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약 14분 · 총 7,098자

벙커의 메아리

주인공: 강민재

새벽 다섯 시, 침대 옆 휴대폰이 울렸다.

민재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고 미간이 좁혀졌다.

왕실 비서실.

"강민재입니다."

목소리는 이미 깨어 있었다. 술 냄새가 입안에 남아 있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 부총리님, 송구합니다만 긴급 통보 드립니다.

"뭔데."

- 지난달 전선에서 구출하신 김태우 병장, 기억하십니까?

민재의 손가락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왜 그 이름이 지금.'

"기억은 하는데. 그래서?"

- 오늘 아침 8시, 청와대 경호 교대 인사차 방문합니다. 왕궁 근위대로 전속 발령이 났습니다.

민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잠깐. 일개 병장이 근위대로?"

- 예. 왕세자 전하께서 직접 추천하셨다고 합니다.

"...알았어."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던졌다. 침대 모서리에 부딪쳐 바닥에 떨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준혁이가 왜.'

민재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저 멀리 청와대 지붕이 보였다. 그 너머 왕궁의 첨탑도.

'아, 씨.'

욕이 튀어나왔지만 삼켰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김태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벙커 안에서 떨던 그 병사. 민재가 손을 내밀자 울먹이며 붙잡았던.

'왜 하필 근위대야.'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다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 밑이 검었다. 어제 마신 위스키 때문인지 눈동자가 충혈되어 있었다.

"망했네."

민재는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컨실러를 두껍게 발랐다.

"이 정도면 되나."

거울 속 여자는 이제 강민재 부총리였다. 흔들림 없는 얼굴.

---

청와대 정문 앞에 차가 섰다.

"부총리님, 도착했습니다."

민재는 창밖을 봤다. 왕궁 근위대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다.

검은색 제복. 금색 견장. 하얀 장갑.

'저 안에 태우가 있겠지.'

차에서 내렸다. 구두 굽 소리가 아스팔트를 쳤다.

의장대가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쳤다.

그때였다.

한 병사의 입술이 떨렸다.

민재의 발걸음이 멈췄다.

'김태우.'

그는 경례 자세 그대로 민재를 봤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왜 저래.'

민재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태우의 눈빛이 붙잡았다.

간절함. 그리고 두려움.

'말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거야?'

옆에 선 선임 병사가 태우의 어깨를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민재와 태우의 시선이 1초 마주쳤다.

태우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민재는 읽을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민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부총리님?"

경호원이 불렀다. 민재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괜찮아. 가자."

뒤돌아 걸었다. 등 뒤에서 태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씨발, 왜 나한테.'

---

집무실 문을 열자 비서 최유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총리님, 아침 일정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어, 잠깐만."

민재는 책상 앞에 섰다. 의자에 앉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청와대 정문이 보였다. 의장대는 이미 철수했다.

'태우는 어디로 갔을까.'

"부총리님?"

유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응, 말해."

"왕궁 근위대 측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유진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민재는 화면을 봤다.

[김태우 병장 관련 개인 면담 일체 금지]

민재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게 뭔데?"

"근위대 규정상 외부 인사와의 사적 접촉을 통제한다는 내용입니다."

"사적 접촉? 내가 언제 사적으로 만나겠다고 했어?"

"그게 아니라..."

유진이 말을 흐렸다. 민재는 태블릿을 책상에 던졌다.

"아니, 근위대로 데려와 놓고 왜 접촉을 막아? 이상하지 않아?"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는 의자에 앉았다.

'준혁이가 추천했다면서. 그런데 왜.'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리듬이 불규칙했다.

"오늘 왕궁 알현 일정 있지?"

"예, 오전 10시입니다."

"그때 물어봐야겠네."

민재는 시계를 봤다. 8시 반.

'한 시간 반.'

---

왕궁 알현실 앞 대기실.

민재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발끝이 까딱거렸다.

'준혁이는 늦는 법이 없는데.'

10시가 지났다. 10시 10분도 지났다.

문이 열렸다. 왕실 비서관이 들어왔다.

"부총리님."

민재는 일어났다.

"전하께서는?"

"죄송합니다만, 오늘 알현은 취소되었습니다."

"뭐?"

민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비서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전선 시찰 보고서는 서면으로 제출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준혁이... 전하께서 직접 요청하신 자린데요?"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비서관은 고개를 숙였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민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더 하려다 참았다.

민재는 복도를 걸었다.

구두 굽이 대리석을 찧었다. 뒤따라오는 경호원의 발소리도 들렸다.

'서면으로 제출? 개소리하네.'

왕궁 정문을 나섰다. 햇살이 눈을 찔렀다.

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민재는 타지 않았다.

"청와대 안 가고?"

"아니."

민재는 왕궁 담장을 따라 걸었다.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뒤따랐다.

"부총리님, 어디 가십니까?"

"산책."

담장 끝까지 걸었다. 모퉁이를 돌자 작은 문이 보였다.

근위대 막사 출입구.

민재는 멈춰 섰다. 문 앞에 헌병이 서 있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손이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야, 이거 열어."

헌병이 고개를 들었다. 민재를 알아본 얼굴이 굳었다.

"부총리님, 여기는..."

"알아. 근데 열어야겠어."

"허가증이 없으시면..."

민재는 한 걸음 다가섰다. 헌병과 눈높이가 맞았다.

"김태우 병장. 내가 구한 애. 거기 있지?"

헌병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흔들렸다.

'있구나.'

민재는 문 옆 인터폰을 눌렀다. 벨 소리가 울렸다.

10초. 20초. 아무도 받지 않았다.

민재는 다시 눌렀다. 이번엔 길게.

- 누구십니까?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중년 남자. 낮고 거친 음성.

"강민재요. 부총리."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통화가 끊겼다. 민재는 팔짱을 꼈다.

기사가 다가왔다.

"부총리님, 일정이..."

"닥쳐."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5분이 지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민재는 핸드폰을 꺼냈다. 왕실 비서실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 왕실 비서실입니다.

"나 강민재. 지금 근위대 막사 앞인데 문 안 열어주네?"

- ...부총리님, 그곳은 사전 허가가 필요한 구역입니다.

"허가 받으러 왔어. 지금 당장."

- 죄송하지만 오늘은 어렵습니다.

민재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 전하께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셨습니다.

"외부인? 나 정부 인사야."

- 규정상 왕실 직속 부대는...

민재는 통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준혁이 새끼.'

욕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삼켰다.

그때 문이 열렸다.

장교 한 명이 나왔다. 계급장을 보니 중령이었다.

"부총리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표정은 차갑았다.

민재는 그를 봤다.

"김태우 병장 만나러 왔어요."

"죄송합니다만, 현재 그 병사는 격리 교육 중입니다."

"격리?"

민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령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신병 적응 프로그램입니다. 2주간 외부 접촉이 제한됩니다."

"개소리. 일개 병장이 무슨 적응 교육이 2주야?"

"근위대 규정입니다."

민재는 중령의 어깨 너머로 막사 안을 봤다.

건물 세 동. 2층짜리 병사들.

한 건물 2층 창문에 커튼이 흔들렸다.

'저기.'

민재는 그쪽으로 걸었다. 중령이 팔을 벌려 막았다.

"부총리님, 무단 침입은..."

"비켜."

"규정 위반입니다."

민재는 중령을 똑바로 봤다.

"내가 구한 병사 만나겠다는데 왜 막아요?"

"명령입니다."

"누구 명령?"

중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재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준혁이... 전하 명령이지?"

중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민재는 놓치지 않았다.

'맞네.'

민재는 한 걸음 물러섰다. 숨을 들이켰다.

"좋아. 오늘은 그냥 갈게요."

중령이 경례했다. 민재는 돌아섰다.

기사가 차 문을 열었다. 민재는 탔다.

차가 출발했다. 사이드미러로 막사가 멀어졌다.

'태우야, 미안.'

민재는 창밖을 봤다. 왕궁 담장이 지나갔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최유진.

"응."

- 부총리님, 총리실에서 연락 왔습니다.

"뭔데."

- 오후 3시 면담 요청입니다. 박서준 총리님께서 직접...

민재는 시계를 봤다. 11시 반.

"알았어."

통화를 끊었다.

'서준이가 왜 갑자기.'

---

청와대 부총리 집무실.

민재는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혀를 눌렀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더미. 전선 시찰 보고서 초안이 맨 위에 있었다.

민재는 펜을 집었다. 첫 장을 넘겼다.

[김태우 병장 구출 경위]

손이 멈췄다.

벙커 안 장면이 떠올랐다. 태우가 울던 얼굴. 준혁이 민재를 안았던 순간.

'그 다음은 기억이 안 나.'

민재는 펜을 놓았다. 관자놀이를 눌렀다.

두통이 왔다. 어제 마신 위스키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노크 소리.

"들어와."

유진이 문을 열었다. 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부총리님,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민재는 태블릿을 받았다.

화면에 기사 제목이 떴다.

[단독] 강민재 부총리, 왕궁 근위대 막사 무단 방문 시도

민재의 눈이 커졌다.

기사를 읽었다. 사진도 있었다.

민재는 사진을 확대했다.

자기 뒷모습. 근위대 막사 문 앞. 중령과 대치하는 장면.

'누가 찍은 거야.'

기사 내용을 읽었다. 익명의 왕실 관계자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 부총리가 규정을 무시하고 병사를 만나려 했습니다. 왕실 경호에 구멍을 낸 겁니다.

"씨발."

민재는 태블릿을 책상에 던졌다.

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해명 보도자료 준비할까요?"

"아니."

"하지만 이대로 두면..."

"그럼 더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

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민재는 의자에 기댔다. 천장을 봤다.

'준혁이 새끼가 흘린 거 아니겠지.'

아니야. 준혁은 그런 애 아니야.

'그럼 누가.'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박서준 총리.

민재는 화면을 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받지 말까.

신호음이 네 번 울렸다. 민재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총리님."

- 민재야.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오히려 그게 더 불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 기사 봤어. 괜찮아?

"...예."

- 오늘 면담 시간 좀 앞당기자. 지금 당장 올 수 있어?

민재는 시계를 봤다. 12시.

"3시로 잡혀 있지 않습니까?"

- 급한 일이야. 지금 와.

통화가 끊겼다.

민재는 핸드폰을 쥔 채 멈춰 있었다.

'뭐가 급해.'

---

총리 집무실.

박서준은 창가에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민재가 들어서자 돌아봤다.

"앉아."

민재는 소파에 앉았다. 서준은 맞은편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커피 줄까?"

"됐습니다."

서준은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민재야, 요즘 너 좀 이상해."

"...예?"

"왕궁 막사까지 찾아가고. 전하 면담도 취소되고. 무슨 일 있어?"

민재는 서준을 봤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냥 병사 안부 확인하려던 겁니다."

"김태우?"

"예."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가로 돌아갔다.

"그 애 근위대 발탁된 거 알지?"

"압니다."

"전하께서 직접 추천하셨어. 이례적인 일이야."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준이 계속 말했다.

"근데 왜 하필 그 애한테 집착해? 전선에서 구한 병사 한둘이 아니잖아."

"집착 아닙니다."

"그래?"

서준이 돌아봤다. 민재와 눈이 마주쳤다.

"민재야, 전하랑 사이 안 좋아진 거 아니야?"

민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현 취소됐잖아. 전화도 안 받으시고."

"바쁘신 겁니다."

서준은 민재 앞으로 걸어왔다. 소파 팔걸이에 앉았다.

"민재야, 나 네 편이야. 알지?"

"...예."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벙커에서 뭐 있었어?"

민재는 숨이 막혔다.

'벙커?'

서준이 웃었다.

"놀랐어? 나 다 알아. 네가 기절했던 거. 전하께서 너 안고 나왔던 거."

민재의 손이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누가 그러던가요."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서준이 몸을 숙였다. 민재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전하께서 네게 뭐라고 했어?"

민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다."

"거짓말."

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김태우 병장이 들었대. 전하께서 뭔가 말씀하시는 걸."

민재의 눈이 커졌다.

'태우가?'

서준이 일어섰다. 책상으로 걸어가 서류를 집었다.

"이거 봐."

민재는 서류를 받았다.

[김태우 병장 진술 조서]

손이 떨렸다. 첫 장을 넘겼다.

- 전하께서 부총리님을 안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귀에 대고 뭔가 말씀하셨습니다.

- 정확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단어는 들렸습니다.

민재는 숨을 들이켰다.

'미안하다?'

서준이 말했다.

"전하께서 왜 사과를 하셨을까?"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준이 책상에 기댔다.

"민재야, 너 전하 좋아하지?"

민재의 고개가 확 올라갔다.

"뭐?"

"아니면 전하께서 널 좋아하시거나."

민재는 일어섰다. 서류를 책상에 던졌다.

"총리님, 지금 무슨 말씀을..."

"진정해. 나 네 적 아니야."

서준이 손을 들었다.

"근데 왕실은 달라. 저 사람들은 스캔들에 목숨 거는 애들이야."

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저랑 전하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럼 왜 김태우를 격리시켰을까?"

민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서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민재야, 내가 도와줄게. 김태우 빼내줄 수도 있어."

민재는 서준을 봤다.

"...조건이 뭡니까."

"똑똑하네."

서준이 웃었다.

"전하께 거리 둬. 당분간 접촉하지 마."

"왜요?"

"네가 위험해지니까."

민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

서준이 민재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민재야, 넌 정치인이야. 감정으로 움직이면 안 돼."

민재는 서준의 손을 뿌리쳤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돌아서서 문으로 걸었다.

총 7,098자 · 약 14분

- 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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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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