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간, 딸의 여름
주인공: 이주아
"네 인생? 네가 뭘 안다고!"
엄마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주아는 귀를 막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이 집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내가 뭘 알아요? 엄마는 나 뭘 아는데요!"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손이 떨렸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절대 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확 돌렸다.
"이주아, 너 지금—"
"**싫어요! 나 몰라!**"
방문을 쾅 닫았다. 벽에 걸린 시간표가 덜컹거렸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짜증나.'
핸드폰을 꺼냈다. 엄마가 압수한 지 사흘 만에 몰래 되찾은 거였다. 친구들 단톡방엔 수능 D-237이라는 타이머가 떠 있었다.
237일.
주아는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답답했다.
'나만 이러나.'
열 분쯤 지났을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주아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문을 살짝 열고 거실을 살폈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등이 축 처져 보였다.
'...에이, 몰라.'
주아는 슬금슬금 방에서 나왔다.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밥은 먹고 다녀."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주아는 대답 대신 코를 훌쩍였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는데 자석에 붙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고등학교 졸업사진이었다. 교복 입은 엄마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땐 좋았겠네. 공부하라는 사람도 없고.'
주아는 사진을 떼어냈다. 뒷면에 1999년 2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거 왜 떼."
엄마가 돌아봤다.
"...그냥요."
주아는 사진을 도로 붙이고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
"산책이요!"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걸었다.
'엄마는 맨날 나만 뭐라 하잖아.'
눈시울이 뜨거웠다. 주아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골목 끝에 낡은 건물이 보였다.
'사진관?'
간판이 녹슬어 있었다. 유리창엔 먼지가 수북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주아는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안에 오래된 카메라와 삼각대가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빛이 번쩍했다.
"...뭐야!"
눈이 부셨다.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빛은 더 강해졌다. 온몸이 따끔거렸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났다.
주아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낡은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주아는 몸을 일으켰다. 책상이었다. 아니, 교실이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근데 교복 디자인이 이상했다. 치마가 길었다.
칠판을 봤다.
'기말고사 D-3'
분필로 삐뚤빼뚤 쓴 글씨였다.
'기말고사...?'
주아는 자기 몸을 내려봤다. 교복을 입고 있었다. 치마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야, 삐삐 봐봐!"
옆에서 남학생이 소리쳤다. 손에 작은 기계를 들고 있었다.
'삐삐...?'
주아는 눈을 비볐다. 꿈인가 싶었다.
창밖을 봤다. 구형 버스가 지나갔다. 건물 옥상에 'SKY 삐삐' 광고판이 보였다.
"이주하 학생?"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네?"
"오늘 전학 온 거 맞지? 인사해봐."
담임선생님이었다.
주아는 멍하니 일어났다. 학생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저,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전학생? 나?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책상 위를 봤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주하(전학생)'
주하. 주아와 한 글자 차이였다.
"자, 저쪽 빈자리에 앉아."
담임이 창가 쪽을 가리켰다.
주아는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학생들 시선이 따가웠다.
빈자리 옆에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앉으려는 순간, 그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주아는 얼어붙었다.
'...엄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여학생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 주하야! 나 수진이. 앞으로 잘 지내자!**"
그 목소리. 그 얼굴.
냉장고에 붙어 있던 사진 속 엄마였다.
아니, 젊은 엄마였다.
주아는 떨리는 손으로 악수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어, 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진은 주아 손을 꼭 잡았다.
"긴장했구나? 괜찮아. 우리 반 애들 다 착해."
복도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H.O.T의 '캔디'였다.
'이게... 뭐야...'
# Part 2/3: 전개
수진이 주아 손을 잡아끌었다.
"쉬는 시간에 학교 구경시켜줄게!"
주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진짜야? 엄마가... 내 앞에?'
수진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표지에 H.O.T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시간표 알려줄게. 오늘은 수학이랑 영어만 있어."
주아는 멍하니 공책을 받았다. 종이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연필로 삐뚤빼뚤 쓴 글씨들이 빼곡했다.
'진짜... 1999년이야.'
가슴이 쿵쾅거렸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수진이 주아 어깨를 톡 쳤다.
"괜찮아? 얼굴이 하얘."
"아, 아니... 괜찮아요."
"말 놔도 돼! 우리 동갑이잖아."
수진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낯설었다. 엄마는 집에서 이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
종이 울렸다.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수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분필로 칠판에 뭔가 적기 시작했다.
주아는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교문 앞에 문방구가 보였다.
'여기가... 엄마가 다니던 학교...'
손이 저절로 주머니로 갔다. 핸드폰이 만져졌다.
꺼내서 화면을 켰다. 배터리가 23%였다.
'충전은 어떻게 해...'
갤럭시 최신 모델이었다. 1999년엔 충전기가 있을 리 없었다.
메시지함을 열었다. 아까 그 깨진 글씨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7월 15일 전에 돌아가.'
발신자는 '알 수 없음'이었다.
주아는 손가락을 떨며 답장을 쳤다.
'누구세요? 어떻게 돌아가요?'
전송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빙글빙글 돌더니 실패 표시가 떴다.
'망했네...'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칠판을 봤다. 미적분 문제가 빼곡했다.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수진이 공책에 뭔가 적어서 넘겼다.
'점심시간에 학생회실 갈 거야. 같이 갈래?'
주아는 연필을 집어 들었다.
'왜요?'
수진이 얼굴을 붉히며 또 적었다.
'회장님한테 편지 전하려고. 도와줘!'
회장님.
주아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그 일기장에 나온 김민우...?'
가슴이 두근거렸다. 궁금했다. 엄마가 좋아했던 사람이 누군지.
'응, 갈게.'
수진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
점심시간이 되자 수진은 주아를 끌고 복도로 나갔다.
학생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향했다. 복도엔 카세트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수진은 주아 손을 꽉 잡았다.
"떨려 죽겠어."
주아는 수진 얼굴을 봤다.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엄마가 이렇게 수줍음 타는 사람이었어?'
지금 아는 엄마는 항상 목소리가 컸다. 확신에 차 있었다.
학생회실 앞에 도착했다. 문에 '학생회 간부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수진은 가방에서 편지 봉투를 꺼냈다. 분홍색 봉투였다. 하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거... 괜찮을까?"
수진 목소리가 떨렸다.
주아는 봉투를 봤다. '김민우 선배님께'라고 적혀 있었다.
'진짜 김민우네.'
가슴이 답답했다. 이 편지를 전하면 뭐가 달라질까.
"괜찮을 거야."
주아는 그렇게 말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수진이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계세요?"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남학생이 나왔다.
주아는 숨이 멎었다.
키가 컸다.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학생회 완장을 차고 있었다.
얼굴이... 낯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남학생이 수진을 보고 웃었다.
"수진아, 무슨 일이야?"
"저, 저기... 이거요."
수진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민우는 편지를 받았다. 봉투를 보더니 미소 지었다.
"고마워. 나중에 읽을게."
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네..."
민우가 주아를 봤다.
"전학생이지? 잘 적응하고 있어?"
주아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다시 웃으며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수진이 주아 팔을 붙잡았다.
"**봤지? 진짜 완벽하지?**"
주아는 대답 대신 민우가 들어간 문을 봤다.
'왜 낯익지...'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남학생 두 명이 걸어왔다. 한 명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민우 형! 오늘 PC방 가자!"
PC방.
주아는 그 단어에 반응했다.
'1999년에도 PC방이 있었나?'
학생회실 문이 다시 열렸다. 민우가 나왔다.
"시험 끝나고 가자. 지금은 공부해야지."
남학생들이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주아는 민우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넓었다. 걸음걸이가 당당했다.
수진이 주아 귀에 속삭였다.
"민우 오빠는 서울대 갈 거래. 우리랑은 다른 세상 사람이야."
주아는 수진 얼굴을 봤다. 눈빛이 슬펐다.
'엄마...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엄마는... 저렇게 슬픈 눈으로 누굴 좋아했구나.'
주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코끝이 찡했다.
수진이 주아 손을 잡아끌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식당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스테인리스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야, 너 삐삐 있어?"
앞에 선 여학생이 물었다.
"아... 없어요."
"요즘 없는 애가 어딨어? 나 SKY 삐삐 샀거든. 번호 줄까?"
주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삐삐 번호를 받아봤자 뭐하나.
밥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김치찌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수진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주아를 봤다.
"근데 주하야, 너 어디서 전학 온 거야?"
주아는 숟가락을 쥔 손이 굳었다.
"저, 저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2024년에서 왔다고?
"서울이요. 강남."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수진 눈이 반짝였다.
"헐, 대박! 강남은 진짜 부자동네잖아. PC방도 많고."
"어, 응..."
주아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떠먹었다. 김치찌개 맛이 달았다. MSG 맛이었다.
'엄마는 매일 이런 거 먹고 자랐구나.'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은 언제나 싱겁고 건강했다. 화학조미료 절대 안 썼다.
수진이 밥을 우걱우걱 먹으며 말했다.
"나 요즘 민우 오빠 때문에 미치겠어. 어제도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인사도 못 했어."
"왜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진짜 짜증나."
수진은 얼굴을 붉혔다.
주아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근데... 민우 선배는 수진이 좋아하는 거 알아요?"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모를걸? 오빠는 나 같은 애는 쳐다도 안 봐. 공부도 못하고 특별한 것도 없잖아."
주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가... 이렇게 자신감 없는 사람이었어?'
지금 아는 엄마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주아한테 맨날 '넌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런 거 아닐걸요. 수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수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괜찮아. 나도 알아. 그냥...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주아는 가슴이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
오후 수업이 끝나고 수진이 주아를 끌고 교문 앞 문방구로 갔다.
"여기 젤리 진짜 맛있어!"
문방구 아저씨가 TV를 보고 있었다. 브라운관 TV였다. 화면이 흐릿했다.
수진은 젤리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 먹어봐. 500원짜리."
주아는 지갑을 열었다. 만 원짜리 지폐가 한 장 있었다.
'이것도 1999년 돈이네...'
아저씨한테 돈을 내고 젤리를 받았다. 거스름돈으로 동전 한 움큼을 받았다.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수진이 젤리를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주하야, 너 집 어디야? 같이 가자."
주아는 손이 얼어붙었다.
'집...?'
어디라고 해야 하지. 이 동네 지리도 모르는데.
"저, 저기... 오늘은 혼자 갈게요. 길 좀 익혀야 해서."
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럼 조심히 가. 내일 봐!"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라탔다.
주아는 벤치에 혼자 남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핸드폰을 꺼냈다. 배터리가 19%였다.
메시지함을 다시 열었다. 아까 그 메시지가 그대로였다.
'7월 15일 전에 돌아가.'
오늘이 7월 10일이면... 5일밖에 안 남았다.
'돌아가려면 뭘 해야 해?'
손가락이 떨렸다. 답답했다.
주머니를 뒤졌다. 학생증이 나왔다. '이주하'라고 적혀 있었다.
'주하... 나랑 한 글자 차이.'
왜 하필 이 이름일까. 우연일까.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메시지가 하나 떴다.
'네가 바꾸면 모든 게 바뀐다.'
발신자는 또 '알 수 없음'이었다.
주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바꾼다고? 뭘?'
답장을 치려는데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배터리가 15%로 떨어졌다.
'망했다...'
주아는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해가 완전히 졌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일단... 잘 곳부터 찾아야겠다.'
주아는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골목을 지나 주택가로 들어갔다.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저녁 냄새가 났다.
'배고파...'
주머니에 동전이 몇 개 있었다. 편의점을 찾아야 했다.
골목 끝에 작은 슈퍼가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주하야!"
돌아봤다.
수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집 이쪽이야?"
주아는 말문이 막혔다.
수진이 주아 얼굴을 빤히 봤다.
"...너 설마 집 없어?"
주아는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수진이 주아 손을 잡았다.
"우리 집 가자. 엄마한테 말씀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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