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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파머: 미래 씨앗으로 역사를 바꾸다

약 18분

타임 파머: 미래 씨앗으로 역사를 바꾸다

주인공: 이준혁

# 타임 파머: 미래 씨앗으로 역사를 바꾸다


등이 먼저 땅을 찾았다.


이준혁은 눈을 뜨기도 전에 코끝으로 흙냄새를 맡았다. 화학비료 냄새 없는, 순수한 부엽토. 손가락을 움직이자 축축한 흙이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pH를 가늠했다. 6.2에서 6.5 사이. 벼과 작물에 최적이다.


"아이고, 이게 무슨..."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연구소가 아니었다. 타임캡슐 실험실도 아니었다. 사방이 황량한 밭이었다. 아니, 밭이었던 것. 갈라진 땅 사이로 말라죽은 조의 줄기가 바람에 덜컹거렸다. 멀리 움막 몇 채가 보였고, 연기 한 줄 없는 굴뚝이 하늘을 찔렀다.


허리춤의 가죽 파우치가 손에 잡혔다. 안에 든 유리병 다섯 개가 똑딱거렸다. 씨앗들. 그리고 특수용액 500ml. 실험 직전까지 들고 있던 것들이 그대로였다.


"배합 농도 0.3% 올렸다고... 시공간까지 튈 줄이야."


준혁은 한숨과 함께 웃었다. 웃다가 멈췄다. 저 멀리 한복도 아닌, 누더기를 두른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어기, 누구시게유?"


앞장선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물었다. 얼굴에 주름이 계곡처럼 패였다. 뒤에 선 젊은이들 눈빛이 날카로웠다. 굶주린 눈이었다.


"아, 저는... 먼 곳에서 온 농부입니다요. 길 잃어서 이리..."


"농부? 그 손에 흙 한 톨 안 묻은 게?"


젊은이 하나가 비웃었다. 준혁은 손을 내려다봤다. 실험실 장갑 자국만 하얗게 남은 손이었다. 서둘러 땅을 쥐었다.


"아이고, 이 땅이 참 기름지네유. 척 보니 알겠습니다. 여기, 3년 전엔 조 농사 잘됐제유?"


노인의 눈이 커졌다.


"어찌 그걸..."


"흙은 거짓말 안 합니다. 근데 요새 가뭄이제유? 땅이 목말라하네."


노인이 지팡이를 내렸다. 뒤의 젊은이들도 긴장을 풀었다.


"석촌 이장 박서방이라 하우. 맞소, 3년 전까진 그럭저럭 먹고살았는디... 요즘은 하늘이 돌아섰는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겄습니다."


준혁은 파우치를 쓸어 내렸다. 박서방의 시선이 따라왔다.


"저어, 씨앗 좀 있는디요. 신기한 것들이라..."


"씨앗?"


뒤에서 튀어나온 건 열두어 살쯤 된 아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 하지만 눈만은 반짝였다.


"소백아! 어른들 말씀하실 때..."


"씨앗이 뭔디유? 먹는 거유?"


준형이 픽 웃었다. 아이의 순진함이 1,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먹을 수도 있제. 근데 심으면 더 많이 먹을 수 있어."


"거짓말. 여그 땅에 뭘 심어도 안 나는디."


박서방이 한숨을 쉬었다.


"소백이 말이 맞소. 작년부터 뭘 심어도... 신라고 백제고, 전쟁만 하느라 하늘이 노한 것이제."


준혁은 무릎을 꿇고 땅을 쓸었다. 손가락으로 5센티 깊이를 팠다. 수분 함량 12%. 작물 발아 최저선이었다.


"흙은 거짓말 안 합니다. 노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목마를 뿐이제."


파우치에서 감자 씨앗 하나를 꺼냈다. 유전자 조작 3세대, 가뭄 저항성 극대화 품종. 발아율 98%, 단 특수용액 필수.


"이걸 심어볼라꼬요."


"그게 뭔디?"


"감자라 합니다. 석 달이면 이것보다 열 배는 큰 게 나옵니다요."


소백이 코웃음 쳤다.


"거짓말쟁이. 콩도 안 되는디 그게 되겄어유?"


준혁은 대답 대신 용액병을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햇빛에 반짝였다. 나노 촉매와 성장호르몬 복합체. 현대 기술의 정수. 그리고 재생산 불가능한, 단 500ml.


"이걸 타면 됩니다."


두 방울을 땅에 떨어뜨렸다. 씨앗을 묻었다. 흙을 덮었다. 박서방과 소백이 멍하니 지켜봤다.


"이제 사흘만 기다려보시제유."


"사흘?"


"예. 사흘이면 싹이 나올 겁니다요. 흙은 거짓말 안 하니께."


---


사흘 후, 소백이 비명을 질렀다.


"이장님! 이장님! 싹이! 진짜 싹이!"


준혁은 움막에서 뛰쳐나왔다. 심은 자리에 연두색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주변에 석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게 대체..."


"요상한 것이..."


준혁은 새싹을 어루만졌다. 성장 속도 정상. 엽록소 농도 최적. 완벽했다.


"보셨제유? 흙은 거짓말 안 합니다요."


박서방이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이 땅에서... 정녕 이런 게..."


"더 심어야겄습니다. 온 마을이 먹을 만큼."


준혁은 파우치를 열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땅콩, 목화. 다섯 종류. 각각 50립씩. 그리고 용액 500ml.


계산이 돌아갔다. 1립당 용액 2ml. 총 250립 파종 가능. 500ml로는 두 번 심을 수 있다. 수확량은... 현대 기준 3,000%. 하지만 여기는 7세기. 비료도 없고 관개도 원시적이다. 그래도 300%는 나온다.


"300%면..."


중얼거리다 멈췄다. 300%는 석촌만 먹여 살리는 게 아니었다. 신라 서부 전선 병력 5,000을 먹여 살린다. 백제와의 전력 균형이 무너진다. 삼국통일 시기가 당겨진다. 아니, 아예 역사가 바뀐다.


"왜 그러시게유?"


소백이 준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제. 자, 밭을 일궈야겄어라."


---


두 달이 흘렀다.


준혁은 밭 한가운데 서서 옥수수를 올려다봤다. 2미터 높이. 이삭이 세 개씩. 알이 꽉 찬 게 손으로 만져도 느껴졌다.


"수확량 312%..."


계산기를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원래 예상은 280%였다. 이건 역사 테러 수준이었다.


"이건... 이건 역사 테러야."


"뭐라고유?"


뒤에서 소백이 침을 흘리며 옥수수를 쳐다봤다. 두 달 사이 얼굴에 살이 올랐다. 감자 수확 후 석촌 사람들 모두 그랬다.


"아무것도 아니라. 소백아, 이거 하나 따볼래?"


"진짜유?"


소백이 이삭을 잡아당겼다. 뚝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껍질을 벗기자 노란 알이 빼곡했다.


"우와... 이게 다 먹는 거유?"


"그럼. 쪄 먹어도 되고, 구워 먹어도 되제."


소백이 옥수수를 껴안았다. 준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먼지가 피어올랐다. 말발굽 소리. 많이.


"소백아, 마을로 뛰어가라. 이장님께 손님 온다고."


"손님?"


"빨리!"


소백이 뛰어갔다. 준혁은 파우치를 확인했다. 용액 250ml 남음. 씨앗 절반 소진.


말들이 멈춰 섰다. 갑옷 입은 무사 스물. 앞장선 이는 삼십 대 중반, 눈빛이 칼날이었다.


"그대가 석촌의 요상한 농부라는 자인가?"


"예. 이준혁이라 합니다요."


"김유신이오. 신라 장군."


준혁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김유신. 삼국통일의 영웅. 역사책에서만 보던 이름.


"씨앗을 내놓으시오."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사들이 밭을 포위했다.


준혁은 천천히 용액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병 입구를 입에 가져갔다.


"이걸 마시면 죽습니다. 저도요."


김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협박인가?"


"아닙니다요. 사실입니다. 이 물 없이는 씨앗이 절대 안 트거든요. 근데 이걸 마시면... 사람도 죽제."


거짓말이었다. 용액은 무해했다. 하지만 김유신은 몰랐다.


"그럼 그 물을 내놓으면 되지 않소?"


"500ml밖에 없습니다. 더 만들 수도 없고요. 이걸로 심을 수 있는 게 고작..."


준혁은 계산했다. 진실의 일부만.


"밭 스무 개 정도제유."


김유신이 말에서 내렸다. 준혁에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그대는 누구시오? 당나라 첩자? 백제 요술쟁이?"


"그냥... 농부입니다요. 흙 사랑하는."


"거짓말."


칼이 목에 닿았다. 차가웠다.


"진실을 말하시오.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대신 말하게 하겠소."


준혁은 용액병을 쥐었다. 손이 떨렸다. 쏟아버릴까? 그럼 모든 게 끝난다. 역사 개입도, 딜레마도.


하지만 소백의 얼굴이 떠올랐다. 옥수수를 껴안던 그 아이. 박서방의 주름진 미소.


"흙은... 거짓말 안 합니다요."


준혁은 병을 내밀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석촌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목에서 칼이 떨어졌다.


"그리고?"


"씨앗 심는 건 제가 직접 합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요."


김유신이 웃었다. 처음으로.


"재미있는 농부로군."


# 후반부 (전-결)


김유신은 용액병을 받아들지 않았다.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오. 명령을 내리는 것이오."


준혁의 손이 굳었다. 김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이 밭의 수확물, 전부 서라벌로 옮긴다. 씨앗과 그 요상한 물도 마찬가지. 그대도 따라오시오."


"안 됩니다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준혁은 한 걸음 물러서지 않았다.


"이 씨앗은... 잘못 쓰면 나라가 망합니다."


김유신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건 장군의 일이오. 농부는 밭이나 갈면 되오."


무사 둘이 준혁의 팔을 잡았다. 용액병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안 돼! 그거 흔들면—"


"조용히 하시오."


김유신이 병을 들어 햇빛에 비췄다. 투명한 액체가 반짝였다.


"이것으로 신라의 군량을 백 배 늘릴 수 있다면, 백제는 한 해 안에 무너진다. 고구려도 그다음이오."


"그게 문제라니까요!"


준혁이 소리쳤다. 무사들이 칼을 뽑았지만 김유신이 손을 들어 막았다.


"말해보시오. 무엇이 문제요?"


준혁은 숨을 골랐다. 말해야 할까? 역사 개입을? 나비효과를? 미래에서 왔다는 걸?


"...씨앗이 너무 잘 자랍니다요."


"그게 문제란 말이오?"


"예. 너무 잘 자라면... 땅이 망가집니다요. 영양분을 다 빨아먹어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진실이기도 했다. 윤작 없이 계속 심으면 지력이 고갈된다.


김유신이 웃었다.


"그럼 다른 땅에 심으면 되지 않소?"


"신라 땅이 얼마나 된다고..."


"신라 땅만 쓰란 법이 있소?"


준혁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김유신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백제 땅. 고구려 땅. 점령지에 심겠다는.


"장군님, 그건..."


"끌고 가라."


무사들이 준혁을 끌었다. 준혁은 발버둥쳤다.


"소백아! 이장님!"


마을 입구에서 소백이 울고 있었다. 박서방이 아이를 붙들고 있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땅에 엎드려 있었다.


"선생님!"


소백의 외침이 멀어졌다. 준혁은 말 위에 던져졌다. 밭이, 옥수수가, 석촌이 멀어졌다.


---


서라벌 궁궐 뒤편 별채.


준혁은 사흘째 갇혀 있었다. 방 한 칸. 창문 없음. 밥은 하루 두 번. 용액병은 이미 빼앗겼다.


문이 열렸다. 김유신이 아니었다. 젊은 관리, 삼십 초반. 눈빛이 날카로웠다.


"이준혁."


"...예."


"나는 김흠순. 조정의 명을 받들어 그대를 심문하러 왔소."


심문. 준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앉으시오."


김흠순이 방바닥에 종이를 펼쳤다. 붓을 꺼냈다.


"첫째, 그대는 어디서 왔소?"


"...석촌입니다요."


"거짓말. 석촌 사람 중 그대를 아는 이가 없소."


준혁은 입을 다물었다.


"둘째, 씨앗은 어디서 구했소?"


"...주웠습니다요."


"주웠다? 어디서?"


"산에서..."


"거짓말. 산에서 주운 씨앗이 두 달 만에 사람 키만큼 자랄 리 없소."


김흠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셋째, 그 요상한 물의 비법을 말하시오."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못 만듭니다요. 저도 물라요."


"모른다?"


"예. 그냥... 있던 걸 쓴 겁니다요."


김흠순이 붓을 내려놨다.


"고문을 원하시오?"


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문해도 못 만드는 건 못 만듭니다요."


"그럼 쓸모없는 농부로군."


김흠순이 일어섰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멈췄다.


"내일 김유신 장군께서 백제 국경으로 출정하신다. 그대의 씨앗을 가지고. 점령한 백제 땅에 심을 것이오."


준혁이 벌떡 일어섰다.


"안 됩니다!"


"왜?"


"그건... 그건 전쟁이 너무 빨리 끝나버립니다요!"


김흠순이 돌아봤다.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게 문제요?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게?"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준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역사가 바뀐다고? 삼국통일이 100년 앞당겨진다고? 그 이후는? 당나라와의 관계는? 발해는? 고려는?


"...사람들이 죽습니다요."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건 당연하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많이 죽어요. 씨앗 때문에."


김흠순의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뜻이오?"


준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씨앗이 너무 잘 자라면... 백제 사람들도 배부르게 됩니다요. 그럼 백제 군사들도 힘이 세집니다요. 전쟁이 길어져요. 더 많이 죽어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김흠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씨앗을 천천히 퍼뜨려야 합니다요. 신라 안에서만. 조금씩."


김흠순이 턱을 쓸었다.


"재미있는 주장이오. 하지만..."


문이 벌컥 열렸다. 김유신이었다.


"흠순, 나가보시오."


"예, 장군님."


김흠순이 나갔다. 김유신이 준혁 앞에 섰다.


"내일 출정한다."


"...들었습니다요."


"그대도 함께 간다."


준혁의 심장이 멎었다.


"예?"


"씨앗을 심는 건 그대가 직접 한다고 했지. 조건을 들어주겠소."


김유신이 용액병을 꺼냈다. 준혁에게 내밀었다.


"백제 땅에 심으시오. 직접."


준혁은 병을 받지 않았다.


"...거부하면요?"


"석촌 사람들이 대신 심는다. 그대의 방법대로."


"그 사람들은 모릅니다요. 어떻게 심는지."


"그럼 배우겠지. 죽을 때까지."


준혁의 손이 떨렸다. 병을 받았다.


---


백제 국경. 탄현.


준혁은 말 위에서 전장을 내려다봤다. 신라군 3,000. 백제군 2,000. 화살이 빗발쳤다. 비명이 들렸다.


"저기."


김유신이 말을 몰았다. 전장 옆, 넓은 밭. 황폐했지만 땅은 기름졌다.


"저 밭에 심으시오."


"...지금요?"


"지금."


준혁은 말에서 내렸다. 파우치를 열었다. 감자 씨앗 50립. 용액 100ml.


손이 떨렸다. 씨앗 하나를 땅에 묻었다. 용액을 떨어뜨렸다. 2ml.


비명 소리가 가까워졌다. 백제 군사 하나가 칼을 들고 달려왔다. 신라 무사가 막았다. 칼이 부딪쳤다.


준혁은 두 번째 씨앗을 묻었다. 용액을 떨어뜨렸다.


'이게 맞나?'


세 번째. 네 번째.


'이게 역사를 바꾸는 건가?'


열 번째. 스무 번째.


'아니면 원래 이래야 하는 건가?'


쉰 번째 씨앗을 묻었다. 용액병이 반쯤 비었다.


김유신이 말에서 내렸다.


"끝났소?"


"...예."


"수고했소."


김유신이 칼을 뽑았다. 준혁의 목에 댔다.


"이제 필요 없소."


준혁의 눈이 커졌다.


"예?"


"씨앗 심는 법은 봤소. 용액도 얼마나 쓰는지 봤소. 이제 그대는 쓸모없소."


칼이 목을 파고들었다. 피가 흘렀다.


"잠깐! 용액 만드는 법은요!"


"없어도 되오. 남은 용액으로 밭 열 개는 더 심을 수 있소."


준혁은 파우치를 움켜쥐었다.


"이 안에 씨앗이 더 있습니다요! 다른 종류!"


김유신의 손이 멈췄다.


"...다른 종류?"


"예! 고구마, 옥수수, 땅콩, 목화! 목화는요, 옷을 만들 수 있어요! 무명보다 백 배 좋은!"


김유신이 칼을 거뒀다. 파우치를 빼앗았다. 열었다.


씨앗 네 봉지. 용액 150ml.


"이게 전부요?"


"예..."


김유신이 웃었다.


"그럼 이것만 있으면 되는군."


칼이 다시 목에 닿았다.


"잠깐!"


준혁이 소리쳤다.


"용액이 떨어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떨어질 때까지 쓰면 되지."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신라가 이미 천하를 통일했겠지."


칼이 힘을 받았다. 준혁은 눈을 감았다.


"목화 씨앗은 용액 없이도 싹틉니다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김유신의 손이 또 멈췄다.


"...뭐라고?"


"목화요! 용액 없이도 자라요! 근데 심는 법이 달라요! 제가 직접 해야 해요!"


김유신이 파우치를 뒤졌다. 목화 씨앗 봉지를 꺼냈다.


"이게 목화?"


"예! 그거 심으면 옷감이 나옵니다요! 명주보다 좋은!"


김유신이 씨앗 하나를 땅에 던졌다. 발로 밟았다.


"심었소. 싹트는지 보겠소."


"안 돼요! 그렇게 심으면 안 돼요!"


"그럼 어떻게 심소?"


준혁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화는 용액이 필요했다. 거짓말이 들통났다.


김유신이 칼을 들어올렸다.


그때였다.


땅이 흔들렸다. 아니, 땅에 묻은 씨앗 하나가 꿈틀거렸다.


김유신이 발을 비켰다. 씨앗에서 싹이 터져 나왔다. 초록빛. 떡잎. 순식간에 5cm.


"이게..."


김유신의 얼굴이 굳었다.


준혁도 얼어붙었다.


'용액을 안 썼는데?'


목화 싹이 자랐다. 10cm. 20cm. 잎이 펼쳐졌다.


준혁은 파우치를 열었다. 목화 씨앗 봉지를 확인했다.


봉지 안쪽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까는 없던 글씨.


**"2차 세대 종자. 자가 발아 가능. 용액 불필요."**


준혁의 손에서 봉지가 떨어졌다.


김유신이 준혁을 돌아봤다.


"그대는 도대체..."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여럿이.


신라 무사 하나가 달려왔다.


"장군님! 백제군이 후퇴합니다!"


"뭐?"


"그리고... 이상한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당나라 옷을 입었는데, 말이 신라말도 백제말도 아닙니다!"


김유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준혁은 목화 싹을 내려다봤다. 30cm까지 자란 줄기. 그리고 줄기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봉오리.


꽃봉오리 안에서 무언가 빛났다. 금속성. 준혁은 손을 뻗었다.


꽃봉오리가 터졌다. 안에서 작은 캡슐이 떨어졌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렸다.


용액이었다.


준혁은 캡슐을 집어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냄새를 맡았다.


똑같았다. 특수 발아용액과.


"이게... 어떻게..."


김유신이 칼을 내렸다. 준혁의 멱살을 잡았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사람이요, 귀신이요!"


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낯선 언어. 하지만 준혁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대 한국어였다.


"타겟 확인. 이준혁 박사. 회수 작전 개시."


준혁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다섯 명. 얼굴에 마스크. 손에 든 건...


총이었다.


21세기 전

총 8,770자 · 약 18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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