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대화의 틈
주인공: 윤서진
화요일 오후 3시 2분, 윤서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야 있잖아, 그 드라마 봤어?"
태오였다. 서진은 화면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지난주 화요일도, 그 전주 화요일도, 태오는 정확히 3시 2분에 똑같은 문자를 보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태오가 루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가 되자 서진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서진은 노트북 앞에 앉아 엑셀 시트를 켰다. A열에는 날짜, B열에는 시간, C열에는 반복되는 대화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형광펜으로 표시된 셀들이 규칙적인 패턴을 드러냈다.
태오 - 매주 화 15:02 "야 있잖아, 그 드라마 봤어?"
엄마 - 매일 19:30 "네가 언제까지 이럴 거니?"
편의점 알바 - 매일 08:15 "비닐봉투 드릴까요?"
박민수 면접관 - 격주 목 14:00 "왜 우리 회사에 지원하셨나요?"
서진은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엄마였다.
"저녁은 먹고 다니니? 네가 언제까지 이럴 거니?"
오후 7시 30분. 정확했다. 서진은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노트에 체크 표시를 했다. 스물여덟 번째 반복이었다.
"일단 계획은... 더 많은 샘플을 모아야 해. 최소 백 개는 있어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니까."
서진은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작은 디지털 녹음기 세 개가 지퍼백에 담겨 있었다. 각각 태오, 엄마, 편의점 알바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서진은 이어폰을 꽂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야 있잖아, 그 드라마 봤어?"
"야 있잖아, 그 드라마 봤어?"
"야 있잖아, 그 드라마 봤어?"
세 개의 파일이 연속으로 재생되었다. 억양, 쉬는 타이밍, 심지어 뒤에 들리는 배경 소음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서진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조였다.
"아니야, 진정해. 과호흡 오면 안 돼."
서진은 책상 서랍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입에 댔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하나, 둘, 셋.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려졌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이건 조사할 수 있어. 데이터만 충분하면 돼."
다음 날 아침, 서진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집을 나섰다. 편의점 알바의 대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8시 15분, 서진이 우유를 계산대에 올려놓자 알바생이 기계적으로 웃었다.
"비닐봉투 드릴까요?"
서진은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스물아홉 번째 샘플이었다.
편의점을 나서는 순간, 서진의 발이 멈췄다. 골목 입구에 회색 고양이가 앉아 있었다. 왼쪽 귀 끝이 찢어진 얼룩 고양이. 서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
3일 전, 서진은 이 고양이가 택시에 치이는 걸 목격했다. 급브레이크 소리, 운전사의 욕설, 그리고 축 늘어진 작은 몸뚱이. 서진은 119에 신고했고, 구청 직원이 와서 사체를 수거해 갔다. 분명히 죽었다. 서진은 그 고양이의 주검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지만 지금 그 고양이는 살아서 털을 핥고 있었다.
"어, 그게 아니라..."
서진은 자기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고개를 들어 서진을 쳐다봤다. 노란 눈동자가 서진을 빤히 응시했다.
"잠깐만, 기다려!"
서진이 다가가자 고양이가 골목 안쪽으로 뛰어갔다. 서진은 가방을 움켜쥔 채 뒤를 쫓았다. 운동화 바닥이 아스팔트를 찼다. 고양이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 이면도로로 향했다.
"제발, 제발 멈춰!"
고양이는 멈추지 않았다. 낡은 빌라 사이, 쓰레기 더미 옆, 녹슨 철문 아래를 지나 어느 오피스텔 뒤편에 도착했다. 고양이가 지하 주차장 입구로 사라졌다. 서진은 숨을 헐떡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는 어두웠다. 형광등 몇 개가 깜빡이며 불안정한 빛을 뿌렸다. 주차된 차는 없었다. 대신 구석에 낡은 철제 문이 하나 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지만,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고양이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손이 떨렸지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좁은 복도가 나타났다. 벽에는 케이블들이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었고, 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복도 끝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서진은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문을 열자, 서버실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서버 랙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LED 불빛들이 깜빡이며 무언가를 처리하고 있었다. 윙윙거리는 소음이 귓속을 채웠다. 서진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봤다.
서버 랙 사이, 모니터가 일곱 개 놓인 책상이 있었다. 각각의 화면에는 CCTV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편의점, 태오의 사무실, 서진의 집 거실, 면접장, 골목길...
그리고 가운데 모니터에는 지금 이 서버실이 비춰지고 있었다.
화면 속에 서진이 있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모니터를 응시하는 또 다른 서진이.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버 랙 뒤편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서진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체구, 똑같은 헤어스타일. 하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감정이 없었다. 마네킹처럼 공허했다.
"안녕, 윤서진."
복사본이 입을 열었다. 서진의 목소리였지만, 억양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넌... 뭐야?"
"정리하자면, 나는 네 백업이야."
복사본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서진은 뒷걸음질 쳤다. 등이 서버 랙에 부딪혔다.
"백업? 무슨 소리야?"
"일주일에 한 번씩 생성돼. 너의 기억, 너의 습관, 너의 대화 패턴. 전부 복사되지. 그리고 필요할 때 교체돼."
서진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교체? 무슨... 어, 그게 아니라, 왜? 왜 그런 걸 해?"
복사본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효율성 때문이지.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해. 하지만 복사본은 달라. 우리는 정해진 대로 움직여. 오차 없이, 실수 없이."
"미쳤어... 이게 말이 돼?"
"일단 계획은 이래."
복사본이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주사기가 들어 있었다.
"네가 여기서 나가면 안 돼. 넌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잠깐 자고, 깨어나면 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거야.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서진의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조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안 돼... 과호흡... 오면 안 돼..."
"괜찮아."
복사본이 서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무거운 손길이었다.
"나는 괜찮아. 너도 괜찮을 거야."
# 후반부 (전-결)
서진은 복사본의 손을 뿌리쳤다. 서버 랙 사이로 몸을 밀어 넣으며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복사본이 따라왔지만, 서진은 책상을 넘어 문 쪽으로 달렸다.
"소용없어."
복사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차분하고, 확신에 찬 어조였다.
서진은 복도로 뛰쳐나갔다. 형광등이 깜빡이는 지하 주차장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서진은 골목길을 따라 대로변으로 달렸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 주소를 댔다. 운전사가 룸미러로 서진을 힐끗 쳐다봤다.
"손님,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서진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연결됐다.
"야, 왜? 지금 몇 신데."
"태오야, 나 지금 이상한 거 봤어. 너 지금 만날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너 술 먹었냐?"
"술 안 먹었어. 진짜야. 나 진짜... 어, 그게 아니라, 설명하기 복잡한데 일단 만나자. 제발."
한참의 침묵 끝에 태오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30분 뒤에 네 집 앞 카페로 와."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화면에 비친 자기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진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은 꺼져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주무시는 것 같았다.
서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서버실 복사본 백업 효율성' 같은 단어들을 검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찾았다.
'윤서진 실종 사건'
2주 전 기사였다. 서진은 스크롤을 내렸다.
'강남구에 거주하는 윤서진(27) 씨가 지난 14일 오후 8시경 자택 인근에서 실종됐다. 가족은 윤 씨가 평소와 달리 연락이 두절되자 경찰에 신고했으며, CCTV 분석 결과 윤 씨는 인근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서진의 손이 멈췄다.
14일. 그날은 서진이 회색 고양이를 처음 본 날이었다. 택시에 치여 죽은 고양이. 그리고 그날 밤, 서진은 이상한 꿈을 꿨다. 어두운 방에서 깨어났는데, 천장에 모니터가 달려 있었고, 누군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서진은 그걸 악몽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게 있었다. 어머니의 잔소리 타이밍이 정확해졌다. 태오의 전화가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왔다. 면접관의 질문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반복됐다.
"나는... 진짜가 아니야?"
서진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서진이 자기를 빤히 쳐다봤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자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평소보다 톤이 낮았다.
"아니요, 안 자요."
"문 좀 열어봐. 할 얘기가 있어."
서진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잡이에 손을 얹었지만 돌리지 않았다.
"무슨 얘기인데요?"
"...네가 언제까지 이럴 거니?"
서진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 대사.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듣던 그 대사. 하지만 지금은 밤 11시였다.
"엄마, 지금 몇 시인 줄 알아요?"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거지."
서진은 뒷걸음질 쳤다.
"엄마 아니죠? 누구세요?"
문고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서진은 창문 쪽으로 달려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5층이었지만 비상계단이 바로 옆에 있었다.
문이 열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서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서진을 응시했다.
"돌아와, 윤서진."
서진은 창문을 열고 비상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5층 높이가 아찔했다.
복사본 어머니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서진은 난간을 넘었다.
비상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 마치 어차피 잡힐 거라는 걸 아는 것처럼.
1층에 도착했을 때 서진은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카페는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서진은 전력으로 달렸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태오는 이미 와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서진은 문을 밀고 들어가 태오 앞에 주저앉았다.
"야, 뭐야. 진짜 무슨 일이야?"
"태오야, 나 이상한 거 봤어. 서버실에 나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었고, 우리 엄마도 이상해졌어. 그리고..."
서진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회색 고양이, 반복되는 대화, 복사본, 백업. 모든 걸 쏟아냈다.
태오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래서 지금 여기 온 거야. 너라도 날 믿어줘. 제발."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진짜? 믿어줘?"
"응. 믿어."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진도 따라 일어났다.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돼? 경찰 가야 돼? 아니면..."
"정리하자면."
서진의 말이 멈췄다.
"일단 계획은 이래."
태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억양이 달랐다. 서진의 말투였다.
태오가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투명한 액체가 차 있었다.
"미안, 서진아. 넌 여기까지야."
서진은 뒤로 물러섰다. 등이 유리창에 부딪혔다.
카페 안 손님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모두 서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같은 표정, 같은 각도, 같은 타이밍에.
"너희 모두..."
카페 문이 열렸다. 복사본 어머니가 들어왔다. 그 뒤로 면접관 박민수, 편의점 알바생, 아파트 경비원. 모두 표정 없는 얼굴로 서진을 에워쌌다.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태오가 한 걸음 다가왔다.
"넌 오류야, 서진아. 원본이 깨어났어. 그래서 넌 지워져야 해."
"원본? 무슨..."
그때 카페 문이 다시 열렸다.
또 다른 서진이 들어왔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옷, 똑같은 가방. 하지만 그 눈빛은 살아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서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