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왕좌의 방 바닥이 갈라졌다.
석판 틈새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더니, 한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민준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숨이 막혔다.
자기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벨리우스의 얼굴. 하지만 뭔가 달랐다. 왼쪽 눈은 갈색, 오른쪽 눈은 은색. 피부 곳곳에 검은 금이 가 있고, 입가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실실 웃음이 걸려 있었다.
"뭐, 뭐야..."
민준이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 몸이 멈췄다.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 다리가 제멋대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아니, 잠깐. 나 지금 안 움직였는데?'
융합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 벌써 시작됐네. 생각보다 빠른데?"
관찰자의 태블릿에서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화면에는 붉은 글씨로 [시스템 권한 상실 / 오류 코드 999]가 깜빡였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관찰자가 태블릿을 흔들어댔지만 소용없었다. 화면은 점점 더 많은 오류 메시지로 뒤덮였다.
융합체는 천천히 민준에게 다가왔다.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바닥에 검은 자국이 새겨졌다.
"자기소개 할게. 난 첫 번째야. 첫 번째 융합. 첫 번째 실패작. 첫 번째로 버려진 세이브 파일."
"세이브... 파일?"
"응. 넌 두 번째고."
민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융합체는 그의 바로 앞까지 와서 턱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 끝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네가 두려워하는 미래이자, 네가 원하는 힘이야."
갈색 눈과 은색 눈이 동시에 민준을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서 민준은 자기 자신이 부서지는 걸 봤다. 강민준과 아벨리우스가 뒤섞이고, 갈라지고,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는 모습을.
발테온이 벌떡 무릎을 꿇었다.
"원, 원본 폐하! 드디어 강림하셨습니까!"
"뭐?"
민준이 황당해서 돌아보려는데, 몸이 또 제멋대로 움직였다. 고개가 천천히 발테온 쪽으로 돌아가더니, 입이 멋대로 열렸다.
"...경솔하구나, 발테온."
목소리가 차갑게 깔렸다. 민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였다.
'미친, 내가 지금 말 안 했는데?!'
민준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이 올라가 왕좌 팔걸이를 짚었다.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동작. 수백 년간 그 자리에 앉아온 사람의 몸짓.
융합체가 키득거렸다.
"좋아. 그럼 게임 시작할까? 진실 게임."
"게임?"
관찰자가 태블릿을 집어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기기는 불꽃을 튀기며 꺼져버렸다.
"이건 내 시나리오가 아니야! 네가 뭔데 멋대로 시나리오를 바꿔?!"
"시나리오?" 융합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네가 쓴 적 없잖아. 넌 그냥 읽는 사람이고."
"뭐, 뭐라고?"
"세 가지 질문에 답해봐." 융합체가 민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대로 답하면 이 세계의 비밀 알려줄게. 첫 번째 질문."
공기가 무거워졌다. 한서진이 검을 빼들었지만 몸이 떨리는 게 보였다. 뭔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 같았다.
"너는 강민준인가, 아벨리우스인가?"
민준의 입이 열렸다. 자기 의지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멋대로 나왔다.
"짐은 심연의 주인, 아벨리우스다."
'아니, 아니야! 나 강민준이라고!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살던 F급 헌터라고!'
속으로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몸은 계속 제멋대로 움직였다. 한 발 앞으로 나가더니, 허공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검은색 마력이 검신을 휘감았다.
한서진이 황급히 검을 올렸다.
"민준 씨, 정신 차려!"
"감히 짐의 이름을 함부로."
민준의 몸이 순식간에 움직였다. 검이 번개처럼 한서진의 목을 노렸다. 한서진이 간신히 막아냈지만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멈춰, 제발! 한서진 씨한테 왜 이래?!'
하지만 몸은 멈추지 않았다. 검이 우아하게 궤적을 그리며 한서 서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한서진이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어깨에 얕은 상처가 났다.
"젠장..."
한서진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민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발놀림, 검의 각도, 호흡까지 완벽했다. 수백 년 전쟁터를 누빈 검술이 민준의 몸을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멈춰줘!'
민준의 비명은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검이 한서진의 목을 향해 내려꽂히려는 순간, 융합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스톱."
검이 한서진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칼끝에서 한 방울 피가 떨어졌다.
민준의 몸이 다시 자기 것이 되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검을 쥔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 하아..."
한서진이 뒷걸음질 쳤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경계, 두려움, 그리고... 배신감.
"민준 씨, 당신..."
"아,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
변명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융합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질문. 너는 왜 여기 있는가?"
이번엔 달랐다. 몸이 멈추지 않았다. 민준은 스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나는... 나는 그냥..."
말이 꼬였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왜 여기 있냐고? 던전에서 죽었으니까. 아니, 아벨리우스의 몸에 빙의했으니까. 아니, 그것도 아니고...
"나는 F급 헌터였어. 빚 때문에 위험한 던전에 들어갔다가..."
기억이 흔들렸다.
아니, 잠깐. 던전이었나? 전쟁터였나?
"아니, 나는... 전쟁에서 배신당했어. 가장 믿었던 부하가 등 뒤에서..."
"민준 씨?"
한서진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민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두 개의 기억이 동시에 재생되고 있었다.
**서울 강남구 원룸. 독촉 전화. 빨간 고지서.**
**어둠의 전쟁터. 배신자의 칼날. 심장을 뚫는 고통.**
"나는... 나는..."
어느 쪽이 진짜지? 강민준이 진짜야, 아벨리우스가 진짜야?
융합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봤지? 이게 융합이야. 두 개가 하나 되는 게 아니라, 둘 다 부서지는 거."
관찰자가 주저앉았다. 깨진 태블릿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이건 설정에 없었어. 융합은 완벽하게 이뤄져야 했다고. 주인공은 두 기억을 다 가진 채로 각성해야 한다고..."
"설정?" 융합체가 비웃었다. "그건 네가 읽은 대본일 뿐이야. 진짜는 따로 있어."
발테온이 황홀한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역시... 역시 원본 폐하. 두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는 신성한 의식..."
"닥쳐."
한서진이 발테온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민준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검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민준 씨. 정신 차려. 당신은 강민준이야. 내가 아는 그 사람."
"한서진 씨..."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나... 나 누구야?"
한서진의 표정이 굳었다. 대답하려는데, 융합체가 끼어들었다.
"좋은 질문. 근데 한서진, 넌 대답 못 해. 왜냐면..."
융합체가 한서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지난번처럼, 또 실패할 테니까."
"...뭐?"
한서진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검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소리야. 지난번이 뭔데."
"몰라?" 융합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첫 번째 루프. 넌 그때 민준을 못 구했잖아."
"루프? 첫 번째?"
민준도, 관찰자도, 발테온도 얼어붙었다. 한서진만 달랐다. 뭔가 아는 것 같은,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융합체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세 번째 질문 갈까?"
민준의 몸이 다시 멋대로 움직였다. 검이 올라가 한서진의 목을 겨눴다. 이번엔 저항할 수 없었다. 팔이, 다리가, 호흡까지 전부 아벨리우스의 것이었다.
한서진이 검을 내려놓았다.
"...민준 씨. 나 기억나?"
"기억...?"
민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반은 민준, 반은 아벨리우스였다. 뒤섞이고, 갈라지고, 무너지는 소리.
융합체가 속삭였다.
"**세 번째 질문. 네가 죽인다면, 누구를 먼저 죽일 거야?**"
민준의 손에서 검이 떨렸다. 한서진의 목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한서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냥 민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그 말에 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융합체가 웃었다.
"답은?"
# 후반부
민준의 손이 떨렸다. 검날이 한서진의 목덜미에 닿을 듯 말 듯 떨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리모컨으로 슬로우 모션을 재생하는 것처럼.
융합체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오, 저항하네? 근데 소용없어. 이미 네 몸은 아벨리우스 쪽으로 기울었거든."
한서진이 눈을 감지 않았다. 그냥 민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민준 씨. 첫 번째 던전 기억나?"
"...뭐?"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반은 자기 목소리, 반은 아벨리우스의 낮은 음성.
"E급 던전이었어. 나랑 같이 들어갔잖아. 넌 겁먹어서 손 떨고 있었고."
"그, 그때..."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아니, 떠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기억이 침투했다. 전쟁터. 핏빛 하늘. 부하들의 함성.
"넌 그때 나 밀쳤어. 고블린 칼날 피하라고."
한서진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떨리지 않았다.
"F급 주제에 S급 앞에 서서 밀어냈다고. 기억나?"
"나... 그랬나..."
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검을 쥔 손이 더 세게 떨렸다. 아벨리우스의 힘이 밀어붙였지만, 민준의 의지가 버텼다.
융합체가 혀를 찼다.
"에이, 재미없어. 감상 타임?"
손가락을 튕기려는 순간, 관찰자가 벌떡 일어났다. 깨진 태블릿 대신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오류 메시지가 미친 듯이 깜박였다.
[ERROR 999: 권한 불명 / 시나리오 이탈 / 강제 복구 시도 중]
"안 돼, 안 돼, 안 돼!"
관찰자가 창을 두들겼다. 손가락 끝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이 루트는 없어! 민준은 한서진을 공격하면 안 된다고! 친구 루트, 신뢰 루트, 협력 엔딩으로 가야 한다고!"
"루트?" 융합체가 킥킥거렸다. "그건 네가 읽은 공략집이고."
"닥쳐!"
관찰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스템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긴급: 원본 데이터 접근 시도 / 비밀번호 필요 / 시도 횟수 1/3]
관찰자가 뭔가를 입력하려다 멈췄다. 손이 떨렸다.
"비밀번호... 비밀번호가 뭐였지..."
발테온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보십시오! 원본 폐하께서 각성하십니다! 두 영혼이 하나로!"
"시끄러워."
민준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아벨리우스였다. 차갑고, 낮고, 절대적인 권위가 담긴 음성.
검이 한서진의 목을 향해 떨어지려는 순간, 한서진이 입을 열었다.
"민준아. 너 빚 얼마 남았어?"
"...뭐?"
검이 멈췄다. 1센티미터, 아니 그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3천만 원. 맞지?"
한서진이 웃었다. 피가 목에서 한 방울 흘러내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갚아줄게. 그러니까 정신 차려."
민준의 동공이 흔들렸다. 3천만 원. 빨간 고지서. 독촉 전화. 원룸 월세.
현실의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나는..."
"강민준이야. 스물아홉. 키 175. F급 헌터. 라면 끓일 때 계란 두 개 넣는 거 좋아하고."
"계란..."
"맞아. 계란."
한서진이 한 발짝 다가왔다. 검날이 목을 긁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넌 아벨리우스 아니야. 그냥 민준이야."
그 말에 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한서진 씨..."
융합체의 표정이 굳었다.
"어?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민준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검이 번개처럼 한서진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한서진이 더 빨랐다. 검을 버리고 민준의 손목을 잡았다. 맨손으로.
"미안."
그리고 민준의 명치를 쳤다.
"크윽!"
민준이 뒤로 비틀거렸다.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서진이 재빨리 검을 집어 들고 융합체를 향해 돌아섰다.
"네 차례야."
융합체가 융합체가 박수를 쳤다.
"오, 멋진데? 근데 소용없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한서진이 쥔 검이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바닥에 쏟아졌다.
"S급 헌터 주제에 아직도 몰라? 여긴 내 무대야."
한서진이 뒷걸음질 쳤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명치를 맞은 충격에 정신이 아득했다.
'한서진 씨가... 날 쳤어.'
이상하게 그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관찰자가 시스템 창에 뭔가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비밀번호 오류 / 시도 횟수 2/3 / 최종 실패 시 데이터 영구 삭제]
"젠장, 젠장, 젠장!"
관찰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시스템 창이 붉게 깜박였다.
융합체가 민준에게 다가왔다.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세 번째 질문, 아직 안 끝났어."
"그만... 해..."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융합체가 턱을 잡아 억지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누구를 먼저 죽일 거야? 한서진? 관찰자? 발테온?**"
"아무도 안 죽여..."
"거짓말." 융합체가 웃었다. "네 안의 아벨리우스는 벌써 순서 정했어. 한서진 먼저, 그다음 관찰자, 마지막으로 발테온. 효율적이지?"
민준의 눈이 커졌다. 머릿속에서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맞아. 한서진부터 제거해야 해. S급 헌터는 변수야. 관찰자는 시스템 권한 없으면 무력해. 발테온은... 쓸모 있으니까 나중에.'
"아니야, 나 그런 생각 안 했어!"
"했어. 방금 했잖아."
융합체가 민준의 이마를 톡 쳤다.
"이게 융합이야. 네 생각인지 아벨리우스 생각인지 구분 못 하게 되는 거. 결국 둘 다 너고, 둘 다 아닌 거지."
한서진이 주먹을 쥐었다. 맨손이었지만 마력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민준 씨 놔둬."
"싫은데?"
융합체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서진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힘에 목이 조였다.
"커헉..."
"S급? 별거 없네."
융합체가 손을 천천히 쥐었다. 한서진의 목이 더 조여졌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만해!"
민준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었지만 억지로 버텼다.
"날 죽여. 대신 한서진 씨는..."
"안 돼요, 폐하!"
발테온이 황급히 달려왔다. 민준 앞을 가로막았다.
"폐하의 몸은 소중합니다! 이런 하등한 존재를 위해..."
"비켜."
민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벨리우스의 음성이 섞여 있었다. 발테온이 얼어붙었다.
"폐, 폐하...?"
민준이 발테온을 밀쳤다. 그리고 융합체를 똑바로 봤다.
"내가 답할게. 세 번째 질문."
융합체의 눈빛이 반짝였다.
"오? 드디어?"
"나는..." 민준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아무도 안 죽여. 대신 나 자신을 죽일게.**"
공기가 멈췄다.
한서진이 바닥에 떨어졌다. 목을 감싸 쥐고 기침했다. 관찰자가 시스템 창 입력을 멈췄다. 발테온이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융합체만 웃고 있었다.
"재밌는 답인데. 어떻게?"
민준이 바닥에 떨어진 검 파편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운 조각이 손바닥을 베었다. 피가 흘렀다.
"이 몸이 아벨리우스 거라면, 이 몸을 부수면 돼."
"민준아, 미쳤어?!"
한서진이 소리쳤지만 민준은 듣지 않았다. 검 파편을 목에 갖다 댔다.
"내가 사라지면 아벨리우스도 사라져. 융합도 실패하고."
융합체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럼 세계도 끝나는데?"
"상관없어."
민준의 손이 떨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나 때문에 사람들 죽는 거보단 나아."
관찰자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주인공이 죽으면 스토리가 붕괴돼!"
시스템 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미친 듯이 떴다.
[경고: 주인공 사망 시 세계 데이터 삭제 / 복구 불가 / 모든 진행 상황 초기화]
"초기화...?"
관찰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럼 첫 번째 루프로 돌아간다고? 다시 시작?"
융합체가 박수를 쳤다.
"정답! 근데 문제는..."
융합체가 민준을 보며 속삭였다.
"**첫 번째 루프에서 민준은 이미 죽었어. 그것도 한서진 손에.**"
한서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거짓말?" 융합체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기억 못 하는 것뿐이야. 첫 번째 루프에서 넌 민준을 죽였어. 아벨리우스로 각성한 민준을 막으려다가."
"아니야, 나는..."
"검으로 심장 관통. 깨끗하게 한 방에. S급답게."
한서진이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민준이 한서진을 봤다. 검 파편은 여전히 목에 대고 있었다.
"한서진 씨... 그게 사실이야?"
한서진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바닥을 봤다.
융합체가 민준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두 번째 루프가 시작된 거야. 관찰자가 세이브 파일 불러와서. 근데 문제는 첫 번째 민준의 데이터가 완전히 안 지워졌다는 거지."
융합체가 자기 몸을 가리켰다.
"그게 나야. 첫 번째 루프에서 죽은 민준의 잔해."
민준의 손에서 검 파편이 떨어졌다.
"그럼... 넌..."
"응. 너야. 정확히는 실패한 너."
융합체가 웃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첫 번째에서 난 아벨리우스랑 융합 못 했어. 그냥 미쳐버렸지. 그래서 한서진이 날 죽였고, 관찰자가 리셋 눌렀어. 근데 데이터는 남았어. 버그처럼."
관찰자가 시스템 창을 노려봤다.
"그래서 오류 999가 뜬 거야... 삭제 안 된 데이터..."
"맞아.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질문의 진짜 의미."
융합체가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누구를 먼저 죽일 거야? 실패한 나? 성공할 너? 아니면 모든 걸 리셋시킬 관찰자?**"
민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발테온이 무릎 꿇었다.
"폐하... 선택하십시오..."
한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민준아... 미안해..."
관찰자가 시스템 창에 마지막 비밀번호를 입력하려 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최종 시도 / 실패 시 영구 삭제 / 비밀번호: ___]
융합체가 속삭였다.
"자, 답은?"
민준이 입을 열려는 순간, 왕좌 뒤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답은 없어."
모두가 돌아봤다.
왕좌 뒤 그림자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검은 후드를 쓴 인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융합체의 미소가 사라졌다.
"네가... 왜 여기..."
후드 인물이 민준을 봤다.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세 번째 루프는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관찰자가 비명을 질렀다.
"원본 시나리오 작가?! 네가 왜!"
후드 인물이 손을 들었다. 시스템 창이 모두 꺼졌다. 관찰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민준이 뒷걸음질 쳤다.
"당신은..."
후드 인물이 후드를 벗었다.
그 얼굴은 민준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늙은 민준이었다. 흰 머리, 주름진 얼굴, 하지만 똑같은 눈빛.
"나는 네 미래야. 아니, 미래였던 존재."
늙은 민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백 번째 루프에서 온."
한서진이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백 번째...?"
"응. 너희는 이미 백 번 실패했어. 매번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매번..."
늙은 민준이 한서진을 봤다.
"**넌 날 죽였어. 아니면 내가 널 죽였거나.**"
융합체가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돼... 백 번째 루프 데이터는 완전히 삭제됐다고..."
"삭제 안 됐어. 난 빠져나왔거든. 시스템 밖으로."
늙은 민준이 민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끝낼 거야. 이 루프를."
민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늙은 민준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검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모든 루프를 동시에 터뜨려. 너, 나, 융합체,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민준을.**"
"그럼... 세계는..."
"사라져. 완전히."
늙은 민준이 웃었다. 공허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다시는 반복 안 돼. 그게 중요해."
민준의 손이 떨렸다. 한서진이 소리쳤다.
"민준아, 그거 받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