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약 14분 · 총 7,063자

대공가의 숨겨진 회계사

주인공: 강민준

눈을 뜬 순간, 코를 찌르는 건 곰팡이 냄새였다.

'여기가... 어디지?'

강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뻐근했다. 책상에 엎드려 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 책상은 아니었다. 회사 책상은 화이트 멜라민이었다. 지금 손끝에 닿는 건 거친 참나무였다.

주변을 둘러봤다.

천장이 높았다. 아니, 너무 높았다. 5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서재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가죽 장정된 책들이 빼곡했다. 촛불이 타닥거렸다. 촛불? 회사에 촛불이 있을 리 없었다.

"뭐야, 이거."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는데, 손에 잡힌 건 차갑고 축축한 돌벽이었다.

'아, 진짜.'

패닉이 밀려왔다. 심장이 두 배속으로 뛰었다. 숨이 가빠졌다. 이런 상황,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제일 싫었다. 숫자로 정리되지 않는 건 전부 싫었다.

그때, 눈앞에 뭔가 떠올랐다.

[파산 선고 D-30]

붉은 글씨였다. 허공에 떠 있었다. 홀로그램처럼. 아니, 홀로그램보다 더 선명했다.

"뭐, 뭐야 이게."

민준은 손을 뻗었다. 글씨가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모였다. 같은 문구로.

파산 선고. D-30.

30일 후 파산?

"말도 안 돼."

민준은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닦았다. 옷자락으로. 그런데 이 옷도 이상했다. 면 셔츠가 아니었다. 거친 린넨이었다. 소매에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레이스? 내가 왜 레이스를 입고 있어?

안경을 다시 썼다.

글씨는 여전했다.

책상 위를 봤다. 장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낡은 가죽 표지, 바랜 종이, 손으로 쓴 숫자들. 제일 위에 있는 장부를 펼쳤다.

'왕국력 1247년 슈바르츠발트 대공가 세입세출 장부.'

왕국력? 슈바르츠발트?

"이게 대체..."

쾅!

문이 열렸다. 아니, 박살났다.

은발의 여자가 들어섰다. 키가 컸다. 175는 넘어 보였다. 검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치마가 바닥을 쓸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입술은 붉었다. 눈은 차가웠다.

"일어났군요."

목소리도 차가웠다.

민준은 한 발 물러났다.

"누, 누구세요?"

"아델하이트 폰 슈바르츠발트. 이 영지의 대행 영주입니다."

여자가 다가왔다. 민준은 또 물러났다. 등이 책장에 닿았다.

"왜 그렇게 겁을 먹었죠? 당신을 고용한 건 접니다."

"고용? 저요?"

"회계사 아닙니까."

회계사. 맞다, 나는 회계사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죠?"

아델하이트의 눈썹이 올라갔다.

"기억이 없습니까?"

"네. 전혀요."

"쓸모없군요."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책상을 가리켰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습니다. 왕실 감사관이 내일 옵니다. 당신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감사관?"

"왕국 재무부 소속입니다. 우리 가문의 장부를 감사하러 옵니다. 만약 부정이 드러나면..."

아델하이트는 말을 끊었다.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민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죽, 죽여요?"

"영지를 몰수당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문은 몰락하죠. 500년 역사가 끝나는 겁니다."

여자의 목소리에 떨림이 섞였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민준은 알아챘다. 숫자만큼이나 사람의 목소리 변화에도 민감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당신이 우리 장부를 정리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마법 계약서에 서명했어요. 위반하면 당신도 죽습니다."

"네?"

아델하이트가 손을 펼쳤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빛이 모여 양피지 형태를 만들었다. 거기 민준의 서명이 있었다. 정확히 그의 필체로.

"이건... 제가 쓴 게 아닌데요."

"마법 계약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나는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쓰러졌고, 눈을 떠보니 중세 유럽 같은 곳에 있고, 마법이 존재하고,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진정해. 진정하라고, 강민준.'

민준은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숫자를 세면 마음이 안정됐다. 언제나 그랬다.

"알겠습니다."

민준은 책상으로 돌아갔다. 장부를 펼쳤다. 손이 떨렸지만, 숫자를 보자 떨림이 멈췄다.

"뭐부터 보면 되죠?"

아델하이트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렸다.

"올해 장부부터 시작하세요. 감사관은 최근 3년을 집중적으로 봅니다."

"3년이요?"

"시간이 부족하면 올해만이라도."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를 당겼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왕국력 1247년 1분기 세입.'

숫자가 빼곡했다. 손으로 쓴 숫자였지만, 정갈했다. 읽기 쉬웠다.

마법석 판매: 1,200골드

영지세 수입: 300골드

관세 수입: 150골드

합계: 1,650골드

다

# 2부

음이었다.

민준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세출 항목이 나왔다.

영지 관리비: 800골드

마법석 채굴 비용: 400골드

합계: 1,200골드

손가락이 멈췄다.

'1,200골드?'

수입도 1,200골드였다. 정확히 일치했다.

민준은 2분기 장부를 펼쳤다. 같은 패턴이었다. 수입 1,200골드, 지출 1,200골드. 3분기도 마찬가지였다. 4분기도.

"이상하네요."

아델하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너무 완벽해요."

"완벽한 게 문제입니까?"

민준은 장부를 탁 닫았다. 아델하이트를 똑바로 봤다.

"회계에서 완벽은 거짓말이에요."

"무슨 뜻이죠?"

"현실에선 수입과 지출이 정확히 맞아떨어질 수 없어요. 항상 오차가 생깁니다. 몇 골드라도요."

민준은 다른 장부를 펼쳤다. 작년 것이었다. 역시 같은 패턴이었다. 매 분기 1,200골드씩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2년 전 장부 어디 있죠?"

아델하이트가 책장을 가리켰다. 민준은 달려가 장부를 꺼냈다. 먼지가 날렸다. 재채기가 나왔다.

장부를 펼쳤다.

숫자가 달랐다.

'왕국력 1245년 1분기.'

마법석 판매: 3,200골드

영지세 수입: 890골드

관세 수입: 310골드

합계: 4,400골드

영지 관리비: 1,200골드

마법석 채굴 비용: 2,800골드

왕실 세금: 600골드

합계: 4,600골드

적자 200골드.

다음 분기는 흑자 150골드. 그다음은 적자 80골드. 숫자가 들쭉날쭉했다. 이게 정상이었다.

"2년 전까지는 멀쩡했어요."

민준은 장부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작년부터 갑자기 완벽해졌죠. 누가 조작한 겁니다."

아델하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조작?"

"장부를 고쳤어요. 감사에 통과하려고."

"그럴 리 없습니다. 우리 가문은..."

"증거가 여기 있잖아요."

민준은 두 장부를 나란히 펼쳤다. 2년 전 것과 작년 것을. 숫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봐요. 2년 전엔 마법석 판매가 분기마다 달랐어요. 3,200골드, 2,800골드, 4,100골드.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한 거죠."

아델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년부터는 매 분기 1,200골드로 고정됐어요. 말이 됩니까? 시장이 그렇게 안정적일 수 없어요."

"그럼... 누가?"

민준은 장부 하단을 봤다. 작은 서명이 있었다.

'기록자: 발터 슈미트.'

"이 사람 누구예요?"

아델하이트의 입술이 얇아졌다.

"우리 가문의 재무관입니다."

"어디 있죠?"

"지금쯤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민준은 장부를 들고 일어났다.

"안내해주세요."

"지금 가시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죠. 내일 감사인데."

아델하이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복도는 어두웠다. 횃불이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돌바닥이 차갑게 울렸다. 민준의 구두 소리가 메아리쳤다.

'구두? 나 운동화 신고 있었는데.'

발을 내려다봤다. 검은 가죽 구두였다. 버클이 달려 있었다. 18세기 스타일이었다.

'이것도 이상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발터라는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아델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걷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신뢰하셨습니다."

"과거형이네요."

"아버지는 3개월 전 쓰러지셨어요. 이후로는 제가 영지를 관리합니다."

"그럼 발터는?"

"여전히 재무를 맡고 있죠. 20년 경력입니다. 저보다 이 영지를 잘 알아요."

민준은 장부를 꼭 안았다.

'20년 경력. 그럼 조작하기 딱 좋은 위치네.'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이 나왔다. 넓은 홀이었다. 천장에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는데, 촛불이 반도 안 켜져 있었다.

'재정이 안 좋은가 보네.'

홀을 가로질렀다. 반대편 복도로 들어섰다.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델하이트가 문을 두드렸다.

"발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안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뚱뚱한 남자가 나왔다. 50대쯤 됐다. 대머리였다. 코밑에 짧은 수염이 있었다. 옷은 깔끔했다. 벨벳 조끼에 금시계 줄이 달려 있었다.

"아가씨,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웠다. 기름진 느낌이었다.

"회계사를 데려왔습니다."

발터의 시선이 민준에게 옮겨갔다. 위아래로 훑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그 이방인 말입니까?"

"강민준입니다."

민준은 손을 내밀었다. 발터는 악수하지 않았다. 그냥 빤히 쳐다봤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민준은 장부를 들어 올렸다.

"이거 당신이 기록한 거 맞죠?"

"그렇습니다만."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왜 작년부터 숫자가 이렇게 일정한지."

발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정하면 안 됩니까?"

"현실적이지 않아요."

"현실적? 이방인 주제에 우리 영지 현실을 안다

# 3부

고 말입니까?"

발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민준은 장부를 펼쳤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

"마법석 판매가 12개월 내내 1,200골드예요. 시장 가격은 변동하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운이 좋았습니다."

"12개월 연속으로요?"

발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턱을 치켜들고 민준을 내려다봤다.

"감히 누구를 의심하는 겁니까?"

"의심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민준은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영지 관리비도 마찬가지예요. 매달 800골드. 겨울에 난방비가 늘고, 여름에 수리비가 늘어야 정상인데."

"효율적으로 관리했습니다."

"너무 효율적이네요."

민준은 장부를 덮었다. 발터를 똑바로 봤다.

"장부를 고쳤죠?"

발터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례한!"

"사실이잖아요."

"당장 나가시오!"

발터가 소리쳤다. 침이 튀었다. 민준은 한 발 물러섰지만, 장부는 놓지 않았다.

아델하이트가 끼어들었다.

"발터, 진정하십시오."

"아가씨, 이 자가 저를 모욕했습니다!"

"질문했을 뿐입니다."

"질문이 아니라 의심입니다! 20년을 섬긴 저를!"

발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은 장부를 들어 올렸다.

"그럼 증명해보세요. 이 숫자들이 진짜라고."

"증명? 내가 왜!"

"못 하시는 거죠?"

발터의 입이 벌어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이 더 붉어졌다.

"좋습니다."

발터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랍을 열었다. 뭔가를 꺼냈다.

양피지 뭉치였다.

"이게 증거입니다."

양피지를 던졌다. 민준이 받았다. 펼쳐 봤다.

'왕실 금고 대출 계약서.'

차용 금액: 50,000골드

이자율: 연 8%

상환 기간: 5년

계약자: 슈바르츠발트 대공가

민준의 손이 멈췄다.

"5만 골드요?"

"그렇습니다. 2년 전 대공님께서 왕실 금고에서 빌리셨죠."

"왜요?"

"마법석 광산 확장 때문입니다."

민준은 계약서를 자세히 봤다. 날짜가 적혀 있었다.

'왕국력 1245년 9월 3일.'

2년 전 9월. 장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 돈으로 뭘 했죠?"

"광산 장비를 샀습니다. 마법 굴착기, 정제 시설..."

"영수증 있어요?"

발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불타 없어졌습니다."

"언제요?"

"작년 겨울 화재 때."

민준은 아델하이트를 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고에 불이 났었습니다. 많은 문서가 소실됐죠."

'참 편리하네.'

민준은 계약서를 다시 봤다. 뭔가 이상했다. 서명란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필체가 흔들렸다.

'슈바르츠발트'라는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특히 마지막 't' 자가 위로 튀어 올라갔다.

"아델하이트 님."

"네?"

"아버님 필체 어떠세요?"

"정갈하신 편입니다. 군인 출신이셔서."

민준은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이건 정갈하지 않은데요."

아델하이트가 다가왔다. 서명을 봤다. 눈이 커졌다.

"이건..."

"아버님 서명 아니죠?"

아델하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발터가 끼어들었다.

"대공님께서 편찮으실 때 쓰신 겁니다."

"편찮으실 때요?"

"9월에 잠깐 몸이 안 좋으셨죠."

민준은 계약서 날짜를 다시 봤다.

'1245년 9월 3일.'

아델하이트에게 물었다.

"그때 아버님 상태가 어땠어요?"

"건강하셨습니다. 사냥을 다녀오신 다음 날이었어요."

민준은 발터를 봤다.

"거짓말하셨네요."

"뭐라고!"

"대공은 건강했어요. 그런데 서명이 흔들렸죠. 이유가 뭘까요?"

발터의 얼굴에서 붉은 기가 빠졌다.

민준은 계약서를 빛에 비춰 봤다. 양피지가 반투명해졌다. 뭔가 보였다.

숫자였다.

아주 작은 숫자들이 서명 밑에 숨어 있었다. 육안으론 안 보이는 크기였다.

'50000 × 0.08 × 5 = 20000'

'70000 - 50000 = 20000'

민준의 심장이 뛰었다.

"이게 뭐죠?"

손가락으로 숫자를 가리켰다. 발터가 달려왔다. 계약서를 낚아챘다.

"돌려주세요!"

"안 됩니다!"

민준이 잡아당겼다. 양피지가 찢어질 뻔했다.

아델하이트가 손을 들었다. 푸른 빛이 번쩍였다.

"멈추십시오!"

마법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민준과 발터가 뒤로 밀렸다.

계약서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델하이트가 손을 뻗었다. 계약서가 그녀에게 날아왔다. 빛에 비춰 봤다.

"이 숫자들..."

"복식부기 코드예요."

민준이 말했다.

"누군가 계약서에 암호를 숨겨뒀어요. 실제 거래 금액을 기록한 거죠."

"7만 골드?"

아델하이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계약서엔 5만이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론 7만 골드를 빼돌렸다는 뜻입니다."

"누가?"

민준은 발터를 봤다. 발터는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당신이 기록자잖아요."

총 7,063자 · 약 14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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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추리#경제#회귀
비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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