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대가
주인공: 서린 (남장명: 서한)
황실 도서관의 천장은 높았다.
서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황태자 카엘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시선은 바닥의 대리석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왜 하필 나를.'
발렌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어제 밤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카엘의 개인 호위로 발탁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 빨랐다.
"서한."
카엘의 목소리에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회의는 형식적인 자리야. 자네는 문 앞에서 대기하면 돼."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했다. 카엘이 미소 지었다. 언제나처럼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서린은 그 미소가 믿어지지 않았다.
'황태자가 왜 나 같은 신참을 데려가지?'
의심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도서관 안쪽 복도는 더 좁았다.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사이로 촛불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책등의 금박 글씨들이 반짝였다.
카엘이 멈춰 섰다.
"여기서 기다려."
"예."
카엘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서린은 문 앞에 서서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다.'
심장이 빨라졌다. 발렌이 준 정보는 간단했다. '도서관 회의실 근처 고문서 목록에 단서가 있다.'
서린은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책장 사이로 몸을 숨기며 시선을 굴렸다. 오래된 양피지 뭉치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 있었다.
'어디 있지.'
손끝이 떨렸다. 찾아야 했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의 흔적을.
세 번째 책장 아래쪽에서 묶음 하나를 발견했다. 표지에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달빛 작전 관련 문서 목록.'
숨이 멎었다.
'달빛.'
아버지가 쓰던 검법의 이름이었다.
서린은 양피지를 펼쳤다. 손이 떨려서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목록은 간단했다. 날짜, 문서 번호, 보관 위치. 그리고 마지막 줄.
'하벨 마을 - 처리 완료.'
가슴이 뒤틀렸다.
'처리 완료라고?'
사람을 죽여놓고 처리 완료라니.
서린은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게 증거야.'
하지만 가져갈 순 없었다. 누군가 알아차리면 끝이었다.
서린은 양피지를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췄다.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레온이었다.
"뭐 하나?"
낮은 목소리였다. 서린은 표정을 지웠다.
"화장실을 찾고 있었습니다."
"여긴 화장실이 없어."
레온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게 울렸다.
"근위대원이 임무 중에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레온이 서린 앞에 섰다.
"자네, 서 장군의 검법을 쓰더군."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들켰나.'
"어제 훈련장에서 봤어. 달빛 베기. 서 장군의 비전이지."
서린은 입을 다물었다. 레온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평민이 어떻게 그 검법을 알지?"
"..."
"대답 안 하나?"
레온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서린은 뒤로 물러섰다. 등이 책장에 부딪혔다.
'거짓말을 만들어야 해.'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어떤 말이 가장 그럴듯할까.
"저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서린은 침을 삼켰다.
"서 장군의 사생아입니다."
레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사생아?"
"예.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검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레온은 서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증명할 수 있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생아라는 증거. 있나?"
서린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 믿을 수 없지."
레온이 허리춤에서 검을 빼냈다. 칼집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지금 당장 달빛 베기를 보여줘. 진짜 서 장군의 핏줄이라면 할 수 있겠지."
검이 서린 앞으로 던져졌다. 바닥에 떨어진 검이 빙글 돌았다.
'어이가 없네.'
서린은 검을 내려다봤다. 레온의 검. 근위대 제식 검이었다.
"못 하겠나?"
"...할 수 있습니다."
서린은 검을 집어 들었다. 무게가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검보다 가벼웠다.
"그럼 해봐."
레온이 팔짱을 꼈다. 서린은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달빛 베기.'
아버지가 가르쳐 준 마지막 검법.
눈을 감았다. 기억이 떠올랐다.
달빛이 쏟아지던 밤. 아버지가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던 모습.
"린아, 잘 봐. 검은 달빛처럼 빠르고 조용해야 해."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서린은 눈을 떴다.
검을 들어 올렸다.
한 호흡.
검이 움직였다. 달빛처럼 빠르게, 소리 없이.
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서린의 손목이 떨렸다. 검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안 돼.'
아버지의 검법을 여기서 쓸 순 없었다. 완벽하게 구사하면 정체가 들통날 테고, 서투르게 흉내 내면 거짓말이 탄로 날 것이다.
레온이 코웃음 쳤다.
"못 하겠나?"
서린은 검을 내렸다. 칼끝이 바닥을 향했다.
"...이 검은 제게 맞지 않습니다."
"핑계군."
레온이 다가섰다. 서린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사생아 주제에 검을 가린다고?"
등이 책장에 부딪혔다. 책 몇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참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자루가 삐걱거렸다.
"레온 부대장."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음성이었다.
카엘이 서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려 있었다.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전하."
레온이 한 발 물러섰다. 표정이 굳어졌다.
"황실 도서관에서 검을 뽑다니. 규율을 모르나?"
카엘이 걸어왔다.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검에 머물렀다.
"죄송합니다. 다만 서한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의심?"
카엘이 레온을 쳐다봤다.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내가 뽑은 호위를 의심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뭔가?"
침묵이 흘렀다. 레온이 입을 다물었다.
카엘이 몸을 돌렸다.
"서한, 따라오게."
"예."
서린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레온에게 건넸다. 레온이 검을 낚아채듯 받았다.
복도를 걸으며 카엘이 물었다.
"서 장군의 사생아라고?"
"...예."
"증거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엘이 멈춰 섰다.
"증거가 없으면 거짓말이지."
심장이 조였다.
'들켰나.'
카엘이 돌아봤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상관없어. 자네가 누구든."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겐 쓸모가 있으니까."
카엘이 다시 걸었다. 서린은 그 뒤를 따랐다.
'쓸모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복도 끝에서 카엘이 벽을 짚었다. 돌 하나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벽이 열렸다.
"들어와."
비밀 통로였다. 좁은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서린은 주저했다. 카엘이 먼저 내려갔다.
'따라가야 하나.'
선택지가 없었다. 서린은 계단을 내려갔다.
촛불이 벽에 꽂혀 있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계단 끝에 작은 방이 나왔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둘. 그게 전부였다.
카엘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양피지 뭉치를 꺼냈다.
"앉게."
서린은 의자에 앉았다. 카엘이 양피지를 펼쳤다.
"달빛 작전. 들어봤나?"
숨이 막혔다.
'어떻게.'
서린은 표정을 지우려 애썼다. 하지만 손끝이 떨렸다.
카엘이 미소 지었다.
"역시 아는군."
"저는..."
"부정하지 마. 자네 눈이 말해주고 있어."
카엘이 양피지를 밀었다. 서린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글씨가 빼곡했다. 날짜, 지명, 인명.
그리고 맨 아래.
'하벨 마을 주민 전원 제거. 서진혁 대장 포함.'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손이 떨렸다. 양피지가 흔들렸다.
"왜 이걸..."
"자네에게 보여주는 이유?"
카엘이 팔짱을 꼈다.
"내겐 적이 많아. 황궁 안에도, 밖에도."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 있지. 자네는 복수를 원하니까."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카엘이 웃고 있었다.
"서진혁 대장의 딸. 서린 양."
온몸이 얼어붙었다.
'어떻게 알았지.'
카엘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린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놀랐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자네가 근위대에 지원한 순간부터."
카엘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남장한 여자가 근위대에 들어오다니. 재미있지 않나?"
서린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왜 가만히 두셨습니까?"
"자네가 필요했으니까."
"무엇에?"
카엘이 양피지를 가리켰다.
"이 문서를 만든 자를 찾는 데."
서린은 양피지를 내려다봤다.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누가 명령했는지 모르신다는 겁니까?"
"황실 누군가야. 하지만 증거가 없어."
카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자네 아버지는 희생양이었어. 전쟁을 끝내기 위한."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냐고? 그래."
카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난 황태자야. 하지만 권력은 없지. 황제 폐하는 병상에 계시고, 실권은 대신들이 쥐고 있어."
서린은 카엘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래서 저를 이용하시겠다는 겁니까?"
"이용이라니. 거래지."
"거래?"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네에게 정보를 줄게. 누가 명령했는지, 증거가 어디 있는지."
"대신?"
"자네는 그걸 찾아와. 내 손을 더럽히지 않고."
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람도 발렌과 똑같네.'
모두가 자기 손은 깨끗하게 두고 싶어 했다.
서린은 카엘을 쳐다봤다.
"거절하면?"
"거절?"
카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손이 저릿했다. 서린은 주먹을 풀었다.
'선택지가 없어.'
카엘이 몸을 뒤로 기댔다.
"좋은 답을 기대하지. 내일 아침까지."
"...예."
서린은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멈춰 섰다.
"레온 부대장은 조심해. 저 사람, 자네를 의심하고 있어."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계단을 올라갔다.
복도로 나왔을 때 숨이 터져 나왔다.
'정체를 알고 있었다니.'
벽에 기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처음부터 다 계획이었어.'
카엘은 서린을 시험하고 있었다. 얼마나 절박한지, 얼마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발소리가 들렸다.
서린은 몸을 일으켰다. 근위대 복장을 고쳐 입었다.
레온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서한."
"예."
레온이 멈춰 섰다. 팔짱을 꼈다.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거짓말."
레온이 한 걸음 다가섰다.
"비밀 통로로 데려가셨지. 뭘 보여줬나?"
서린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어.'
레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입 다물 거면 좋아. 하지만 기억해둬."
검자루에 손이 올라갔다.
"난 자네를 믿지 않아. 절대로."
레온이 몸을 돌렸다. 복도를 걸어갔다.
서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레온도 적이야.'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
다음 날 새벽.
서린은 숙소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아버지의 검.
천에 기름을 묻혀 칼날을 문질렀다.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달빛 베기.'
어젯밤 레온 앞에서 쓰지 못한 검법.
서린은 검을 들어 올렸다. 자세를 잡았다.
한 호흡.
검이 움직였다. 공기가 갈라졌다.
달빛이 칼날을 따라 흘렀다.
완벽했다.
서린은 검을 내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버지.'
목걸이를 만졌다.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았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서린은 검을 칼집에 넣었다.
"누구십니까?"
"나야."
낯선 목소리였다.
서린은 문을 열었다.
발렌이 서 있었다.
"...어떻게 여길."
"들어가도 되나?"
서린은 한 발 물러섰다. 발렌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발렌이 방을 둘러봤다. 시선이 검에 머물렀다.
"좋은 검이군."
"무슨 일이십니까?"
발렌이 미소 지었다.
"카엘 전하께서 제안하셨다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지.'
발렌이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을 바라봤다.
"거래는 위험해. 특히 황태자와의 거래는."
"...그래서 오신 겁니까? 경고하러?"
"경고?"
발렌이 돌아봤다.
"아니, 제안하러 왔지."
서린은 한 발 물러섰다.
"또 거래입니까?"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난 자네 편이야."
"편이라고요?"
발렌이 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서린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달빛 작전 문서 원본의 위치."
숨이 멎었다.
서린은 양피지를 받았다. 손이 떨렸다.
지도였다. 황궁 지하 서고의 구조도.
"어떻게..."
"내 정보망을 무시하지 마."
발렌이 서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밤 자정. 서고 경비가 교대하는 시간이야."
"왜 이걸 주십니까?"
"자네가 성공해야 나도 이득이니까."
발렌의 손이 떨어졌다.
"카엘 전하는 증거를 원하시지. 하지만 원본을 가져오면?"
서린은 발렌을 쳐다봤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은 복사본만 있으면 돼. 원본은 자네가 가져."
발렌이 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진짜 배후를 잡을 수 있어. 자네 아버지를 죽인 자를."
문이 열렸다.
"선택은 자네 몫이야. 서린 양."
발렌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서린은 양피지를 내려다봤다.
'원본.'
손이 떨렸다.
'하지만 카엘 전하를 배신하는 거잖아.'
주먹을 쥐었다. 양피지가 구겨졌다.
'어느 쪽을 믿어야 하지.'
---
자정.
서린은 검을 허리에 찼다.
근위대 복장을 벗었다.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거울을 봤다.
남장한 얼굴이 비쳤다.
'마지막이야.'
서린은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촛불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를 죽였다.
1층 홀을 지나 지하로 가는 문 앞에 섰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서린은 품에서 철사를 꺼냈다. 자물쇠에 넣었다.
찰칵.
열렸다.
문을 밀었다. 삐걱 소리가 났다.
계단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서린은 숨을 고르고 내려갔다.
지하 서고.
책장이 빼곡했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린은 지도를 펼쳤다. 촛불을 켰다.
'3번 통로, 7번 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