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태양의 후예
주인공: 아쉬 노크티스
황혼이 영원한 세계에서는 시간을 해로 세지 않았다.
잠들 때와 깨어날 때, 그 사이의 간격만이 하루를 구분했다.
아쉬는 리엔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물 길어와야지."
"음… 다섯 번만 더…"
리엔이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아쉬는 형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다섯 번 자면 우물 얼어."
"에이, 거짓말."
그래도 리엔은 눈을 떴다. 아쉬는 낡은 담요를 개키며 일어섰다.
'오늘도 무사히.'
그게 전부였다.
정착촌은 영원의 숲 가장자리, 정령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하프엘프들만 모여 사는 이곳엔 나무 스무 그루와 천막 열두 동이 전부였다. 순수 혈통 엘프들은 이곳을 '경계'라 불렀다. 숲과 바깥세상 사이의 완충지대.
버려진 자들의 거처.
아쉬는 물통 두 개를 들고 천막을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찔렀다.
'추위가 더 심해졌어.'
우물까지는 걸어서 백 걸음. 리엔이 뒤따라오며 하품을 했다.
"형, 어제 꿈 꿨어."
"무슨?"
"나무들이… 울고 있었어. 진짜 슬프게."
아쉬의 손이 잠깐 멈췄다. 물통 손잡이가 삐걱거렸다.
"그냥 꿈이야."
"근데 진짜 같았는데. 정령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쉬는 리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제의 은빛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정령은 하프한테 말 안 걸어. 알지?"
"응… 그치?"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아쉬는 손을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또 시작이군.'
검은 문신이 목에서 쇄골까지,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뻗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걸 보면 시선을 피했다.
금기된 계약의 흔적.
대가를 치르지 않은 힘의 증표.
"형, 또 아파?"
리엔이 아쉬의 손목을 잡았다. 아쉬는 재빨리 소매를 내렸다.
"아니. 괜찮아."
"거짓말. 빛나고 있잖아."
"…바람이 차서 그래."
리엔은 더 묻지 않았다. 형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알았으니까.
우물에 도착했을 때, 물은 아직 얼지 않았다. 아쉬는 두레박을 내렸다.
철컥.
밧줄이 팽팽해지며 물통이 채워졌다. 리엔이 옆에서 두 번째 물통을 받쳤다.
"형은 무서운 거 없어?"
"왜?"
"그냥… 궁금해서."
아쉬는 물통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없어."
"진짜?"
"응."
거짓말이었다.
'리엔을 잃는 게 무섭지.'
하지만 그건 말할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이 천막으로 돌아올 때쯤, 마을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순찰대 제복을 입은 엘프 하나가 서 있었다.
카엘.
영원의 숲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순찰대장이었다. 순수 혈통 엘프답게 키가 크고 얼굴선이 날카로웠다. 은빛 갑옷 위에 초록 망토를 걸쳤는데, 그게 이곳 하프엘프들의 누더기와 대조됐다.
"최근 인간 노예상들이 숲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카엘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특히 정착촌 주변에서 발자국이 발견됐습니다. 밤에는 외출을 삼가고, 낯선 자가 보이면 즉시 신호탄을 올리세요."
하프엘프 몇몇이 웅성거렸다.
"순찰대가 지켜주는 거 아니에요?"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카엘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이 군중을 훑다가 아쉬에게 멈췄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카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웃음 같기도, 동정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뭐지.'
아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목덜미 문신이 다시 따끔거렸다.
카엘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며칠간 경계를 강화하겠습니다. 안심하세요."
그는 돌아서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순찰대원 둘이 뒤따랐다.
마을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리엔이 아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형, 순찰대가 지켜준대. 괜찮은 거지?"
"…응."
아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속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카엘의 눈빛이 이상했어.'
저건 경고가 아니었다.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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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아니, 황혼이 짙어지고.
정착촌에 어둠이 내렸다.
아쉬는 천막 입구에 앉아 작은 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리엔은 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조용하네.'
바람 소리만 들렸다. 나무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냉기가 피부를 할퀴었다.
그때였다.
쉿—
하늘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신호탄.
아쉬는 칼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섰다.
"리엔!"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리엔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형…? 무슨 일이야?"
"나 따라와. 지금 당장."
아쉬는 형제의 손목을 잡고 천막을 나섰다.
# Part 2: 전개
마을 중앙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쉬는 리엔의 손을 꽉 쥔 채 천막 사이로 몸을 숨겼다. 숨소리를 죽였다.
'뭐가 잘못됐어.'
신호탄은 위험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형…"
리엔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쉬는 형제의 입을 막았다.
"쉿."
천막 틈 사이로 보였다.
갑옷 입은 인간 다섯이 마을 사람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손에는 쇠사슬과 곤봉. 한 명은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불빛이 하프엘프들의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노예 사냥꾼.
그들 옆에 카엘이 서 있었다.
아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설마.'
카엘은 팔짱을 낀 채 사냥꾼 중 한 명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거래하는 얼굴이었다.
"저 엘프, 우리 편 맞나?"
사냥꾼 중 하나가 물었다. 덩치가 컸다. 목에 철제 목걸이를 두른 게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맞습니다, 그렉 님."
카엘이 고개를 숙였다.
"순찰대는 오늘 밤 이 구역을 비웠습니다. 세 시간은 안전합니다."
"좋아. 약속대로 하프 열 명. 그중에서 마력 있는 애들로 골라."
그렉이 턱짓했다. 사냥꾼들이 마을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손목을 잡아당겼다.
비명이 터졌다.
"안 돼! 제발!"
"엄마!"
아이 하나가 울부짖으며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사냥꾼이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이 새끼, 가만 안 있어?"
쾅.
곤봉이 아이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작은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리엔이 아쉬의 손을 움켜쥐었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아쉬는 형제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참아. 지금은 안 돼.'
사냥꾼 다섯, 무장한 상태. 카엘까지 적이라면 이길 수 없었다.
'리엔을 지켜야 해.'
그게 우선이었다.
카엘이 마을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 시선이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저 아이."
그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켰다.
아쉬의 숨이 멎었다.
카엘이 가리킨 건 리엔이 아니었다. 옆 천막에 사는 소녀였다. 열 살쯤 됐을까. 은발에 푸른 눈.
"정령 친화도가 높습니다. 귀한 물건이 될 겁니다."
"오, 그래?"
그렉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턱을 잡아 올렸다.
"예쁘네. 인간 귀족들이 좋아하겠어."
소녀가 몸부림쳤다. 그렉이 비웃으며 사슬을 던졌다.
"채워."
사냥꾼이 소녀의 손목에 족쇄를 채웠다. 찰칵. 쇠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카엘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아홉 명 더 필요합니다."
"알아서 골라. 난 저 꼬맹이만 있으면 돼."
그렉이 손을 내저었다. 카엘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멈췄다.
아쉬와 눈이 마주쳤다.
'젠장.'
천막 틈이 너무 컸다. 카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기."
그의 손가락이 아쉬를 가리켰다.
"천막 뒤에 숨은 아이 둘. 데려오세요."
사냥꾼 둘이 달려왔다. 아쉬는 리엔을 뒤로 밀어냈다.
"뛰어!"
"형!"
리엔이 비명을 질렀지만, 아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사냥꾼 하나가 팔을 뻗었다. 아쉬는 몸을 숙여 피했다.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빠르긴 한데.'
훈련받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아쉬는 사냥꾼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뚝.
관절이 꺾이는 소리. 사냥꾼이 비명을 질렀다.
"이 새끼가!"
두 번째 사냥꾼이 곤봉을 휘둘렀다. 아쉬는 옆으로 굴렀다.
쾅.
곤봉이 땅을 쳤다. 흙먼지가 튀었다.
아쉬는 일어서며 주먹을 날렸다. 사냥꾼의 턱에 명중했다.
퍽.
사냥꾼이 비틀거렸다. 아쉬는 그의 곤봉을 빼앗아 머리를 내리쳤다.
쿵.
사냥꾼이 쓰러졌다.
"오?"
그렉이 휘파람을 불었다.
"하프 주제에 싸우네. 재밌는데?"
아쉬는 숨을 몰아쉬며 곤봉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둘은 쓰러뜨렸어. 하지만 아직 셋이 남았고…'
카엘이 검을 뽑았다.
"그만하세요, 아쉬 노크티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항하면 동생까지 다칩니다."
아쉬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리엔이 사냥꾼 하나에게 붙잡혀 있었다.
목에 칼이 닿아 있었다.
"형!"
리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쉬는 곤봉을 떨어뜨렸다.
"…리엔은 보내줘."
"안 되죠."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동생은 특별합니다.
# Part 3: 위기-결말부
아쉬는 곤봉을 떨어뜨렸다.
"…리엔은 보내줘."
"안 되죠."
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 동생은 특별합니다. 정령 친화도가 당신보다 훨씬 높아요."
그렉이 리엔에게 다가갔다. 턱을 잡아 올렸다.
"오, 진짜네. 이 눈빛 봐. 귀족 놈들이 환장하겠어."
리엔이 몸부림쳤다. 칼날이 목을 긁었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형!"
아쉬의 시야가 좁아졌다.
'리엔을 건드리면—'
목덜미가 타올랐다. 검은 문신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일 만큼 강렬했다.
카엘의 눈이 커졌다.
"설마... 아직도 그 힘이 남아 있어?"
"뭐?"
그렉이 고개를 돌렸다. 아쉬의 팔에서 손목까지, 목에서 쇄골까지 검은 빛이 번져갔다.
'이러면 안 돼.'
아쉬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속삭임이 들려왔다.
*'계약을 기억하느냐.'*
낮고 무거운 목소리. 뇌 속에서 울렸다.
*'네 것을 내놓아라. 그러면 힘을 주겠다.'*
아쉬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직… 아니야.'
대가는 컸다. 이 힘을 쓸 때마다 무언가를 잃었다.
기억. 감정. 수명.
어쩌면 영혼까지.
하지만 리엔이 다치면—
"형, 하지 마!"
리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물 섞인 외침이었다.
"약속했잖아! 다시는 그 힘 안 쓴다고!"
아쉬의 손이 멈췄다.
'맞아.'
리엔과 약속했었다. 지난겨울, 아쉬가 이 힘을 써서 늑대 무리를 쓰러뜨렸을 때. 형제는 울며 매달렸었다.
'형이 이상해져. 제발 그만해.'
그때 아쉬는 대답했었다.
'다시는 안 써. 약속할게.'
카엘이 검을 들었다.
"그렉 님, 저 아이는 위험합니다. 지금 죽여야—"
"닥쳐."
그렉이 손을 들어 카엘을 막았다.
"재밌잖아. 저 꼬맹이, 얼마에 팔릴까?"
그는 아쉬에게 다가왔다. 횃불을 들어 얼굴을 비췄다.
"그 문신, 그림자 상인의 낙인이지?"
아쉬는 대답하지 않았다.
"맞네. 계약자는 비싸게 팔려. 투기장에서 인기 많거든."
그렉이 웃었다. 썩은 이빨이 드러났다.
"둘 다 데려간다. 채워."
사냥꾼들이 달려들었다. 아쉬는 저항하지 않았다.
'리엔만 무사하면 돼.'
차가운 쇠사슬이 손목을 감았다. 찰칵. 족쇄가 채워졌다.
리엔도 묶였다.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아쉬가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형 잘못 아니야."
카엘이 다가왔다. 아쉬를 내려다봤다.
"순찰대는 내일 아침에 돌아옵니다. 그때쯤이면 당신들은 이미 숲 밖이겠죠."
"왜?"
아쉬가 물었다.
"왜 배신했어."
카엘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배신? 우린 애초에 같은 편이 아니었어요."
그는 몸을 숙여 아쉬의 귀에 속삭였다.
"하프엘프 따위, 숲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죠. 순찰대는 당신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겁니다."
아쉬의 주먹이 떨렸다. 쇠사슬이 덜컥거렸다.
"당신들이 사라지면 우리 할당량도 줄어들어요. 윈윈이죠."
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그렉에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그래. 다음에도 연락해."
그렉이 손을 흔들었다. 카엘은 돌아서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은빛 갑옷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
사냥꾼들이 하프엘프들을 줄지어 세웠다.
열 명.
아이 셋, 어른 일곱. 모두 손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렉이 횃불을 들어 천막에 불을 붙였다.
"흔적 남기면 안 되니까."
불길이 번졌다. 천막 하나가 타올랐다.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사냥꾼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가자."
그렉이 사슬을 잡아당겼다. 하프엘프들이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아쉬는 뒤를 돌아봤다.
정착촌이 불타고 있었다.
'끝이구나.'
리엔이 옆에서 걸었다. 작은 손이 아쉬의 손을 잡았다.
"형, 괜찮아질까?"
"…응."
거짓말이었다.
---
숲길은 좁았다.
나무뿌리가 튀어나와 발목을 걸었다. 누군가 넘어지면 사냥꾼이 채찍을 휘둘렀다.
"빨리 안 걸어?"
핏자국이 땅에 떨어졌다.
아쉬는 리엔을 앞에 세우고 뒤에서 걸었다. 형제가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잡았다.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
사냥꾼은 다섯. 그중 둘은 아까 아쉬에게 당해서 다쳤다. 싸울 만했다.
하지만 족쇄가 문제였다.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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