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6,913자

설사노트: 복수의 향기

주인공: 한민준

강태오의 발이 복도 바닥을 찍어 누를 때마다 1학년 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 죄송합니다. 진짜 몰라서..."

"몰라서?"

태오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교실 안 애들이 고개를 돌렸다. 본 척하면 다음은 자기 차례니까.

민준은 창가 자리에서 교과서를 펼쳐 든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매일 똑같네.'

태오는 복도 한가운데서 1학년 애를 벽에 밀어붙였다. 3학년 6반을 지나갈 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게 성광고 불문율이었다. 지키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다음엔 기어서 지나가. 알았어?"

"...네."

태오가 애를 밀쳐냈다. 1학년은 비틀거리며 복도 끝으로 도망쳤다.

민준의 시선이 태오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저 넓은 어깨, 저 당당한 걸음걸이. 3년 내내 저랬다.

'언젠간.'

교과서 모서리가 손톱 밑으로 파고들었다. 민준은 책을 덮었다.

종이 울렸다.

***

방과 후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민준은 구관 쪽으로 걸어갔다. 신관 화장실은 사람이 많아서 싫었다. 누가 옆 칸에 있으면 소리가 신경 쓰였다.

구관 복도는 어두웠다. 전등 절반이 나가 있었고, 창문마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3학년 애들도 이쪽은 안 왔다.

민준이 화장실 문을 밀었다.

낡은 타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면대 수도꼭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세 번째 칸 문 아래로 뭔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뭐지?'

민준이 다가갔다. 갈색 노트였다. 표지가 낡아서 가죽인지 종이인지 구분이 안 갔다.

손을 뻗었다.

노트를 집어 드는 순간, 형광등이 깜빡였다.

민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표지에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설사노트 (Diarrhea Note)

"...뭐야, 이거."

민준이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또박또박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사용 규칙

1.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의 배변 활동을 조종할 수 있다.

2. 노트 주인은 '요정의 눈'으로 대상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3. 효과는 즉시 발동되며, 강도와 타이밍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민준이 피식 웃었다.

"누가 장난으로 만든 건가."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크크크, 장난이라뇨?"

민준이 돌아봤다.

세면대 위에 뭔가 앉아 있었다.

갈색 털로 뒤덮인, 손바닥만 한 생명체. 두 눈은 까맣게 빛나고 있었고,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민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새 주인님이시네요~"

생명체가 폴짝 뛰어 민준 어깨에 올라앉았다. 민준은 노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저, 저리 가..."

"제 이름은 뿌리예요. 설사노트의 요정이죠. 주인님만 저를 볼 수 있어요."

뿌리가 민준 귀 옆에서 킥킥 웃었다.

민준은 뒤로 물러섰다. 등이 화장실 문에 부딪혔다.

'환각이야. 공부 너무 많이 해서...'

"환각 아니에요~"

뿌리가 민준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 천장에 매달렸다.

"노트를 주웠으니 이제 주인님 거예요. 규칙은 다 읽으셨죠?"

민준이 노트를 내려다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게... 진짜라고?"

"당연하죠. 한번 써보시면 알아요."

뿌리가 거꾸로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았다.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노트를, 이 요정을...

'믿을 수 있을까?'

뿌리가 민준 앞으로 떨어졌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민준 손바닥에 착지했다.

"주인님, 복수하고 싶은 사람 있으시죠?"

민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복수.

그 단어가 가슴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있어."

"그럼 적어보세요. 이름만 쓰면 돼요."

뿌리가 손뼉을 쳤다.

민준은 노트를 펼쳤다. 펜을 꺼냈다.

'시험 삼아...'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2학년 5반, 김현수.

작년에 민준 가방을 복도 창밖으로 던진 놈이었다. 교과서며 필통이며 전부 운동장에 떨어졌었다. 태오 무리 중 하나.

이름을 다 쓰는 순간, 노트가 희미하게 빛났다.

민준의 눈앞에 반투명한 화면이 펼쳐졌다.

"...뭐야?"

화면 속에 운동장이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달리고 있는 김현수가 보였다. 체육복 차림이었다.

'요정의 눈...'

민준의 입이 벌어졌다.

"주인님, 이제 명령만 내리시면 돼요. 설사, 변비, 방귀, 뭐든지요."

뿌리가 민준 어깨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민준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현수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체육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설사 신호."

민준이 속삭였다.

"지금."

순간, 화면 속 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수가 달리다

달리던 발이 멈춰 섰다.

화면 속 현수가 트랙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혔다. 체육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었지만, 현수는 움직이지 못했다.

"크크크, 시작됐어요!"

뿌리가 민준 어깨에서 깡충 뛰었다.

민준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현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양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비틀거렸다.

'진짜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심장은 오히려 뜨거웠다.

"주인님, 강도 조절도 가능해요. 더 세게 할까요?"

"...아니."

민준이 노트를 덮었다. 화면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충분해."

구관 화장실을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민준은 신관 쪽으로 걸었다. 뿌리는 어깨 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

다음 날 아침, 복도는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야, 들었어? 김현수 어제 운동장에서..."

"진짜? 미쳤네."

민준은 사물함 앞을 지나가며 귀를 쫑긋 세웠다.

"체육 선생님 앞에서 그랬대. 완전 창피했겠다."

"쟤 원래 배 약한가?"

학생들이 키득거렸다.

민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교실로 들어서는데, 뿌리가 귓속말했다.

"주인님, 기분 좋으시죠?"

"...그냥."

하지만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어제 그 자리였다. 현수가 쪼그려 앉았던 곳.

'한 명은 끝났어.'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발소리. 여러 명이 함께 걷는 소리.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강태오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뒤에 세 명이 따라붙어 있었다. 2학년 애들이 황급히 비켜섰다.

태오의 시선이 민준 쪽으로 향했다.

'...왜?'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교과서를 펼쳤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멈췄다.

민준의 책상 바로 옆에서.

"야."

태오의 목소리였다.

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2학년 5반 아는 애 있어?"

"...왜요?"

"김현수. 걔 어제 이상한 일 당했거든."

태오의 눈빛이 차가웠다.

민준의 손가락이 책장을 넘겼다. 뿌리가 어깨에서 몸을 낮췄다.

"모르는데요."

"그래?"

태오가 민준 책상을 손으로 탁 쳤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우리 패거리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잘 알아두고."

태오가 돌아섰다. 뒤따라온 애들이 민준을 한 번씩 쏘아보고 지나갔다.

민준은 책을 쥔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한테 왜...'

가슴속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도 모를 텐데.

뿌리가 속삭였다.

"주인님,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저 인간도 곧..."

"...조용히 해."

민준이 노트를 가방에서 꺼냈다. 책상 서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종이 울렸다.

***

점심시간, 민준은 구석 자리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급식실은 시끄러웠다. 쟁반 부딪는 소리, 웃음소리, 고함.

민준은 그 소음 속에서 혼자였다.

'태오는 왜 날 의심한 거지?'

숟가락을 놓았다. 밥맛이 없었다.

"주인님, 저기요."

뿌리가 민준 귀에 대고 말했다.

"3학년 쪽 보세요."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창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 애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이서연이 있었다.

긴 생머리, 하얀 피부. 성광고 여신이라 불리는 애였다.

서연이 태오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태오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의 시선이 서연에게 고정됐다.

'저 애가 왜 태오 옆에...'

뿌리가 킥킥 웃었다.

"주인님, 질투 나세요?"

"...아니."

"거짓말. 얼굴에 다 써 있어요."

민준이 시선을 떼려는데, 서연이 일어났다.

쟁반을 들고 태오 옆을 떠났다. 태오는 서연의 뒷모습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밥을 먹었다.

민준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저런 놈이...'

그때, 옆 테이블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야, 태오 오빠랑 서연이 사귀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서연이가 고백했는데 차였대."

"진짜? 그럼 왜 맨날 붙어 다녀?"

"서연이가 포기 안 하는 거지. 태오 오빠는 관심도 없는데."

민준이 귀를 기울였다.

고백. 거절. 포기하지 않는 여자애.

'...흠.'

입꼬리가 올라갔다.

뿌리가 민준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주인님, 뭔가 생각나셨죠?"

"...아직은 아니야."

민준이 쟁반을 들고 일어났다.

급식실을 나오는데, 복도에서 서연과 마주쳤다.

서연이 민준을 스쳐 지나갔다. 은은한 샴푸 향기가 났다.

민준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서연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옥상 쪽으로.

'...왜 저기로?'

민준은 복도 끝에서 멈춰 섰다.

서연이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보였다.

'혼자?'

뿌리가 민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인님, 요정의 눈 써보실래요?"

"...그래."

민준이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펼쳐서 서연의 이름을 떠올렸다.

반투명 화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옥상 난간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다. 서연이 난간에 기대어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누구 기다리나?'

화면 속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옥상 문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민준의 손가락이 굳었다.

강태오가 옥상으로 들어왔다.

"야, 뭔데?"

태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어왔다.

서연이 핸드폰을 내렸다.

"오빠, 시간 내줘서 고마워."

"바쁜데. 빨리 해."

태오가 난간에 등을 기댔다.

서연이 한 발 다가섰다. 민준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빠, 나... 오늘 할 얘기가 있어서."

"...또?"

태오가 고개를 돌렸다. 짜증 섞인 표정이었다.

서연의 손이 떨렸다.

"오빠, 나 진심이야. 지난번에 내가 고백했을 때..."

"서연아."

태오가 서연을 똑바로 봤다.

"나 너한테 관심 없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민준의 입술이 말라갔다.

'...저 자식.'

"근데 왜 자꾸 따라다녀? 재미있으면 가줄게, 그랬잖아. 근데 이게 재미있냐?"

태오가 돌아서려는데, 서연이 태오 팔을 잡았다.

"오빠, 한 번만 더 생각해줘. 나 정말..."

"야."

태오가 서연 손을 뿌리쳤다.

"집착하지 마. 보기 안 좋아."

서연이 비틀거렸다.

민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트가 구겨질 것 같았다.

뿌리가 민준 어깨를 톡톡 쳤다.

"주인님, 저 인간 혼내줄까요? 지금 당장?"

"...아니."

민준이 화면을 끄지 않았다.

태오가 옥상 문 쪽으로 걸어갔다. 서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기다려.'

민준이 노트를 펼쳤다. 펜을 꺼냈다.

'지금이 아냐.'

***

방과 후, 민준은 교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뿌리가 민준 책상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주인님, 심심해요. 오늘은 안 쓰실 거예요?"

"...쓸 거야."

민준이 노트를 펼쳤다.

강태오 - 오후 5시 30분, 옥상에서 급성 설사 신호 발동.

손목시계를 봤다. 5시 20분.

'10분 남았어.'

민준은 요정의 눈을 다시 켰다. 화면 속에 복도가 보였다.

태오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왜 또 옥상으로?'

뿌리가 민준 어깨에 올라탔다.

"크크크, 주인님 완벽해요. 타이밍 예술이에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태오가 옥상 문을 열었다.

서연이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또 만나는 거야?'

태오가 다가갔다.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오빠."

"뭐야, 또 부른 거야?"

태오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빠가 문자 보냈잖아. 옥상에서 할 얘기 있다고..."

"...뭔 소리야?"

태오가 멈춰 섰다.

"나 문자 안 보냈는데?"

서연이 핸드폰을 꺼냈다. 태오도 주머니를 뒤졌다.

민준의 심장이 빨라졌다.

'누가 문자를...?'

뿌리가 민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주인님, 이거 함정 아니에요?"

"...닥쳐."

민준이 화면을 더 가까이 당겼다.

태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야, 누가 장난친 거 같은데."

"...장난?"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태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윽..."

태오가 배를 움켜쥐었다.

민준의 손목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켰다.

'시작됐어.'

뿌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크크크! 터진다 터져!"

화면 속 태오가 비틀거렸다. 서연이 황급히 다가섰다.

"오빠, 괜찮아?"

"...비켜."

태오가 서연을 밀쳤다. 옥상 문 쪽으로 달려갔다.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계획대로야.'

그런데.

태오가 문을 열려는 순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뭐야?"

태오가 손잡이를 흔들었다.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준이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겼어?'

서연이 태오 옆으로 달려왔다.

"오빠, 문이 왜...?"

"모르겠어. 잠긴 것 같은데."

태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양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민준의 손에 땀이 났다.

'누가 문을 잠근 거야?'

뿌리가 민준 어깨를 톡톡 쳤다.

"주인님, 이거... 누가 일부러 가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민준이 노트를 내려다봤다.

그때, 화면 속에서 옥상 반대편 구석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군가 숨어 있었다.

민준의 숨이 멎었다.

총 6,913자 · 약 14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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