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그녀 사이 2화: 꽃과 균열
주인공: 이훈남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훈남은 카페 유리창 너머로 그 장면을 봤다. 붉은 장미와 백합이 섞인, 꽤 공들인 티가 나는 꽃다발. 그걸 건네는 남자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받는 미미의 얼굴은 창백했다.
'뭐지?'
훈남의 손이 카페 문 손잡이에서 멈췄다. 유럽에서 돌아온 지 사흘째. 미미와는 오늘 처음 만나기로 했다. '돌아오면 밥 사줄게'라던 그녀의 메시지가 아직 핸드폰에 남아있었다.
남자가 웃었다.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미소. 미미는 꽃다발을 받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두 손을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순간 창밖으로 향했고, 훈남과 눈이 마주쳤다.
미미의 눈이 커졌다. 입술이 '훈남아'라는 모양을 만들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리창 하나가 이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훈남은 한 걸음 물러났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30대 초반쯤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넥타이가 반듯했고 구두가 반짝였다. 훈남을 보는 그의 표정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얼어붙었다.
미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다발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훈남은 돌아섰다.
"훈남아! 잠깐만!"
미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지만 훈남의 발은 이미 인도를 벗어나 있었다. 강남대로의 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배기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신호등이 빨갛게 켜졌다가 꺼졌다.
BMW 키를 꺼내 쥐었을 때,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 떨려?'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백미러로 카페를 봤다. 미미가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제지하는 손짓이었다.
훈남은 액셀을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신호를 두 개 지나쳤다. 노란불에 진입했다가 빨간불로 바뀌는 걸 알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클랙슨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한강대교 진입로가 나타났다. 훈남은 핸들을 꺾었다.
강변북로의 아스팔트가 햇빛에 반짝였다. 한강이 오른편으로 펼쳐졌다. 수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유람선 한 척이 느릿하게 물살을 가르며 지나갔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훈남의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꽃다발. 장미. 정장 입은 남자.'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미미의 표정. 당황. 아니, 놀람? 최책감?'
스티어링 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BMW 특유의 묵직한 핸들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평소 같으면 기분 좋은 감촉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차가웠다.
핸드폰이 울렸다. 조수석에 던져둔 폰의 화면이 켜졌다. '미미' 두 글자가 떴다. 훈남은 고개를 돌렸다. 한강을 봤다. 전화는 계속 울렸다.
여섯 번째 신호음이 끝나고 진동이 멈췄다.
3초 뒤, 다시 울렸다.
이번엔 받았다.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훈남아, 어디야?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미미의 목소리가 숨이 차 있었다. 뛰었나보다.
"그냥. 드라이브."
"드라이브? 갑자기 왜 가버린 거야? 나 지금 택시 잡아서 가는 중인데—"
"올 필요 없어."
침묵.
미미의 호흡 소리만 스피커로 새어나왔다. 배경음으로 택시 엔진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거, 오해야."
"오해?"
"응. 민호, 그러니까 아까 그 사람. 옛날에 잠깐 만났던—"
"됐어."
훈남은 말을 잘랐다.
"됐다는 게 무슨 소리야?"
"설명 안 해도 돼. 네 사생활이잖아."
"사생활? 지금 그게 무슨..."
미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난 건지, 억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훈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을 내렸다. 강바람이 후드득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린내와 풀냄새가 섞여있었다.
"미안.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훈남아."
"나중에 전화할게."
끊었다.
핸드폰이 즉시 다시 울렸지만 훈남은 전원을 껐다. 화면이 깜빡이다 꺼졌다. 갑자기 차 안이 조용해졌다.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았다.
'내가 뭐 하는 거지?'
훈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화난 거야? 배신감? 질투?'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마치 유럽에서 짐을 잔뜩 싸왔는데, 그게 전부 쓸모없는 물건들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은 기분.
양양 바다가 떠올랐다. 서핑보드 위에 누워 수평선을 바라보던 순간들.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던, 온전히 혼자였던 시간들. 그때가 좋았다. 편했다.
'그런데 왜 돌아왔지?'
프라하의 밤거리도 떠올랐다. 석양에 물든 카를교 위에서 찍은 셀카. 인스타에 올렸을 때 미미가 제일 먼저 좋아요를 눌렀었다. '부럽다ㅠㅠ 나도 데려가' 댓글까지 달았었다.
그때 훈남은 웃으면서 답장을 썼었다. '다음엔 같이 가자.'
'다음.'
그게 언제일까? 정말 그런 다음이 오긴 할까?
성산대교를 지나 반포 쪽으로 접어들었다. 강변에 사람들이 보였다. 돗자리를 펴고 앉은 커플, 자전거를 타는 가족, 강아지와 산책하는 노인. 모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훈남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고 창문을 완전히 내렸다. 강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5월의 바람은 따뜻하면서도 시원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부셨다.
'나는 뭘 원하는 거지?'
질문은 간단했지만 답은 복잡했다.
자유? 그건 이미 가지고 있었다. 취직 3년 차, 연봉 5천. BMW 3시리즈를 현금으로 샀고, 양양에 서핑 갈 때마다 보드를 트렁크에 싣고 달렸다. 유럽 배낭여행도 다녀왔다.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 미미를 만난 지 6개월. 소개팅으로 시작했다. 강남 어느 루프탑 바에서. 그녀는 마티니를 마셨고 훈남은 맥주를 마셨다. 대화가 잘 통했다. 아니,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했다?'
훈남은 고개를 저었다.
미미는 좋은 사람이었다. 밝고, 적극적이고, 예뻤다. 훈남이 유럽 간다고 했을 때도 응원해줬다. '다녀와, 사진 많이 찍어와' 했다. 집착하지 않았다.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왜.
왜 아까 그 꽃다발이 눈에 밟히는 걸까?
왜 그 남자의 정장 차림이 자꾸 떠오르는 걸까?
'나보다 나이 많아 보였어. 안정적으로 보였고. 꽃도 들고 왔고.'
훈남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봤다. 청바지에 후드티. 발목에 모래가 아직 묻어있는 운동화. 유럽에서 돌아온 지 사흘인데 아직 짐도 다 안 풀었다. 서핑보드는 여전히 거실 한쪽에 기대져 있었다.
'나는 꽃 같은 거 사본 적도 없지.'
웃음이 났다. 허탈한 웃음.
핸드폰 전원을 켰다. 부팅되는 동안 강물을 봤다. 물결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외로웠다.
메시지가 쏟아졌다.
미미가 열세 통. 준서 선배가 두 통. 어머니가 한 통.
미미의 메시지들을 열었다.
'훈남아 제발 전화 받아'
'오해야 진짜'
'민호는 옛날 남자친구인데 헤어진 지 1년 넘었어'
'오늘 갑자기 나타난 거야'
'나도 당황했어'
'꽃 받은 거 아니야 거절했어'
'제발 만나자'
'어디야?'
마지막 메시지는 10분 전.
'알았어. 진정할 시간 필요하면 줄게. 근데 오늘 안에 꼭 한 번만 통화하자. 응?'
훈남은 핸드폰을 조수석에 다시 던졌다.
준서 선배의 메시지를 열었다.
'야 미미한테 연락 왔는데 너 어디야?'
'걔 진짜 억울해하던데. 한 번 얘기는 들어봐라'
선배. 회사 입사 동기였지만 나이는 다섯 살 많았다. 결혼 2년 차. 아이 하나. 강남 아파트 전세 살이. 출퇴근 지옥을 견디며 살고 있었다.
그 선배가 가끔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혼자 사는 게 좋긴 한데, 외롭긴 해.'
훈남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을 봤다. BMW 천장은 깨끗했다. 먼지 하나 없었다.
'나는 외롭지 않은데.'
스스로에게 말했다.
'진짜?'
또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강물 냄새가 더 짙어졌다. 어디선가 치킨 굽는 냄새가 났다. 배가 고팠다. 미미와 먹으려고 했던 저녁. 이태원의 파스타 집. 예약까지 해뒀었다.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미미의 번호를 눌렀다. 한 번 신호가 가기도 전에 바로 받았다.
"훈남아!"
"응."
"...괜찮아?"
"모르겠어."
솔직했다.
침묵이 흘렀다. 길지 않은 침묵이었지만 무거웠다.
"만날 수 있어?"
미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훈남은 강물을 봤다. 유람선이 또 한 척 지나가고 있었다. 배 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다들 웃고 있었다.
"...어디서?"
"어디든. 네가 편한 곳."
훈남은 잠시 생각했다.
"한강. 반포 쪽 둔치."
"알았어. 30분 안에 갈게."
끊었다.
훈남은 차에서 내렸다. 문을 잠그고 둔치 쪽으로 걸어갔다. 풀냄새가 났다. 누군가 치킨을 먹다 버린 봉지가 바람에 굴러갔다.
벤치에 앉았다. 강물을 봤다. 물은 계속 흘렀다.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자유와 사랑.'
누군가 그랬었다. 둘 다 가질 순 없다고.
'정말?'
훈남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지금 가슴 한쪽이 무겁다는 것. 그리고 그 무게가 싫지만은 않다는 것.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문이 열리고 미미가 내렸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훈남은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워졌다. 숨을 헐떡이며 훈남 앞에 섰다.
"미안해."
미미가 먼저 말했다.
훈남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눈이 붉었다. 울었나보다.
"뭐가."
"놀라게 해서. 오해하게 해서."
훈남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미미가 그의 옆에 앉았다. 가까웠다. 향수 냄새가 났다. 익숙한
# 후반부
향수. 처음 만난 날도 이 향수였다.
"민호는 1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야."
미미가 강물을 보며 말했다.
"3년 사귀었어. 결혼 생각도 했고."
훈남의 턱이 굳었다.
"근데 헤어졌어. 내가 차였어."
"..."
"민호는 완벽했어. 좋은 회사 다니고, 집도 있고, 부모님도 좋으시고.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
미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숨이 막혔어. 하루하루가 계획이고, 스케줄이고, 예정된 미래였어.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애 낳고, 어느 아파트 사고. 다 정해져 있었어."
훈남은 여전히 침묵했다.
"어느 날 내가 물어봤어. '우리 여행 가면 안 돼?' 그랬더니 민호가 그랬어. '내년 휴가 때 스페인 가기로 했잖아. 벌써 항공권 끊었는데?' 난 즉흥적으로 지금 떠나고 싶었는데."
미미가 훈남을 돌아봤다.
"그날 깨달았어. 나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어. 민호는 이해 못 했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울었어."
훈남의 주먹이 쥐어졌다.
"아무것도 잘못 안 했어. 민호는 완벽했어. 근데 그게 문제였어."
미미가 훈남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러다 너를 만났어. 유럽 간다고 하면 '잘 다녀와' 해주는 사람. 서핑 간다고 하면 같이 가자는 사람. 계획 없이 드라이브하자는 사람."
"미미야."
"응?"
"근데 오늘 그 사람이 꽃 들고 왔잖아."
미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거절했어."
"정말?"
"응."
훈남은 그녀의 눈을 봤다. 진심이 보였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무거웠다.
"민호가 뭐래?"
"다시 시작하자고. 자기가 변했대. 더 자유롭게 살겠대."
"믿어?"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안 변해. 아니, 변하긴 하는데 오래 걸려."
바람이 불었다. 미미의 머리카락이 훈남의 어깨에 닿았다.
"나는 거절했어. 너를 만나면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됐거든."
"뭔데?"
"자유. 근데 혼자가 아닌 자유."
훈남이 손을 빼려 했다. 미미가 더 세게 잡았다.
"훈남아, 나 너 좋아해. 진심이야."
"미미야..."
"자유로운 너니까 좋은 거야. 계획 없는 너니까 좋은 거야."
훈남은 손을 뿌리쳤다.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미미가 얼어붙었다.
"뭐?"
"나 지금 아무것도 없어. 차는 겨우 할부로 뽑았고, 집도 월세고, 통장엔 삼백도 없어."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훈남의 목소리가 커졌다. 옆 벤치의 커플이 쳐다봤다.
"민호는 꽃 사들고 왔어. 정장 입고, 좋은 차 몰고. 나는? 후드티 입고 모래 묻은 신발 신고. 이게 자유야? 이건 그냥 애송이야."
"훈남아..."
"나도 겁나. 나도 불안해.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어. 근데 다른 삶은 숨이 막혀."
미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럼 우린?"
훈남은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강물 소리만 들렸다. 유람선의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안해."
훈남이 일어났다.
"나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뭐가 준비가 안 됐는데?"
미미가 울먹이며 물었다.
"모르겠어. 근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겁쟁이."
미미가 쏘아붙였다.
"자유 운운하면서 정작 사랑은 겁나는 거잖아."
훈남의 발이 멈췄다.
"사람 하나 제대로 사랑하는 것도 용기야. 근데 넌 그것도 무서운 거지?"
훈남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무너질 것 같았다.
"미안."
다시 걸었다. 미미의 흐느끼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계속 걸었다. 차까지 왔다.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에 미미가 보였다. 벤치에 앉아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맞나?'
알 수 없었다.
액셀을 밟았다. 차가 움직였다. 한강대교를 건넜다. 불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라디오를 켰다. 발라드가 흘렀다. 껐다.
핸드폰이 울렸다. 미미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소라였다.
훈남은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또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훈남씨, 미미 괜찮아요? 민호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던데...'
훈남은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졌다.
'민호 오빠라고 했네.'
웃음이 났다. 비참한 웃음.
소라. 미미의 친구. 소개팅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 그날 민호 얘기를 했었다. '미미 전 남자친구 진짜 스펙 좋았는데 미미가 차버렸어. 미친 거 아니야?'
그때는 웃었었다. '그럼 나한텐 기회네' 하면서.
지금은 웃을 수 없었다.
'민호가 다시 나타났다는 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미미가 아직도 그에게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때였다.
백미러에 불빛이 비쳤다. 너무 가까웠다. 차 한 대가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뭐야."
속도를 높였다. 뒤 차도 속도를 높였다.
이상했다.
신호에 걸렸다. 멈췄다. 뒤 차도 멈췄다.
백미러로 봤다.
벤츠였다. E클래스. 검은색.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정장 차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민호였다.
두 사람의 눈이 백미러 너머로 마주쳤다. 민호의 표정은 단호했다. 분노도, 적의도 아니었다. 그냥 단호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훈남은 액셀을 밟았다. 민호의 차도 따라왔다.
강변북로로 진입했다. 차선을 바꿨다. 민호도 바꿨다.
'뭐 하는 거야 이 사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았다.
"이훈남씨?"
낮은 목소리. 남자 목소리.
"...누구세요?"
"민호요. 정민호."
숨이 멎었다.
"지금 앞에 가시는 거 맞죠? BMW."
"...어떻게."
"미미한테 들었어요. 차 색깔까지."
훈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깐 차 세우고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를."
"미미 얘기요."
"저 바빠서요."
끊으려는데 민호가 말했다.
"미미가 울고 있어요. 지금."
훈남의 손이 멈췄다.
"한강 둔치에서 혼자 울고 있어요. 당신 때문에."
"...그건."
"나도 당신 욕하려고 전화한 거 아니에요. 그냥 얘기 좀 하자는 거예요."
훈남은 핸들을 꽉 쥐었다.
"5분만요. 차 세워요."
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탁하는 것 같았다.
훈남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뒤에서 민호의 벤츠도 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창문을 두드렸다.
훈남은 창문을 내렸다.
민호가 서 있었다. 정장 차림. 넥타이는 풀려 있었다. 얼굴은 지쳐 보였다.
"내려요."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요?"
"아니요. 제대로 얘기해야죠."
훈남은 차에서 내렸다. 두 남자가 마주 섰다.
민호가 먼저 말했다.
"미미 사랑해요?"
직구였다.
훈남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으면 놔줘요."
"...뭐라고요?"
"사랑하는지도 모르면서 붙잡고 있지 말라고요."
민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나는 미미 3년 사귀었어요. 진심으로 사랑했고, 결혼하려고 했어요. 근데 차였어요."
"알아요."
"뭘 알아요? 그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민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1년 동안 잊으려고 했어요. 근데 안 됐어요. 그래서 다시 찾아갔어요. 변하겠다고, 미미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근데 미미는 거절했잖아요."
"당신 때문이에요!"
민호가 소리쳤다.
"당신이 없었으면 미미는 돌아왔을 거예요!"
훈남은 한 발 물러섰다.
"근데..."
민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도 이제 알아요. 미미 마음이 당신한테 있다는 거."
"..."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 미미 사랑해요?"
훈남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모르겠어요."
민호가 비웃었다.
"겁쟁이네요."
"뭐라고요?"
"나보다 어리면서 더 비겁하네요."
훈남의 주먹이 쥐어졌다.
"나는 최소한 미미한테 확실했어요. 사랑한다고,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근데 당신은?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옆에 두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요?"
민호가 한 발 다가섰다.
"당신 자유 좋아하잖아요? 그럼 미미도 자유롭게 해줘요. 확신 없으면 놔줘요."
훈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민호가 돌아섰다. 차로 걸어갔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봤다.
"오늘 자정까지 생각해봐요. 미미 사랑하는지."
"왜 자정까지?"
민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죠. 당신이 확신 없으면."
차 문이 닫혔다. 시동이 걸렸다. 벤츠가 떠났다.
훈남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미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