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내게 남긴 것들
주인공: 한서윤
새벽 네 시, 서윤은 비명을 삼키며 눈을 떴다.
꿈속에서 민혁이 손을 뻗고 있었다. 하얀 병실, 링거 줄에 묶인 손목.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가 뭐라 말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윤이 한 발 다가서려는 순간, 민혁의 손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하."
거친 숨이 어둠 속에 흩어졌다. 서윤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창밖은 아직 컴컴했다. 1월 1일. 새해 첫날.
'새해 복 많이 받아, 서윤아.'
작년 이맘때 민혁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서윤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잠은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시선이 책장 위로 향했다. 거기, 먼지 쌓인 액자 옆에 놓인 나무 상자. 민혁이 죽기 사흘 전, 재희에게 맡겼던 것. '1월부터 12월까지, 매달 1일에 하나씩 열어봐.'
서윤은 천천히 일어나 상자 앞에 섰다. 손을 뻗었다가 움찔 거뒀다. 그러다 다시 뻗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하얀 봉투 열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맨 앞 봉투에는 '1월'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혁의 글씨. 삐뚤삐뚤하지만 또렷한.
"...음."
서윤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찢으면 끝이다. 민혁이 남긴 마지막 말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거다. 열두 달이 지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다.
그래도 서윤은 봉투를 찢었다.
편지지 한 장. 짧은 문장 몇 줄.
'서윤아, 오늘은 한남동 그 카페 가. 네가 좋아하던 자리에 앉아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창밖을 10분만 봐. 아무 생각 안 해도 돼. 그냥 있어줘. — 민혁'
서윤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냥 있어줘'라는 말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냥 있어. 네가 없는데.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해가 뜨려면 아직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
오전 열 시, 서윤은 한남동 골목 앞에 서 있었다.
'책과 쉼표'. 독립서점 겸 카페. 민혁이 원고 쓸 때마다 끌고 오던 곳. 서윤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손잡이를 잡았다.
따르릉.
문이 열리며 종소리가 울렸다. 카페 안은 따뜻했다. 원두 볶는 냄새, 은은한 재즈, 책장 가득한 헌책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서윤을 보자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서윤 씨?"
"...안녕하세요."
서윤은 작게 고개 숙였다. 주인은 카운터를 나와 서윤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언제 이후지... 작년 여름?"
"...네."
"혼자 오셨어요?"
"...네."
대답이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주인이 뭔가 눈치챈 듯 말을 멈췄다. 서윤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따뜻한 걸로."
"...알겠어요."
주인이 카운터로 돌아가는 동안 서윤은 카페 안을 둘러봤다. 창가 자리. 민혁이 앉던 자리. 지금은 비어 있었다.
서윤은 그쪽으로 걸어갔다. 의자를 빼내 앉았다.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민혁도 여기 손을 올렸었다. 노트북 두드리면서, 커피 마시면서, 서윤 손 잡으면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주인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컵 옆에 작은 쿠키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서비스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서윤은 커피를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웠다. 주인이 물러간 뒤, 서윤은 창밖을 봤다.
겨울 햇살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노부부. 자전거 탄 배달원. 모두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10분. 민혁이 시킨 시간.
서윤은 핸드폰을 꺼내 타이머를 맞췄다. 10분 00초. 시작 버튼을 눌렀다.
09분 59초.
09분 58초.
창밖을 봤다 창밖을 봤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09분 30초.
'아무 생각 안 해도 돼.'
민혁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근데 그게 제일 어려웠다. 아무 생각도 안 하면 오히려 모든 생각이 몰려왔다.
병실 복도에 앉아 있던 날. 의사가 나와서 고개를 저었던 순간. 민혁의 마지막 숨소리. 장례식장 빈 의자들.
08분 12초.
눈가가 뜨거워졌다. 서윤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뜨거웠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괜찮아. 괜찮아.'
속으로 되뇌었지만 소용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저기."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옆 테이블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랐다.
남자는 냅킨 몇 장을 서윤 쪽으로 밀었다.
"...괜찮으세요?"
"...네."
서윤은 재빨리 눈가를 닦았다. 냅킨을 받지 않았다.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냅킨을 도로 당겼다.
"...죄송합니다. 괜한 짓을."
"아뇨. 괜찮아요."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다시 봤다.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06분 40초.
타이머는 계속 흘렀다. 서윤은 커피를 다시 마셨다. 눈물을 삼켰다. 그렇게 10분을 채웠다.
띠리리링.
타이머가 울렸다. 서윤은 핸드폰을 껐다.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했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오실 거예요?"
"...글쎄요."
서윤은 대답을 흐렸다.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카페 문을 나서는데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서윤은 목도리를 여미고 골목을 걸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서윤은 멈췄다. 돌아보니 아까 그 남자였다. 손에 뭔가 들고 있었다.
"...이거."
장갑이었다. 서윤의 장갑.
"카페에 두고 가셨어요."
"...아."
서윤은 장갑을 받았다. 남자는 잠깐 서윤을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남자가 돌아서려는 순간, 서윤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뒤돌아봤다. 서윤은 장갑을 꼭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리고 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후반부
남자가 돌아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서윤은 장갑을 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따라왔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서윤은 고개를 저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서자 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사람들이 바빴다.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서윤만 제자리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재희였다.
"언니, 어디야? 집에 없던데."
"...밖."
"어디? 혼자?"
"응."
재희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지 열었어?"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 지금 갈게. 어디 있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은 게 아니잖아. 오늘 1월 1일이야. 민혁 오빠가 돌아가신 지 딱 반년..."
"재희야."
서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재희가 말을 멈췄다.
"나... 좀 혼자 있고 싶어."
"...언니."
"미안. 나중에 연락할게."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손이 떨렸다.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서윤은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주웠다. 화면에 금이 가 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깨진 건 핸드폰만이 아니었다.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서윤 앞을 가로막았다. 올려다보니 재희였다.
"...어떻게."
"추적했지. 언니 위치 공유 켜놨잖아."
재희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뛰어온 모양이었다. 서윤은 천천히 일어났다.
"나 괜찮다고 했잖아."
"괜찮은 척하지 마. 언니 눈 다 퉁퉁 부었어."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재희가 서윤의 팔을 잡았다.
"카페 가자.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방금 마셨어."
"그럼 밥이라도. 아침 먹었어?"
"...배 안 고파."
"언니!"
재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봤다. 재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언니, 이러지 마. 민혁 오빠가 보면 얼마나 속상해."
그 말에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미안. 그게 아니라..."
"민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
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재희가 눈을 크게 떴다.
"민혁이가 뭘 속상해해.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느껴. 아무것도."
"언니..."
"나 혼자 있고 싶다고 했잖아. 왜 자꾸 쫓아와."
서윤은 재희의 손을 뿌리쳤다. 재희가 비틀거렸다. 서윤은 돌아서서 걸었다. 재희가 뒤에서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
서윤은 한강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강물이 회색빛으로 일렁였다. 서윤은 난간에 팔을 기댔다.
'민혁아.'
속으로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민혁은 죽었다.
서윤은 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바람에 편지가 펄럭였다. '그냥 있어줘'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어떻게 그냥 있어. 네가 없는데. 네가 좋아하던 카페에 혼자 앉아서 커피 마시고 창밖 보고. 그게 뭐가 의미 있어.
눈물이 또 났다. 서윤은 편지를 꽉 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보고 싶어."
말끝이 바람에 흩어졌다. 서윤은 난간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쇠 난간이 피부에 닿았다.
'서윤아.'
민혁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환청이었다. 서윤은 눈을 감았다.
'너 혼자가 아니야.'
거짓말. 나 혼자야. 완전히.
핸드폰이 울렸다. 서윤은 핸드폰을 꺼냈다. 재희였다. 서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또 받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가 왔을 때 서윤은 전화를 받았다.
"...뭐."
"언니, 미안해. 아까 내가 너무 심했어."
재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지 않아. 나... 언니한테 상처 준 거 알아. 근데 나도 무서워. 언니가 혼자 있으면 무슨 일 생길까 봐."
서윤은 난간을 내려다봤다. 강물이 멀리 보였다.
"... "...아무 일도 안 생겨."
"언니, 지금 어디야?"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가 다급하게 물었다.
"한강이야? 언니 위치가 한강으로 나오는데..."
"집 갈게."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난간에서 몸을 떼고 돌아섰다.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가방 속에서 뭔가 느껴졌다. 서윤은 가방을 열었다. 나무 상자. 언제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아마 집 나올 때 무의식중에 챙긴 모양이었다.
상자를 꺼내 열었다. 하얀 봉투 열한 개. 2월부터 12월까지.
서윤은 '2월' 봉투를 꺼내 들었다. 찢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민혁이 정해놓은 규칙. 매달 1일에만.
그런데 손이 움직였다.
봉투 귀퉁이가 찢어졌다.
"...아."
서윤은 화들짝 손을 거뒀다. 봉투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람이 불어 봉투가 굴러갔다.
서윤은 뛰어가서 봉투를 주웠다. 귀퉁이가 조금 찢어졌지만 안은 무사했다. 서윤은 봉투를 꽉 쥐고 주저앉았다.
"...미안해."
누구한테 사과하는지 몰랐다. 민혁한테? 자기 자신한테?
서윤은 봉투를 다시 상자에 넣었다.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윤을 힐끗거렸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민혁이 좋아하던 색이었다.
'서윤아, 저 하늘 봐. 예쁘지?'
민혁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서윤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싶어."
이번엔 소리 내서 말했다. 옆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서윤을 돌아봤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또 재희였다. 서윤은 이번엔 바로 받았다.
"...응."
"언니, 제발. 집 가. 내가 치킨 시킬게. 언니 좋아하는 거."
"...배 안 고파."
"그래도 먹어.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 나 진짜 걱정돼. 오늘 하루만 같이 있자. 응?"
"...알았어."
"진짜? 지금 집 가는 거야?"
"응."
"알았어. 나 30분 뒤에 갈게. 그때까지 집에 있어야 돼. 약속."
"...약속."
서윤은 전화를 끊었다. 일어서서 다리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집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서윤은 중간에 몇 번이나 멈춰 섰다. 그때마다 민혁 생각이 났다.
'서윤아, 천천히 가도 돼. 나 기다릴게.'
민혁은 항상 서윤을 기다려줬다. 서윤이 말을 더듬어도, 대답이 늦어도, 울기만 해도. 그냥 옆에 있어줬다.
이제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재희가 먼저 와 있었다.
"언니!"
재희가 달려와서 서윤을 꽉 안았다. 서윤은 몸을 굳혔다.
"...아파."
"미안. 근데 너무 걱정했어."
재희가 몸을 떼고 서윤을 살폈다. 서윤의 얼굴이 창백했다.
"집 들어가자. 춥겠다."
재희가 서윤의 팔을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불을 켜지 않고 나왔던 모양이었다.
재희가 불을 켰다. 거실이 환해졌다. 서윤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치킨 시킬게. 뭐 먹고 싶어?"
"...아무거나."
재희가 핸드폰으로 주문을 했다. 서윤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언니, 물 마셔."
재희가 물을 건넸다. 서윤은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목이 칼칼했다.
"...고마워."
"뭐가. 당연한 거지."
재희가 서윤 옆에 앉았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재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아까 내가 한 말... 정말 미안해."
"괜찮아."
"괜찮지 않아. 나도 알아. 민혁 오빠 없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근데 나는... 언니가 무너질까 봐 너무 무서워."
서윤은 재희를 봤다. 재희의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나 안 무너져."
"...그래 보이지 않아."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재희가 서윤의 손을 잡았다.
"언니, 나한테 기대도 돼. 혼자 견디지 마."
서윤은 손을 빼려다가 그냥 뒀다. 재희의 손이 따뜻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치킨이 왔다. 재희가 받아왔다.
"자, 먹어."
재희가 치킨을 펼쳤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서윤은 한 조각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맛있지?"
"...응."
서윤은 억지로 삼켰다. 재희가 걱정스럽게 서윤을 봤다.
"언니, 편지... 뭐라고 쓰여 있었어?"
서윤은 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재희에게 건넸다. 재희가 읽었다.
"...카페 갔었구나."
"응."
"혼자?"
"...아니."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랑?"
"모르는 사람. 그냥... 옆 테이블에 있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냥 장갑 주워줬어."
서윤은 장갑을 꺼내 보였다. 재희가 장갑을 만져봤다.
"...민혁 오빠가 선물해준 거 아니야?"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 2월 편지는 언제 열 거야?"
"...2월 1일."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까 봉투를 찢을 뻔했던 게 생각났다.
"...모르겠어."
재희가 서윤을 꽉 안았다.
"언니, 힘들면 나한테 전화해. 언제든지. 알았지?"
"...응."
재희는 밤늦게까지 있다가 돌아갔다. 서윤은 혼자 남았다.
거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민혁 생각이 났다. 편지 생각이 났다. 카페에서 만난 남자 생각이 났다.
'왜 따라왔을까.'
궁금했다.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중요하지 않다.
핸드폰을 켰다. 재희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언니 잘 자. 내일 아침에 전화할게.'
서윤은 답장을 보냈다.
'응. 잘 자.'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는데 알림이 떴다. 사진 앱 알림이었다.
'1년 전 오늘의 추억'
서윤은 알림을 눌렀다. 사진이 떴다. 민혁과 서윤이 함께 찍은 사진. 작년 1월 1일. 새해 첫날.
민혁이 웃고 있었다. 서윤도 웃고 있었다. 둘 다 행복해 보였다.
서윤은 사진을 확대했다. 민혁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눈물이 핸드폰 화면에 떨어졌다. 서윤은 사진을 끄고 핸드폰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 내서 울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
다음 날 아침, 서윤은 눈을 떴다.
해가 떠 있었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서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책장 위에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서윤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한 달 기다려야 해.'
민혁이 정한 규칙. 서윤은 그 규칙을 지키고 싶었다. 민혁이 남긴 마지막 것들이었으니까.
핸드폰이 울렸다. 재희였다.
"언니, 일어났어?"
"...응."
"아침 먹었어?"
"아직."
"나 지금 갈게. 같이 먹자."
"아니야. 괜찮아."
"언니..."
"진짜 괜찮아. 나... 나가야 돼."
"어디?"
서윤은 창밖을 봤다. 햇빛이 눈부셨다.
"...산책."
"혼자?"
"응."
재희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알았어. 근데 점심때 연락해. 안 하면 내가 찾아갈 거야."
"...알았어."
전화를 끊고 서윤은 옷을 갈아입었다. 민혁이 선물한 장갑을 꼈다.
밖으로 나왔다. 공기가 차가웠다. 서윤은 골목을 걸었다.
특별히 갈 곳은 없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민혁과 자주 걷던 길을 따라갔다.
한남동 쪽으로 발이 향했다. 어제 갔던 카페 근처였다. 서윤은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들어갈까.'
고민했다. 어제 운 것을 주인이 기억할까. 그 남자가 또 있을까.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저기요."
서윤은 돌아봤다. 어제 그 남자였다.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