펼친 순간, 너는 나와 하나가 되었다."
목소리가 웃었다. 비웃음.
**"재능 없는 폐물. 딱 내 취향이지."**
"저는... 폐물이 아닙니다."
**"그래? 아까 대련장에선 개처럼 기어나왔잖아."**
연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인정해. 너는 약하다. 쓸모없다. 버림받았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그래서 완벽하다."
"...무슨 소리입니까."
**"재능 있는 놈들은 교만하지. 힘을 당연하게 여겨. 하지만 너는 다르다."**
천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바닥을 기어본 놈만이 진짜 힘을 갈구한다.
# 천마비급을 주운 폐물 공자 (3/3)
"바닥을 기어본 놈만이 진짜 힘을 갈구한다."
천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연서진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봤다. 검게 변한 혈관이 맥박쳤다.
**"운기를 멈추지 마라. 끝까지 밀어붙여."**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혈관이 견디지..."
**"이론?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
천마가 비웃었다.
**"네 이론이 널 강하게 만들어줬나? 백무진 앞에서 꿇어앉지 않게 해줬나?"**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힘은 이론이 아니라 의지로 얻는 거다. 계속해."**
연서진은 눈을 감았다. 다시 혈을 짚어나갔다.
족삼리혈. 무릎 아래.
찌릿!
전류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용천혈. 발바닥.
콰직!
뼈가 뒤틀리는 소리.
"크윽!"
비명을 삼켰다. 이가 부딪쳤다.
온몸이 불덩이였다. 혈관마다 용암이 흐르는 것 같았다.
'죽는 건가...'
**"죽긴. 이제 시작인데."**
천마가 낄낄 웃었다.
**"마지막 혈. 명문혈. 등 뒤 척추."**
등이 차갑게 식었다.
의식을 등 뒤로 돌렸다. 척추 어딘가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쿵!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콰아아아!
몸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커어어억!"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입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피부가 찢어질 것 같았다.
눈앞이 새빨갰다. 귀에서 윙 소리.
'이건... 못 견뎌...'
"견뎌."
천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지금 포기하면 평생 폐물이다. 백무진에게 개 취급당하며 살 거냐?"**
이를 악물었다. 피가 잇몸을 타고 흘렀다.
'아니... 아니야...'
**"그럼 버텨. 네 안의 모든 걸 짜내."**
온몸에 힘을 줬다. 근육이 경련했다.
혈관 속 검은 기운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심장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팔로. 팔에서 다리로.
원을 그리며 순환했다.
쿠우우웅!
몸속에서 울림이 퍼졌다.
그 순간.
탁!
뭔가 터지는 소리.
단전이었다.
막혀 있던 단전이 미세하게 열렸다.
실날 같은 틈.
하지만 그 틈으로 검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헉... 헉..."
숨이 턱까지 찼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됐다."
천마의 목소리에 만족감이 묻어났다.
**"첫 운기 성공. 이제 넌 천마혈경 초식 보유자다."**
연서진은 손을 들어올렸다. 떨림이 멎었다.
손끝에서 검은 실이 피어올랐다. 연기처럼 흩날렸다.
"이게... 마기?"
**"정확히는 혈기. 네 피에서 뽑아낸 힘이지."**
신기했다. 손가락을 움직이자 검은 실이 따라 움직였다.
**"아직 약해. 겨우 파리 한 마리 죽일 정도."**
"...그래도 어제보단 낫네요."
**"오, 농담도 하네? 성격 괜찮은데."**
천마가 킥킥 웃었다.
연서진은 책을 집어들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혈마초식 이후 수련법.'
글자가 빼곡했다.
'매일 혈을 자극하라. 고통은 줄지 않는다. 익숙해질 뿐.'
한숨이 나왔다.
"이론적으로는... 매일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거네요."
**"당연하지. 힘은 공짜가 아니야."**
책을 덮었다. 촛불이 거의 다 타들어갔다.
밖이 밝았다. 새벽이 온 모양이었다.
"나가야겠네."
일어서려다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무리했으니까. 오늘은 쉬어."**
"안 돼요. 오늘 백무진이..."
말을 멈췄다.
맞다. 오늘 백무진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대련장에서 보자던가.'
입술이 말랐다.
"두려워?"
천마가 물었다.
"...아뇨."
거짓말이었다. 두려웠다.
아직 혈기는 미약했다. 백무진을 이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럼 됐어. 두려움을 인정하는 놈은 강해질 수 있어."**
"무슨 뜻이죠?"
**"겁 없는 놈은 방심하고 죽어. 하지만 두려움을 아는 놈은 준비해."**
천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오늘은 지는 게 목표다."
"...네?"
**"이기려 들지 마. 관찰해. 백무진의 검로, 호흡, 습관. 전부 머릿속에 새겨."**
연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 분석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그거야. 네 장기를 살려."**
촛불이 꺼졌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연서진은 천마혈경을 품에 넣었다. 금서각을 나섰다.
복도가 조용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았다.
침대에 쓰러졌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조금만... 눈 붙이자...'
눈이 감겼다.
---
"야, 연서진!"
목소리에 눈을 떴다.
해가 중천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소운하가 서 있었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뭐... 뭐예요?"
"백무진이 대련장에서 기다린대. 한 시진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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