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거자의 영역 - 7화: 기억의 조각들
주인공: 아셀
# 소거자의 영역 - 7화: 기억의 조각들
던전의 중심부는 침묵으로 가득했다.
아셀은 코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검은 수정처럼 빛나는 던전 코어가 희미하게 맥박치듯 빛을 발했다. 그 빛은 규칙적이었지만 어딘가 불안정했다. 마치 무언가를 토해내려는 것처럼.
"준비되셨습니까?"
기록자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코어 반대편에 서 있었다. 투명한 형체가 코어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시작해라."
아셀의 대답은 짧았다. 그의 손이 코어 표면에 닿았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무언가가 손끝에서 팔을 타고 올라왔다.
"경고드립니다. 코어에 기록된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감정입니다. 고통입니다. 절규입니다."
"상관없다."
"당신의 정신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견뎌야 한다."
기록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코어의 다른 면에 닿았다. 순간, 던전 전체가 떨렸다.
빛이 아셀을 삼켰다.
***
처음 보인 것은 어둠이었다.
끝없는 어둠. 소리도 없고 빛도 없는 공간. 아셀은 그 안에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는 존재했다. 그것만이 확실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작고 떨리는 목소리. 세라핌이었다. 아셀의 심장이 요동쳤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 보였다. 세라핌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였다. 갓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 순백의 날개를 가진, 빛나는 존재.
"왜 저를 버리셨어요?"
아셀은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기억 속의 존재일 뿐.
세라핌의 주변이 변했다. 어둠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쇠사슬이었다. 빛나는 쇠사슬이 세라핌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날개를 짓눌렀다.
"아파요. 아버지, 너무 아파요."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눈물조차 쇠사슬에 얼어붙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왜 저를... 왜..."
목소리가 끊겼다. 세라핌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형, 형 어디 있어?"
리엔이었다. 역시 어린 모습이었다. 검은 날개를 가진 아이. 그는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세라핌 형! 대답해줘!"
대답은 없었다. 리엔은 계속 걸었다. 아니, 기어갔다. 그의 다리에도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왜 우리를 여기 가둔 거야? 우리가 뭘 잘못했어?"
분노가 목소리에 섞였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백 년을 견딘 자의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우릴 버렸어. 천계가 우릴 가뒀어. 우린...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리엔이 바닥에 쓰러졌다. 쇠사슬이 조여들었다. 그의 날개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 너무 아파..."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다섯 명이 보였다. 나머지 자식들. 그들은 각자 다른 공간에 갇혀 있었지만 모두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아버지..."
"왜..."
"돌아와줘..."
"제발..."
목소리들이 겹쳤다. 아셀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기억 속에서는 수백 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변했다. 절규가 되었다. 저주가 되었다.
"죽여줘..."
"그만... 제발..."
"더 이상 못 견뎌..."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긴 침묵. 아이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했다. 고통 속에서.
***
아셀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자신이 혀를 깨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떨렸다. 온몸이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기록자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계속."
"무엇을?"
"계속 보여줘라."
"당신의 정신이—"
"내 명령이다."
아셀은 다시 코어에 손을 뻗었다.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기록자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두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목소리가,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셀은 이를 악물었다. 견뎌야 했다. 이것이 자신의 죄였다. 자신이 져야 할 무게였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라핌이 날개를 잃는 순간. 리엔이 처음으로 증오를 배우는 순간. 다른 아이들이 하나씩 희망을 잃어가는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일곱 아이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봉인이 약해진 짧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형, 우리 죽는 거야?"
막내의 목소리였다.
"아니야."
세라핌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아버지가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하지만 벌써 천 년이—"
"올 거야."
세라핌이 동생들을 끌어안았다.
"아버지는 우릴 사랑하셨어. 분명히. 그러니까 반드시 오실 거야."
리엔이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형은 정말... 바보야."
"그래도 믿어야지. 안 그러면..."
세라핌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는 울고 있었다.
"안 그러면 우린 버려진 거잖아. 그냥... 버려진 거..."
일곱 아이가 함께 울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
아셀이 코어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세라핌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것이... 전부인가?"
"아닙니다."
기록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코어에는 수천 년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군."
아셀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눈물과 피가 섞여 있었다.
"계속 보여줘라. 전부."
"당신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다."
기록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알아야 한다."
"무엇을?"
"내가 저지른 죄의 무게를."
아셀이 다시 코어에 손을 뻗으려 할 때, 던전 입구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리엔이었다. 그는 중심부로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검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하계에서 답이 왔습니다."
# 소거자의 영역 - 7화: 기억의 조각들 (후반부)
아셀은 코어에서 손을 떼고 리엔을 바라봤다. 눈물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리엔이 두루마리를 건넸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셀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하계의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읽었다.
『소거자에게.
제안을 거절한다.
천계와의 전쟁은 우리에게도 이득이 없다. 균형이 깨지면 양쪽 모두 멸망한다. 이것이 만물의 법칙이다.
하지만 정보는 줄 수 있다.
네 자식들을 봉인한 자들의 명단. 그들의 위치. 그들의 약점.
대가는 하나. 전쟁이 끝난 후, 네 던전을 하계에 넘겨라. 중립 지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 마왕회의 일동』
아셀은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리엔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정보만 받는다."
"대가 없이?"
"협상한다."
아셀이 일어섰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버텼다.
"던전은 줄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것을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천계의 비밀."
리엔의 눈이 커졌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천계의 비밀을... 하계에?"
"그렇다."
"천계가 알면—"
"이미 적이다."
아셀이 기록자를 돌아봤다.
"답장을 작성해라. 내가 불러주겠다."
기록자가 양피지와 깃펜을 꺼냈다. 아셀이 입을 열었다.
"마왕회의에게. 제안을 수정한다. 던전 대신 천계의 금기 지식을 제공한다. 창조의 비밀, 신의 참된 이름, 그리고..."
그가 잠시 멈췄다.
"천계의 핵심부로 가는 길."
리엔이 숨을 들이켰다. 기록자의 손이 멈췄다.
"아버지, 그건..."
"계속 적어라."
아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조건은 하나. 정보를 먼저 넘겨라. 확인 후 지식을 전달하겠다. 거짓이 있다면 거래는 무효다."
기록자가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아셀이 두루마리를 받아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검은 불꽃이 인장에서 타올랐다.
"리엔."
"예."
"이것을 하계로 보내라. 가장 빠른 방법으로."
"알겠습니다."
리엔이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나가려 할 때, 아셀이 그를 불렀다.
"리엔."
"...예."
"코어의 기억을 봤다."
리엔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네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봤다."
"그게 뭐."
리엔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나간 일입니다."
"아니다."
아셀이 한 걸음 다가갔다.
"끝나지 않았다. 너희의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리엔이 돌아섰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하다고 하시겠습니까? 사랑한다고 하시겠습니까? 그게 뭘 바꿉니까?"
"바꾸지 못한다."
아셀이 대답했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그가 리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툰 동작이었다. 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랑한다."
리엔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늦었어요."
"알고 있다."
"세라핌 형은 이미..."
"알고 있다."
아셀이 리엔을 끌어안았다. 어색했다. 수천 년 만의 포옹이었다. 리엔이 아버지의 품에서 흐느꼈다.
"형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세요?"
"......"
"아버지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버지도... 고통받으셨을 거라고."
리엔이 주먹으로 아셀의 가슴을 쳤다. 약한 힘이었다.
"바보 같은 형... 끝까지 아버지를 믿었어요..."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다."
한참 후에야 리엔이 몸을 떼었다. 그는 눈물을 닦고 두루마리를 다시 들었다.
"...가겠습니다."
"조심해라."
리엔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중심부에 다시 침묵이 내렸다.
기록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코어의 기억을."
"그렇다."
아셀이 다시 코어 앞에 앉았다. 손을 뻗기 전에 그가 물었다.
"한 가지 묻겠다."
"무엇이든."
"왜 천계는 내 자식들을 봉인했는가?"
기록자가 잠시 침묵했다.
"...당신이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코어에 그 이유도 기록되어 있다는 뜻인가?"
"예. 봉인 당시의 기억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나눈 대화가."
아셀의 손이 코어에 닿았다.
세 번째 파도.
이번에는 천계였다. 빛나는 대전. 열두 개의 옥좌. 최고 천사들의 회의였다.
"아셀의 창조물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앙의 천사가 물었다. 눈이 여섯 개 달린 존재였다.
"제거해야 합니다."
다른 천사가 대답했다.
"왜?"
"너무 완벽합니다. 아셀은 금기를 건드렸습니다. 생명에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진정한 창조를."
"그게 왜 문제인가?"
"신의 영역입니다."
천사들이 웅성거렸다.
"신은 오래전에 떠나셨다."
"하지만 법칙은 남아 있습니다. 진정한 창조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천사가 손을 들어 정숙을 요구했다.
"제거는 불가능하다. 아셀이 창조한 것은 이미 영혼을 가졌다. 영혼을 지닌 자는 죽일 수 없다. 법칙이다."
"그럼?"
"봉인한다. 영원히."
"아셀이 알면—"
"모르게 한다."
중앙의 천사가 일어섰다.
"아셀을 하계와의 전쟁에 투입한다. 그 사이에 봉인을 완료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끝난 후다."
"만약 알게 되면?"
"그때는..."
천사가 미소 지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도 제거한다."
장면이 바뀌었다.
아셀이 전장에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수천의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피투성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시각, 천계에서는.
일곱 아이가 하나씩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저항했다. 하지만 최고 천사들을 당할 수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세라핌이 소리쳤다.
"조용히 해라. 네 아버지는 듣지 못한다."
천사가 세라핌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영원히 잠들어라. 금기의 자식이여."
봉인의 문이 닫혔다.
***
아셀이 코어에서 손을 뗐을 때,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처음부터... 계획이었군."
"...예."
기록자가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이용했습니다. 전쟁에 묶어두고, 그 사이에..."
"내 자식들을..."
아셀의 손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코어가 진동했다.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진정하십시오. 던전이—"
"진정?"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진정하라는 거냐?"
던전의 벽에 금이 갔다. 마물들이 비명을 질렀다.
"수천 년... 수천 년을 속였다... 내 자식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아셀이 일어섰다. 그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천계를..."
그때였다.
던전 입구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거대한 빛이 중심부까지 밀려왔다.
"이것은..."
기록자가 경악했다.
"천계의 군대입니다!"
중심부의 문이 폭발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천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백, 아니 수천이었다.
선두에 선 천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던전주 아셀! 천계의 명령에 따라 체포한다! 죄목은 금기 위반, 질서 파괴, 그리고..."
천사가 아셀을 똑바로 바라봤다.
"신에 대한 반역!"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사들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때마침 잘 왔다."
천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저항하면 즉시—"
"이제 묻지 않겠다."
아셀의 주변으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소거의 영역이 펼쳐졌다.
"누가 명령했는지. 왜 그랬는지."
던전 전체가 진동했다.
"전부 죽인 다음..."
아셀이 손을 들었다. 검은 불꽃이 폭발했다.
"직접 물어보겠다."
천사들이 돌격했다. 빛과 어둠이 충돌했다.
그 순간.
코어에서 새로운 빛이 터져 나왔다. 아셀도, 천사들도 모두 멈췄다.
코어가 말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기록을 재생한다. 최종 기억. 봉인 직전, 세라핌이 남긴 메시지.』
세라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버지... 만약 이걸 듣고 있다면..."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를 구하러 오지 마세요. 이건... 함정입니다. 천계는 아버지를 노리고 있어요. 우리는... 미끼일 뿐이에요..."
아셀의 눈이 커졌다.
"제발... 살아계세요... 그게... 우리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복수는... 동생들에게... 맡기세요..."
침묵.
아셀이 고개를 들었다. 천사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