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노트와 숨겨진 마음
주인공: 리안
리안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가 손을 멈췄다.
"어?"
비어 있었다. 언제나 거기 꽂혀 있던 파란 표지 노트가 사라졌다.
'가방에 넣었나?'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교과서, 필통, 물통, 구겨진 알림장. 노트는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리안아, 급식 안 가?"
서준이가 책상을 툭 쳤다. 아이들은 벌써 줄을 서서 복도로 나가고 있었다.
"음... 나 먼저 갈게."
리안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서랍을 뒤졌다. 빈 공간만 손에 잡혔다.
'설마 떨어뜨렸나?'
책상 밑을 들여다봤다. 먼지만 수북했다. 옆 책상 사이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교실이 텅 비어갔다. 웃음소리가 복도 끝으로 멀어졌다.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뒤쪽으로 갔다. 사물함 구역은 늘 어질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실내화, 이름 없는 우산, 찢어진 공책 한 권.
파란 노트는 없었다.
'어디 갔지?'
가슴이 답답했다. 노트 안에는 지난 두 달 동안 쓴 이야기가 빼곡했다. 완성하지 못한 동화, 친구들 이름을 바꿔 쓴 모험담, 혼자 끙끙대며 고쳐 쓴 결말들.
그중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 누가 읽으면...'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뭐 찾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경이었다.
리안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경은 급식 가방을 든 채 교실 문에 서 있었다.
"아... 음... 그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나경은 리안의 표정을 보더니 바로 눈치챘다.
"노트 잃어버렸어?"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내 작품 노트가... 없어졌어."
나경의 눈이 반짝였다.
"사건이네!"
리안은 당황했다. 사건이라니.
"그냥... 어디 두고 온 것 같은데..."
"아니야. 넌 늘 그 노트 서랍에 꽂아두잖아. 나 봤어."
나경은 급식 가방을 책상 위에 던지고 리안 옆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언제 봤어?"
"음... 3교시 쉬는 시간?"
"그때 뭐 했는데?"
"글 쓰고 있었어. 토끼 이야기 결말 부분..."
나경은 턱을 쓰다듬었다. 추리 소설 주인공처럼.
"4교시는?"
"체육 시간이었어. 운동장에서 피구..."
"그럼 그 사이야."
나경은 교실을 둘러봤다. 28개의 책상이 줄지어 있었다. 창가 맨 뒷자리, 리안의 책상만 서랍이 열려 있었다.
"체육 시간엔 전부 운동장 나갔지?"
"응..."
"누가 교실에 남았거나, 일찍 들어온 사람이 있을 거야."
리안은 불안했다. 누군가 일부러 가져갔다는 생각이 들자 손이 떨렸다.
'내 이야기를 누가 읽으면...'
나경은 리안의 떨리는 손을 봤다.
"괜찮아. 내가 찾아줄게."
"진짜?"
"응. 나 추리 소설 스물세 권 읽었거든."
나경은 가방에서 돋보기 키링을 꺼내 들었다. 장난감이었지만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탐정 모드 온!"
리안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됐다.
"일단 증거 수집부터 하자."
나경은 리안의 책상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서랍 안쪽, 책상 다리, 옆자리 틈새.
"여기 연필심 가루 있어."
"그건 내가 떨어뜨린 거..."
"혹시 몰라. 범인이 급하게 뒤지다가 남긴 흔적일 수도 있지."
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경의 추리는 과했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반 애들한테 물어보자."
"어떻게?"
"자연스럽게. 들키면 안 되니까."
나경은 리안을 이끌고 복도로 나갔다. 아이들은 급식실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서준이가 우유를 들고 지나갔다.
"야, 서준아."
나경이 불렀다.
"왜?"
"너 4교시 체육 시간에 어디 갔었어?"
"운동장. 피구했잖아."
"중간에 화장실 같은 데 안 갔어?"
서준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갔는데? 근데 교실은 안 들렀어. 왜?"
"아니, 그냥."
나경은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서준이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갔다.
"용의선상에서 제외."
나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리안은 따라다니며 친구들 얼굴을 살폈다.
민서, 지우, 하늘. 모두 비슷한 대답이었다. 체육 시간 내내 운동장에 있었다고.
그런데 한 명이 달랐다.
유진이었다.
나경이 물었을 때,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나... 배 아파서 일찍 들어왔어."
목소리가 작았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나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교실에?"
"응... 보건실 갔다가 교실로..."
유진은 리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손을 꼭 쥔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리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유진이가?'
유진은 늘 조용했다. 쉬는 시간에도 혼자 책을 읽거나 창밖을 바라봤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리안은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의 손이 책상 모서리를 꽉 쥐고 있었다.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진이가... 정말?'
믿고 싶지 않았다. 유진은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조용했지만, 리안이 쉬는 시간에 쓴 이야기를 몰래 훔쳐보다가 들켰을 때도 미안하다고 작게 사과했던 아이였다.
"유진아."
나경이 한 발짝 다가섰다.
"교실에서 뭐 했어?"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더 깊이 숙였다.
"그냥 물어보는 거야. 화내는 거 아니니까."
나경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유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럼 왜 대답을 안 해?"
"......"
침묵이 길어졌다. 복도를 지나가던 아이들이 힐끗힐끗 쳐다봤다.
리안은 참지 못하고 나경의 팔을 잡았다.
"나경아, 그만하자."
"왜? 분명히 수상한데."
"그래도..."
리안은 유진을 다시 봤다. 유진의 어깨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도 힘들어 보여.'
서준이가 복도 끝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천천히 걸어왔다.
"너희 뭐 해?"
나경이 대답했다.
"리안 노트 찾고 있어. 유진이가 수상해."
서준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게 말하면 유진이 기분 나쁘잖아."
"하지만 증거가—"
"증거? 뭔데?"
나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유진이 교실에 일찍 들어왔다는 것뿐.
서준은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아, 괜찮아?"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끄덕였다.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이... 요즘 힘들어 보이던데."
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냥 물어보는 게 어때? 이렇게 몰아붙이지 말고."
리안은 가슴이 뜨끔했다. 서준 말이 맞았다.
"...미안해, 유진아."
리안이 작게 말했다.
유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자기 자리로 갔다.
등이 작고 외로워 보였다.
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니야. 나도 궁금했어."
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근데 유진이는 아닐 것 같아."
"왜?"
"그냥... 느낌이."
나경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5교시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왔다.
리안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봤다. 운동장 한쪽 벤치가 보였다. 평소에 혼자 이야기를 구상하던 곳.
'노트... 정말 어디 간 걸까?'
수업 내내 집중할 수 없었다. 선생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공책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리안은 자꾸 유진 쪽을 쳐다봤다.
'유진이... 뭐 쓰고 있는 거지?'
---
방과 후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교실은 금방 텅 비었다.
나경이 리안 책상으로 왔다.
"리안아."
"응?"
"나 생각이 있어."
나경의 눈빛이 다시 반짝였다.
"유진이 사물함 확인해보자."
"...그건 좀..."
"증거 찾으려는 거야. 유진이 결백하면 그걸로 끝이고."
리안은 망설였다. 하지만 노트를 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빨리 하자."
둘은 교실 뒤쪽 사물함 구역으로 갔다.
유진의 사물함은 맨 아래 줄 왼쪽 끝이었다.
나경이 문을 열려는 순간.
"너희 뭐 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이었다.
리안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음..."
나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리안 노트 찾고 있어. 유진이가 수상해."
서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아까도 그랬잖아."
"하지만—"
"유진이 사물함 뒤지려고? 그건 아니지 않아?"
서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리안은 고개를 숙였다. 서준 말이 맞았다.
"...미안해."
"리안이가 미안할 거 없어. 나경이 네가 너무 나간 거야."
나경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그냥 친구 도와주려고..."
"도와주는 게 이런 식이야?"
서준은 한숨을 쉬었다.
"유진이 요즘 진짜 힘들어 보여. 아침마다 혼자 울고 있던데."
리안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울어?"
"응. 아침 자습 시간에. 고개 숙이고 있길래 봤더니 눈물 닦고 있더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유진이가... 왜?'
서준은 사물함 쪽을 가리켰다.
"그냥 물어보자. 직접. 이렇게 뒤에서 의심하지 말고."
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잘못했어."
셋은 유진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하교한 뒤였다.
교실로 돌아왔을 때, 리안은 유진의 책상 위에 놓인 공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낡은 공책이었다. 표지가 해져 있었다.
"이거..."
나경이 공책을 집어 들었다.
"유진이 거 같은데?"
"함부로 보면 안 되지 않아?"
서준이 말했지만, 나경은 이미 펼치고 있었다.
첫 페이지가 보였다.
리안은 숨이 멎었다.
공책 첫 페이지에는 리안의 글씨가 빼곡했다.
아니, 리안이 쓴 이야기였다.
'토끼와 달의 약속'
리안이 3교시에 쓰던 그 이야기.
"이거... 리안 이야기잖아?"
나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리안은 공책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왜 유진이 공책에 내 이야기가...'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장. 리안이 지난주에 쓴 '별을 삼킨 고양이'.
세 번째 장. '혼자 남은 나무의 노래'.
전부 리안의 이야기였다. 하나도 빠짐없이.
하지만 글씨체는 달랐다. 서툴렀다. 삐뚤빼뚤했다.
'유진이가... 베껴 쓴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준이 공책을 들여다봤다.
"...이거 필사 아냐?"
"필사?"
"응. 좋아하는 글을 따라 쓰는 거. 우리 누나도 해."
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증거야."
"무슨 증거?"
"유진이가 리안 노트를 훔쳤다는 증거."
리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책 모서리가 손에서 휘어졌다.
'유진이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마지막 장을 펼쳤을 때, 리안은 숨이 멎었다.
거기엔 리안이 쓴 적 없는 문장이 있었다.
---
*'이 이야기들은 나를 살게 해줬어.*
*혼자라고 생각했던 날들.*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주던 날들.*
*리안의 이야기만 읽으면 괜찮았어.*
*토끼도, 고양이도, 나무도 다 혼자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
글씨가 번져 있었다.
눈물 자국이었다.
리안의 손이 떨렸다.
'유진이... 울면서 이걸 썼구나.'
나경이 공책을 도로 가져갔다.
"봐. 유진이가 네 노트를 훔쳐서 베껴 쓴 거야."
"...아니야."
리안의 목소리가 잠겼다.
"아니긴 왜 아냐? 증거가—"
"유진이는 내 이야기를 좋아해 준 거야."
리안은 공책을 꼭 안았다.
"훔친 게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나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서준이 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리안이 말이 맞을지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해?"
"유진이 요즘 정말 힘들어 보였거든. 혼자 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
리안은 유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복도에서 고개를 숙이고 떨던 모습.
교실에서 혼자 창밖만 보던 모습.
'유진이도... 나처럼 외로웠던 걸까?'
나경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노트는 돌려줘야지. 남의 물건 가져간 건 잘못이잖아."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유진이한테 물어볼게."
셋은 집으로 돌아갔다.
리안은 유진의 공책을 가방에 넣었다.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자꾸 신경 쓰였다.
'유진이는 왜 내 이야기를 베껴 쓴 걸까?'
---
다음 날 아침.
리안은 일찍 학교에 갔다.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청소 당번 한 명만 걸레질하고 있었다.
리안은 자기 자리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멎었다.
노트가 있었다.
'돌아왔다...'
파란 표지의 낡은 노트. 리안의 노트.
손이 저절로 뻗어졌다.
노트를 꺼내 펼쳤다.
첫 페이지. '토끼와 달의 약속'. 리안이 쓴 그대로였다.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도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리안은 숨을 멈췄다.
거기엔 리안이 쓴 적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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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게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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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었다.
그 아래 서툰 글씨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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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작은 토끼가 살았어.*
*토끼는 늘 혼자였어.*
*친구들은 토끼를 안 좋아했어.*
*말이 없다고, 재미없다고.*
*토끼는 슬펐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어느 날, 토끼는 숲속에서 노트 한 권을 주웠어.*
*노트 안에는 이야기가 가득했어.*
*혼자 남은 나무 이야기.*
*별을 삼킨 고양이 이야기.*
*달과 약속한 토끼 이야기.*
*전부 혼자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들.*
*토끼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울었어.*
*나만 혼자가 아니구나.*
*나만 외롭지 않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견딜 수 있었어.*
*토끼는 노트를 돌려주고 싶었어.*
*하지만 용기가 없었어.*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 이야기를 남겨.*
*노트 주인에게 고마웠다고.*
*혼자가 아니게 해줘서 고마웠다고.'*
---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리안의 손이 떨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글을 쓴 사람은...'
교실 문이 열렸다.
유진이 들어왔다.
가방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의 눈이 커졌다. 노트를 본 거였다.
"...미안해."
유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네 노트... 몰래 가져갔어."
리안은 노트를 꼭 쥐었다.
"...왜?"
"너... 너무 부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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