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6,921자

우리가 부서지는 방법

주인공: 강서윤

새벽 네 시 반, 손목이 저렸다.

펜을 쥔 채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서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모니터 속 캐릭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밝은 노란색 말풍선 안에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대사가 적혀 있었다.

'역겹네.'

자기가 그린 그림이 자기를 비웃는 기분이었다.

마감까지 사흘. 아직 두 컷밖에 못 그렸다. 손목을 돌렸더니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긴 소매를 습관적으로 당겼다. 겨울도 아닌데 늘 긴팔을 입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윤 작가님, 진행 상황 어떠세요?"

편집자 지우였다. 새벽 다섯 시도 안 됐는데 벌써 연락이 왔다.

"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마감 꼭 지켜주셔야 해요. 이번 화 조회수가—"

"알아요. 걱정 마세요."

끊었다.

알아서 할게요, 라는 말이 입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실제로 괜찮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커피가 필요했다. 작업실에 남은 건 어제 마신 텀블러뿐이었다. 차가운 원두 찌꺼기 냄새가 났다.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3층 복도 전구가 깜빡였다. 이 건물은 늘 이랬다. 낡았지만 싼 게 장점이었다. 혼자 살기엔 충분했다.

편의점까지는 걸어서 2분.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5월인데도 서늘했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다. 길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만 외롭게 켜져 있었다.

편의점 자동문이 열렸다.

냉장고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뒷모습이 낯익었다.

키 큰 남자. 검은색 후드. 목덜미 라인이 익숙했다.

'설마.'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남자가 돌아섰다.

정민혁이었다.

1년 만이었다.

숨이 막혔다. 발이 바닥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민혁은 서윤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밝았다.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따뜻했다. 온도가 있었다.

"이 동네 사시나 봐요? 저도 요즘 여기 자주 와요."

서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민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이상하게 익숙한 기분이에요."

손목이 저렸다. 아니, 저린 게 아니라 아팠다. 무의식적으로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뇨."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민혁은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6개월 전에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많이 잃었거든요. 그래서 가끔 이런 착각을 해요."

기억을 잃었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자동으로 나온 말이었다. 타인을 위로하는 건 늘 쉬웠다.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오히려 편한 것도 있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민혁이 우유를 집어 들었다.

"전 요즘 근처 서점에서 일해요. 책 정리하고, 손님 응대하고. 단순한 일이지만 좋더라고요."

서점.

변호사였던 사람이 서점에서 일한다니.

"그래요. 다행이네요."

말이 자꾸 짧아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커피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민혁도 따라왔다.

"저기, 실례지만…"

그가 말을 꺼냈다.

"친구 해주실 수 있나요? 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요."

서윤의 손이 떨렸다.

계산대 위에 커피를 올려놓는데 캔이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순간, 민혁의 손이 재빠르게 잡았다.

그의 손이 서윤의 손등을 스쳤다.

뜨거웠다.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시간이 멈췄다.

민혁의 시선이 서윤의 손목으로 향했다. 소매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흰 살 위로 가느다란 선이 보였다.

흉터였다.

민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거…"

서윤은 재빨리 손을 빼냈다. 소매를 끌어내렸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또 그 말이 나왔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민혁이 뒤따라 나왔다.

"저기, 혹시 다친 거예요?"

"아뇨."

"하지만 아까 그건—"

"오래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차갑게 말했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민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실례했네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멀어지려는데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또 봬요. 이 동네 좁으니까."

대답하지 않았다.

작업실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캔 커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에 가느다란 선들이 있었다. 오래되어 희미해진 흔적들.

'기억을 잃었다고?'

민혁은 서윤을 몰랐다.

# 우리가 부서지는 방법 (Part 2)

민혁은 자신을 몰랐다.

그 사실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서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목을 내려다봤다. 희미한 선들이 형광등 아래서 빛났다.

'넌 왜 그렇게 약해?'

민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1년 전, 마지막으로 만난 날. 그는 서윤을 그렇게 몰아붙였다.

지금 편의점에서 만난 그 사람은 달랐다. 목소리에 온기가 있었다. 눈빛에 경멸이 없었다.

'이게 뭐야.'

캔 커피가 차가웠다. 손에 쥐었더니 땀이 맺혔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우였다.

"받아, 서윤아."

화면을 째려봤지만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받았다.

"...왜."

"마주쳤어? 민혁이."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아, 거기서 나와. 당장."

"어디로요."

"어디든. 그 사람 근처는 안 돼."

"그 사람은 날 모르는데요."

말끝이 떨렸다.

지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문제야. 넌 기억하는데 쟤는 몰라. 그게 얼마나 미칠 것 같은 상황인지 알아?"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내일 내가 갈게. 점심 먹자."

"마감이—"

"좋으니까 나쁘니까 대답만 해."

"...좋아요."

끊었다.

핸드폰을 던졌다. 소파 쿠션 위로 떨어졌다.

모니터가 꺼지지 않고 있었다. 화면 속 캐릭터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밝은 노란 말풍선. 환한 표정.

'역겹다고.'

마우스를 집어 던졌다. 모니터를 맞추진 못했다. 바닥에 떨어져 배터리가 튕겨 나갔다.

숨이 가빠졌다.

가슴이 조였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지만 숨은 쉬어졌다.

창밖을 내다봤다.

골목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후드를 입은 남자.

민혁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다. 3층 창문. 불 켜진 작업실. 서윤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들어 흔들었다.

환하게 웃었다.

서윤은 재빨리 커튼을 쳤다.

등을 벽에 기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왜 거기 있어.'

'왜 웃어.'

'왜 날 몰라.'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아까 그분이시죠? 창문에서 보였어요.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그냥 산책하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편히 쉬세요."**

민혁이었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을까.

아, 편의점.

계산할 때 멤버십 카드를 냈었다. 그때 본 건가.

'미쳤네.'

서윤은 답장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잠을 자야 했다. 마감까지 이틀 반. 두 컷밖에 못 그렸다.

하지만 눈이 감기지 않았다.

민혁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친구 해주실 수 있나요?'

그 말이 가장 아팠다.

친구.

1년 전엔 약혼자였는데.

***

아침 열 시, 지우가 왔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손에 비닐봉지를 가득 들고 있었다.

"샌드위치. 먹어."

"괜찮아요."

"좋으니까 나쁘니까만 대답하래도."

지우가 밀고 들어왔다. 작업실을 둘러봤다. 바닥에 널린 마우스, 꺼지지 않은 모니터, 구겨진 이불.

"...완전 엉망이네."

"알아요."

"씻었어?"

"어제."

"오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우가 한숨을 쉬며 샌드위치를 테이블에 놓았다.

"일단 먹어. 그다음에 얘기하자."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지우 앞에서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없었다. 아니,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민혁이 어땠어?"

지우가 물었다.

"달랐어요."

"뭐가?"

"전부."

서윤은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목소리도, 눈빛도, 말투도. 예전 그 사람이 아니었어요."

"기억을 잃었으니까."

"근데 왜 하필 여기 사는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지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민혁이 가족들이 이사시켰대. 새 출발하라고. 근처 서점에 자리도 구해줬고."

"여기가 하필 왜 새 출발이에요. 나랑 살던 동네 바로 옆인데."

"그건..."

지우가 말을 흐렸다.

"뭐예요."

"민혁 엄마가, 혹시 몰라서 그랬대. 네 근처에 있으면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을까 봐."

숨이 막혔다.

"미쳤네요."

"나도 그렇게 말했어. 근데 이미 계약 끝났대. 6개월 전에."

"6개월 전이면..."

서윤이 계산했다.

민혁이 사고 당한 직후였다.

"그 사람들, 진짜 나쁘네요."

"가족 입장에선 이해는 돼. 민혁이 기억 돌아오길 바라는 거잖아."

"근데 왜 나한테는 연락 안 했어요."

목소리가 커졌다.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여기 들이밀어 놓은 거예요?"

지우가 대답하지 못했다.

# 우리가 부서지는 방법 (Part 3)

서윤은 샌드위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 혼자 버텨볼게요."

"서윤아—"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지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 좀 해. 그 말."

"뭐요?"

"'알아서 할게요'. 넌 맨날 그 말만 해. 근데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거든?"

목소리가 떨렸다.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봤다. 햇살이 눈부셨다.

"...저도 알아요."

작게 말했다.

"근데 어떻게 해요. 다른 말이 안 나와요."

지우가 다가와 서윤의 어깨를 잡았다.

"일단 여기서 나와. 한동안 내 집에 있어."

"마감이—"

"노트북 들고 오면 되잖아."

"싫어요."

서윤이 지우의 손을 뿌리쳤다.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냥... 그냥 견딜게요."

"견디다가 부서지면?"

"이미 부서졌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 모두 문을 쳐다봤다.

노크가 다시 울렸다.

"택배예요?"

지우가 작게 물었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주문한 게 없었다.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강서윤 씨 계신가요?"

민혁이었다.

지우의 눈이 커졌다. 서윤은 숨을 참았다.

"어제 연락드렸던 정민혁이에요. 혹시 집 앞에 놓고 간 거 받으셨나 해서요."

뭘 놓고 갔다는 거지.

서윤은 문 쪽으로 다가갔다. 지우가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서윤은 문을 열었다.

민혁이 서 있었다. 손에 종이봉투를 들고.

"아, 안 주무셨네요. 다행이다."

환하게 웃었다.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웃음이 너무 낯설었다.

"어제 밤에 작업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침에 커피 놓고 갔는데 못 보신 것 같아서 다시 가져왔어요."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왜요."

서윤의 목소리가 나왔다.

"네?"

"왜 이러세요. 우린 남인데."

민혁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그냥, 친구 하고 싶어서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친구 필요 없어요."

차갑게 말했다.

민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봉투를 천천히 내렸다.

"제가 실례했나요?"

"네."

"죄송해요. 그냥 혼자 사시는 것 같아서, 힘드실까 봐..."

"혼자 사는 게 편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문을 닫으려는데 민혁이 손을 내밀었다.

문틈에 손이 끼었다.

"잠깐만요."

목소리가 간절했다.

서윤은 멈췄다.

민혁이 문틈 사이로 서윤을 봤다.

"혹시... 우리 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심장이 멎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꾸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어제부터 계속."

민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꿈을 꿨어요. 누가 우는 꿈. 여자 목소리였는데 얼굴은 안 보였어요. 근데 그 목소리가 당신이랑 비슷한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착각이에요."

"그럼 왜 이렇게 날 피해요?"

"안 피했어요."

"아까 손목 보고 놀랐잖아요. 왜요? 제가 뭘 잘못한 거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서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뒤에서 지우가 다가왔다.

"이봐요, 민혁 씨. 그만 가세요."

민혁이 지우를 봤다. 눈이 커졌다.

"...지우 씨?"

"날 기억해요?"

"아뇨. 근데 사진에서 봤어요. 제 옛날 사진첩에. 같이 찍힌 사진 있었거든요."

지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알겠네요. 우린 친구 사이였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왜요?"

"당신이 기억을 잃어서요."

민혁의 얼굴이 굳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과거에."

"많이요."

지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특히 서윤한테."

민혁이 서윤을 봤다.

"제가... 당신한테 뭘 했어요?"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약혼 파기했어요. 제가 약해서요.'

'손목 그은 날 날 버렸어요.'

'제 웹툰이 한심하다고 했어요.'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민혁이 한 걸음 다가왔다.

"말해주세요. 제발."

눈빛이 간절했다.

"제가 사과할게요. 뭐든지."

서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사과해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럼 뭘 해야 해요."

"아무것도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저 혼자 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또 그 말이 나왔다.

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뭐라고요?"

"혼자 두기 싫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당신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손이 가슴 위로 갔다.

"여기가. 자꾸 조여요. 당신 보면."

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민혁이 당황했다.

"왜 울어요? 제가 또 실수했나요?"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닫았다.

쿵.

민혁이 문을 두드렸다.

"강서윤 씨. 열어주세요."

"가세요."

"싫어요. 말 안 하면 계속 여기 있을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등을 문에 기댔다. 주저앉았다.

지우가 다

총 6,921자 · 약 14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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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힐링#감성#성장
H
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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