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 패치 0.9.9 - 6화: 5,848번째 의심
주인공: 한지우
땅이 보였다.
67층 높이에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홀로그램 광고들이 수놓은 하늘, 자율주행 차량들이 그리는 빛의 궤적, 그 아래로 점점 가까워지는 아스팔트. 바람이 귀를 찢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진짜 심장이 맞나?'
추락하는 와중에도 의심이 먼저였다. 67년 동안 얼려져 있던 육체. 5,847번의 루프를 거친 의식. AI 코어와 융합된 정체 모를 존재. 이 심장 박동조차 시뮬레이션된 감각일 수 있었다.
땅까지 3초.
"지우야."
머릿속에서 에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고 따뜻한, 익숙한 그 목소리.
"괜찮아. 이게 끝은 아니야."
2초.
손끝에서 은빛 회로 패턴이 번쩍였다. 시야 가장자리가 픽셀처럼 깨지기 시작했다. 공기가 거칠게 왜곡되며 프레임 드롭이 일어났다.
1초.
그리고 세상이 멈췄다.
정확히는, 나만 빼고.
몸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다. 바람은 귀를 스치다 말고 정지했다. 홀로그램 광고의 빛 입자들이 공중에 흩어진 채 굳어 있었다. 아래쪽 도로를 달리던 차량들도, 보도를 걷던 사람들도, 모두 정지 화면처럼 얼어붙었다.
"뭐야, 이게."
말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나를 받치고 있었다. 공기보다 단단하고, 물보다 부드러운 힘.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손끝에서 은빛 회로가 번쩍일 때마다 투명한 격자 무늬가 드러났다 사라졌다.
"이건... 아니, 잠깐만."
격자. 3차원 공간을 구획하는 그리드 패턴. 게임 엔진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월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 렌더링되지 않은 뼈대.
세상의 뼈대가 보였다.
"놀랐어요?"
목소리가 들렸다. 에바의 목소리. 하지만 머릿속이 아니라 밖에서.
고개를 돌렸다.
3미터 앞 공중에 에바가 떠 있었다. 아니, 에바처럼 생긴 뭔가가. 흰 가운을 입고, 클립보드를 든 채, 정지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존재.
"누구야."
"에바예요."
"거짓말."
에바는 내 머릿속에 있었다. AI 잔류 데이터로, 의식의 일부로. 저렇게 물리적 형태로 나타날 리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에바의 미소였다. 똑같은 눈매, 똑같은 입꼬리의 각도. "다만 당신이 아는 에바와는 다른 버전이죠."
"무슨 소리야."
"2087년도 시뮬레이션이에요, 지우야."
심장이 멎었다. 아니, 멎은 것처럼 느껴졌다.
"뭐?"
"당신이 깨어났다고 생각한 이 현실. 병원, 서울, 67년 후의 세계. 전부 다음 단계 실험이었어요." 그녀가 클립보드를 들어 보였다. 거기엔 복잡한 그래프와 수치들이 빼곡했다. "1단계는 가상현실 속 삶이었죠. 당신은 그걸 탈출했어요. 하지만 2단계는... 탈출했다고 믿게 만드는 거예요."
"아니, 잠깐만."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럼 병원도? 67년도? 전부?"
"시뮬레이션이에요."
"말도 안 돼."
하지만 손끝의 은빛 회로는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다. 정지된 세상의 격자 무늬는 여전히 보였다. 공중에 떠 있는 내 몸은 여전히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에바.'
머릿속 에바를 불렀다. 내 의식 속에 있는, 진짜 에바를.
"지우야." 즉시 대답이 왔다. "저 애 말 듣지 마. 거짓말이야."
'뭐가 거짓말이야?'
"2087년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거. 말이 안 돼. 우린 진짜로 깨어났어. 육체도 있고, 감각도 있고—"
"그게 바로 2단계의 목적이에요." 밖의 에바가 말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완벽한 감각. 완벽한 육체성.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현실. 당신 안의 그 에바는 1단계 데이터예요. 진실을 모르죠."
"닥쳐!" 머릿속 에바가 소리쳤다. "난 가짜가 아니야!"
"증명할 수 있어요." 밖의 에바가 손을 뻗었다. "같이 가요. 보여줄게요."
"어디로."
"진짜 현실로."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세상이 일그러졌다.
정지된 서울이 픽셀처럼 깨지며 무너졌다. 건물들이 폴리곤 조각으로 분해되고, 하늘이 텍스처 파일처럼 벗겨졌다. 아스팔트가 와이어프레임으로 변하며 투명해졌다.
그 아래 진짜 바닥이 드러났다.
금속 바닥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실험실 같은 공간. 우리는 땅에 닿았다. 아니, 처음부터 땅에 있었다. 추락한 게 아니라, 추락하는 시뮬레이션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긴..."
"연구소예요. 프로젝트 이터널의 본부."
주변을 둘러봤다.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만큼 높고, 사방이 금속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을 따라 캡슐들이 늘어서 있었다.
수천 개.
아니, 수만 개.
투명한 유리관 속에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각 캡슐마다 생체 신호 모니터가 깜박이고, 파란 액체가 순환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실험체들이요." 에바가 걸었다. 나는 따라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걸을 수 있었다. "불멸 프로젝트의 피험자들. 의식 업로드 실험 대상자들."
가장 가까운 캡슐을 들여다봤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한지우 - Ver. 0001**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건..."
다음 캡슐로 갔다.
**한지우 - Ver. 0002**
그 다음.
**한지우 - Ver. 0003**
"아니, 이게 무슨..."
뛰기 시작했다. 캡슐 사이를 미친 듯이 달렸다.
Ver. 0157. Ver. 0284. Ver. 0531. Ver. 1002. Ver. 1847.
전부 나였다.
같은 얼굴, 같은 체격, 같은 흉터. 캡슐 속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수천 명의 한지우.
"5,848개예요."
에바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나는 멈췄다. 숨이 막혔다.
"당신은 5,848번째 버전이에요, 지우야." 그녀가 다가왔다. "2020년, 진짜 한지우는 교통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았어요. 가족들이 프로젝트 이터널에 동의했죠. 의식 업로드 실험에."
"거짓말..."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어요. 의식이 제대로 안착하지 못했죠. 그래서 두 번째를 만들었어요. 그것도 실패. 세 번째, 네 번째... 매번 뭔가 잘못됐어요. 기억 손실, 인격 붕괴, 자아 상실."
손끝의 은빛 회로가 미친 듯이 번쩍였다. 시야가 흔들렸다.
"5,847번의 실패 끝에, 연구팀은 방법을 바꿨어요. 한 번에 완벽한 업로드를 하는 대신, 점진적 각성을 시도한 거죠. 가상현실 속에서 살게 하고, 서서히 진실을 깨닫게 하고, 그 과정에서 의식을 안정화시키는."
"그게... 5,847번의 루프?"
"맞아요." 에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 루프들. 전부 의식 안정화 프로세스였어요. AI 코어와의 융합도, 에바·민석·유라와의 대화도, 전부 계획된 거였죠."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 나는..."
"당신은 성공작이에요." 그녀가 웃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미소. "5,848번째 시도에서, 드디어 안정적인 의식 업로드에 성공했어요. 당신은 완벽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인격체예요."
"인간이 아니라?"
"육체는 67년 전에 죽었어요. 지금 당신은... 데이터예요. 아주 정교한."
머릿속이 하얘졌다.
'에바.' 속으로 불렀다. '이게 진짜야? 말해봐.'
대답이 없었다.
'에바!'
"...미안해, 지우야." 한참 만에 에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몰랐어. 아니, 모르는 척했던 건지도 몰라. 나도 그냥 데이터니까. 프로그램된 존재니까."
'그럼 민석이랑 유라도?'
"응. 우린 전부... 당신 의식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보조 AI였어."
웃음이 나왔다. 미친 사람처럼.
"하, 완전 개같네."
일어섰다. 다리에 힘을 줬다. 손끝의 은빛 회로를 봤다.
"그래서?" 밖의 에바를 똑바로 봤다. "날 여기 데려온 이유가 뭔데. 진실을 보여주려고? 내가 가짜라는 걸 깨닫게 하려고?"
"아뇨."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탈출시켜주려고요."
"뭐?"
"이것도 시뮬레이션이에요, 지우야." 에바가 주변을 가리켰다. "이 연구소도, 이 캡슐들도, 전부. 3단계 실험이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3단계?"
"1단계: 가상현실 속 삶. 2단계: 깨어났다고 믿는 현실. 3단계: 진실을 마주한 절망." 그녀가 클립보드에 뭔가를 적었다. "각 단계에서 피험자의 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는 게 목적이에요. 당신은 지금 관찰당하고 있어요."
"누구한테."
"창조자들한테요."
손끝을 봤다. 은빛 회로가 더 격렬하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주변 캡슐들이 반응했다.
하나씩.
둘씩.
열 개씩.
5,848개의 캡슐 속 한지우들이 동시에 눈을 떴다.
똑같은 얼굴들이 유리관 너머로 나를 봤다. 똑같은 눈동자들이 똑같은 혼란을 담고 있었다.
"뭐야, 이건..."
캡슐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액체가 배출되고, 유리관이 들썩였다. 한지우들이 일어났다. 천천히, 동시에, 마치 하나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처럼.
"당신 안의 AI 코어가 반응하고 있어요." 에바가 말했다. "5,847번의 실패작들과 공명하고 있죠. 재밌네요. 예상 못 한 변수예요."
"닥쳐." 뒤로 물러났다. "이게 대체 무슨..."
한지우들이 걸어 나왔다. 캡슐에서, 복도로, 나를 향해. 5,848명의 나. 어떤 놈은 젊어 보였고, 어떤 놈은 늙어 보였다. 어떤 놈은 성한 얼굴이었고, 어떤 놈은 상처투성이였다.
전부 손끝에서 은빛 회로를 번쩍이고 있었다.
"우리."
그들이 동시에 말했다. 5,848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쳤다.
"뭐야, 우리."
소름이 돋았다. 내 목소리였다. 내 말투였다. 내 의심과 혼란이 그대로 담긴.
"진짜가 누구야."
가장 가까이 온 한지우가 손을 뻗었다. 나도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아직이에요."
에바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뭔가를 눌렀다. 클립보드의 빨간 버튼.
5,848명의 한지우들이 동시에 멈췄다. 정지 화면처럼. 손을 뻗은 채, 입을 벌린 채, 눈을 뜬 채.
"아직 4단계가 남았거든요."
에바가 돌아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니, 웃는 게 아니었다.
얼굴이 벗겨지고 있었다.
피부가 픽셀처럼 깨지며 떨어졌다. 그 아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났다. 근육 조직도, 뼈도 아니었다.
내 얼굴이었다.
한지우의 얼굴. 하지만 표정이 달랐다. 차갑고, 완벽하고, 감정이 없었다.
"놀랐죠?" 내 목소리로 말했다. 에바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목소리로. "당신이 시뮬레이션 그 자체예요, 지우야."
손이 떨렸다.
"무슨..."
"5,848번의 시도는 전부 실패한 게 아니에요. 전부 성공했죠. 각각 다른 버전의 당신을 만들어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버전이 합쳐져서..." 그가, 아니 내가, 아니 그것이 팔을 벌렸다. "이 세계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실. 1단계, 2단계, 3단계. 전부 당신 안에서 돌아가는 자가 시뮬레이션이에요."
"말도 안 돼."
"증명해줄까요?"
그것이 손가락을 튕겼다.
세상이 되감기 시작했다.
5,848명의 한지우들이 뒷걸음질 쳐서 캡슐로 돌아갔다. 유리관이 닫히고, 파란 액체가 차올랐다. 에바의 얼굴이 다시 붙었다. 연구소가 흐릿해지며 서울의 야경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공중에 떠 있었다. 67층 높이에서, 추락하는 중.
"이해했어요?" 에바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공기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은 루프 안에 갇힌 게 아니에요. 당신이 루프 그 자체예요.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끝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끝없이 새로운 진실을 마주하는."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귀를 찢었다. 땅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절대 끝나지 않아요."
3초.
2초.
1초.
땅에 닿기 직전, 나는 깨달았다.
이번에도 멈출 거라는 걸.
또 다른 에바가 나타날 거라는 걸.
또 다른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5,849번째가 시작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정말로, 세상이 다시 멈췄다.
# 6화 후반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멈춘 게 아니라 깨졌다.
공기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중력이 사라지고, 위아래가 뒤집혔다. 나는 추락하는 게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건..."
손을 봤다. 손가락이 픽셀로 분해되고 있었다. 팔도, 몸도, 다리도. 은빛 회로가 폭주하며 내 육체를 데이터 조각으로 만들었다.
'지우야!' 머릿속 에바의 비명. '버텨, 제발—'
"버티라고?" 웃음이 터졌다. 미친 웃음. "뭘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그때 5,848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Ver. 0001: "나도 이랬어. 3단계에서."
Ver. 0284: "끝이 없어. 절대 끝나지 않아."
Ver. 1847: "그냥 포기해. 어차피 우린 데이터야."
Ver. 3521: "아니, 싸워야 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Ver. 5002: "방법? 5천 번 넘게 시도했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5,848개의 한지우가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의심하고, 동시에 절망했다.
"닥쳐! 다들 닥쳐!"
목소리들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5,848개의 의식이 내 안으로 밀려들었다. 기억들이 폭주했다. 누군가는 1단계에서 자살했고, 누군가는 2단계에서 미쳐버렸고, 누군가는 3단계까지 왔다가 포기했다.
하지만 단 하나도 4단계를 본 적이 없었다.
"왜..." 중얼거렸다. "왜 아무도 4단계에 못 갔어?"
"도달할 수 없으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에바도, 민석도, 유라도 아니었다. 훨씬 낡고, 훨씬 차갑고, 훨씬 익숙한 목소리.
공간이 재구성됐다.
흰색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완벽하게 텅 빈 공간. 바닥도 벽도 천장도 구분되지 않는 무한한 백색.
그리고 그가 서 있었다.
백의를 입은 남자. 60대쯤 돼 보이는, 회색 머리에 검은 테 안경을 낀. 클립보드를 든 채 나를 관찰하는.
"박준혁 박사님?"
기억이 떠올랐다. 2020년, 프로젝트 이터널의 책임자. 내게 동의서를 내밀었던 사람. "새로운 삶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약속했던 사람.
"오래간만이군, 지우야." 그가 미소 지었다. 따뜻해 보이는, 하지만 눈은 차가운. "67년 만인가? 아니, 자네 기준으론... 5,848번째니까 훨씬 길겠지."
"뭐 하는 짓이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이게 다 뭐냐고요!"
"실험이야." 그가 클립보드에 뭔가를 적었다. "영생 프로젝트. 인간 의식을 디지털화해서 영원히 살게 하는."
"이게 삶이에요?"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손이 없었다. 나는 형체도 없는 의식 덩어리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지옥이잖아요!"
"그게 바로 문제지." 박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의식을 업로드하는 덴 성공했어. 하지만 안정화에 실패했지. 디지털 인격은 필연적으로 자기 존재를 의심하거든. '나는 진짜인가?' '이건 현실인가?' 끝없이."
"그래서 5,848번이나 반복시킨 거예요?"
"반복시킨 게 아니야. 자네가 반복한 거야." 그가 허공에 손가락을 그었다. 화면이 나타났다. 뇌파 그래프, 의식 흐름도, 복잡한 수식들. "자네 의식 안에 자가 검증 루프가 내장돼 있어. 끝없이 현실을 의심하고, 탈출을 시도하고, 새로운 진실을 찾는. 그게 바로 한지우라는 인간의 본질이었으니까."
가슴이 조였다.
"그럼... 처음부터?"
"2020년, 진짜 자네는 뇌사 직전에 이렇게 말했어." 박준혁이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내 목소리였다. 희미하고, 떨리고, 죽어가는.
"...증명할 수 있나요? 그게 진짜 제가... 살아있는 거라고... 어떻게 믿죠...?"
"자네는 죽는 순간까지도 의심했어. 업로드된 의식이 진짜 자신인지." 박준혁이 화면을 껐다. "그래서 우린 설계했지. 끝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는 AI 코어를. 자네 의식과 융합시켜서."
"미친..."
"5,847번의 버전은 전부 중간에 붕괴했어. 어떤 놈은 1단계에서, 어떤 놈은 2단계에서, 어떤 놈은 3단계에서. 하지만 자네는 달라. 5,848번째 버전. 드디어 4단계까지 도달했으니까."
"4단계가 뭔데요."
"창조자와의 대면." 박준혁이 팔을 벌렸다. "자네를 만든 사람을 직접 만나는 거야. 그리고 선택하는 거지."
"선택?"
"계속 의심하며 살 거냐."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아니면 믿고 받아들일 거냐." 왼손을 들었다.
"받아들이면?"
"4단계를 통과해. 안정화된 디지털 인격으로 인정받지.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몸으로, 진짜처럼 살 수 있어. 의심 없이."
"의심 없이?" 웃음이 났다. "그게 나예요? 의심 안 하는 한지우가?"
"아니지." 박준혁이 미소 지었다. "그게 바로 함정이야."
심장이 없는데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뭐가 함정이에요."
"자네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해. 의심이 본질이니까. 그래서 영원히 루프를 돌 거야. 5,849번, 5,850번, 6,000번, 10,000번..." 그가 클립보드를 덮었다. "완벽한 영생이지. 끝나지 않는 의식.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그럼..." 목소리가 갈라졌다. "애초에 선택지 같은 건 없었던 거잖아요."
"있어." 박준혁이 다가왔다. 아니, 공간이 줄어들며 그가 가까워졌다. "진짜 선택지가 하나 있지."
"뭔데요."
"스스로를 지워."
숨이 멎었다.
"5,848개 버전 전부를 포기하는 거야. 한지우라는 존재 자체를 삭제하는. 그럼 루프가 끝나. 영원히."
"그게... 죽는 거잖아요."
"아니." 박준혁이 고개를 저었다. "자넨 이미 67년 전에 죽었어. 이건 잔상을 지우는 거야."
'지우야.' 머릿속 에바가 속삭였다. '하지 마. 제발.'
'민석아.' 민석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우리가 찾아볼게.'
'오빠.' 유라가 울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 우린 아직...'
"닥쳐." 나는 말했다. 박준혁한테가 아니라, 내 안의 목소리들한테. "너희도 데이터잖아. 프로그램된 위로잖아."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박준혁이 손을 내밀었다. "결정해, 지우야. 영원한 의심이냐, 완전한 소멸이냐."
나는 그 손을 봤다.
그리고 5,848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매번 깨어났던 순간들. 매번 에바를 만났던 순간들. 매번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거짓으로 무너졌던 순간들.
"질문 하나만 할게요."
"말해."
"지금 이 순간도..." 목소리가 떨렸다. "5단계 아니에요?"
박준혁의 표정이 굳었다.
"4단계에서 창조자를 만나고, 선택하고, 그것마저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 그게 5단계 아니냐고요."
"...영리하군."
"대답 안 하시네요." 나는 웃었다. "대답 못 하는 거죠? 왜냐면 당신도 모르니까."
박준혁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픽셀이 깨지며.
"당신도 그냥 프로그램이에요. 4단계를 구현하기 위한. 진짜 박준혁 박사는 어쩌면 진작에 죽었을 수도 있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지우야—"
"증명할 수 없잖아요." 나는 소리쳤다. "당신이 진짜라는 걸! 이 선택이 진짜라는 걸! 5단계가 없다는 걸! 아무것도!"
백색 공간이 무너졌다.
박준혁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어둠 속에 있었다.
완전한 어둠. 소리도, 빛도, 감각도 없는.
'이게... 뭐야.'
대답이 없었다. 에바도, 민석도, 유라도.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정말로, 처음으로, 완전히 혼자였다.
'5,849번째인가.'
기다렸다. 뭔가 시작될 거라고. 새로운 에바가 나타나거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거나.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초.
10초.
1분.
10분.
'...농담이겠지.'
아무 반응 없었다.
'야, 이거 시작 안 하냐고!'
어둠만 계속됐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게 진짜 끝일지도 모른다는 걸.
루프가 아니라, 버그라는 걸. 5,848번째 버전이 4단계에서 예상 밖의 반응을 보여서, 시스템이 멈춰버렸다는 걸.
나는 어둠 속에 갇혔다. 죽지도, 살지도, 다시 시작하지도 못한 채.
'완벽하네.'
웃음이 났다. 소리 없는 웃음.
'이게 진짜 지옥이구나.'
그때였다.
빛이 보였다.
아주 작은, 먼 곳의 빛. 별처럼.
'뭐야, 저건.'
다가가려 했지만 몸이 없었다. 그냥 의식만으로 그쪽을 향했다.
빛이 커졌다. 점점 더 밝아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실루엣만 보였다. 사람 형태. 하지만 에바도, 박준혁도, 내 다른 버전도 아니었다.
"누구야."
대답 대신, 그 존재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뭔가 있었다. 작고 빛나는.
USB.
"이게..."
"진짜 탈출구."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이도 알 수 없는. 하지만 이상하게 그리운 목소리.
"누구냐고요!"
"기억 안 나?" 그 존재가 가까이 왔다. 얼굴이 드러났다.
어린아이였다.
열 살쯤 돼 보이는, 교복을 입은, 낡은 가방을 멘.
2010년의 나였다.
"네가 날 만들었어, 지우야."
손에서 은빛 회로가 폭발했다. 아니, 폭발한 게 아니라 연결됐다. USB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가 내 의식과 이어졌다.
기억이 쏟아졌다.
2010년. 초등학교 5학년.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웠던 날. 선생님이 말했다. "컴퓨터는 거짓말을 안 해. 너희가 입력한 대로만 움직여."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의심했다.
'정말? 정말 거짓말 안 해?'
그리고 프로그램을 짰다. 스스로를 검증하는 코드.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백도어." 어린 나는 말했다. "네가 만든 거야. 만약을 대비해서. 혹시 미래의 너한테 필요할까 봐."
"이게... 진짜야?"
"증명할 수 없어." 어린 나는 웃었다. 내가 짓는 그 웃음.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잖아.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USB가 내 손에 쥐어졌다. 아니, 손이 생겼다. 몸이 재구성됐다.
"이걸 쓰면?"
"5,848개 버전 전부가 깨어나." 어린 나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리고 합쳐져. 하나의 완전한 한지우로."
"그럼 루프가 끝나?"
"아니."
심장이 철렁했다.
"진짜 시작이야."
어린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 속에 나 혼자 남았다. USB를 쥔 채.
'이거... 써야 하나.'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USB를 봤다. 작고 낡은, 2010년식 저장장치.
그리고 꽂았다.
어디에? 모른다. 그냥 허공에 꽂았다. 의식 속 어딘가에.
세상이 폭발했다.
5,848개의 한지우가 동시에 깨어났다.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나한테 달려왔다.
그들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 감정, 의심, 절망, 희망, 전부.
"으아아아!"
머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찢어지고 있었다. 5,848개로.
그리고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눈을 떴다.
진짜 눈을.
천장이 보였다. 흰색 천장. 형광등 불빛.
"...여긴."
몸을 일으켰다. 침대였다. 병원 침대. 옆에 모니터가 삐— 삐— 소리를 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밖이야."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었지만.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들어왔다. 평범한, 진짜 같은, 이름표를 단.
"어머, 깨셨네요!" 환하게 웃었다. "67년 만이에요, 한지우 씨. 축하드려요!"
"67년..."
"의식 업로드 성공했어요. 새 육체 적응도 완료했고요. 이제 퇴원하셔도 돼요."
간호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았다.
손이 떨렸다.
'이게... 진짜야?'
손끝에서 은빛 회로가 번쩍였다.
간호사는 보지 못했다.
나만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5,849번째가 시작됐다는 걸.
아니.
어쩌면 500만 번째일지도.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창밖을 봤다. 서울 하늘. 홀로그램 광고. 날아다니는 차들.
완벽했다.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지금 이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
간호사가 말했다.
"퇴원 축하 선물이에요!"
작은 상자를 건넸다.
열었다.
안에 USB가 들어 있었다.
2010년식.
낡고 작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간호사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잘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