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각본
주인공: 최상현
"어이, 최상현."
책상에 발을 걸치고 있던 김우람이 턱짓을 했다.
"담배 하나 사와라."
교실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또 시작이네.'
새 학기 첫날부터 이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아 알았어..."
책상 서랍에서 지갑을 꺼내는 손이 느릿했다. 만원짜리 한 장이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
"빨랑 갔다 와라.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김우람이 씹던 껌을 짝짝 소리 내며 말했다. 그 옆에 있던 정태호가 킥킥 웃었다.
교실을 나서는데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반 애들 몇몇이 힐끗거리다 눈을 돌리는 게 보였다.
'누구 하나 말리는 새끼가 없네.'
편의점까지 가는 길,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세어보려다 그만뒀다. 세봤자 뭐가 달라지나.
편의점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알바생이 힐끗 쳐다봤다.
"저... 이거 하나요."
담배 진열대를 가리키며 카운터 앞에 만원을 내밀었다. 알바생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학생이지? 신분증 있어?"
"아... 그게..."
없다고 하기도 뭣하고 있다고 하기도 뭣했다. 말끝이 흐려졌다.
"학생이면 못 팔아. 미안한데 그냥 가."
'아, 씨.'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는데 등이 뜨거웠다.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이 우습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걸 뭐라고 설명하냐.'
교실로 돌아가자 김우람이 먼저 물었다.
"어디 있노?"
"신분증 달라 그래서... 못 샀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우람 표정이 굳었다.
"핑계 대지 말고."
"진짜야, 진짜 안 팔아준다니까..."
"됐고. 이따 학교 끝나고 레몬 피시방 뒤로 와라."
그 말을 남기고 김우람은 자리로 돌아갔다. 정태호가 옆에서 뭐라고 속닥거리자 둘이 낮게 웃었다.
'또 저 골목이네.'
수업 시간 내내 그 골목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칠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과 후 골목은 이미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벽에 붙어 담배를 태우던 김우람이 이쪽을 발견하고 씩 웃었다.
"핑계 댄다고 봐줄 거 같았나?"
"아니 진짜 신분증 없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이 얼얼했다.
짝, 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울렸다.
'맞았네.'
머리가 잠깐 멍했다. 정태호가 옆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사오라고. 알겠나?"
"...어."
"뭐라고?"
"아 알았어."
김우람이 피우던 담배를 던지듯 건넸다.
"이거나 태워라. 처음이지?"
주변 눈치를 살피다 담배를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라이터 불이 붙는 순간 목이 매캐하게 타올랐다. 기침이 튀어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김우람과 정태호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켁켁대는 거 봐라, 존나 웃기네."
'웃어라, 실컷.'
연기를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건 담배 연기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골목을 나와 혼자 걷는 길, 뺨이 여전히 얼얼했다. 입 안에서 씁쓸한 맛이 가시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머릿속으로 오늘 당한 일을 세기 시작했다. 담배 심부름 실패, 뺨 맞은 거, 강제로 담배 태운 거. 이번 학기 들어 벌써 몇 개나 쌓였는지 헤아리다 그만뒀다. 세어봤자 늘어나기만 하는 목록이었다.
'싸워서 이길 수 있나.'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김우람 팔뚝은 최상현 두 배는 됐고, 정태호까지 붙으면 답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주였나, 김우람이 복도 끝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던 모습. 평소처럼 큰 소리로 떠들던 애가 그때만큼은 목소리를 낮추고 벽에 붙어 있었다. 표정도 평소와 달리 굳어 있었고.
'그때 뭐 때문에 그랬을까.'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자꾸 그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 완력으로는 이길 수 없어도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자.'
집에 가는 길, 담배 냄새가 옷에서 가시지 않았다. 교복 상의를 벗어 코에 대보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다음날 아침, 매점 앞에서 박수란이 알아챘다.
"니 표정 와이라노, 똥 씹었나?"
빵을 고르며 물었다. 최상현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아니 그냥..."
"어제 또 뭔 일 있었제. 얼굴에 다 써 있다."
박수란은 눈치가 빨랐다. 같은 반 짝꿍인 데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숨기기가 어려웠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뺨 벌겋던데."
"아 진짜 별거 아니래도..."
빵을 계산하며 말끝을 흐렸다. 박수란이 팔짱을 끼고 쳐다봤다.
"니 그러다 진짜 사고 치는 거 아니제?"
"내가 뭔 사고를 쳐."
"몰라, 니 표정 보면 뭔가 꾹꾹 눌러 참는 거 같아가."
'눈치 하난 빠르네.'
괜히 뜨끔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빵 봉지를 뜯었다.
"걱정 마라, 나 그런 애 아니잖아."
"그래 니가 무슨 사고를 치겠노, 순딩이가."
박수란이 피식 웃으며 옆구리를 툭 쳤다. 그 손짓에 잠깐 마음이 풀렸다.
'그래, 별거 아닌 척하자.'
교실로 향하는 길,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아이들 몇몇이 축구공을 차고 있었고 평범한 아침 풍경이었다. 그 평범함 속에서 혼자만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우연히 학교 뒤편을 지나다 발걸음이 멎었다.
담벼락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우람이었다.
몸을 낮추고 담벼락 틈으로 살짝 엿봤다. 낯선 남자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교복을 입지 않은,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였다.
"니가 약속을 안 지키니까 그렇지."
남자 목소리가 낮고 날카로웠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 큰소리치던 김우람이 그 남자 앞에서는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목소리도 기어들어갔다.
'저게 뭐지.'
숨을 죽이고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지만 그게 무서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손에 잡혔다.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켜고 카메라 앱을 열었다.
'이거 찍어놓으면 뭐라도 될까.'
정확히 뭘 위해서인지는 몰랐다. 그냥 찍어야 할 것 같았다.
담벼락 틈 사이로 휴대폰을 들이밀고 셔터를 눌렀다. 소리가 날까 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행히 둘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계속 언성을 높이며 말싸움을 이어갔다.
몇 장을 더 찍고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화면을 다시 확인해보려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화면부터 켰다.
사진첩을 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첫 장을 확대하는 순간, 숨이 턱 걸렸다.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팔뚝에 새겨진 문신 일부와 손목에 감긴 굵은 시계까지.
'이거...'
두 번째 사진을 넘겼다. 김우람이 뭔가를 건네받는 장면이었다. 작은 봉투 같은 게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저게 뭐고.'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종류가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세 번째 사진에서는 남자가 김우람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화면 속 김우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저 새끼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교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항상 남을 짓누르던 눈빛이 저기선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돌아봤다.
'들켰으면 어쩌지.'
다행히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심장은 계속 그 리듬을 유지했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박수란을 만나자마자 팔을 잡아끌었다.
"뭐고, 아침부터 와 이라노."
"수란아, 나 어제 뭐 봤는지 알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박수란이 눈을 크게 떴다.
"뭘 봤는데?"
주변을 살피고 골목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첩을 열어 보여주자 박수란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이거 그 아저씨가... 우람이 멱살을?"
"어. 그리고 이거 봐봐, 여기 봉투 주고받는 거."
박수란이 화면을 확대해 자세히 들여다봤다. 미간이 좁아졌다.
"이거 딱 봐도 뭔가 켕기는 냄새 나는데."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박수란이 사진 속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번에 내가 니한테 말했제, 우람이 밤에 몰래 어디 갔다 온다고."
"어, 그거."
"이 사람이랑 관련 있는 거 아이가?"
'맞을 수도 있겠네.'
머릿속에서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목소리 낮추고 통화하던 모습, 밤마다 사라진다던 소문, 그리고 이 사진.
"수란아, 나 이거 좀 더 알아보고 싶은데."
"뭐를? 그 아저씨가 누군지?"
"어. 그리고 저 봉투 안에 뭐가 들었는지."
박수란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니 이거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수도 있다. 저 아저씨 인상 봐라, 보통 사람 아닌 거 같은데."
"알아. 그래도..."
말이 잠깐 끊겼다. 뺨이 얼얼했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 싫어."
박수란이 잠자코 최상현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뭔가 다른 게 담겨 있었다.
"니 표정이 어제랑 다르네."
"뭐가."
"모르겠다, 뭔가... 눈빛이 좀 무섭다."
'그런가.'
스스로도 낯선 감각이었다. 누군가를 겁먹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일단 우람이 뒷조사부터 해보자. 밤에 어디 가는지."
"그거 어떻게 알아보노?"
"오늘 방과 후에 몰래 따라가 보면 되지."
박수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알겠다, 같이 가주께."
교실로 들어서는데 김우람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니가 그런 표정 지을 줄은 몰랐지.'
속으로 되뇌며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정리했다.
수업 시간 내내 창밖으로 시선이 자주 갔다. 오늘 방과 후 계획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짚었다.
'들키면 안 돼. 조심해야 돼.'
종이 울리자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박수란과 눈이 마주치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을 나서는 김우람의 뒷모습이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밟기 시작했다.
'오늘은 뭘 보게 될까.'
가로등도 없는 좁은 골목으로 김우람이 꺾어 들어갔다.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낯선 건물 앞에서 멈췄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줬다.
숨어서 지켜보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박수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저기 뭐 하는 데고..."
대답할 틈도 없이 건물 안에서 낮은 고함이 흘러나왔다. 어제 그 남자 목소리였다.
"들어가보자."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박수란이 팔을 확 붙잡았다.
"미쳤나, 저길 왜 들어가."
"창문으로만 볼게. 들어가는 거 아니고."
건물 옆으로 돌아가자 반쯤 깨진 창문이 보였다.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발끝을 세우고 창틀에 눈높이를 맞췄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 안, 남자 서넛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다.
'저 아저씨...'
어제 그 남자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건 어제 사진 속 그 봉투와 똑같이 생긴 것들이었다.
여러 개였다. 하나가 아니라 열 개도 넘어 보였다.
"우람이는 저기 왜 있는데."
박수란이 창틀 아래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손끝이 창틀을 붙잡고 있었다.
시선을 옮기자 구석에 서 있는 김우람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남자들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게 다 뭔데.'
남자 하나가 봉투 하나를 집어 김우람 앞으로 던졌다. 우람이 그걸 받아 품속에 넣는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다음 주까지 세 개 더 돌려라. 안 그러면..."
말끝이 흐려졌다. 대신 남자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숨이 턱 막혔다. 옆에서 박수란도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완전...'
무슨 물건인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런데 저 표정, 저 몸짓, 이 모든 분위기가 말해주고 있었다.
절대 평범한 게 아니었다.
핸드폰을 슬며시 들어 창문 틈으로 조심스레 렌즈를 갖다 댔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찍어야 돼. 이건 찍어야 돼.'
셔터 소리를 죽이려 무음 모드부터 확인했다. 화면 속 봉투들이 선명하게 잡혔다.
찰칵.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그 순간 방 안에서 누군가 고개를 홱 돌렸다.
"뭐꼬 저거."
남자 하나가 창문 쪽을 손가락질했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뛰어!"
박수란이 손목을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골목 밖으로 있는 힘껏 내달렸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 뒤이어 발소리가 쏟아졌다.
"저기 서라!"
굵은 남자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잡히면 끝이야.'
큰길로 나서자마자 지나가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니 골목 어귀에서 남자들이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서야 숨이 겨우 트였다. 박수란이 옆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고 저 아저씨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나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손안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니 화면에 금이 가 있었다.
넘어지면서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진첩은 무사히 열렸다.
방금 찍은 사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봉투들, 남자들 얼굴, 그리고 구석에서 떨고 있는 김우람까지.
'이걸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누구에게 보여야 할지.
"상현아, 니 표정 또 그렇다."
박수란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눈에 두려움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어떡할 건데."
대답 대신 화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사진 속 남자 얼굴을 확대하자 낯익은 무언가가 눈에 걸렸다.
목에 걸린 목걸이, 그 끝에 달린 문양.
어디서 봤더라. 분명 최근에 어디선가.
'이거...'
기억을 더듬던 순간,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교문 앞에 서 있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방금 화면 속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목걸이를 건 남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