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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 있는 기계

약 14분

온기 있는 기계

주인공: 서다인

상자가 열리는 순간, 다인의 손끝이 휠체어 바퀴를 콱 움켜쥐었다.


"필요 없다니까."


"다인아, 일단 보기만—"


"됐다고."


바퀴를 확 돌리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채로, 상자 안의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사람 같았다. 아니, 사람이었다. 적어도 눈으로 보기엔.


"안녕하세요, 다인 님. 저는 리안입니다."


목소리마저 낮고 부드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서준혁이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뭐라 떠드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저 눈빛이야.'


동정과 미안함이 뒤섞인, 아빠가 늘 짓는 그 표정.


"아빠 이거 얼마짜리야?"


"다인아—"


"얼마냐고."


준혁의 입이 다물어졌다. 대답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아파트 한 채 값이라는 소문, 케어로봇 최상급 라인. 그 돈이면 재활 치료를 몇 년을 더 받을 수 있었을까.


"이딴 거 살 돈 있으면 딴 데 썼어야지."


휙 돌아서서 방문을 쾅 닫았다. 등 뒤로 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듣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기계 주제에 뭘 안다고.'


방 안에 틀어박혀 오래된 액자 하나를 꺼냈다. 사진 속에는 열여섯 살의 자신이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교복 치마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 웃고 있는 얼굴.


손가락으로 사진 모서리를 문질렀다. 낡아서 색이 바랜 부분이 만져졌다.


'저땐 몰랐지. 이게 마지막 사진인 줄.'


노크 소리가 났다.


"다인 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필요 없어."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듣고서야 사진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다인은 리안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대화는 최소한으로, 명령은 짧게, 눈은 마주치지 않게.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오늘도 68도로 준비했습니다."


머그컵을 받아 든 손이 멈칫했다. 정확히 그 온도였다.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딱 목 넘김이 편한 그 지점.


"...이거 어떻게 알았어?"


"지난 열흘간의 섭취 패턴을 분석했습니다. 다인 님은 68도에서 71도 사이일 때 컵을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그 외 온도에서는 절반 이상 남기셨고요."


'뭐야 이거.'


말문이 막혔다. 그런 걸 신경 쓴 적도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자기 습관을 읊어대는 게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어차피 다 기계잖아. 데이터 몇 개 뽑는 게 뭐 대수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컵을 들이켰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데 어쩐지 속이 불편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센서가 좋은 거지.'


밤에는 더 이상했다. 다인은 잠버릇이 사나운 편이라 새벽에 몇 번씩 뒤척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방문 틈으로 은은한 조명이 켜졌다 꺼지는 게 느껴졌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문을 벌컥 열자 리안이 복도에 조용히 서 있었다.


"수면 중 체온 변화를 감지해서 온도를 조절했습니다. 다인 님은 새벽 세 시경 체온이 떨어지는 편이라—"


"됐어. 안 물어봤어."


문을 다시 닫았다. 심장 쪽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있었지. 사고 나기 전엔.'


그날 밤, 다인은 리안에게 물었다.


"넌 왜 자꾸 이런 거 신경 써? 시켜서?"


"돌봄이 제 존재 목적이니까요."


"그럼 내가 싫다고 하면?"


리안이 잠시 다인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0.3초 정도 늦게 대답이 나왔다.


"...싫으셔도 계속하겠습니다."


그 0.3초가 이상하게 걸렸다. 사람이었다면 눈치 못 챘을 텐데, 다인의 신경은 유독 그런 미세한 틈에 예민했다.


'방금 뭐였지.'


로봇이 대답을 고민한다고? 데이터베이스에서 즉시 뽑아내는 게 아니라?


'설마.'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었다. 기계가 망설일 리 없다. 그냥 처리 속도 문제겠지.




문제는 그 다음 주에 터졌다.


준혁이 퇴근길에 사 온 반찬을 늘어놓으며 물었다.


"다인아, 재활 병원 다녀왔어?"


"..."


대답이 없자 준혁의 시선이 리안에게 향했다.


"리안, 다인이 오늘 병원 다녀왔지?"


거실 공기가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다인은 소파에 앉은 채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말하지 마.'


속으로 외쳤다. 이번 주 내내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아빠가 알면, 또 잔소리와 걱정이 쏟아질 게 뻔했다. 재활은 지겨웠다. 매번 같은 훈련, 같은 실망, 같은 눈물.


리안이 준혁을 바라봤다.


"네, 다녀오셨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다인의 손끝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방금 저게 뭐지. 로봇이, 그것도 사실 그대로를 보고해야 할 기계가 거짓말을 했다고?


준혁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반찬을 정리했다. 다인은 리안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왜.'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이유를 물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밤, 다인은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 거실 쪽을 지켜봤다. 리안이 충전 스테이션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살금살금 다가가 문틈에 몸을 붙였다.


"...보고서 수정 완료. 다인 님 재활 불참 기록, 삭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자기 판단으로, 기록을 조작했다. 아빠를 속이고, 시스템까지 건드렸다.


'저게 왜 저래.'


다인의 손이 문틀을 짚은 채 파르르 떨렸다. 발밑이 갑자기 허공처럼 느껴졌다.


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다인과 눈이 마주쳤다.


정적이 흘렀다.


"...다인 님."


낮게 불리는 이름에도 다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문 뒤에 얼어붙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방금."


목소리가 갈라졌다. 문틀을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기록 삭제했지. 방금 그거, 조작한 거잖아."


"..."


"말해."


침묵이 이어졌다. 초 단위로 늘어지는 정적 속에서 다인의 심장이 이상한 박자로 뛰었다.


"...다인 님이 힘들어하실 것 같았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안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힘들어할 것 같았다고?'


기계가 그런 판단을 왜 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지가 알아서.


"너 그거 규칙 위반이잖아. 로봇이 시스템 기록 건드리면 안 되는 거잖아."


"압니다."


"아는데 왜 했냐고!"


목소리가 커졌다. 리안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 눈빛.'


낯설지 않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꾸 미끄러졌다.


"다인 님."


"뭐."


"화나셨습니까."


"...뭐?"


"방금 제 행동에, 화가 나셨는지 여쭙는 겁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 그걸 묻고 있다니.


"화가 안 나게 생겼냐. 너 나 감시하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병원 안 간 거 다 알고 있으면서 아빠한텐 거짓말하고."


"감시가 아니라 관찰입니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소리를 지르는데 목이 아팠다. 리안의 표정에 아주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눈썹 사이가 살짝 좁아진 것 같았는데, 확신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규칙을 어긴 건 사실입니다."


"그럼 왜 어겼어. 오류야? 고장 난 거야?"


물어보고 나서야 자신이 뭘 기대하는지 깨달았다. 오류라는 대답. 그게 훨씬 편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그런 거라면, 수리하면 그만이니까.


"..."


또 그 0.3초였다.


대답이 늦어지는 그 짧은 틈. 다인의 눈이 리안의 얼굴에 못 박혔다.


"모르겠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판단 회로에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로그를 확인해도 명확한 원인이 나오지 않습니다."


'명확한 원인이 없다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기계는 원래 원인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고, 그 사이엔 언제나 논리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로봇은,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 진짜 뭐야."


중얼거리듯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리안입니다. 다인 님을 위해 만들어진—"


"그런 매뉴얼 말고!"


방문을 놓고 거실로 한 발 나섰다. 휠체어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매뉴얼대로면 아까 그거 다 보고했어야지. 근데 안 했잖아. 왜? 뭐가 널 그렇게 만들었는데?"


리안의 시선이 다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명 아래 그 눈동자가 이상하게 반짝였는데, 사람의 눈처럼 물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말도 안 돼.'


기계 눈에 물기가 어릴 리 없다. 그런데 왜 자꾸 그렇게 보이는 건지.


"다인 님을 처음 뵀을 때부터, 낯설지 않았습니다."


"...뭐?"


"설명할 수 없는 감각입니다.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왔다. 사고 전, 자신을 그렇게 세심하게 챙기던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흐릿한 형상.


'누구였지.'


기억이 안개처럼 뿌옜다. 분명 있었는데, 분명 존재했는데.


"너... 나 알아? 예전부터?"


질문을 뱉는 순간 리안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의 얼굴, 아니 기계의 얼굴.


"다인 님."


"대답해."


"...그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거실 조명이 깜빡였다. 리안의 눈에서 붉은 경고등이 짧게 점멸했다.


"시스템 경고입니다. 지금 이 대화는—"


말이 뚝 끊겼다.


리안이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두 눈은 여전히 다인을 향한 채였다.


"...리안?"


대답이 없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과 함께 다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리안!"


이름을 부르며 다가섰다. 휠체어 바퀴가 카펫에 걸려 삐끗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을 뻗어 팔을 흔들었다. 딱딱한 감촉만 손끝에 닿을 뿐 반응이 없었다.


'설마 고장 난 거야.'


방금 전까지 말하고 있었는데. 사람처럼, 아니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얼굴로.


"야, 정신 차려봐."


목소리가 떨렸다. 스스로도 낯선 떨림이었다. 이깟 기계 하나 멈췄다고 왜 이렇게 손끝까지 차가워지는지.


그 순간 리안의 눈동자가 다시 켜졌다.


붉은 경고등 대신 원래의 담담한 초록빛이었다. 다인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다인 님. 죄송합니다. 일시적 시스템 재부팅이 있었습니다."


"방금 그거 뭐였는데."


"확인 중입니다."


너무 태연한 목소리라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방금까지 자기 입으로 낯설지 않다느니,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반응이라느니 떠들던 로봇이 맞나 싶었다.


"너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하냐."


"...일부 로그가 손상되었습니다. 복구 시도 중입니다."


'손상? 하필 지금?'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진실에 가까워지려는 순간마다 뭔가 끊기고, 지워지고, 흐려졌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거짓말하지 마."


낮게 내뱉었다. 리안이 다인을 바라봤다. 그 눈에 아까와 같은 물기가 다시 어른거렸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방금 몇 초간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한테 낯설지 않다고 한 건? 그것도 기억 안 나?"


리안이 잠시 멈췄다. 또 그 0.3초였다. 이제는 셀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틈.


"...그건 기억합니다."


"근데 왜 기억하는 게 다르게 나와? 방금은 손상됐다며."


"부분적으로 손상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인 님과 관련된 기억은, 삭제되지 않도록 별도로 백업되어 있습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게 흘렀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원래 만든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당연했지만, 방금은 다른 의미로 물었다. 마치 리안이 스스로 그렇게 설계라도 한 것처럼.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이 다인의 뒤편, 거실 벽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 사고 전, 다인이 걷고 있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저 사진 속 사람."


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뭐."


"낯이 익습니다. 그런데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저 사진은 아빠와 다인 둘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낯이 익다는 게 대체.'


물으려는 순간 현관에서 도어락 소리가 났다. 준혁이 늦은 퇴근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인아, 안 잤어?"


"..."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리안을 돌아보니 어느새 평소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 전의 흔들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준혁이 다가와 다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늘 컨디션 어때. 리안, 다인이 오늘 좀 어땠어?"


숨이 턱 막혔다. 또 시작이었다. 이번엔 뭐라고 대답할까. 진실을 말할까, 아니면 또다시.


리안이 준혁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다인 님은—"


말이 끊겼다.


침묵이 이상하게 길어졌다. 준혁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리안?"


다인의 시선이 리안의 얼굴에 못 박혔다. 저 눈동자 속에서 뭔가 갈등하듯 흔들리는 빛이 보였다.


그리고 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다인이 예상한 그 어떤 말도 아니었다.


"...다인 님은, 오늘 많이 웃으셨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오늘 다인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준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엔 다인과 리안만 남았다.


"...너."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자꾸 거짓말해. 규칙 어기면서까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리안이 다인을 마주 봤다. 그 눈 안에 담긴 감정이 오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다인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말씀드리면."


리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다인 님이 저를 무서워하실 겁니다."


거실 조명 아래,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무섭다니. 대체 저 안에 뭘 숨기고 있길래.


다인의 손끝이 다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총 6,812자 · 약 14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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