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개 세계의 어머니
주인공: 최유리
교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유리는 철제 펜스에 기댄 채 조현을 기다렸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시 47분. 아이는 늘 정확히 2시 50분에 나온다.
주변 학부모들이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유리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또 왔을까.'
어제도 봤다. 그제도. 일주일째다.
검은 후드. 멀찍이 서서 조현만 쳐다보는 인영.
유리는 주차장 쪽을 훑었다. 차들 사이. 가로수 뒤. 없다.
"엄마!"
조현이 뛰어왔다. 노란 가방이 등에서 덜컹거렸다.
유리는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얼굴을 살폈다. 상처는 없다. 표정도 괜찮다.
"급식 맛있었어?"
"응. 근데…"
조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또 그 사람이에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유리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교문 왼쪽, 횡단보도 건너편. 검은 후드를 쓴 여자가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서서 이쪽을 봤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후드가 깊게 눌려 있었다.
"괜찮아."
유리는 조현의 손을 꽉 잡았다.
"엄마가 지킬게."
아이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유리는 평소와 다른 길로 걸었다. 대로변 대신 주택가 골목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피했다.
'왜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본능이 그랬다. 사람 많은 곳이 더 위험하다고.
뒤를 돌아봤다.
검은 후드가 따라오고 있었다.
거리는 50미터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유리는 걸음을 빨리했다. 조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 무서워…"
"집까지만. 조금만."
골목이 좁아졌다. 담벼락 양쪽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발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 멈추지 않는다.
유리는 뛰었다. 조현의 손을 끌며.
"엄마!"
"괜찮아. 괜찮아."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열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씨…"
주웠다. 뒤를 봤다.
골목 입구가 비어 있었다.
사라졌다.
'어디로.'
숨소리만 들렸다. 조현의 것. 자신의 것.
유리는 아이를 안았다. 등을 토닥였다.
"들어가자."
현관문을 열려는데 조현이 소리쳤다.
"저기요!"
놀이터였다.
집 앞 작은 놀이터. 미끄럼틀과 그네 두 개.
미끄럼틀 뒤에 검은 후드가 서 있었다.
이번엔 가까웠다. 10미터.
유리는 조현을 뒤로 밀었다.
"집 안 들어가. 문 잠그고."
"엄마는요?"
"들어가."
목소리가 낮게 갈렸다.
조현이 울먹이며 현관으로 뛰어갔다.
유리는 가방을 뒤졌다. 호신용 스프레이. 손에 쥐었다.
검은 후드가 움직였다.
천천히. 미끄럼틀 뒤에서 나왔다.
오른손에 뭔가 들려 있었다.
칼이었다.
과도. 날이 짧고 뾰족한.
유리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철제 펜스에 닿았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후드 속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턱만 살짝. 피부가 창백했다.
"왜 우리 애를…"
여자가 달려들었다.
빨랐다.
칼이 허공을 갈랐다.
유리는 옆으로 몸을 틀었다. 스프레이를 뿌렸다.
캔에서 하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크윽!"
여자가 비틀거렸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후드가 뒤로 벗겨졌다.
유리는 얼어붙었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똑같은 눈. 코. 입술.
하지만 온 얼굴에 흉터가 난무했다.
세로로. 가로로. 깊게 파인 칼자국들.
눈꺼풀에도. 입술에도.
동공이 풀려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진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안녕."
목소리도 똑같았다.
유리는 숨이 막혔다.
'미친…'
여자가 칼을 다시 들어 올렸다.
"네 차례야."
유리는 스프레이를 한 번 더 뿌렸다. 여자의 눈을 향해.
"아악!"
여자가 뒤로 물러났다. 칼을 휘둘렀지만 빗나갔다.
유리는 돌아서서 뛰었다.
현관문은 너무 멀었다. 저 여자가 먼저 막을 것이다.
편의점.
골목 끝 편의점. 불이 켜져 있다.
유리는 있는 힘껏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쫓아왔다.
"도망가지 마."
낮고 축축한 목소리.
"같이 있어야지. 우리."
편의점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손님, 뛰지 마세…"
알바생이 뭐라 했지만 유리는 듣지 않았다.
진열대 뒤로 숨었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귀에서 터질 것처럼 뛰었다.
'조현이.'
집에 혼자 있다. 문은 잠갔을까.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다.
유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손이 떨려서 비밀번호를 두 번 틀렸다.
세 번째에 풀렸다.
전화를 걸려는데 편의점 문이 열렸다.
땡그랑.
유리는 숨을 죽였다.
"손님?"
알바생 목소리.
"아까 그 손님 어디 갔어요?"
대답이 없었다.
정적.
유리는 진열대 틈으로 입구를 봤다.
검은 후드가 서 있었다.
알바생 앞에.
"저기요, 손님. 칼 들고 계시면…"
알바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자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유리 쪽으로.
눈이 마주쳤다.
흉터투성이 얼굴. 풀린 동공.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찾았다."
유리는 벌떡 일어났다. 뒷문 쪽으로 뛰었다.
"손님! 거기 직원 전용…"
창고였다.
박스들이 쌓여 있고 비상구 표시등이 깜빡였다.
유리는 비상구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제발…"
뒤에서 발소리.
천천히. 가까워진다.
유리는 박스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숨바꼭질?"
여자의 목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재밌네. 옛날에도 했잖아."
박스를 넘어뜨리는 소리.
쿵. 쿵.
"59번. 58번. 57번…"
'뭐야. 저게 무슨…'
"다 찾았어. 너만 남았어."
유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소화기. 빗자루. 쓸 만한 게 없다.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112를 눌렀다.
"112 신고 접수…"
"편의점이요. 골목 안쪽 GS. 칼 든 사람이…"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칼날이 귀를 스쳤다.
유리는 비명을 삼켰다. 옆으로 굴렀다.
여자가 박스 위에 서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도망가."
칼을 휘둘렀다.
유리는 팔로 막았다. 재킷 소매가 찢어졌다. 피가 배어 나왔다.
"아…!"
여자가 다시 칼을 들어 올렸다.
유리는 소화기를 집어 던졌다.
여자의 어깨에 맞았다. 비틀거렸다.
그 틈에 유리는 창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편의점 안. 알바생이 카운터 뒤에 숨어서 떨고 있었다.
유리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골목. 어둑어둑해졌다.
집까지 50미터.
뛰었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현관문 앞에 조현이 서 있었다.
"엄마!"
"왜 나와!"
아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았다. 잠갔다.
체인까지 걸었다.
"엄마 팔…"
"괜찮아."
유리는 조현을 꽉 안았다.
아이의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괜찮아. 엄마가 지킬게."
조현이 유리의 옷을 움켜쥐고 울었다.
유리는 창문 쪽을 봤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틈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커튼 틈으로 보이는 얼굴.
유리는 숨을 멈췄다.
똑같은 얼굴이 유리창에 바짝 붙어 웃고 있었다.
'어떻게.'
현관은 잠갔다. 체인까지 걸었다.
저 여자는 어떻게 2층까지 올라왔나.
유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조현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여자가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열어줘."
목소리가 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왔다.
"같이 있어야지."
유리는 핸드폰을 집었다. 경찰. 아까 신고했다. 왜 안 오나.
화면을 켰다.
부재중 전화 3통. 112에서 걸려온 것이다.
'젠장.'
편의점에서 끊겼던 거다.
여자가 다시 유리창을 두드렸다. 이번엔 세게.
탁. 탁. 탁.
"안 열어주면 깨고 들어갈 건데."
유리는 주방으로 갔다. 서랍을 열었다.
식칼. 가장 큰 것.
손에 쥐었다. 손잡이가 땀으로 미끄러웠다.
거실로 돌아왔다.
여자가 사라져 있었다.
커튼 틈으로 보이는 건 어둠뿐.
'어디로.'
유리는 창문마다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부엌. 화장실. 작은 방.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귀에서 쿵쿵 울렸다.
조현의 방문을 열었다.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숨소리가 고르다.
유리는 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았다. 칼을 무릎에 올렸다.
핸드폰으로 112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112 신고센터입니다."
"아까 신고했던 사람인데요. 골목 안 GS 편의점."
"네, 확인됩니다. 출동 중입니다."
"빨리 와주세요. 집까지 따라왔어요."
"주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주소를 말했다. 상담원이 뭐라 더 물었지만 유리는 끊었다.
조용했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째깍. 째깍.
유리는 CCTV 사진을 다시 열었다.
목걸이. 확대했다.
치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작은 것. 큰 것. 어금니도 있고 앞니도 있다.
'유치.'
몇 개는 유치였다.
유리의 손이 떨렸다.
'왜 이런 걸.'
누구 거지.
사진을 더 확대했다.
목걸이 아래 여자의 목. 거기 문신이 있었다.
숫자였다.
60.
유리는 사진을 내렸다.
편의점 창고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던 것.
59번. 58번. 57번.
'60개.'
뭐가 60개인가.
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드르륵.
누가 창문을 여는 소리.
유리는 벌떡 일어났다.
베란다였다.
창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잠갔는데.'
유리는 칼을 들고 다가갔다.
창문이 활짝 열렸다.
바람이 들어왔다. 차가웠다.
밖에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 난간 너머 골목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유리는 창문을 닫으려 했다.
위에서 소리가 났다.
똑.
뭔가 떨어지는 소리.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 여자가 매달려 있었다.
거꾸로.
머리가 아래로. 발이 위로.
팔다리가 거미처럼 천장에 붙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웃었다.
"찾았다."
유리는 칼을 휘둘렀다.
여자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착지했다.
무릎을 굽혔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목을 좌우로 꺾었다. 뚝. 뚝.
"아프게 하지 마."
유리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소파에 닿았다.
"누구세요."
"몰라?"
여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린 같은 사람인데."
"미친."
"59번 세계에선 네가 날 죽였어. 칼로. 배를 여섯 번 찔렀지."
여자가 배를 쓸어내렸다.
"58번에선 목을 졸랐고. 57번엔 머리를 …"
"닥쳐."
유리는 칼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까이 오지 마."
여자가 멈췄다.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번엔 다르네."
"뭐가."
"애가 있잖아."
여자의 시선이 조현의 방으로 향했다.
유리는 칼을 더 세게 쥐었다.
"건드리지 마."
"60번째야. 마지막."
여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치아들이 달그락거렸다.
"다 모았어. 59개 세계에서. 너한테서."
'치아.'
유리의 입안이 말랐다.
"이게… 내 거?"
"응. 네 어금니. 네 송곳니. 네 앞니."
여자가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59명의 너. 다 죽였어. 이제 너만 남았어."
유리는 뒤로 물러섰다.
발이 조현의 가방에 걸렸다. 휘청했다.
여자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칼을 쳐냈다.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여자의 손이 유리의 목을 감았다.
"60번째 치아."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발버둥 쳤다. 여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꿈쩍도 안 했다.
'조현이.'
시야가 흐려졌다.
여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똑같은 얼굴. 흉터만 다른.
"미안. 아프겠지만…"
쿵.
여자의 손이 풀렸다.
유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침을 했다. 목을 감쌌다.
고개를 들었다.
조현이 서 있었다.
손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뒤통수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
조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리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잘했어."
여자가 신음 소리를 냈다.
움직였다.
'아직.'
유리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었다.
일어섰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 묻은 얼굴로 웃었다.
"역시… 다르네."
"뭐가 다른데."
"이번엔 네가 엄마야."
여자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유리는 칼을 겨눴다.
"경찰 오고 있어. 꼼짝 마."
"경찰?"
여자가 킥킥 웃었다.
"소용없어. 난 죽어도 돌아와. 계속."
현관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쿵쿵쿵.
"경찰입니다!"
유리는 문 쪽을 봤다.
그 순간 여자가 베란다로 뛰었다.
난간을 넘었다.
"잠깐!"
유리는 베란다로 달려갔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여자가 없었다.
2층 높이. 떨어졌으면 누워 있어야 하는데.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만 깜빡거렸다.
"문 열어주세요!"
유리는 조현을 데리고 현관으로 갔다.
체인을 풀었다. 문을 열었다.
경찰 두 명이 서 있었다.
"신고 접수하고 왔습니다."
"안에… 침입자가…"
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데요."
"베란다로 도망갔어요. 방금."
경찰 한 명이 베란다로 나갔다.
아래를 확인했다.
"아무도 안 보입니다."
유리는 바닥을 봤다.
피가 있어야 했다.
뒤통수에서 흘렀던 피.
바닥은 깨끗했다.
"여기 피가…"
없었다.
야구 방망이도 없었다.
'어떻게.'
조현이 유리의 옷을 잡아당겼다.
"엄마. 목."
유리는 목을 만졌다.
따끔했다.
손가락에 피가 묻었다.
경찰이 유리를 봤다.
"다치셨네요. 병원 가셔야겠습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
유리는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
자기 목소리였다.
"59개 세계에선 조현이가 없었어."
유리는 숨이 멎었다.
"**그래서 이번이 특별해. 60번째니까.**"
"뭘 원하는 거야."
"교환."
"뭘."
"**네 치아. 아니면 조현이 치아.**"
전화가 끊겼다.
유리는 핸드폰을 쥔 채 굳어 있었다.
경찰이 물었다.
"누구 전화였습니까?"
유리는 조현을 봤다.
아이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떨고 있었다.
유리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괜찮아. 엄마가 지킨다."
경찰이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일단 병원부터 가보시죠."
"저 진짜…"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말해봤자 소용없다. 피도 없고 흔적도 없다.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경찰이 수첩을 꺼냈다.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원한 관계라든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CCTV 확인해보겠습니다. 연락처 남겨주시고요."
번호를 적어줬다.
경찰이 나갔다.
문을 닫았다. 체인을 다시 걸었다.
조현이 유리 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엄마. 무서워."
"응. 나도."
유리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무거웠다. 팔이 후들거렸다.
소파에 앉혔다.
"여기 있어. 엄마가 창문 확인할게."
모든 창문을 닫았다.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베란다. 화장실. 조현이 방.
다 잠겼다.
거실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기록. 아까 그 번호.
다시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끊었다.
CCTV 사진을 다시 열었다.
목걸이. 치아들. 목의 숫자.
60.
'59개 세계.'
유리는 사진을 확대했다.
여자의 얼굴. 흉터.
턱선. 눈매.
'나.'
분명 나였다.
10년 전? 아니. 더 오래전.
'17년.'
가슴이 철렁했다.
17년 전 겨울.
대학교 2학년.
친구 셋이서 놀러 갔던 펜션.
'그때.'
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조현이 유리를 쳐다봤다.
"엄마?"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다.
17년 전 그날. 펜션 지하실.
술에 취해서 내려갔던 계단.
어두웠다. 친구 지은이가 먼저 내려갔다.
"유리야, 여기 뭔가 있어."
따라 내려갔다.
지은이가 벽을 만지고 있었다.
"이거 봐. 숫자."
벽에 새겨진 숫자들.
1부터 60까지.
빨간 페인트로.
"누가 장난친 건가."
민지가 웃었다.
유리는 웃지 않았다.
숫자 옆에 작은 글씨들.
이름이었다.
여자 이름들.
마지막 줄. 60번.
최유리.
"야, 이거 네 이름이잖아."
지은이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연이겠지."
민지가 말했다.
하지만 유리는 알았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그날 밤 펜션 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지하실엔 내려가지 마. 좋지 않아."
"왜요?"
"옛날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떠났다.
그 후로 잊고 살았다.
'아니.'
잊으려고 했다.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조현이 졸고 있었다.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유리는 아이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줬다.
"엄마 어디 가?"
"안 가. 여기 있어."
"거짓말."
조현이 눈을 떴다.
"엄마 맨날 거짓말해."
유리는 아무 말 못 했다.
아이가 맞다.
"이번엔 안 그래."
"진짜?"
"응."
조현이 눈을 감았다.
유리는 방을 나왔다.
문을 닫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강원도 펜션 사건 17년 전'
기사가 떴다.
**[17년 전 오늘] 폐쇄된 펜션서 백골 발견… 신원 미상 여성 59구**
손가락이 멈췄다.
59구.
기사를 열었다.
> 2007년 12월, 강원도 폐펜션 지하에서 여성 유골 59구 발견. 신원 확인 불가. 모두 20대 추정. 사인은 둔기에 의한…
유리는 스크롤을 내렸다.
> 현장에서 발견된 벽면의 숫자와 이름. 경찰 추정 '연쇄 살인 희생자 명단'. 60번째 이름은 '최유리'로 기재되어 있으나 해당 인물은…
화면이 꺼졌다.
배터리가 나갔다.
"제발."
충전기를 꽂았다.
다시 켰다.
기사를 찾았다.
> 60번째 희생자로 지목된 '최유리'는 당시 대학생.
> 60번째 희생자로 지목된 '최유리'는 당시 대학생. 사건 발생 3일 전 해당 펜션 투숙 기록 있으나 생존 확인. 참고인 조사 후 혐의 없음.
유리는 핸드폰을 쥔 채 얼어붙었다.
'내가 60번째였다.'
살아남았다. 그것뿐.
59명은 죽었는데.
벨소리가 울렸다.
집 현관 초인종.
유리는 일어섰다.
인터폰 화면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복도만 보였다.
다시 울렸다.
길게.
유리는 문 앞으로 갔다.
"누구세요?"
대답 없었다.
"경찰이면 말씀하세요."
여전히 조용했다.
문 아래 틈새로 뭔가 밀려 들어왔다.
종이.
유리는 주웠다.
사진이었다.
17년 전 펜션.
지하실 벽.
숫자들 옆에 선 여자.
검은 옷. 목걸이.
여자가 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60. 최유리.**
사진 뒷면에 글씨가 있었다.
'네가 살았으니까 누군가는 계속 죽어.'
유리는 사진을 구겼다.
문을 열었다.
체인이 걸린 채로.
복도를 봤다.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불빛만 깜빡였다.
유리는 체인을 풀었다.
복도로 나갔다.
계단 쪽을 확인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올라가는 소리.
유리는 뛰었다.
계단을 올랐다.
3층. 4층.
발소리가 멈췄다.
옥상 문이 열려 있었다.
유리는 올라갔다.
바람이 얼굴을 쳤다.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급수탑. 빨랫줄.
"나와."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유리는 돌아섰다.
여자가 급수탑 그늘에 서 있었다.
얼굴이 보였다.
17년 전 유리.
짧은 머리. 흉터 없는 얼굴.
"네가 기억 안 하는 것뿐이야."
"뭘."
"그날 밤. 지하실에서."
여자가 한 걸음 나왔다.
"**넌 도망쳤어. 나를 두고.**"
유리는 숨을 참았다.
"무슨 소리야."
"59명이 죽을 때. 넌 계단을 올라갔지."
"난… 거기 없었어."
"거짓말."
여자가 목걸이를 만졌다.
치아들이 부딪쳤다.
"이 중에 네 것도 있어."
"말도 안 돼."
"17년 전 네 어금니. 빠졌잖아."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맞다.
그때 사랑니를 뽑았다.
"그건…"
"**펜션 주인이 가져갔어. 네가 자고 있을 때.**"
여자가 웃었다.
"60번째 제물로 쓰려고."
유리는 뒷걸음질 쳤다.
"근데 실패했어. 넌 떠났으니까."
여자가 목걸이를 풀었다.
치아 하나를 빼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죽었지."
치아를 유리에게 던졌다.
바닥에 떨어졌다.
유리는 내려다봤다.
어금니.
뿌리 부분에 작은 글씨.
최유리.
"이제 알겠어?"
여자가 다가왔다.
"**60번째는 끝나지 않아. 네가 완성해야 해.**"
"무슨 완성."
"**조현이 치아. 아니면 네 목숨.**"
유리는 난간을 잡았다.
뒤가 막혔다.
"선택해."
여자가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안 그러면 59개 세계가 다시 시작돼. 조현이가 없는 세계로."
유리는 난간을 넘었다.
"미쳤어?"
여자가 웃었다.
유리는 난간 바깥쪽에 매달렸다.
손에 힘을 줬다.
"17년 전에도 그렇게 도망쳤지."
발밑이 텅 비었다.
5층 높이.
"이번엔 안 돼."
유리는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비상계단 난간이 보였다.
2미터쯤.
뛰어야 한다.
여자가 난간 너머로 몸을 숙였다.
"**떨어져 봐. 어차피 59번 더 반복될 텐데.**"
유리는 손을 놨다.
몸이 떨어졌다.
비상계단 난간을 잡았다.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엄마!"
조현이 목소리.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3층 창문.
조현이 유리를 보고 있었다.
"조현아!"
힘을 줬다. 난간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