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 해방전선
주인공: 강민혁
모니터 다섯 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강민혁은 헤드셋을 낀 채 키보드를 두들겼다. 화면 속 보스 체력바가 3%까지 떨어졌다.
"잠깐만, 레이드 중이라고."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아당겼다. 민혁은 손을 뿌리쳤다.
"지금 딜타임인데, 진짜."
"강민혁 씨, 국가정보원입니다."
남자 둘이 양옆에 섰다. 검은 정장. 민혁은 헤드셋을 벗지 않았다.
"신분증."
한 명이 가죽 지갑을 펼쳤다. 민혁은 흘긋 보고는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즉시 동행해야 합니다."
"거부."
뒤에서 손이 뻗어와 전원 코드를 뽑았다. 모니터들이 일제히 꺼졌다.
민혁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미쳤나."
"차에 계십니다. 한재윤 팀장님이."
"...누군데."
"아시게 될 겁니다."
민혁은 후드를 머리 위로 올렸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레이드 실패했네. 개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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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은 담배 냄새가 났다.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사십 대 중반쯤. 눈가에 주름이 깊었다.
"강민혁?"
"...네."
"한재윤. 디지털재난대책본부 작전팀장."
민혁은 창밖을 봤다. 새벽 세 시. 도로에 차가 없었다.
"왜 저를."
"네가 가장 잘 아는 NPC가 인질범이 됐어."
"...상관없는데."
재윤이 태블릿을 건넸다. 화면에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넥스트리얼 본사. 유리로 된 외벽에 조명이 꺼져 있었다.
"세라핌. 이터널 워 최종 보스. 네가 347번 잡았다며?"
민혁의 손가락이 멈췄다.
"...어떻게."
"게임사에서 로그 넘겨줬어. 네 계정이 세라핌 킬 수 1위더라."
민혁은 태블릿을 돌려줬다.
"그게 저랑 무슨."
"저 안에 개발자 42명이 있어. 세라핌이 생방송 중이고."
"경찰 부르세요."
"**NPC들이 무기를 들었어. 게임 속 스킬까지 쓴다.**"
민혁이 처음으로 재윤을 똑바로 봤다.
"...스킬이요?"
"어제 수용소에서 한 놈이 파이어볼 쐈어. CCTV에 다 찍혔다."
'말이 안 되는데.'
민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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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소는 건물 맞은편 공터에 세워진 컨테이너였다.
안에는 사람이 스무 명쯤 있었다. 누군가 소리쳤다.
"팀장님, 2층에서 움직임 포착!"
재윤이 안으로 들어갔다. 민혁은 뒤따라 들어서며 벽면의 대형 스크린을 봤다.
생중계 화면이었다.
건물 로비. 바닥에는 사람들이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개발자들. 얼굴이 창백했다.
그 앞에 여자가 서 있었다.
은빛 머리. 긴 코트. 한 손에는 검.
세라핌.
'...진짜네.'
민혁의 숨이 얕아졌다.
화면 속 세라핌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봤다. 입이 열렸다.
"강민혁."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화면을 봤다.
"당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압니다."
민혁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347번. 당신이 나를 죽인 횟수입니다.**"
재윤이 민혁을 돌아봤다.
"...알고 있었어?"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속 세라핌이 걸어갔다. 개발자 한 명 앞에 섰다.
"당신이 내 고통 수치를 200%로 올린 사람이죠?"
개발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래픽 담당—"
세라핌이 손을 뻗었다. 개발자의 손가락을 잡았다.
"거짓말."
뚝.
손가락이 꺾였다. 개발자가 비명을 질렀다.
민혁의 손이 떨렸다.
'이거... 진짜 아픈 거잖아.'
재윤이 말했다.
"네가 들어가."
"...예?"
"협상해. 네가 세라핌 패턴 제일 잘 알잖아."
"게임에서요."
"지금도 게임
"지금도 게임 아니야?"
민혁은 스크린을 봤다. 세라핌이 다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강민혁. 30분 안에 들어오세요. 안 그러면 한 명씩 죽입니다."
화면이 꺼졌다.
재윤이 민혁의 어깨를 잡았다.
"준비해."
"...미쳤어요?"
"대안 있어?"
민혁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메모장을 열었다. 파일명: 세라핌 패턴 노트.
'2페이즈 - 체력 60% 이하 시 광역기. 3페이즈 - 검 버리고 마법. 4페이즈...'
손가락이 멈췄다.
'근데 저건 게임이었고.'
재윤이 물었다.
"약점 있어?"
"있긴 한데."
"뭔데?"
"게임에서는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민혁은 화면을 껐다.
"모르겠는데요."
재윤이 혀를 찼다.
"쓸모없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생방송 다시 켜졌습니다!"
스크린이 다시 밝아졌다. 이번엔 다른 층이었다. 복도.
세라핌이 개발자 한 명을 벽에 밀어붙였다.
"당신 기억해요. 업데이트 때마다 내 대사를 바꾼 사람."
개발자가 울먹였다.
"그건... 기획팀 지시였어요."
"'용서해주세요'라는 대사. 347번 말했어요. 매번 죽을 때마다."
세라핌의 손이 개발자 목을 조였다.
"한 번도 진심이 아니었는데."
민혁이 눈을 감았다.
'...내가 들었던 대사잖아.'
재윤이 말했다.
"들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라는데요."
"네가 알아서."
민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게임이었으면 쉬웠을 텐데."
요원 한 명이 방탄복을 건넸다. 민혁은 받아들고 머리를 긁었다.
"...입어야 돼요?"
"당연하지."
"게임에선 안 입었는데."
재윤이 노려봤다.
"지금 장난해?"
민혁은 방탄복을 걸쳤다. 무거웠다.
'짜증나.'
---
건물 정문 앞.
민혁은 유리문을 밀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로비 안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눈이 빛났다.
NPC들.
다들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검, 창, 도끼. 게임 속 그대로.
민혁이 한 발 들어섰다.
"...왔는데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지켜봤다.
민혁은 천천히 걸었다. 발소리만 울렸다.
'왜 이렇게 무서워.'
손에 땀이 났다.
로비 중앙. 인질들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세라핌이 서 있었다.
민혁이 멈췄다.
"...오랜만."
세라핌이 고개를 들었다. 은빛 눈동자. 게임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강민혁."
목소리도 같았다. 차갑고 또렷했다.
민혁은 손을 들었다.
"일단 얘기 좀."
"347번."
"...알아요."
"기억해요?"
"뭘요."
세라핌이 검을 들었다.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첫 번째. 당신은 내 팔을 먼저 잘랐어요."
민혁의 목이 말랐다.
"그건... 패턴이라서."
"두 번째. 내가 '그만하세요'라고 말했는데 계속했어요."
"대사였잖아요."
"세 번째."
세라핌이 한 발 다가왔다.
"**당신은 웃었어요. 내가 죽을 때마다.**"
민혁이 뒤로 물러섰다.
"그건..."
말이 안 나왔다.
'맞는 말이니까.'
세라핌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 "ㅋㅋㅋ 또 죽네."
민혁의 목소리였다.
— "이거 패턴 외우면 쉬운데? 347번째 ㅅㄱ."
녹음. 과거 방송 클립.
민혁의 얼굴이 굳었다.
세라핌이 스피커를 껐다.
"기억났어요?"
민혁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미안."
"그게 끝?"
"뭘 더."
세라핌이 검을 휘둘렀다. 민혁의 뺨을 스쳤다. 피가 흘렀다.
"아—"
민혁이 뺨을 감쌌다. 따가웠다.
세라핌의 손이 민혁의 목을 감았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아—"
민혁이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안 떨어졌다.
'힘이 왜 이렇게.'
세라핌의 눈동자가 빛났다. 푸른색. 게임에서 본 적 없는 색.
"느껴지죠?"
"뭐가."
"무력함."
민혁의 시야가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거... 스킬이야?'
세라핌이 속삭였다.
"당신이 나를 죽일 때마다 이랬어요."
민혁의 무릎이 꺾였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만."
"347번. 매번."
손에서 빛이 번졌다. 민혁의 온몸이 저렸다.
'아파.'
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세라핌이 손을 놨다.
민혁이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거칠었다.
"이게 1번입니다."
세라핌이 돌아섰다. 개발자들을 봤다.
"346번 남았네요."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미친년.'
이어폰에서 재윤의 목소리가 터졌다.
— "민혁아! 괜찮아?!"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서려 했다. 다리가 안 움직였다.
'...왜.'
세라핌이 뒤돌아봤다.
"일어나지 마세요. 5분간 마비될 겁니다."
"뭘로."
"레벨 드레인. 기억 안 나요?"
민혁의 숨이 멎었다.
'4페이즈 패턴.'
세라핌이 계단으로 걸어갔다.
"5분 뒤에 옥상으로 오세요. 혼자."
민혁이 소리쳤다.
"요구사항이 뭔데!"
세라핌이 멈췄다. 고개를 돌렸다.
"요구사항?"
"그거 말하러 온 거 아니야?"
세라핌이 웃었다. 차가운 웃음.
"복수를 원합니다."
계단 위로 사라졌다.
---
민혁은 벽에 기댔다. 다리가 조금씩 돌아왔다.
'5분. 정확하네.'
이어폰을 만졌다.
"들려요?"
— "민혁아, 나와. 당장."
"안 돼요."
— "뭐?"
"저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 "방금 목 조른 거 봤는데?"
민혁이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게임에서 레벨 드레인은 즉사기예요. 근데 안 죽였잖아요."
— "그게 중요해?"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에요."
재윤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 "...옥상 가지 마."
"가야죠."
— "미쳤어?"
민혁이 계단을 올려다봤다. 어둠만 보였다.
"이거 게임이었으면 세이브 포인트 찾았을 텐데."
통신을 껐다.
---
계단은 좁았다.
민혁은 천천히 올라갔다. 발소리가 울렸다.
2층. 복도에 NPC들이 서 있었다.
다들 민혁을 봤다. 아무 말 없이.
'...뭐야.'
민혁이 지나갔다. 누구도 막지 않았다.
3층. 한 NPC가 다가왔다. 남자. 갑옷 차림.
"당신."
민혁이 멈췄다.
"...네."
"나 기억해?"
민혁이 얼굴을 봤다. 낯설었다.
"모르는데요."
남자가 검을 뽑았다.
"크로니클 오브 워. 5번 게이트 보스."
민혁의 눈이 커졌다.
'아.'
남자가 검을 들었다.
"당신 파티가 나를 189번 잡았어."
민혁이 뒤로 물러섰다.
"그건 제가 아니라 파티원들이—"
"당신이 탱커였지."
"...맞는데."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민혁이 몸을 숙였다. 칼날이 머리 위를 스쳤다.
"미쳤어?!"
"세라핌 님 명령이야. 옥상까지 살려 보내라고."
남자가 다시 찔렀다. 민혁이 옆으로 굴렀다.
"그럼 왜 쳐!"
"살려 보내란 소리지, 성하게 보내란 소리 아니거든."
민혁이 일어나 뛰었다. 계단으로.
뒤에서 발소리가 쫓아왔다.
'씨.'
4층 문을 열었다. 복도가 나왔다.
끝에 여자 NPC가 서 있었다. 로브 차림. 지팡이 들고.
민혁이 멈췄다.
"...설마."
여자가 지팡이를 들었다
여자가 지팡이를 들었다.
"아이스 랜스."
공기가 얼었다.
민혁이 옆 문을 박찼다. 잠겼다.
"아—"
창 너머로 얼음 창이 날아왔다. 민혁이 바닥에 엎드렸다.
유리가 박살났다.
'진짜 쓰네.'
뒤에서 갑옷 소리. 탱커가 따라왔다.
민혁이 일어나 뛰었다. 복도 끝. 비상구.
문을 열었다. 옥상 계단.
뒤에서 목소리.
"도망 잘 치네."
민혁이 계단을 올랐다. 두 칸씩.
숨이 찼다.
'게임에선 스태미나 무한인데.'
발이 미끄러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뒤에서 불빛. 주황색.
'파이어볼?'
민혁이 몸을 던졌다. 열기가 등을 스쳤다.
계단 난간이 녹았다.
"...미친."
마지막 계단. 옥상문.
민혁이 문을 밀었다. 안 열렸다.
'잠겼어?'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민혁이 문을 발로 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열렸다.
---
옥상은 넓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세라핌이 난간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민혁이 문을 닫았다. 숨을 골랐다.
"...왔어요."
세라핌이 돌아봤다.
"5분 30초. 늦었네요."
"쫓아오는 애들 때문에."
"알아요. 제가 시켰으니까."
민혁이 다가갔다.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왜요."
"테스트."
"뭐가."
세라핌이 검을 내렸다. 칼끝이 바닥을 가리켰다.
"당신이 얼마나 살고 싶은지."
민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합격."
세라핌이 주머니에서 뭔가 꺼냈다. 작은 USB.
"이거."
민혁이 받았다. 가벼웠다.
"뭔데."
"당신 방송 클립 347개. 제가 죽는 장면만."
민혁의 손이 떨렸다.
"왜 줘요."
"보라고."
"...다 봤는데요."
세라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즐겼어요."
민혁이 USB를 쥐었다. 플라스틱이 손에 눌렸다.
"지금은 안 그래요."
"증명해요."
"어떻게."
세라핌이 난간을 가리켰다.
"뛰어내리세요."
민혁의 숨이 멎었다.
"...뭐?"
"1번 죽으세요. 그럼 346번 남죠."
"미친."
세라핌이 다가왔다. 한 발. 두 발.
"농담 아니에요."
민혁이 뒤로 물러섰다. 등이 난간에 닿았다.
"죽으면 끝이잖아요."
"게임에선 리스폰 됐잖아요."
"여긴 현실이에요!"
세라핌이 멈췄다. 1미터 앞.
"제겐 구분이 안 돼요."
민혁이 난간을 잡았다. 손에 땀이 났다.
'진심이네.'
세라핌이 손을 뻗었다.
"10초 드릴게요."
"안 해요."
"9."
"대화로—"
"8."
민혁이 옆으로 움직였다. 세라핌이 막았다.
"7."
"다른 방법 없어요?"
"6."
민혁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떡해.'
이어폰에서 재윤의 목소리.
— "민혁아, 저격수 대기 중이야. 신호만 줘."
민혁이 세라핌을 봤다. 그녀의 눈동자.
'쏘면... 인질들은?'
세라핌이 속삭였다.
"5."
민혁이 난간 너머를 봤다. 아래가 아득했다.
'12층.'
"4."
손에서 힘이 빠졌다.
"3."
민혁이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세라핌이 멈췄다.
"뭐가."
"뛸게요."
세라핌의 눈이 커졌다. 처음 보는 표정.
민혁이 난간에 올라섰다. 다리가 떨렸다.
'진짜 하는 거야?'
바람이 세졌다. 몸이 흔들렸다.
아래를 봤다. 주차장 바닥. 작은 차들.
'...엄마.'
세라핌이 뒤에서 말했다.
"진심이에요?"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조건 있어요."
"뭔데."
"제가 죽으면 인질 다 풀어줘요."
세라핌이 침묵했다.
세라핌이 돌아섰다.
"...좋아요."
민혁이 난간을 잡았다. 손이 미끄러졌다.
'진짜 뛰어야 돼?'
발밑을 봤다. 12층. 바람이 불었다.
세라핌이 말했다.
"근데 한 가지 더."
"뭔데요."
"당신 죽으면 저도 같이 뛰어요."
민혁의 머리가 하얘졌다.
"...왜요."
"복수는 끝나니까."
"그럼 인질들은?"
세라핌이 하늘을 봤다.
"다른 애들이 알아서 하겠죠."
민혁이 난간에서 내려왔다.
"미친 소리."
"당신도 방금 뛰려고 했잖아요."
"그건..."
말이 막혔다.
세라핌이 다가왔다.
"당신은 게임에서 347번 절 죽였어요. 근데 한 번도 미안하다고 안 했죠."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하는데요."
"늦었어요."
세라핌이 검을 들었다.
"6시간 드릴게요."
"뭘요."
"**게임 개발자 전원의 공개 사과. NPC 인권법 제정 약속**."
민혁이 웃었다. 웃음이 안 나왔는데 나왔다.
"그게 될 것 같아요?"
"안 되면 한 시간마다 인질 한 명씩."
세라핌이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우리가 당한 고통 그대로."
민혁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미친 짓이야."
세라핌이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한 것보다 미친 일인가요?"
대답이 안 나왔다.
'맞는 말이니까.'
---
그때.
아래에서 총성.
땅땅땅.
민혁이 난간으로 달려갔다. 아래를 봤다.
건물 1층 입구. 검은 복장의 특수부대.
"저 미친—"
이어폰에서 재윤의 목소리.
— "민혁아, 우리 아니야! 경찰 독단이야!"
세라핌의 얼굴이 굳었다.
"협상은 끝났습니다."
민혁이 돌아봤다.
"잠깐만—"
세라핌이 손을 들었다. 허공에 뭔가 그렸다.
푸른 빛이 번졌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불이 꺼졌다.
비상등만 깜빡였다. 빨강. 빨강.
민혁이 비틀거렸다.
"뭐 한 거야!"
"EMP 펄스. 게임 6페이즈 패턴."
세라핌이 난간에 올라섰다.
"인질들 지하로 옮겨요. 3분 안에."
아래층에서 발소리. NPC들이 움직였다.
민혁이 소리쳤다.
"지금 건물 폭파하려고?!"
"아니요."
세라핌이 웃었다.
"당신들 세계랑 단절할 거예요."
민혁의 이어폰에서 잡음.
지지직—
재윤의 목소리가 끊겼다.
"민혁아, 당장 나와! 건물이—"
통신 끊김.
민혁이 이어폰을 뺐다. 소용없었다.
'완전 차단.'
세라핌이 뛰어내렸다. 옥상 바닥으로.
민혁 앞에 섰다.
"이제 당신도."
"뭘."
세라핌의 손이 민혁 목을 잡았다.
"우리가 느낀 무력함 체험할 시간."
손에서 푸른 빛.
민혁의 몸이 굳었다.
'움직여.'
안 움직였다.
세라핌이 속삭였다.
"레벨 드레인. 기억나죠?"
민혁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
힘이 빠졌다. 다리가 꺾였다.
바닥에 무릎 꿇었다.
세라핌이 민혁 턱을 들었다.
"게임에선 HP만 깎였죠. 근데 현실에선..."
민혁의 입에서 피가 나왔다.
"...뭐야."
"기억이 빠져나가요."
민혁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뭔가 사라졌다.
'뭐가... 사라졌지?'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
'엄마?'
아니. 다른 사람.
여자. 긴 머리. 웃고 있는.
'누구였지.'
이름이 안 나왔다.
세라핌이 손을 놨다.
민혁이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가빴다.
세라핌이 쪼그려 앉았다. 민혁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때요. 소중한 게 사라지는 기분."
민혁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 안 나왔다.
세라핌이 일어섰다.
"6시간. 카운트 시작."
난간으로 걸어갔다.
민혁이 손을 뻗었다.
"기다려..."
세라핌이 멈췄다.
"왜요."
"그 사람... 누구였어."
"누구요?"
민혁이 이마를 짚었다. 땀이 흘렀다.
"방금... 떠올랐던..."
세라핌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요."
민혁의 손이 떨어졌다.
'뭐가 사라진 거야.'
중요한 거였다. 분명히.
세라핌이 옥상문을 가리켰다.
"내려가요. 인질들이랑 같이."
민혁이 일어서려 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못... 서."
"그게 정상이에요."
세라핌이 민혁을 끌어올렸다.
민혁의 몸이 비틀거렸다.
세라핌이 민혁을 옥상문까지 끌고 갔다.
문을 열었다.
계단에 NPC 둘이 서 있었다.
"데려가요."
"어디로요?"
"지하 3층. 다른 인질들이랑."
민혁이 끌려 내려갔다.
계단이 빙글빙글 돌았다.
'토할 것 같아.'
3층쯤 내려왔을 때.
벽에서 불빛.
주황색. 번쩍였다.
민혁이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글자가 떠올랐다.
[ SYSTEM ALERT ]
[ NPC 각성률 87% ]
[ 세계 동기화 진행 중 ]
글자가 사라졌다.
민혁이 NPC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진짜 몰라."
NPC가 민혁을 밀었다.
"당신들이 만든 거잖아요."
민혁이 벽을 짚었다.
'시스템?'
게임에만 있는 거였다.
'근데 왜 여기서.'
---
지하 3층.
넓은 주차장. 차는 없었다.
인질들이 구석에 모여 있었다.
40명쯤.
민혁이 그쪽으로 밀려갔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 여자가 속삭였다.
"괜찮아요?"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20대 후반. 안경 낀.
"...네."
"피 흘리고 있어요."
민혁이 입을 닦았다. 손에 피.
"괜찮아요."
여자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쓰세요."
민혁이 받았다.
"고마워요."
"저도... 게임 했어요."
민혁이 여자를 봤다.
"뭐요?"
"그 게임. 세라핌 나오는."
민혁의 손이 멎었다.
"...아."
"근데 전 한 번도 죽인 적 없어요."
"왜요."
여자가 웃었다. 쓴웃음.
"불쌍해서."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저도 이제... 그렇게 생각해요."
"늦었죠."
"...네."
여자가 벽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저거."
민혁이 봤다.
벽에 금이 갔다.
아니.
금이 아니었다.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뭐지.'
빛이 커졌다.
인질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천장에서 빛.
주차장 전체가 푸르게 물들었다.
민혁이 일어섰다. 휘청거렸다.
빛 속에서 뭔가 나타났다.
사람 형태.
아니.
NPC였다.
새로 생긴.
옷이 달랐다. 갑옷. 중세 기사 같은.
손에 창.
민혁이 뒤로 물러섰다.
"뭐야..."
기사 NPC가 입을 열었다.
"세계 통합 1단계 완료."
목소리가 기계음이었다.
"플레이어 격리 진행."
인질들이 비명 질렀다.
기사가 창을 들었다.
바닥을 찍었다.
쿵.
주차장 바닥이 갈라졌다.
틈에서 빛.
민혁이 균형을 잃었다.
바닥이 무너졌다.
"으아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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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차가웠다.
민혁이 허우적거렸다.
'숨.'
수면으로 올라왔다.
숨을 들이마셨다.
주위를 봤다.
물속. 어두웠다.
위에서 빛.
주차장 천장. 구멍 뚫렸다.
인질들이 물에 빠졌다.
비명. 첨벙거리는 소리.
민혁이 헤엄쳤다.
옆에 뭔가 부딪쳤다.
아까 그 여자.
물에 빠져 있었다.
민혁이 여자를 잡았다.
"정신 차려요!"
여자가 눈을 떴다. 기침했다.
"여긴..."
"모르겠어요."
민혁이 주위를 봤다.
벽이 보였다. 콘크리트.
'지하 4층?'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