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의 틈새, 조연으로 살아남기
주인공: 한서진
빙의 3일째.
한서진은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예언서를 펼쳤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3화. 아카데미 실습 중 C급 빌런 습격.'
그 문장 아래로, 선명한 글씨가 이어졌다.
'한서진, 강채원을 감싸다 사망.'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크게 뛰었다.
"음... 그러니까, 책에서는..."
중얼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예언서는 다른 사람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냥 낡은 공책처럼 보일 뿐.
'강채원.'
그 이름을 다시 읽었다.
A등급 전투형 능력자. 아카데미 1학년 수석.
서진은 고개를 들어 도서관 입구를 봤다.
마침 그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긴 생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교복 재킷은 어깨에만 걸친 채.
손엔 태블릿 PC. 이어폰을 낀 귀.
주변 학생들이 슬쩍슬쩍 쳐다봤다. 강산그룹 외동딸. 미래의 영웅.
채원은 그 시선들을 신경도 안 쓰는 듯 걸어갔다.
서진은 재빨리 예언서를 덮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사람을 구해야 해.'
예언서를 다시 펼쳤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3화 이후 내용.
'강채원, 3년 후 타락한 빌런으로 전락. 아이기스 본사 습격.'
글씨가 떨려 보였다.
아니, 손이 떨리고 있었다.
'구하면... 나도 살 수 있을까?'
채원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서진과의 거리, 약 10미터.
태블릿을 책상에 놓고 이어폰을 빼냈다.
서진은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어떻게 말을 걸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저기, 음... 그러니까..."
작게 중얼거렸다.
채원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서진은 화들짝 놀라 예언서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몇 초 후, 조심스럽게 책 위로 눈을 올렸다.
채원은 이미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안 되겠어. 일단 관찰부터.'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 사이로 몸을 숨기며 채원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넘기고 있었다.
전투 영상이었다. 빌런 토벌 실전 기록.
채원의 표정은 차갑고 집중되어 있었다.
서진은 책장에 기댄 채 그녀를 관찰했다.
'3년 후 타락.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예언서엔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결과만. 냉정한 문장들만.
채원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황급히 책장 뒤로 몸을 숨겼다.
등에 땀이 흘렀다.
"...스토킹?"
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낮았다.
서진은 숨을 참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책장을 돌아 나타난 채원.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서진을 내려다봤다.
"F등급 주제에 용기는 있네."
서진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게, 음..."
채원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시는 따라다니지 마. 경고는 한 번만 해."
그녀는 돌아서서 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은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책장에 손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망했어...'
---
그날 밤.
서진은 기숙사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예언서는 베개 밑에 숨겨뒀다.
'이틀 후. 실습.'
머릿속으로 예언서 내용을 되짚었다.
'C급 빌런 출현. 나는 채원을 감싸다 죽는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아프다고 하면 되잖아. 결석하면 안 죽어.'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근데 그럼 채원은?'
예언서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글씨는 선명했다.
페이지를 넘겼다.
3화 다음 장.
거기엔 없던 문장이 새로 생겨 있었다.
'한서진 결석 시, 강채원 단독 조우. 중상. 3년 후 타락의 시발점.'
손에서 책이 떨어질 뻔했다.
"미친..."
작게 욕이 나왔다.
이불을 걷어찼다.
일어나 앉았다.
'도망치면 더 꼬인다는 거잖아.'
예언서를 노려봤다.
글씨는 변하지 않았다.
냉정하고 확정적인 문장들.
서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하라고.'
---
다음 날 아침.
서진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잤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도서관 문을 밀고 들어섰다.
채원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이번엔 태블릿이 아니라 책을 읽고 있었다.
'전략 전술론 개론.'
서진은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예언서를 펼쳤다.
3화 부분을 다시, 또다시 읽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책에 항상 답이 있었어.'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갔다.
'C급 빌런, 그림자 조종 능력. 실습장 북쪽 구역 출현.'
'강채원, 단독 교전 시도. 한서진 개입.'
'한서진 사망.'
그 다음은 없었다.
"...
# 예언서의 틈새, 조연으로 살아남기 (전개부)
손가락이 멈췄다.
예언서 모서리가 희미하게 빛났다.
붉은색. 경고등처럼.
서진은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빛은 사라져 있었다.
'방금 뭐였지.'
심장이 빨라졌다.
책장을 넘겼다. 3화 다음 페이지.
거기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예언을 비틀수록, 대가는 커진다.'
"...뭔 개소리야."
작게 중얼거렸다.
도서관 안이 갑자기 좁게 느껴졌다.
채원이 책을 덮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실습복 차림.
'벌써?'
시계를 봤다. 오전 9시 40분.
실습은 10시부터였다.
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도 황급히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삐걱 소리를 냈다.
채원이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서진은 예언서를 가슴에 꼭 안았다.
채원의 눈썹이 좁혀졌다.
"또?"
한 단어.
차갑고 날카로웠다.
서진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목구멍이 말랐다.
"음... 그러니까, 나도 실습이..."
"북쪽 구역 아니잖아. F등급은 남쪽."
채원이 말을 자르고 돌아섰다.
서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긴 머리가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북쪽.'
예언서에 적힌 그 장소.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
실습장은 아카데미 뒤편 산자락에 있었다.
인공으로 조성된 폐건물 단지.
빌런 토벌 훈련용 시뮬레이션 구역.
서진은 남쪽 집결지에 섰다.
F등급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
담당 교수가 태블릿을 들고 출석을 불렀다.
"한서진."
"...네."
대답이 늦었다.
교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컨디션 괜찮아?"
"아, 네. 괜찮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북쪽을 봤다.
폐건물 사이로 채원의 조가 보였다.
A등급 학생들. 전투복 차림.
채원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담당 교관과 무언가 얘기 중.
'10시 15분. 빌런 출현.'
예언서 내용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지금은 9시 58분.
17분 남았다.
"자, 다들 조 편성대로 움직여. 남쪽 구역 C동부터 수색."
교수의 지시가 떨어졌다.
학생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서진은 뒤처졌다.
발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돼. 들키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무단 이탈. 징계. 최악의 경우 퇴학.
하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폐건물 그늘로 몸을 숨겼다.
북쪽 구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원의 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5명. 전부 A등급.
서진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예언서를 꺼냈다.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새 문장이 떠올랐다.
'10시 12분. 예정보다 3분 빠름.'
손이 떨렸다.
"...3분?"
시계를 봤다. 10시 9분.
3분 후.
숨이 막혔다.
북쪽 건물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여학생 목소리.
서진은 고개를 확 들었다.
건물 2층 창문이 박살났다.
유리 파편이 쏟아졌다.
검은 그림자가 창밖으로 튀어나왔다.
액체처럼 흐르는 형체.
'그림자 조종형.'
예언서대로였다.
아니, 3분 빨랐다.
학생 하나가 그림자에 휘감겨 끌려 들어갔다.
비명이 끊겼다.
서진은 달렸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F등급 주제에.
건물 입구에 도착했을 때, 채원이 나오고 있었다.
얼굴에 피가 튀어 있었다.
남의 피.
"왜 여기 있어."
채원이 서진을 봤다.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눈빛이 흔들렸다.
"음, 그러니까..."
서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건물 안에서 또 비명.
채원이 돌아서려는 순간, 서진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안 돼."
처음으로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채원이 팔을 뿌리쳤다.
"비켜. F등급이 끼어들 일 아니야."
그녀가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이 허공을 쥐었다.
'예언서엔 이렇게 안 나왔어.'
책을 펼쳤다.
글씨가 지워지고 새로 쓰였다.
'강채원, 단독 추격. 그림자 빌런 함정 유도.'
'한서진, 방관 시 채원 중상 확정.'
마지막 줄이 붉게 빛났다.
'개입 시, 생존 가능성 8%. 한서진 사망 가능성 92%.'
숫자였다.
처음 보는 형식이었다.
서진은 책을 덮었다.
손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들어가면 죽어. 안 들어가면 채원이 다쳐.'
건물 안에서 폭발음.
창문이 또 깨졌다.
채원이 벽에 부딪혀 나자빠졌다.
피가 입꼬리에서 흘렀다.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뻗어 나왔다.
서진은 그 장면을 봤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발이 움직였다.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
# 예언서의 틈새, 조연으로 살아남기 (위기-결말부)
복도 끝에 채원이 보였다.
벽에 기댄 채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기어왔다.
뱀처럼 꿈틀거렸다.
서진은 숨을 참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8%.'
예언서 숫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채원이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무릎이 꺾였다.
다시 주저앉았다.
"젠장..."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림자가 발목을 감았다.
채원이 끌려가기 시작했다.
"놔!"
그녀가 바닥을 긁었다.
손톱에서 피가 났다.
서진은 옆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책상을 들어 복도로 던졌다.
쾅!
책상이 그림자 위로 떨어졌다.
그림자가 움찔했다.
채원을 감은 힘이 약해졌다.
채원이 고개를 돌렸다.
"...너?"
서진은 대답 대신 또 다른 책상을 들었다.
팔이 후들거렸다.
F등급 체력으론 한계였다.
그림자가 방향을 틀었다.
서진을 향해 뻗어 나왔다.
"도망쳐, 바보야!"
채원이 소리쳤다.
서진은 책상을 던졌다.
그림자가 책상을 집어삼켰다.
산산조각 났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진은 뒤로 물러섰다.
등이 벽에 닿았다.
그림자가 눈앞까지 왔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손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죽는구나.'
머릿속이 이상하게 고요했다.
예언서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페이지가 펼쳐졌다.
새 문장이 떠올랐다.
'원한다면, 비틀 수 있다.'
'대가는—'
문장이 끊겼다.
예언서가 뜨거워졌다.
손바닥에 화상을 입는 것처럼 뜨거웠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책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
복도를 물들였다.
그림자가 빛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서진은 예언서를 들어 올렸다.
빛이 강해졌다.
그림자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금속이 긁히는 소리 같았다.
"이게... 뭐야..."
채원이 중얼거렸다.
서진도 몰랐다.
예언서가 저절로 페이지를 넘겼다.
빈 페이지에 글씨가 새겨졌다.
'능력 각성: 예언 개입. 제한 시간 30초.'
'생존 확률 8% → 34%.'
숫자가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41%. 53%.
서진은 그림자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빛이 그림자를 밀어냈다.
그림자가 복도 끝으로 몰렸다.
창문 쪽.
서진은 계속 걸었다.
다리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30초.'
머릿속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25초.
그림자가 창문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빛이 사라졌다.
예언서가 식었다.
서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채원이 다가왔다.
다리를 절뚝이며.
서진 앞에 섰다.
"그게 뭐야."
예언서를 가리켰다.
서진은 책을 가슴에 안았다.
"...공책."
"거짓말."
채원이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췄다.
"F등급이 그림자 빌런을 몰아낸다고? 말이 돼?"
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채원의 손이 예언서로 뻗어왔다.
서진은 책을 뒤로 뺐다.
"안 돼."
"왜?"
"...보이지 않을 거야. 너한텐."
채원의 눈썹이 좁혀졌다.
"무슨 소리야."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교수들이었다.
늦게 도착했다.
"학생들! 괜찮아?"
담당 교수가 달려왔다.
채원은 일어섰다.
서진을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돌아섰다.
"...나중에 얘기하자."
---
보건실.
서진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의사가 링거를 꽂았다.
"과로야. 며칠 쉬어."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가 나갔다.
보건실이 조용해졌다.
커튼 너머로 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다. 타박상뿐이에요."
다른 교수와 얘기 중이었다.
서진은 예언서를 꺼냈다.
베개 밑에 숨겨뒀던 것.
페이지를 펼쳤다.
3화가 새로 쓰여 있었다.
'한서진, 능력 각성. 강채원 구출 성공.'
'생존.'
그 밑에 4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내용이 없었다.
빈 페이지.
서진은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 붉은 글씨로 경고문이 떠올랐다.
'원래 죽을 운명을 비틀었다.'
'균형을 맞춰라.'
'그렇지 않으면—'
문장이 끊겼다.
다음 줄이 천천히 나타났다.
'대가는 그녀가 치른다.'
손에서 책이 떨어질 뻔했다.
"뭐?"
복도에서 비명이 터졌다.
여학생 목소리.
서진은 벌떡 일어났다.
링거 줄이 팔에서 뽑혔다.
피가 흘렀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커튼을 젖히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복도 끝.
채원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뭔가에 붙잡혀 있었다.
그림자.
아까 그 그림자가 채원의 목을 감고 있었다.
"채원!"
서진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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