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6,883자

감정 수집가들

주인공: 한미리

## 1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아니, 박으려고 했다. 손이 먼저 벽을 짚었다. 차가운 벽지가 땀 젖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72시간.'

미리는 숫자를 세는 게 습관이었다. 두통이 시작된 시간, 진통제를 먹은 횟수, 잠들지 못한 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73시간 12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떨렸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물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안 났다.

바닥이 기울었다.

아니, 몸이 기울었다. 무릎이 먼저 꺾였다. 카펫에 닿는 순간, 섬유 하나하나가 피부를 찔렀다. 과민해진 신경이 모든 감각을 증폭시켰다.

'일어나야 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시야가 좁아졌다. 천장의 형광등이 멀어졌다. 동그란 빛이 점점 작아지다가.

꺼졌다.

---

눈을 뜨는 데 한참 걸렸다.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속눈썹에 뭔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억지로 눈을 떴다.

천장이 없었다.

"...뭐?"

형광등도 없었다. 벽지의 얼룩도, 곰팡이 핀 모서리도 없었다. 그 자리에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미리는 누운 채로 멈췄다. 숨도 멈췄다.

'환각.'

논리적인 설명이었다. 72시간 넘게 잠을 못 자면 환각을 본다. 의학 저널에서 읽었던 내용이었다. 측두엽의 과활성화, 도파민 불균형, 시각 피질의 오작동.

그런데.

책상이 떠 있었다.

정확히는 공중에 떠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노트북이 열린 채로 책상 위에 붙어 있었다. 화면에서 파란 빛이 새어 나왔다. 중력 같은 건 없는 것처럼.

"말도 안 돼."

일어나려고 했다. 팔에 힘을 줬다.

바닥이 물결쳤다.

카펫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손바닥 아래에서 섬유들이 꿈틀거렸다. 미리는 비명을 삼켰다. 목구멍에서 소리가 걸렸다.

침대가 천장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니, 천장이 없으니까 그냥 위로. 끝없이 위로. 이불이 축 늘어져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문장이 끊어졌다.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공기가 이상했다. 숨을 쉴 때마다 뭔가 무거운 게 폐를 채웠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아니, 물보다 더 무거웠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입 주변에서 흩날렸다.

미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지러웠다. 두통은 사라졌다. 그게 더 이상했다. 3일 동안 머리를 쪼개던 통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벽이 보였다.

정확히는,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반투명한 막 같은 게 있었다. 희미하게 흔들렸다. 너머로 뭔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둠 속의 또 다른 어둠.

시계를 봤다.

벽에 걸린 시계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초침이 정방향으로 세 바퀴 돌더니 갑자기 역방향으로 돌았다. 분침은 제자리에서 떨고 있었다.

"이건 꿈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확신이 없었다.

꿈이라면 깨어나야 했다.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손톱으로 손등을 긁었다. 빨간 선이 그어졌다.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

"꿈이 아니라면..."

그때.

파란 빛이 보였다.

---

침대 밑에서 뭔가 나왔다.

작았다. 아기 고양이만 했다. 둥근 형태였는데 정확한 윤곽은 없었다. 파란 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떠올랐다.

미리는 뒷걸음질쳤다. 발이 뭔가에 걸렸다. 넘어질 뻔했다.

그 생물체가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 같은 게 있었다. 눈 같은 것 두 개. 입 같은 것 하나. 전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에서 액체 같은 게 흘러내렸다. 빛나는 눈물.

"뭐... 뭐야, 너."

생물체가 멈췄다. 공중에 떠서 미리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윽."

미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갈비뼈 사이에서 뭔가 터지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생물체의 입이 열렸다.

"왜 나를 혼자 뒀어요?"

목소리였다. 아이의 목소리. 떨리고, 작고, 슬펐다.

미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구멍이 막혔다.

"왜요?"

생물체가 더 가까이 왔다. 파란 빛이 강해졌다. 미리의 가슴에서 같은 색의 빛이 새어 나왔다. 티셔츠를 뚫고 나오는 빛. 심장 있는 자리에서.

"저... 저리 가."

목소리가 나왔다. 간신히.

생물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빛의 입자로 흩어졌다.

'외로움.'

단어가 떠올랐다. 정확한 이름. 저건 외로움이었다. 미리가 밀어낸, 묻어둔, 없는 척했던.

"난... 혼자가 아니었어."

# 감정 수집가들

## 2부

"난... 혼자가 아니었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이 흔들렸다.

카펫이 찢어지듯 갈라졌다. 틈 사이로 검은 액체가 솟구쳤다. 끈적했다. 공기보다 무거웠다. 미리의 발목까지 차올랐다.

"거짓말."

외로움이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알아요. 당신이 혼자 울던 밤들. 전화기를 들었다가 끊던 순간들. 문자를 지우던 손가락."

미리는 뒷걸음질쳤다. 발이 검은 액체에 빠졌다.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게 아니라 온도가 없었다. 감각이 사라졌다.

'72번.'

숫자가 떠올랐다. 지난 1년간 전화를 걸다가 끊은 횟수. 미리는 전부 기록했었다. 엑셀 파일에. 날짜, 시간, 통화 대상. 단 한 번도 연결하지 않았다.

"그건..."

변명이 목구멍에 걸렸다.

외로움이 다가왔다. 파란 빛이 강렬해졌다. 미리의 가슴에서 나오는 빛과 겹쳤다. 두 빛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기가 일렁였다.

"당신은 혼자였어요."

단언이었다. 의문이 아니었다.

미리의 무릎이 꺾였다. 검은 액체가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감각이 사라진 다리가 떨렸다.

"아니야. 부모님이 계셨고, 대학 동기들도 있었고..."

"다 죽었잖아요."

심장이 멎었다.

"부모님은 5년 전에. 동기들은...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먼저 연락을 끊었죠. 3년 4개월 전."

미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외로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검은 액체와 섞였다. 액체가 끓어올랐다. 거품이 터지면서 소리가 났다.

"왜요?"

미리 자신의 목소리였다. 5년 전 목소리. 장례식장에서 혼자 중얼거리던.

"왜 나만 남았어?"

가슴이 찢어졌다.

---

벽이 무너졌다.

정확히는 반투명한 막이 찢어졌다. 그 너머에서 뭔가 쏟아져 들어왔다.

붉은 빛이었다.

외로움보다 컸다. 성인 남자만 했다. 형태가 불규칙했다. 각이 져 있었다. 가시 같은 게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또 시작이네."

목소리가 낮았다. 거칠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분노였다.

미리는 알 수 있었다. 이름을 듣지 않아도. 저 붉은 빛이 뿜어내는 열기가 피부를 태웠다. 멀리 있는데도 뜨거웠다.

"넌 항상 그래. 외로움한테는 착해. 슬픔한테도 참아줘. 근데 나한테는?"

분노가 다가왔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떠 있던 책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노트북 화면이 깨졌다.

"나는 가둬두지."

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화를 내. 필요할 때는."

"거짓말."

분노의 가시가 뻗어 나왔다. 미리의 팔을 스쳤다. 피부가 찢어졌다. 피가 났다. 검은색이었다.

"마지막으로 소리 지른 게 언제야? 3년 전? 4년?"

"..."

"정확한 숫자 좋아하잖아. 세봐."

미리의 입술이 떨렸다.

'1,247일.'

숫자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화를 낸 날. 대학 동기가 논문 공저자에서 미리 이름을 빼던 날. 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연락을 끊었다.

"화내는 대신 뭘 했지?"

분노가 비웃었다.

"두통약 먹었지. 몇 알?"

"...3알."

"하루에?"

"...응."

"1,247일 동안?"

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금속을 긁는 것 같았다.

"3,741알. 네 간은 이미 망가졌어. 근데 넌 병원도 안 가지. 왜? 화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조였다.

"그건..."

"변명하지 마."

분노의 가시가 미리를 둘러쌌다. 열기가 강해졌다. 땀이 쏟아졌다. 검은 액체가 증발하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넌 화낼 자격이 있어. 부모님이 널 두고 간 것도, 동기들이 널 이용한 것도, 세상이 네 고통을 무시한 것도. 전부 화낼 이유야."

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어쩔 수 없다고?"

분노가 폭발했다.

가시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벽을 뚫었다. 천장을 찢었다. 공간 전체가 흔들렸다. 떠 있던 침대가 산산조각 났다.

미리는 바닥에 엎드렸다. 귀가 먹먹했다. 폭음이 머릿속을 채웠다.

"어쩔 수 없는 게 어디 있어!"

분노가 소리쳤다.

"부모님은 유언장도 안 남겼어! 장례 비용도, 빚도 전부 네가 떠안았지! 동기들은 네 연구를 훔쳐갔어! 근데 넌 한마디도 안 했어!"

"그건..."

"왜!"

미리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노가 바로 앞까지 왔다. 열기가 피부를 태웠다. 미리는 눈을 감았다.

"왜냐하면..."

목소리가 나왔다. 작았다.

"화내면... 정확히 말하면, 화를 내는 순간 나도 부모님처럼 될까 봐."

분노가 멈췄다.

---

침묵이 흘렀다.

열기가 식었다. 분노의 가시들이 천천히 움츠러들었다.

미리는 눈을 떴다.

분노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감정 수집가들

## 3부

"엄마가 그랬거든."

미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내는 사람은 추하다고. 감정 조절 못 하는 건 동물이랑 똑같다고."

분노의 가시가 완전히 사라졌다. 붉은 빛이 흐려졌다.

"그래서 참았어. 5년 동안. 아니, 정확히는... 그 전부터."

검은 액체가 허리까지 차올랐다. 미리는 숨을 들이켰다. 폐가 무거웠다.

"근데 엄마는 화를 냈어. 매일. 나한테만."

외로움이 다가왔다. 파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중 잣대네."

분노가 말했다. 목소리에서 열기가 빠졌다.

"응."

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그러니까, 화내면 엄마처럼 될까 봐."

"넌 네 엄마가 아니야."

새 목소리였다.

---

천장이 찢어졌다.

노란 빛이 쏟아져 내렸다. 따뜻했다. 열기가 아니라 온기였다.

형태가 내려왔다. 둥글었다. 외로움보다 작았다. 아기 주먹만 했다. 표면이 반짝였다. 비눗방울처럼.

"오랜만이네, 미리야."

목소리가 밝았다.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기쁨이었다.

미리는 숨이 막혔다.

"너... 너는..."

"응, 나. 잊었어?"

기쁨이 빙글 돌았다. 노란 빛이 흩날렸다. 검은 액체에 닿은 빛이 황금색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 한... 7년? 8년?"

"...9년."

미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확히 9년 2개월 17일."

"역시 숫자는 세고 있었네."

기쁨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종소리 같았다.

미리는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왜... 왜 이제 나타나?"

"부르지 않았잖아."

기쁨이 손 위에 내려앉았다. 무게가 없었다. 간지러웠다.

"한 번이라도 나를 찾았어?"

미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찾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9년 동안 단 한 번도 기쁨을 찾지 않았다. 슬픔은 억눌렀고, 외로움은 무시했고, 분노는 가뒀지만.

기쁨은 아예 잊었다.

"미안..."

"사과는 필요 없어."

기쁨이 손바닥에서 떠올랐다.

"그냥 궁금해. 왜 나를 버렸는지."

미리의 가슴이 조였다.

"버린 게 아니야. 그냥..."

"그냥?"

기쁨이 얼굴 앞까지 왔다. 노란 빛이 눈부셨다.

"그냥 기쁠 이유가 없었어."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이 갈라졌다.

---

검은 액체가 폭발했다.

미리는 비명을 삼켰다. 몸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손을 휘저었다. 잡을 게 없었다.

"미리!"

외로움이 소리쳤다.

분노가 가시를 뻗었다. 미리의 팔을 감았다. 뜨거웠다. 피부가 타들어 갔다.

"놓지 마!"

기쁨이 빛을 쏘았다. 노란 빛이 검은 액체를 밀어냈다. 잠깐 동안만.

미리는 가까스로 바닥을 짚었다. 손톱이 갈라졌다. 피가 났다.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이게 뭐야..."

숨이 턱까지 찼다.

"네 슬픔이야."

새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했다. 속삭임 같았다. 하지만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미리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액체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작았다. 기쁨보다도 작았다. 투명했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윤곽만 희미하게.

물방울 같았다.

"슬픔..."

미리가 중얼거렸다.

슬픔이 다가왔다. 촉감이 차갑지 않았다. 온도가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 나를 지웠어?"

목소리가 미리 자신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심장이 멎었다.

"지운 게 아니야..."

"거짓말."

슬픔이 미리의 발목을 감았다.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손을 봤다. 반투명해지고 있었다. 외로움처럼. 손가락 끝부터 천천히.

"뭐야, 이거..."

공포가 치밀었다. 손을 흔들었다. 소용없었다. 투명도가 높아졌다.

"네가 슬픔을 억누른 시간만큼."

슬픔이 말했다.

"넌 이미 사라지고 있었어."

팔꿈치까지 투명해졌다. 뼈가 비쳤다. 아니, 뼈도 투명했다. 안이 텅 비어 있었다.

"9년 2개월 17일."

슬픔이 속삭였다.

"네가 울지 않은 시간. 3,339일. 80,136시간."

미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정확히 그만큼, 넌 사라졌어."

어깨가 투명해졌다. 목까지 번졌다.

"안 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

"재밌네."

분노가 비웃었다.

"네가 날 가둔 동안, 슬픔이 널 잡아먹고 있었어."

외로움이 울었다. 파란 눈물이 쏟아졌다.

"미리, 우리를 받아들여. 그럼..."

"안 돼."

기쁨이 끼어들었다.

미리는 고개를 들었다. 가까스로.

기쁨의 빛이 어두워져 있었다. 노란색이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우리를 받아들이면..."

기쁨이 떨렸다.

"당신은 견딜 수 없을 거예요."

"무슨..."

"9년치 슬픔. 3,741알의 분노. 72번의 외로움."

기쁨이 슬픈 눈으로 미리를 봤다.

총 6,883자 · 약 14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너구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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