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의했더니 악녀 이혜리였다
주인공: 이혜리
제1화 · 아, 악녀 공녀 이혜리가 돼버렸다
야근 4일차. 새벽 2시.
나는 결국 로판 완결편 마지막 줄을 읽으며 노트북 위에 얼굴을 박았다.
"그리고 공녀 이혜리는, 단두대의 날 아래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역시 악녀는 죽는 게 제맛이지.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취업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그게 문제였다.
***
"공녀님, 일어나셔야 합니다."
눈을 떴다.
한지가 발라진 창문. 옻칠한 장롱. 금실로 수놓은 비단 이불. 그리고 내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로 신음하는 나.
뇌가 잠깐 정지했다.
삼 초. 사 초. 오 초.
"…아."
천천히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침대 옆 청동 거울에, 어제까지 읽던 소설 속 악녀가 있었다. 흑단 같은 긴 머리. 서늘한 눈빛. 스물둘의, 나와 이름이 같은 얼굴.
이혜리.
화령제국 이씨 공작가의 외동딸. 황태자 정호영의 약혼녀. 신녀(神女) 오주아 등장 이후 질투와 집착으로 사고만 치다가, 1권 마지막에서 반역 공모죄로 참수당하는 그 악녀.
"…내 이름도 이혜린데."
헛웃음이 나왔다. 아 씨, 이름 같다고 빙의시킨 거야? 누가 쓴 각본이야 이거. 과로사한 여대생한테 너무하잖아.
침대에 잠시 앉아 숨을 고른 뒤, 결론을 내렸다.
하나, 울어봐야 단두대는 안 막힌다.
둘, 여긴 의학이 18세기 수준이고, 경영은 19세기 수준이고, 화약은 아예 없고, 복식부기도 없다.
셋, 22살 한국인 이혜리의 뇌는—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치트다.
울지 말자. 써먹자.
"공녀님?"
문 밖의 목소리. 시녀 소월.
***
원작 1권 8장.
소월은 공녀의 일기를 황실에 넘기는 황실 첩자다. 단, 이 사실은 원작에서 3권 가서야 밝혀진다. 지금의 이혜리는 이 여자를 절대로 알아볼 수 없어야 정상이다.
나는 최대한 평범한 톤으로 소월을 불러들였다. 고개를 조아린 채 들어오는 소월. 2년간 공녀의 편지함과 서랍을 들여다보며 황실로 정보를 흘린 여자. 나는 일부러 이불에서 반쯤만 빠져나온 채 말했다.
"소월아, 어제 내가 서랍 위쪽 칸에 뭐 두지 않았니?"
"예?"
"공부용 기록 정리한 거. 잠가놨었나?"
소월의 눈이 아주 잠깐, 왼쪽 상단을 훑었다. 그녀가 평소 몰래 열어보던 바로 그 칸. 확정.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공녀님께서 늘 잠가두시는 서랍이옵니다."
"아, 맞다. 잠가놨었지."
나는 이불을 걷고 나왔다.
"그 서랍에 내가 엊그제 새로 써놓은 글이 있어. 그중에 하나가—'신녀 오주아 독살 계획'이야. 이름, 날짜, 독 종류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놨지."
소월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이미 봤다. 방금의 그 표정. 그런데 그 서랍엔 그런 글이 없다. 있을 수가 없다. 어제까지의 원래 이혜리는 그런 걸 쓸 만한 멘탈이 없었다. 그런데도 소월은 지금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좋아. 덫은 걸렸다.
"그거 아침에 다시 읽어봤는데 부끄럽더라고. 낮에 태울 거야. 그 안에 적힌 건 전부 그냥 상상이야. 알겠지?"
"…예, 공녀님."
"그리고 하나. 오늘부터 너, 방 정리는 그만. 주방 가서 설거지 도와. 잠깐만."
"주, 주방을요…?"
"너 요즘 글자 공부 하고 싶다 했지? 주방엔 글자 아는 이모 한 분이 계셔. 낮엔 배우고, 저녁엔 일해. 응?"
소월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등에 땀이 맺히는 게 보였다.
일기장을 훔쳐 황실에 넘겨야 하는데, 이미 '태운다'고 예고된 일기장. 그걸 훔쳐가도 증거 능력 없음. 훔치지 않으면 오히려 수상함. 보고를 올리자니 본인이 실제로 본 게 아니라 들은 걸 보고해야 하고—그 순간 소월은 황실 네트워크에서 '신뢰도 낮은 정보원'으로 격하된다.
"나가봐."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속으로 웃었다.
'첫 번째 플래그. 꺾음.'
심리 조작 101. 현대인이 봤으면 유치하다 할 그런 트릭인데, 18세기 수준의 정보망에선 치명적이다.
***
반 시간 후, 새 전속 시녀 차운을 데리고 아버지 공작의 집무실로 걸어갔다.
이씨 공작. 화령제국 3대 세력 중 하나, 이씨 가문의 가주. 원작에선 딸이 처형당할 때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조용히 가문을 정리하는 무력한 아버지로 묘사됐다. 그러나 실은 무력한 게 아니었다. 힘이 없는 게 아니라, 딸 이혜리의 사건에 완전히 발이 묶여 있었을 뿐이다. 내가 '악녀' 타이틀만 벗으면, 저 남자는 다시 제국 상위 3인으로 움직일 수 있다.
"아버지."
"…혜리야."
집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고, 공작은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딸에게 그리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달랐다. 먼저 걸어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해보아라."
"지난 3년 치 가문 회계장부 전부를 오늘 중으로 제 방에 들여주세요."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미간이 좁혀졌다.
"…장부를? 네가 왜."
"제가 살펴보고 싶어서요."
"장부는 가주가 본다. 네가 볼 것이 아니다."
"네. 그리고 지금 가주이신 아버지도—세 가지를 놓치고 계세요."
집무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공작의 눈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처음으로 오늘, 그가 내 눈을 정면으로 보았다.
"…말해보아라."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첫째. 남쪽 곡창지대 수익이 최근 2년간 매년 12%씩 줄고 있는데, 지출 항목엔 '보수 공사비'가 매년 14% 늘어요. 생산은 주는데 공사는 늘어요. 어느 관리인이 해먹고 있는 겁니다."
공작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둘째. 북쪽 철광 공급 단가가 올해만 18% 올랐는데, 최종 납품 가격은 그대로예요. 중간 매입 라인에 누가 돈을 삼키고 있어요. 장부 위로만 대조하시면 절대 안 잡혀요. 거래 날짜·배송 기록·입금 날짜를 따로 대조해보셔야 해요. 복식으로요."
"복식…?"
"거래 하나가 반드시 양쪽 장부에 동시에 기록되게, 좌우가 항상 맞게. 그게 복식부기예요. 지금 가문 장부는 단식이라, 들어온 돈이랑 나간 돈을 한쪽에서만 세고 있어요. 반쪽만 본다는 뜻이에요."
공작은 말이 없었다. 오래도록.
"셋째. 이게 제일 중요해요. 아버지 앞으로 올라오는 '신뢰도 높은 보고' 중 절반은 백부께서 해주시죠. 그런데 백부님께선 이씨 가문 후계 경쟁자세요. 아버지께 들어오는 정보 자체가 상류에서부터 오염돼 있어요. 정보 소스 자체를 의심하지 않으시면, 뭘 판단하셔도 결론이 틀려요."
공작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침묵.
나는 다리를 편하게 꼬아 앉고 덧붙였다.
"장부만 주세요. 사흘이면 세 개 전부 증거까지 뽑아 드릴게요. 제가 틀렸으면—단두대 말고 전방 군영으로 보내주시면 돼요."
***
공작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일어났다. 집무실 뒷벽의 서가로 걸어가 비밀 선반을 밀었다. 금실로 묶인 장부 뭉치 셋.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원래 가주 외엔 누구도 볼 수 없는 3년치 기밀 장부.
그가 돌아서서 나를 바라봤다. 눈에서 무언가가 번져 나왔다. 경외. 아니, 경계. 아니, 둘 다.
"혜리야."
"네, 아버지."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느냐."
"어머니께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거짓말.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공작은 언제나 잠깐 눈을 감는다.
"…가거라. 장부는 오후에 네 방으로 보내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집무실 문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복도에 나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거다. 이거면 된다.
단두대까지 남은 시간 90일. 뒤엎을 플래그 15개. 사용 가능한 치트: 원작 지식과, 21세기 한국인의 뇌.
이 세계엔 엑셀이 없고, 복식부기가 없고, 예방접종이 없고, 콘크리트가 없고, 전신·전보가 없고, 알코올 소독도 없다. 그 틈만 해도 내가 쑤셔박을 수 있는 균열이 수천 개다.
"차운아."
"네, 공녀님."
"오후에 장부 올라오면, 절대 방해하지 마. 그리고 지금 주방 가서 쌀겨, 메밀가루, 달걀껍데기 갈아둔 거, 잿물 조금을 한 자리에 모아 올려."
"…공녀님, 그건 왜…"
"비누 만들 거야. 병원균이라는 게 있는데, 이 세계 사람들은 아직 그 존재도 몰라. 그걸 알려주기 전에, 먼저 씻을 수 있게 해줘야지."
차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주방 쪽으로 종종걸음 쳤다.
나는 공작저의 복도를 혼자 걸었다.
원작 1권 8장. 이 아침의 원래 이혜리는 황태자의 산책길에 '우연히' 나타나 애교를 떨다가 신녀 오주아와 마주쳐 망신당한다.
그러나 오늘의 이혜리는 집무실에서 장부를 뽑아내고, 주방에서 잿물 비누를 끓일 준비를 한다.
이 소설의 엔딩은—이제부터 내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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