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법정
주인공: 강도윤
법정 안이 고요했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강도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청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십대 여성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판사님! 제발, 제발요!"
"정숙."
강도윤은 눈도 주지 않았다. 판결문을 덮고 일어섰다. 법복 자락이 휘날렸다.
방청석을 빠져나가는 피고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십대 남성. 대형 건설사 현장소장.
'증거 불충분.'
강도윤은 판사실로 돌아왔다. 법복을 벗어 걸고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 서류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내일 선고할 사건 기록. 그는 형광펜을 집어 들었다.
"규정상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손이 멈췄다.
'왜 자꾸 그 여자 얼굴이 떠오르지.'
방청석에서 울던 유족. 딸을 잃은 어머니.
강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형광펜을 다시 움직였다.
"감정은... 판단 기준이 아니다."
시계를 봤다. 밤 아홉시.
"오늘은 여기까지."
서류를 정리하려던 순간이었다.
책상 모서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강도윤의 손이 멈췄다.
피투성이 블라우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여자. 이십대로 보였다.
"...누구십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강도윤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 눈가에 핏자국.
"판사님."
"어떻게 여기..."
"저 억울해요."
강도윤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벌떡 일어섰다.
"경비실에 연락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3년 전 기억하세요?"
여자가 책상에서 내려왔다. 맨발이었다.
"산업재해 사건. 이수진. 저예요."
강도윤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수진. 현장 추락사. 무죄 판결.'
"그건..."
"증거 불충분이라고 하셨죠."
이수진이 한 발짝 다가왔다. 강도윤은 뒷걸음질 쳤다.
"저, 지금 환각을..."
"전 귀신이에요, 판사님."
"...이해가 안 됩니다."
강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심호흡을 했다.
'과로다. 휴가를 내야 해.'
눈을 떴다.
이수진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도윤은 벽에 등을 부딪혔다.
"판사님, 진정하세요."
"가, 가까이 오지 마..."
"전 해칠 생각 없어요.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이수진이 물러섰다. 강도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뭐가... 뭐가 하고 싶은 겁니까."
"재심이요."
"재심은 규정상..."
"증거 있어요."
강도윤의 눈이 커졌다.
"증거요?"
"네. 그때 회사가 숨긴 거."
"그게 어디..."
통장에서 오백만 원이 빠져나갔다.
강도윤은 몰랐다. 그 순간을.
---
다음 날 아침.
강도윤은 휴대폰을 붙들고 은행 앱을 열었다. 열 번도 넘게.
'출금 500만 원. 출금 500만 원.'
어제 밤부터 계속 확인했다. 잔액이 변하지 않았다.
"미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손이 떨렸다.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세 번째였다.
"고객님, 말씀드렸다시피 정상 출금 내역입니다."
"정상일 리가 없습니다. 제가 출금한 적이..."
"ATM 기록 확인 결과 고객님 카드로..."
"확인 좀 다시 해주십시오. 이건 명백한..."
"죄송하지만 추가 조사는 어렵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도윤은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환청. 환각. 이제 통장까지.'
정신과 예약을 검색하려던 순간이었다.
"판사님."
이수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으악!"
강도윤은 의자째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아, 깜짝 놀라게 하지 말라고요!"
"죄송해요. 근데 판사님, 어제 제 질문에 대답 안 하셨잖아요."
강도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수진을 올려다봤다.
"질문이요?"
"증거가 어디 있냐고 물으셨잖아요."
"그게..."
'통장.'
강도윤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질문. 오백만 원. 설마.'
"혹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질문 한 번에 오백만 원이에요."
"미, 미친..."
강도윤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왜 미리 말을 안 합니까!"
"몰랐어요, 판사님도. 처음 발동되는 거라."
"발동? 이게 무슨..."
"판사님한테 생긴 능력이에요. 귀신한테 질문하면 진실만 듣게 되는."
강도윤은 책상을 붙잡았다. 숨이 가빠졌다.
"말도 안 되는..."
"근데 돈이 나가요. 질문 한 번에 오백."
"그럼 지금 또...!"
강도윤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이수진이 피식 웃었다.
"의문문 형태여야 차감돼요. 방금 건 안전해요."
"...이게 대체."
강도윤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머리를 감쌌다.
'능력. 귀신. 오백만 원.'
"정신과 예약이나 해야겠어요."
"소용없어요. 판사님한테만 보이거든요, 저."
이수진이 창가로 걸어갔다. 햇빛이 그녀를 통과했다.
강도윤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증거."
"네?"
"어제 말한 증거. 어디 있습니까."
"아, 그거요?"
이수진이 돌아섰다.
"회사 지하 보관실. 3번 캐비닛에..."
"잠깐!"
강도윤이 손을 들었다. 이수진이 입을 다물었다.
"질문 안 했습니다. 대답하지 마세요."
"아, 그럼 공짜로 알려드릴게요."
"...공짜요?"
"질문 아니면 돈 안 나가요. 제가 그냥 떠드는 건 괜찮아요."
강도윤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모장을 켰다.
"말씀하세요."
"대한건설 본사 지하 2층. 보관실 3번 캐비닛. 안전 점검 기록부 원본이 있어요."
"원본이요?"
"회사가 조작한 거. 진짜 기록은 숨겨뒀어요."
강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게 증거라는 겁니까."
"네. 그거만 있으면..."
"불법 취득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습니다."
이수진의 얼굴이 굳었다.
"예?"
"판사가 직접 침입해서 가져올 순 없어요. 절차상..."
"그럼 어떻게 해요!"
이수진이 소리쳤다. 강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검찰에 제보하거나 변호사를 통해..."
"3년이나 지났는데요!"
"그래도 규정은..."
"규정, 규정! 그것만 따지면 전 영원히 억울한 거예요?"
강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투명한 핏물이었다.
"판사님도 아셨잖아요. 그때 뭔가 이상하다고."
"...증거가 없었습니다."
"있었어요! 회사가 숨긴 거예요!"
"그건 제 권한 밖입니다."
강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이수진이 책상을 탁 쳤다.
손이 책상을 통과했다.
"판사님."
"...돌아가세요."
"싫어요."
"이건 협박입니까."
"아니요. 부탁이에요."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이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요. 판사님밖에 없어요."
침묵이 흘렀다.
강도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박계장."
"네?"
"제 로스쿨 동기. 지금 변호사입니다."
이수진의 눈이 커졌다.
"그분한테 부탁하면..."
"안 돼요."
"왜죠."
"다른 사람은 저 못 봐요. 판사님만 가능해요."
강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방법이 없습니다."
"직접 가져오시면 되잖아요."
"그게 불법이라니까요."
"들키지 않으면 돼요."
"...뭐라고요?"
이수진이 몸을 숙였다. 강도윤과 눈높이를 맞췄다.
"야간에 몰래 들어가서 사진만 찍어오세요. 그럼 제보 형태로..."
"미쳤습니까."
강도윤은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제정신입니까."
"판사님이 안 하시면 아무도 못 해요."
"저는 판사입니다. 범죄를 저지를 수 없어요."
이수진이 팔짱을 꼈다. 투명한 몸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럼 저 그냥 포기하라는 거예요?"
"...변호사를 선임하십시오."
"돈 없어요. 죽었는걸요."
강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이수진이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그녀를 관통했다.
"판사님, 3년 전 기억나세요? 제 손."
"손이요?"
"손가락 세 개 없었잖아요. 기계에 끼어서."
강도윤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합니다."
"그거 회사 안전 수칙 위반이었어요. 근데 판사님은."
"증거가 없었습니다."
"있었다니까요!"
이수진이 소리쳤다.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판사님, 괜찮으세요?"
문 밖에서 서기관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은 재빨리 눈을 떴다.
"네, 괜찮습니다."
"안에서 소리가..."
"혼자 통화 중입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강도윤은 이수진을 돌아봤다.
"조용히 하세요."
"미안해요."
이수진이 고개를 숙였다. 강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박계장한테 연락하겠습니다."
"소용없어요."
"일단 상담은..."
"판사님."
이수진이 그를 똑바로 봤다.
"능력자는 판사님이에요. 저한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은."
강도윤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질문. 오백만 원.'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 좀 하겠습니다."
"언제까지요?"
"모릅니다."
"판사님!"
"나가세요."
강도윤이 문을 가리켰다. 이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 나갈 거예요."
"지금 협박입니까."
"아니요. 농성이에요."
"...미친."
강도윤은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
오후 세 시.
강도윤은 재판정에 앉아 있었다. 검은 법복이 무거웠다.
"피고인, 최종 진술하십시오."
중년 남자가 일어섰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강도윤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횡령 사건이었다.
'증거는 충분해.'
그런데 집중이 안 됐다.
'3번 캐비닛.'
이수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판사님?"
검사가 그를 불렀다. 강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네, 계속하십시오."
"판결 선고 일정을..."
바로 그때였다.
방청석 맨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투명한 형체. 교복 차림. 십 대 소년.
강도윤의 손이 떨렸다.
'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움직였다.
'도와주세요.'
강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판사님, 괜찮으십니까?"
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은 눈을 떴다.
"...잠시 정회하겠습니다."
"예?"
"십 분 후 재개합니다."
강도윤은 벌떡 일어났다. 법정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벽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나가 아니야.'
판사실 문 밖에 모여 있던 형체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거야.'
휴대폰이 울렸다. 박계장이었다.
"여보세요."
- 도윤아, 저녁 약속 기억하지?
"...미안, 취소해야 할 것 같아."
- 왜? 무슨 일 있어?
강도윤은 복도 끝을 바라봤다. 소년이 서 있었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 너 목소리 떨려. 진짜 괜찮아?
"응. 나중에 연락할게."
전화를 끊었다. 소년이 다가왔다.
"판사님."
"...뭡니까."
"저도 억울해요."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소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학교 폭력이요. 가해자들 전부 무혐의 받았어요."
"제가 맡은 사건이 아닙니다."
"근데 판사님이 볼 수 있잖아요."
"그건..."
강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제발이요.
"제발이요. 아무도 안 믿어줬어요."
강도윤은 뒤돌아 걸었다. 빠르게.
"저는 못 돕습니다."
"왜요?"
"제 일이 아니니까요."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소년은 따라오지 않았다.
판사실 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가면 이수진이 있어.'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었다.
이수진이 창가에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셨네요."
"...당연히 제 방인데요."
강도윤은 책상에 앉았다. 서류를 펼쳤다.
"아직 생각 안 끝났어요?"
"네."
"언제까지 생각하실 건데요."
"모릅니다."
이수진이 다가왔다.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려다가 그대로 관통했다.
"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괜찮습니까."
"부끄러워요."
이수진이 일어났다. 얼굴이 붉어졌다.
"귀신도 창피한 줄 아세요?"
"당연하죠. 사람인데."
강도윤은 펜을 들었다. 이수진이 그를 내려다봤다.
"판사님."
"네."
"밖에 몇 명 더 있던데요."
펜이 멈췄다.
"...봤습니까."
"네. 교복 입은 애도 있고, 할머니도 계시던데."
강도윤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랑 상관없습니다."
"근데 다들 판사님 기다리는 것 같던데요."
"제가 뭘 어쩌라고요."
"도와주시면 되죠."
강도윤은 펜을 내려놓았다. 이수진을 똑바로 봤다.
"이수진씨."
"네."
"저는 판사입니다. 귀신 상담사가 아니에요."
"근데 능력이 있잖아요."
"능력이 있다고 다 써야 합니까."
이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강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질문 한 번에 오백만 원이에요. 제 월급이 얼마인 줄 아세요?"
"...몰라요."
"세후 삼백입니다. 두 번 물어보면 파산해요."
이수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돈 받고 하시면 되잖아요."
"뭐요?"
"귀신들한테. 질문 받고 돈 받는 거예요."
강도윤은 어이가 없었다.
"귀신이 무슨 돈이 있어요."
"유족들한테 받으면 되죠."
"...미친."
강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수진이 몸을 숙였다.
"진짜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 유족들은 돈 많이 내요. 저도 낼 수 있어요."
"당신 죽었잖아요."
"동생이 있어요. 통장에 이천 있을걸요."
강도윤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아니에요. 정신 멀쩡해요."
이수진이 웃었다. 강도윤은 그녀를 바라봤다.
'진심이네.'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강도윤 판사님?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차가웠다.
"네, 그런데요."
- 서지안 검사입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강도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 뵙고 싶은데요. 내일 점심 어떠세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강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서지안.'
이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예요?"
"...아는 사람."
"목소리 떨려요."
강도윤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손이 떨렸다.
'왜 지금.'
진통제를 꺼냈다. 물 없이 삼켰다.
이수진이 다가왔다.
"판사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근데 얼굴이..."
"조용히 좀 해주세요."
이수진이 입을 다물었다.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3번 캐비닛. 야간 잠입. 서지안.'
머릿속이 꼬였다.
"판사님."
이수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제가... 도울까요?"
강도윤은 눈을 떴다. 이수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어떻게요."
"몰라요. 근데 뭔가 힘들어 보여서요."
강도윤은 웃음이 나왔다. 쓴웃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강도윤은 판사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이수진 산재 사건 기록이었다.
'3번 캐비닛.'
펜을 돌렸다.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판사님."
이수진이 옆에 섰다. 강도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증거만 있으면 재심 청구 가능합니다."
"...그렇죠?"
"근데 불법 취득 증거는 법정에서 무효예요."
이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강도윤은 서류를 덮었다. 한숨을 쉬었다.
"합법적으로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죠."
"그게 뭔데요."
"...모릅니다."
이수진이 책상을 내려다봤다. 강도윤은 창밖을 바라봤다.
'서지안이 왜.'
휴대폰 화면에 남아 있는 문자.
- 내일 12시. 법원 앞 카페.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판사님."
"네."
"저 혼자가 아니에요."
강도윤은 고개를 돌렸다. 이수진이 문을 가리켰다.
"우리 같은 사람 많아요."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복도에 흐릿한 형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교복 입은 소년. 할머니. 정장 차림 남자. 젊은 여자.
모두 강도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도윤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뒷걸음질 쳤다.
"뭐예요, 저게."
"억울한 사람들이요."
이수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들 판사님 기다려요."
"저한테 왜..."
"볼 수 있잖아요. 판사님만."
강도윤은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꽉 잡았다.
'미친. 이게 뭐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판사님."
이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진짜 억울해요. 아무도 안 들어줘요."
강도윤은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려 했다.
안 됐다.
"제가... 뭘 어쩌라고요."
"물어봐 주세요. 진실을."
"그럼 제 돈이..."
말을 멈췄다.
휴대폰을 꺼냈다. 은행 앱을 켰다.
잔액: 4,200,000원
"...뭐?"
어제 확인했을 땐 9,700,000원이었다.
"오백만 원이..."
이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 질문하셨잖아요."
"안 했는데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으셨어요. 증거 위치."
강도윤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건... 그냥 한 말인데."
"의문문이면 다 차감돼요."
"미친."
강도윤은 책상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감쌌다.
'질문 조심해야 돼. 평생.'
이수진이 다가왔다.
"판사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있나요!"
소리쳤다. 이수진이 움찔했다.
강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이수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조용히 좀 있어 주세요. 제발."
이수진은 입을 다물었다. 뒤로 물러섰다.
강도윤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진통제를 꺼냈다.
두 알을 삼켰다.
'정리하자.'
증거는 있다. 3번 캐비닛.
근데 불법으로 가져오면 소용없다.
서지안은 뭔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귀신들은 계속 늘어난다.
"...이해가 안 돼."
중얼거렸다. 이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전부 다요."
강도윤은 시계를 봤다. 11시 30분.
'서지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복을 벗었다.
"어디 가세요?"
"약속 있습니다."
"누구랑요?"
강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귀신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강도윤은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시선이 따라왔다.
'보지 마. 신경 쓰지 마.'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소년이 뛰어들었다.
아니, 통과해 들어왔다.
"판사님."
"...나가세요."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못 듭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소년이 앞을 막아섰다.
으로 죽었어요. 근데 자살 처리됐어요."
"나가라니까요."
강도윤은 소년을 밀쳤다. 손이 허공을 갈랐다.
소년은 그대로 서 있었다.
"증거 있어요. 학교 CCTV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문이 열렸다.
강도윤은 뛰쳐나갔다. 소년은 따라오지 않았다.
로비를 가로질렀다.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폐를 찔렀다.
법원 앞 카페가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서지안이었다.
강도윤은 발을 멈췄다.
'들어가면 끝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지안이었다.
- 들어오세요.
전화를 끊었다. 서지안이 손짓했다.
강도윤은 문을 밀었다. 종이 딸랑거렸다.
"앉으세요."
서지안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강도윤은 천천히 앉았다.
"커피 시킬까요?"
"됐습니다."
서지안은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3년 만이네요."
"...그렇네요."
"그때 그 사건 기억하세요?"
강도윤의 손이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무슨 사건 말씀이십니까."
"산재 사건이요. 피해자 이수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지안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책상에 올렸다.
"이거 아세요?"
"...모릅니다."
"거짓말 마세요. 판사님 서명 들어간 야간 출입 기록이에요."
강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3번 캐비닛 앞 CCTV에 찍혔어요. 3년 전 그날 밤."
서지안이 봉투를 밀었다.
"열어 보세요."
강도윤은 손을 뻗었다. 봉투를 열었다.
흑백 사진이었다. 캐비닛 앞에 선 자신의 모습.
"불법 증거 취득 미수. 직권 남용."
서지안이 말했다.
"변명 있으세요?"
강도윤은 사진을 내려다봤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어요?"
서지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정의감? 아니면 돈?"
"...아닙니다."
"그럼 뭐예요?"
강도윤은 고개를 들었다. 서지안을 똑바로 봤다.
"이수진씨가 억울해서요."
"증거도 없이요?"
"있었습니다. 3번 캐비닛에."
서지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알았죠?"
강도윤은 입을 다물었다.
'말할 수 없어.'
서지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판사님, 협조하시면 선처해 드릴게요."
"...뭘 원하십니까."
"누가 시켰는지 말해요."
강도윤은 숨이 막혔다.
'아무도 안 시켰는데.'
서지안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돌려 보였다.
통화 기록이었다.
- 수신: 강도윤 / 발신: 미상 / 통화 시간: 0초
날짜는 3년 전 그날 밤이었다.
"이 번호 누구예요?"
강도윤은 화면을 응시했다. 기억이 없었다.
"모릅니다."
"거짓말."
서지안이 휴대폰을 거뒀다.
"이 번호로 추적했더니 재밌는 게 나오더라고요."
강도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뭐가요."
"죽은 사람 명의예요."
시간이 멈췄다.
강도윤은 서지안을 바라봤다. 서지안이 미소 지었다.
"이수진. 그 사람 번호예요."
"...말도 안 돼요."
"통신사 기록 확인했어요. 틀림없어요."
강도윤은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머리가 하얘졌다.
'그날 밤. 전화.'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 3번 캐비닛. 증거 있어요.
여자 목소리였다.
"...이수진."
서지안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요?"
강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은..."
"앉으세요."
"갑니다."
"앉으라고요!"
서지안이 손목을 잡았다. 강도윤이 멈췄다.
그 순간.
서지안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이수진이었다.
그녀가 강도윤을 바라봤다. 입을 열었다.
"판사님."
강도윤의 입술이 떨렸다.
"저도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