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게으름뱅이 4화: 쌍둥이 천마의 비밀
주인공: 나태운
황천협곡의 바람이 멈췄다.
나태운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삼파연합의 시체들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승리는 완벽했다. 그런데도 저주는 풀리지 않았다.
"귀찮네."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건 백야린의 뒷모습이었다. 천마는 협곡 끝자락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뭘 보고 있어."
"……오빠가 올 것 같아서."
백야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태운은 입맛을 다셨다. 또 시작이군. 천마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건 처음 봤다.
"네 오빠 죽었잖아."
"언니야. 쌍둥이 언니."
"아, 그래. 귀찮게."
나태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10년 전 일은 기억하기도 귀찮았다. 백야월. 전대 천마. 자신의 목을 베라고 웃으며 말했던 여자. 그리고 그 순간, 걸렸던 저주.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잠들 수 없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백야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잠들려고 하면 심장이 뛰었다. 뭔가 놓친 게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태운."
백야린이 돌아섰다. 천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가 살아있다면?"
"그럼 죽이면 되지."
"……네가?"
"귀찮으니까 네가 해."
나태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불면증은 무공을 갉아먹고 있었다. 10년 전의 그라면 이 정도 전투는 숨도 안 찼을 텐데.
바로 그때였다.
협곡 입구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 짝. 짝.
느린 박수.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역시 절대검성이야. 삼파연합을 혼자 쓸어버리다니."
나태운의 눈이 떠졌다. 완전히.
협곡 입구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검은 도포에 은빛 가면을 쓴 채.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 기운은.
"백야월."
백야린의 비명 같은 외침이 협곡을 울렸다. 천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공포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 알 수 없었다.
가면을 쓴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린아. 잘 지냈어?"
"언니……?"
"그래, 언니야. 네 쌍둥이 언니."
여자의 손이 가면으로 향했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가면을 벗어냈다.
드러난 얼굴.
백야린과 똑같았다. 아니, 완벽하게 대칭되는 얼굴이었다. 백야린의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다면, 백야월은 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10년 만이네, 태운아."
백야월이 웃었다. 그 웃음은 10년 전 그날, 자신의 목을 베라고 말하던 그때와 똑같았다.
나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귀찮아지니까.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귀찮네."
"여전하구나. 그 말버릇."
백야월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백야린이 앞을 막아섰다.
"언니, 어떻게……."
"어떻게 살아있냐고? 간단해. 안 죽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그날……!"
"그날 네가 내 목을 베었지. 맞아. 천마 계승 의식. 쌍둥이 천마 중 하나가 죽어야만 진정한 천마가 탄생한다는 그 저주 같은 전설."
백야월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근데 말이야, 린아. 누가 죽어야 한다는 규칙은 있었어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더라고."
백야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슨……."
"나는 죽었어. 정확히 3분 12초 동안. 그리고 되살아났지. 천마신교 금서에 기록된 환생술로. 대가는 컸어. 내 무공의 절반과 10년이라는 시간. 하지만 덕분에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
나태운이 하품을 했다.
"길게 말하지 마. 귀찮아."
"미안. 네 성격 잊고 있었네."
백야월이 나태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간단히 말할게. 너한테 건 저주, 기억하지?"
"……."
"그거 내가 걸었어. 10년 전, 내가 죽기 직전에. 불면의 저주.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절대 잠들 수 없는."
나태운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으로 살기가 섞였다.
"이유는."
"널 이용하기 위해서. 무림 최강자를 내 도구로 만들기 위해서."
백야월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광기가 섞여 있었다.
"생각해봐. 잠들지 못하는 절대검성. 점점 약해지는 몸.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성격. 너는 계속 싸울 수밖에 없어.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림의 질서는 무너지지."
"언니……!"
백야린이 검을 뽑았다. 천마의 기운이 폭발했다. 하지만 백야월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내지 마, 린아. 이건 다 너를 위한 거야."
"무슨 소리야!"
"쌍둥이 천마의 진짜 의미를 아직도 몰라? 달과 해가 동시에 뜨는 날. 두 천마가 함께할 때, 세상은 완전한 어둠 아니면 완전한 빛이 된다는 거."
백야월의 눈빛이 타올랐다.
"나는 10년간 준비했어. 너와 내가 다시 하나가 되는 방법을. 쌍둥이 천마 의식을 완성하는 방법을. 그리고 그 열쇠가 바로……."
백야월의 손가락이 나태운을 가리켰다.
"절대검성의 죽음이야."
침묵이 흘렀다.
나태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억눌린 검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귀찮네."
짧은 말과 함께, 나태운이 주저앉았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 모라. 다 귀찮아."
백야린이 당황했다.
"나태운?!"
"포기. 난 자고 싶어. 그냥 자고 싶다고."
나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만에 처음 드러낸 감정이었다.
"10년이야. 1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못 잤어. 눈 감으면 꿈도 안 와. 그냥 어둠만 있어. 깨어있는 건지 자는 건지도 모르겠어. 귀찮아. 다 귀찮다고."
바로 그 순간.
나태운의 몸에서 검기가 폭발했다.
통제되지 않은, 억눌렸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황천협곡의 바닥이 갈라졌다. 벽이 무너졌다.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백야월이 뒤로 물러났다. 백야린이 방어막을 쳤다.
"이건……!"
"각성이야."
백야월이 웃었다. 환희에 찬 웃음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협곡 반대편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설린이었다.
혈마문의 소문주는 혼절산 한 병을 들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오직 나태운만을 향하고 있었다.
"태운 오빠……."
설린이 속삭였다.
"이제 영원히 함께 잠들 수 있어요."
# 천하제일 게으름뱅이 4화: 쌍둥이 천마의 비밀 (후반부)
나태운의 검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통제되지 않은 힘. 10년간 억눌렀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백야린이 천마의 기운으로 방어막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검기는 방어막을 관통했다. 아니, 관통한 게 아니었다. 검기가 방어막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건 검기가 아니야……!"
백야린이 헐떡였다.
백야월이 말했다.
"맞아. 검기가 아니지. 저건 '무(無)'야. 존재 자체를 지우는 힘. 절대검성의 진짜 경지."
협곡 바닥이 계속 갈라졌다. 균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틈 사이로 검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설린이 그 검은 기운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워요……."
그녀가 혼절산 병을 땅에 놓았다. 천천히 나태운에게 다가갔다.
"태운 오빠. 제가 함께 있어줄게요. 영원히."
백야린이 설린 앞을 막아섰다.
"비켜!"
"안 돼. 넌 그를 죽일 생각이잖아."
"죽이는 게 아니에요. 해방시켜드리는 거예요."
설린의 눈빛이 변했다. 혈마문의 마공이 폭발했다. 붉은 기운이 설린의 몸을 감쌌다.
"언니는 몰라요. 잠들지 못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매일 밤 깨어있어야 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설린의 손톱이 길게 자라났다. 혈마조(血魔爪). 혈마문의 절기였다.
"그분은 10년 동안 고통받았어요. 이제 쉬게 해드려야죠."
"그건 네 멋대로 판단이야!"
백야린과 설린의 기운이 충돌했다. 천마와 혈마. 두 절정고수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쾅!
둘 다 동시에 튕겨나갔다.
나태운이 일어서 있었다.
눈을 뜬 채로.
아니, 눈은 떠져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고 싶어."
나태운이 중얼거렸다.
"그냥 자고 싶다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그냥 깊이, 깊이……."
그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냥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협곡이 반으로 갈라졌다.
정확히 반으로.
마치 신이 자로 잰 것처럼 완벽하게.
백야월이 박수를 쳤다.
"훌륭해.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그녀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 구슬이었다.
구슬 표면에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쌍둥이가 서로를 안고 있는 형상이었다.
"이게 뭔지 알아, 린아?"
백야린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천마혈옥(天魔血玉)?"
"정답. 천마신교 금서에 기록된 금기의 보물. 두 천마의 혈을 담으면, 그 둘을 하나로 만드는."
백야월이 구슬을 높이 들었다.
"10년 전, 내가 죽었을 때 내 피가 이 안에 담겼어. 그리고 지금, 네 피만 있으면 의식이 완성돼."
"미쳤어……!"
"미쳤다고? 그럴지도. 하지만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쌍둥이 천마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백야월의 눈빛이 나태운을 향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절대검성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어. 아니, 저주를 전이시킬 수 있지. 다른 누군가에게."
나태운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초점 없는 눈이었다.
"누구한테."
"무림맹에게."
백야월이 웃었다.
"무림맹주와 그 수하들 전부에게. 저주를 나눠서 걸면, 너는 자유로워져. 대신 무림맹 전체가 불면에 시달리겠지. 그들은 점점 미쳐갈 거야. 서로를 죽이기 시작할 거고."
"그럼 무림이 멸망해!"
백야린이 소리쳤다.
"그게 목적이야. 무림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천마신교가 지배하는 세상."
백야월이 천천히 백야린에게 다가갔다.
"넌 선택해야 해, 린아. 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건지, 아니면 저 남자를 위해 죽을 건지."
"나는……."
백야린이 나태운을 봤다.
나태운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자고 싶다고, 그냥 자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10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자지 못한 남자.
천하제일의 검객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잠들고 싶어 하는 사람.
백야린의 가슴이 아팠다.
"나는……그 사람을 살리고 싶어."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여. 우리가 하나가 되면, 저주를 풀 수 있어."
"하지만 그 대가로 무림이……."
"무림이 뭐가 중요해? 우리를 버린 무림이. 쌍둥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았다며 죽이려 했던 그들이."
백야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괴물 취급받았어. 쌍둥이 천마라는 전설 때문에. 부모님도 우릴 죽이려 했잖아. 천마신교조차 우릴 두려워했고."
"그래도……."
"그래도 뭐?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백야월이 천마혈옥을 쥐었다. 구슬이 붉게 빛났다.
"난 용서 안 해. 절대로. 이 세상 모두에게 복수할 거야."
바로 그 순간.
설린이 움직였다.
혈마문의 신법. 순간이동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나태운 뒤에 섰다.
그리고 그의 목에 혼절산 병을 들이댔다.
"미안해요, 태운 오빠."
설린이 속삭였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이걸 마시면 영원히 잠들 수 있어요. 고통도 없이. 꿈도 없이. 그냥……평화롭게."
"설린, 그거 놔!"
백야린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백야월이 막아섰다.
"늦었어."
설린이 병을 나태운의 입에 가져갔다.
혼절산. 한 방울만 마셔도 석 달을 잔다는 맹독. 한 병을 마시면……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나태운의 입이 열렸다.
설린이 병을 기울였다.
붉은 액체가 나태운의 입 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백야린이 절규했다.
"안 돼!"
천마의 기운이 폭발했다. 백야월을 밀어내고 달려갔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네 방울.
다섯 방울.
여섯 방울.
설린이 웃었다. 황홀한 표정으로.
"이제 함께……."
일곱 방울.
그 순간.
나태운의 손이 움직였다.
설린의 손목을 잡았다.
"귀찮네."
초점 없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다 귀찮아."
나태운이 설린의 손목을 비틀었다. 혼절산 병이 떨어졌다. 땅에 부딪혀 깨졌다. 붉은 액체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래서 결정했어."
나태운이 일어섰다.
"다 부숴버리기로."
검을 뽑았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검을 뽑았다.
절대검 무영(無影).
검신이 드러나는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아니, 빛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검이 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삼키는 검.
"너희 전부."
나태운이 말했다.
"한 번에 상대해줄게. 귀찮으니까."
백야월이 웃었다.
"좋아. 그게 네 답이라면."
천마혈옥이 더욱 강하게 빛났다.
"보여줄게. 쌍둥이 천마의 진정한 힘을."
백야월이 손을 뻗었다. 백야린을 향해.
"린아, 이리 와."
"싫어!"
"선택권은 없어."
천마혈옥에서 붉은 사슬이 뻗어나왔다. 백야린의 몸을 감았다. 사슬은 그녀의 혈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백야린이 비명을 질렀다.
"언니, 멈춰!"
"곧 끝나. 곧 우리는 하나가 될 거야."
천마혈옥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다. 쌍둥이 문양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태운이 검을 들었다.
"귀찮게 하지 마."
검을 휘둘렀다.
세상이 둘로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 게 아니었다. 세상의 절반이 '사라졌다'. 존재 자체가 지워졌다.
백야월과 백야린이 있던 공간까지.
하지만.
"소용없어."
백야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라진 공간에서.
"이미 의식은 시작됐어. 네 검으로도 막을 수 없어."
붉은 빛이 폭발했다.
사라진 공간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하나가 된 쌍둥이가 서 있었다.
백야월과 백야린이 겹쳐진 형상.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게……진짜 쌍둥이 천마."
목소리도 둘이 겹쳐서 들렸다.
"이제 네 저주를 풀어줄게, 태운아. 대신……."
쌍둥이 천마가 손을 뻗었다.
"네 목숨을 받겠어."
나태운이 하품을 했다.
"역시 귀찮네."
검을 거꾸로 쥐었다.
자신의 목을 향해.
"그럼 내가 먼저 죽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