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낙원의 囚人
주인공: 서연우
눈을 뜨는 순간, 천장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새하얀 천장에 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고, 수정 샹들리에가 부드러운 빛을 흘렸다. 이불은 비단처럼 매끄러웠고, 베개는 깃털처럼 푹신했다.
'여기가... 어디지?'
서연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손끝이 차가웠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어제 뭘 했는지, 어디서 잤는지, 심지어 내가 누군지도 희미했다. 이름만 겨우 기억났다. 서연우. 그게 전부였다.
문이 열렸다.
"아가씨! 깨어나셨어요!"
하얀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뒤이어 은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얼굴은 조각처럼 정교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연우를 향했다.
"연우야."
남자가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연우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아빠가 여기 있어. 괜찮아."
'...아빠?'
연우의 손이 떨렸다.
본능이 소리쳤다. 이 사람을 모른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하지만 목구멍이 막혔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저... 저기..."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기억을 잃은 건가요?"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잠깐, 미세하게. 곧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하지만 괜찮아. 천천히 기억하면 돼."
그가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은 다정했지만, 연우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야. 이 사람... 내 아빠가 아니야.'
확신이 들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알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 금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고,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연우... 내 딸..."
여자가 달려와 연우를 껴안았다.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미와 바닐라. 달콤하지만 어딘가 숨 막히는.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정말... 정말 다행이야."
'엄마?'
연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의 품이 따뜻했다. 하지만 연우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이 사람도 모른다. 한 번도 본 적 없다.
"제가..."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가 연우를 떼어냈다. 눈물 어린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내가 미친 건가. 왜 이 사람들이 낯설지? 왜 거부감이 들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만약 내가 정말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면? 만약 내가 빙의한 거라면?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어디 갔을까?
'미안해...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미안해...'
"연우야, 배고프지?"
은발 남자가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배는 고팠다. 하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조금... 어지러워요."
"그럼 좀 더 쉬어. 아빠가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
남자가 일어섰다. 여자도 따라 일어났다.
"엄마는 주방에 가서 연우 좋아하는 수프 끓여올게."
'내가 좋아하는 수프?'
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침실이 조용해졌다.
연우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진정해. 일단 진정하자. 상황을 파악해야 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바닥이 차갑게 느껴졌다.
방을 둘러봤다. 화려했다. 벽에는 유화가 걸려 있고, 서랍장 위에는 은으로 만든 거울과 빗이 놓여 있었다. 옷장을 열자 비단 드레스들이 주르륵 걸려 있었다.
'이게... 다 내 거?'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소녀가 연우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열두 살쯤 돼 보였다.
'나... 맞나?'
손을 들어 볼을 만졌다. 거울 속 소녀도 똑같이 움직였다.
'이게 내 얼굴이야. 근데 왜 이렇게 어려? 나... 원래 몇 살이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득,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불안. 아니, 공포에 가까운.
'나... 회귀한 건가? 아니면 빙의? 아니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나, 들어가도 돼?"
낯선 목소리였다. 어린 남자아이 같았다.
"어... 응."
문이 열렸다.
은발의 소년이 들어왔다. 키는 연우보다 조금 작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연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기억나?"
소년이 물었다. 표정이 없었다.
"아니... 미안."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습관적으로 사과가 튀어나왔다.
소년이 한 발 다가왔다.
"난 율리안. 네 동생."
'동생?'
연우는 소년을 올려다봤다. 율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연우를 응시했다. 눈빛이 묘했다. 차갑지만, 어딘가 집착적인.
"...안녕."
연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율리안은 웃지 않았다.
# Part 2/3: 전개
"기억... 안 나."
연우는 한 발 물러섰다. 율리안의 시선이 따라왔다.
"그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알려줄게. 누나는 날 제일 좋아했어."
'제일... 좋아했다고?'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율리안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연우는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누나, 왜 피해?"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 꼬였다. 율리안의 눈빛이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기보단 공허했다. 감정이 없는 유리구슬 같았다.
"누나는 항상 내 손 잡고 정원 산책했어. 매일 밤 책도 읽어줬고. 기억 안 나도 상관없어."
소년이 연우의 손을 잡았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손이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이건... 뭔가 이상해.'
연우는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율리안의 손아귀가 단단했다.
"율리안, 나..."
"누나는 내 거야."
소년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문이 열렸다. 이사벨라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연우야, 수프 가져왔어. 율리안도 같이... 어머, 둘이 무슨 얘기해?"
율리안이 손을 놓았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환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냥 누나랑 인사했어요. 누나, 기억 못 해도 괜찮대요."
"그래, 착하네. 우리 율리안."
이사벨라가 율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우는 벽에 기댄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방금... 뭐였지?'
손목이 얼얼했다. 율리안이 잡았던 자리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연우야, 앉아. 식기 전에 먹어야지."
이사벨라가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하얀 그릇에 담긴 수프가 김을 내뿜었다. 버섯과 크림 냄새가 났다.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혹시 기억나?"
"아니요... 죄송해요."
또 사과가 튀어나왔다. 이사벨라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엄마 탓이 아니야."
여자가 연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이 따뜻했지만, 연우는 움츠러들었다.
'왜 이렇게 불편하지. 이 사람이 내 엄마라면서, 왜 이렇게 낯설지?'
율리안이 의자를 당겼다.
"누나, 앉아."
연우는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수프를 한 입 떴다. 크림이 혀에 감겼다. 맛있었다. 아니, 맛있어야 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조여 왔다.
"맛있어?"
이사벨라가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안이 옆에 앉았다.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숟가락을 놓을 때마다, 숨 쉴 때마다, 모든 움직임을 관찰했다.
'왜 저렇게 쳐다봐...'
등골이 오싹했다.
"율리안, 너도 먹어."
이사벨라가 율리안에게 빵을 건넸다. 소년은 빵을 받았지만 먹지 않았다. 그저 연우만 바라봤다.
"누나, 다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아파."
"...응."
연우는 억지로 수프를 비웠다. 속이 메스꺼웠다.
"잘했어. 이제 좀 쉬어. 오후엔 아빠랑 정원 산책하자."
"저... 혼자 있고 싶어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이사벨라의 얼굴이 굳었다.
"혼자? 왜?"
"그냥... 머리가 아파서요."
"그럼 엄마가 옆에서 간호해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연우는 일어났다. 이사벨라가 손목을 잡았다.
"연우야, 엄마가 싫어?"
목소리가 떨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만요."
"...그래. 알았어."
이사벨라가 손을 놓았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슬펐다.
연우는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숨이 막혔다.
'뭐가 이렇게 답답하지. 숨 쉬기도 힘들어.'
발소리가 멀어졌다. 문이 닫혔다.
침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연우는 이불을 걷어냈다. 천장을 바라봤다. 금빛 문양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 원래 몇 살이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희미하게 뭔가가 떠올랐다.
'스물다섯? 아니, 스물여섯?'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보다 나이가 많았다. 어른이었다.
'그럼 난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열두 살 몸에 있는 거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섭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문으로 다가갔다.
밖은 정원이었다. 장미 덤불과 분수가 보였다. 저 멀리 철문이 있었다. 높은 담장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기로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문득,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도망쳐. 여기서 나가.'
손이 창문 손잡이로 갔다. 돌렸다. 잠겨 있었다.
'왜 잠긴 거야?'
다시 돌렸다.
# Part 3/3: 위기-클리프행어
잠겨 있었다.
연우는 손잡이를 다시 돌렸다.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왜? 왜 잠긴 거야?'
심장이 빨리 뛰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뒤돌아섰다. 방문을 바라봤다. 문고리에 손이 갔다.
'나가자. 일단 밖으로.'
복도가 고요했다. 아무도 없었다.
연우는 맨발로 복도를 걸었다. 차가운 대리석이 발바닥에 닿았다. 양쪽 벽에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 은발이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연우를 따라왔다.
'이 사람들... 다 누구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홀이 넓게 펼쳐졌다. 샹들리에가 반짝였다.
"누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얼어붙었다. 천천히 돌아봤다.
율리안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인형처럼 가만히.
"어디 가?"
"그냥... 산책."
"혼자?"
소년이 한 계단 내려왔다.
"응."
"안 돼."
율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누나는 혼자 다니면 안 돼. 위험해."
"뭐가 위험한데?"
"누나가 또 다칠 수 있어."
'또?'
연우의 눈이 커졌다.
"내가... 언제 다쳤는데?"
율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억 안 나지?"
"...응."
"그럼 됐어. 중요한 건 이제 안전하다는 거니까."
소년이 계단을 내려왔다. 연우와 나란히 섰다.
"같이 가자. 내가 안내해줄게."
손이 연우의 손목을 잡았다. 차가웠다.
'싫어. 이 손 싫어.'
본능이 소리쳤다. 하지만 입은 다른 말을 했다.
"...고마워."
율리안이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누나는 착해. 항상."
두 사람은 복도를 걸었다. 율리안이 멈춰 선 곳은 서재 앞이었다.
"여기 들어가본 적 있어?"
"...모르겠어."
"그럼 들어가 보자."
율리안이 문을 밀었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서재는 어두웠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책장이 벽 한쪽을 가득 채웠다. 가죽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와 먼지 냄새도.
"아빠 서재야. 아빠는 여기서 일해."
율리안이 속삭였다.
연우는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카펫에 흡수됐다.
책상 위에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깃펜과 잉크병도 보였다.
'평범한 서재인데...'
그런데 왜일까. 가슴이 답답했다.
율리안이 책장 앞에 섰다.
"누나, 이거 봐."
소년이 책 한 권을 빼냈다. 딸깍, 소리가 났다.
책장이 옆으로 밀렸다.
뒤에 문이 있었다. 철문이었다. 손잡이가 없었다.
"...뭐야, 이거?"
연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율리안이 고개를 가웃했다.
"비밀 방. 아빠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래."
"그럼 왜 나한테 보여줘?"
"누나니까."
소년이 철문을 두드렸다. 쿵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여기 들어가면 안 돼. 절대."
"왜?"
"아빠가 그랬어. 누나가 들어가면... 위험하대."
'위험? 뭐가?'
연우는 철문을 바라봤다. 문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지하 냄새 같았다. 축축하고 퀴퀴한.
"안에 뭐가 있는데?"
"몰라. 나도 못 들어가 봤어."
율리안이 연우를 돌아봤다.
"근데 누나, 궁금해?"
"...아니."
거짓말이었다. 궁금했다. 미칠 것 같이.
'저 안에 뭐가 있길래 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율리안이 책장을 도로 밀었다. 철문이 사라졌다.
"나가자. 아빠한테 들키면 혼나."
두 사람은 서재를 나왔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레오나르드가 서 있었다.
"뭐 하는 거니?"
목소리가 낮았다. 차가웠다.
율리안이 대답했다.
"누나랑 산책하고 있었어요."
"서재엔 왜 갔어?"
"그냥... 구경."
레오나르드의 눈빛이 연우에게 향했다.
"연우야, 안에서 뭘 봤니?"
"아무것도요... 그냥 책이랑..."
"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다음부턴 서재 들어가지 마. 위험한 물건이 많아."
"네..."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 이렇게 긴장돼?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레오나르드가 연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연우야, 넌 우리 가족이야. 알지?"
"...네."
"가족은 서로 믿어야 해. 비밀 없이."
남자의 손이 어깨를 꽉 눌렀다. 아팠다.
"그러니까 아빠 말 잘 들어. 응?"
"네, 아빠..."
레오나르드가 손을 떼었다.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차가웠다.
"착하네. 이제 방에 가서 쉬어. 저녁 되면 부를게."
"네..."
연우는 계단을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문을 닫았다. 등을 기댔다.
'뭐야... 뭐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손이 떨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 문 안엔 뭐가 있는 걸까. 왜 날 못 들어가게 하지?'
창문으로 갔다. 또 손잡이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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