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검은 구슬이 손바닥 위에서 맥박처럼 떨렸다.
민준의 시선이 그것에 고정됐다. 안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수백 개의 실루엣이 겹쳐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전부 자신의 모습이었다. 어떤 건 웃고 있었고, 어떤 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게... 뭐야."
목소리가 나왔다. 떨렸다. 아벨리우스의 카리스마 같은 건 온데간데없었다.
늙은 민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원하던 거잖아. 끝."
"끝이라니—"
"루프를 멈추는 거야. 이 세계, 관찰자, 시스템, 전부 다."
구슬 안에서 빛이 번졌다. 왕좌의 방 전체가 일렁였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서진이 검을 뽑았다.
"손 떼."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민준은 그 안에서 떨림을 느꼈다. 한서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넌 지금 뭘 하려는지도 모르잖아."
"알아."
늙은 민준이 고개를 저었다.
"너보다 백 번은 더 잘 알지."
한서진이 한 발 다가섰다. 검끝이 구슬을 향했다.
융합체가 그 사이에 섰다.
"비켜."
한서진이 말했다.
융합체는 웃었다. 입이 세 개였다. 전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택은 민준의 몫이야."
"네 몫 아니야."
"우리 몫도 아니고."
세 입이 동시에 말했다. 목소리가 겹쳤다.
한서진의 검이 빛났다. 하지만 융합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서 있을 뿐이었는데, 공간 자체가 일그러졌다.
"넌 우릴 벨 수 없어."
"우린 이미 죽었거든."
"죽은 것도 아니고."
한서진이 이를 물었다.
관찰자가 바닥에 쓰러진 채 중얼거렸다.
"이건... 내 시나리오가 아니야..."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이 허공을 긁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시스템이... 왜 응답을... 권한이..."
발테온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
감격에 찬 목소리였다.
"이 모든 것이... 최종 시험이셨군요."
민준이 그를 봤다.
"뭐?"
"관찰자조차 속이시고, 융합체를 시험 삼아 이끌어내시고..."
발테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심연의 진정한 주인은 역시..."
"아니, 잠깐—"
민준이 손을 저었다. 하지만 발테온은 이미 이마를 바닥에 박고 있었다.
"저는 믿었습니다. 폐하께서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민준의 입이 바짝 말랐다.
'이 사람 진심이야...?'
늙은 민준이 피식 웃었다.
"봐. 네가 뭘 해도 저렇게 해석당해."
"닥쳐."
민준이 쏘아붙였다.
구슬이 다시 떨렸다. 이번엔 더 강하게.
"결정해. 시간 없어."
늙은 민준이 말했다.
"이거 쓰면 끝이야. 루프고 뭐고 전부 멈춰. 넌 자유야."
"자유?"
"그래. 더 이상 되풀이 안 해. 죽지도 않고, 괴물도 안 되고."
민준의 손이 떨�렸다.
"대신?"
"대신 이 세계도 끝나지."
공기가 무거워졌다.
한서진이 검을 겨눴다.
"그럼 안 돼."
"왜?"
늙은 민준이 물었다.
"넌 이 세계가 뭔지도 몰라. 그냥 게임이야. 관찰자가 만든."
"게임이든 뭐든, 사람들은 살아 있어."
한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멋대로 끝낼 권리 없어."
"권리?"
늙은 민준이 비웃었다.
"난 백 번 죽었어. 백 번. 넌 상상도 못 해."
구슬에서 빛이 쏟아졌다.
홀로그램처럼 장면이 펼쳐졌다.
첫 번째 루프.
민준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젊었다. 지금보다 훨씬.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서진이 그 앞에 섰다.
검을 들고.
"미안해."
한서진이 말했다.
검이 민준의 심장을 관통했다.
민준이 비틀거렸다. 피가 왕좌를 적셨다.
"왜...?"
"넌 너무 위험해."
한서진이 검을 뽑았다.
민준이 쓰러졌다.
장면이 흩어졌다.
두 번째 루프.
민준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눈이 세 개로 늘어났다. 입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안 돼... 안 돼..."
민준이 거울을 쳤다. 깨졌다. 파편에 비친 파편에 비친 얼굴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융합 실패."
시스템 음성이 울렸다.
민준이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가 둘로 갈라졌다.
장면이 또 흩어졌다.
세 번째 루프.
민준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떨어져 나갔다.
"이게... 내가 원한 거였나..."
민준이 중얼거렸다.
왕좌가 기울었다. 민준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장면이 사라졌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
루프가 빠르게 지나갔다. 매번 다른 죽음이었다. 매번 다른 실패였다.
한서진이 뒤로 물러섰다.
손이 떨렸다.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내가... 저걸...?"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준은 그 장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야. 전부 나야.'
가슴이 조여들었다.
'근데 나 아니야. 난 한 번도... 저런 적 없어.'
혼란이 밀려왔다.
"백 번이야."
늙은 민준이 말했다.
"백 번 실패했어. 넌."
"아니."
민준이 고개를 저었다.
"난 아니야. 난 이번이 처음—"
"처음?"
늙은 민준이 비웃었다.
"넌 그냥 백한 번째야. 기억 못 할 뿐이지."
민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융합체가 끼어들었다.
"틀렸어."
세 입이 동시에 말했다.
"그건 네가 아니야."
"넌 이번이 처음이잖아."
"기억 없으면 다른 사람이야."
늙은 민준이 융합체를 노려봤다.
"닥쳐. 넌 그냥 버그야."
"버그 맞아."
"근데 넌 실패작이잖아."
"우린 최소한 살아남았거든."
융합체가 웃었다. 세 입이 전부 다르게 웃었다.
민준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누구야?'
구슬이 손 안에서 뜨거워졌다. 아팠다. 하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답인가? 이걸 쓰면 끝나는 건가?'
한서진이 다가왔다.
"민준아."
목소리가 떨렸다.
"그거 내려놔."
민준이 그를 봤다.
"넌 날 죽였잖아."
"...뭐?"
"첫 번째 루프에서. 네가 날 찔렀어."
한서진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나 아니야..."
"너잖아."
민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기억 없으면 다른 사람이라며!"
한서진이 소리쳤다.
민준이 멈칫했다.
한서진이 숨을 골랐다.
"네 논리대로면... 난 네 살인자 아니야. 그것도 다른 한서진이야."
침묵이 흘렀다.
민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럼... 나도...?"
"그래."
한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너야. 저 루프들이 아니라."
늙은 민준이 혀를 찼다.
"감동적이네. 근데 소용없어."
구슬이 진동했다. 왕좌의 방 전체가 흔들렸다.
"시간 다 됐어. 선택해."
민준이 구슬을 내려다봤다.
안에서 수백 개의 자신이 손을 뻗고 있었다.
'도와줘.'
'끝내줘.'
'제발.'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는 것 같았다.
민준의 손가락이 구슬을 감쌌다.
"이거 쓰면..."
"루프 끝나."
늙은 민준이 말했다.
"다시는 반복 안 해. 너도, 나도, 아무도."
"세계는?"
"없어져."
민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발테온이 여전히 무릎 꿇고 있었다.
"폐하의 선택을 믿습니다."
관찰자가 바닥을 기었다.
"안 돼... 시나리오가... 내 권한이..."
한서진이 검을 내렸다.
"민준아."
민준이 그를 봤다.
"네가 뭘 선택하든..."
한서진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난 널 안 찔러."
민준의 가슴이 뛰었다.
'이 사람... 진심이네.'
구슬이 펄스를 쏘아냈다.
민준의 몸이 뒤로 밀렸다. 구슬을 놓치지 않았다.
늙은 민준이 다가왔다.
"마지막 기회야."
손을 뻗었다.
"이리 줘. 내가 대신—"
민준이 뒤로 물러섰다.
"싫어."
"뭐?"
"이건 내 거야. 네 거 아니야."
늙은 민준의 눈빛이 변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민준이 구슬을 가슴에 안았다.
"모르겠어. 근데..."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정할 거야."
구슬이 빛났다.
왕좌의 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후반부
구슬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민준의 손이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손바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크윽—"
민준이 신음을 삼켰다. 구슬을 놓을 수 없었다.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왜 안 떨어져?!'
빛이 민준의 팔을 타고 올라왔다. 핏줄을 따라 번졌다. 파랗게 빛나는 선이 피부 아래로 그어졌다.
늙은 민준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미친... 넌 지금 융합을 시작한 거야!"
"뭐?"
민준이 구슬을 내려다봤다.
구슬 안에서 수백 개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전부 민준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살려줘.'
빛이 민준의 어깨를 감쌌다. 목으로 올라왔다.
한서진이 달려왔다.
"민준아!"
검을 들어 구슬을 치려 했다.
민준이 고개를 저었다.
"안... 안 돼..."
목소리가 둘로 갈라졌다.
한서진이 멈칫했다.
민준의 눈이 변하고 있었다. 한쪽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비켜라, 인간."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낮고, 절대적이었다.
한서진이 검을 겨눴다.
"민준, 정신 차려!"
"짐은 민준이 아니다."
아벨리우스가 민준의 입을 빌려 말했다.
"어리석은 인간이 짐의 힘을 건드렸구나. 대가를 치러야지."
민준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구슬을 높이 들어 올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민준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벨리우스가 웃었다. 민준의 얼굴로.
"백 번 실패한 짐을 비웃는 자여."
늙은 민준을 향해 손가락을 펴 보였다.
"네가 틀렸다. 짐은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다."
"무슨 소리야—"
"모든 루프는 짐의 계획이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늙은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짓말..."
"거짓말?"
아벨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네가 죽을 때마다, 융합이 실패할 때마다, 세계가 무너질 때마다... 짐은 데이터를 모았다."
구슬이 더 강하게 빛났다.
"백 번의 실패는 백 번의 실험이었지. 완벽한 융합을 위한."
늙은 민준이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난 자유의지로..."
"자유의지?"
아벨리우스가 비웃었다.
"넌 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았을 뿐이야. 관찰자도, 시스템도, 전부 짐의 도구였다."
관찰자가 바닥에서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 내가... 내가 설계했어..."
"네가?"
아벨리우스가 관찰자를 내려다봤다.
"누가 너한테 권한을 줬는지 기억해봐."
관찰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건..."
"짐이다."
민준의 몸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짓말이야! 나는... 나는 그냥 회사원이었어! 트럭에 치여서...!'
"트럭?"
아벨리우스가 민준의 기억을 뒤졌다.
"아, 그 연출 말이지. 평범한 죽음. 억울한 전생. 이세계로의 소환. 전형적인 시나리오."
민준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럼 나는...?'
"넌 처음부터 짐이었다. 강민준이라는 이름은 역할일 뿐."
빛이 민준의 머리를 감쌌다.
기억이 밀려왔다.
왕좌.
핏빛 하늘.
무릎 꿇은 수천의 군대.
민준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아니, 아벨리우스가.
"재미없어."
아벨리우스가 중얼거렸다.
"영원은 지루해. 절대 권력도 지루해. 전부 지겨워."
손가락을 튕겼다.
세계가 리셋되었다.
"이번엔 약한 인간으로 시작해볼까."
아벨리우스가 웃었다.
"기억도 지우고, 힘도 봉인하고. 그리고..."
왕좌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를 이기는지 보는 거야."
장면이 흩어졌다.
민준이 비틀거렸다.
'그럼... 나는... 게임이었어...?'
"게임 아니야."
아벨리우스가 정정했다.
"실험이지. 짐이 인간성을 가질 수 있는지 시험한 거야."
"왜...?"
"심심해서."
민준의 무릎이 꺾였다.
한서진이 달려들었다.
"닥쳐!"
검을 휘둘렀다. 아벨리우스가 손가락 하나 까딱했다.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서진의 손목이 꺾였다.
"크윽—!"
한서진이 무릎을 꿇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짓눌렀다.
"인간 주제에 짐에게 칼을 겨누다니."
아벨리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이 몸은 네가 소중하다더군."
민준의 의식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한서진 건드리지 마!'
"오?"
아벨리우스가 멈칫했다.
"아직도 버티네. 집요하군."
민준의 오른손이 떨렸다.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내 몸이야... 내 거라고...!'
구슬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융합체가 낄낄거렸다.
"봐봐, 싸우잖아."
"둘이 한 몸에서."
"우리랑 똑같아."
아벨리우스가 융합체를 노려봤다.
"닥치지 못해."
융합체의 세 입이 동시에 찢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발테온이 벌떡 일어났다.
"폐하! 제가 돕겠습니다!"
"필요 없다."
아벨리우스가 차갑게 말했다.
"짐은 혼자서도—"
민준의 왼손이 오른손을 붙잡았다.
"으윽..."
두 손이 서로를 조였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처럼.
"뭐 하는 거야, 이 어리석은..."
아벨리우스가 당황했다.
민준이 이를 악물었다.
"내... 몸... 돌려줘..."
"이건 원래 짐의 것이다!"
"아니야!"
민준이 소리쳤다.
"나는... 나는 강민준이야! 회사에서 야근하고,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 먹고, 지하철에서 졸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가짜라도 상관없어!"
아벨리우스가 비웃으려다 멈췄다.
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게 내 전부였어. 시시하고, 별 볼 일 없고, 그래도..."
숨을 들이켰다.
"내 거였어."
구슬이 금이 갔다.
아벨리우스가 황급히 힘을 풀었다.
"잠깐, 이건—"
"이제 끝내자."
민준이 구슬을 바닥에 내리쳤다.
"안 돼!"
늙은 민준이 소리쳤다.
"그거 깨지면 모든 루프가—"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빛이 폭발했다.
왕좌의 방이 무너졌다. 벽이 사라지고, 바닥이 갈라지고, 천장이 떨어졌다.
한서진이 민준에게 달려갔다. 손을 뻗었다.
"민준아!"
민준이 그 손을 잡았다.
"미안... 나... 이상한 짓..."
"됐어."
한서진이 그를 끌어안았다.
"살아만 있어."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관찰자가 비명을 질렀다.
"시스템 붕괴! 데이터 역류! 재부팅 불가—"
목소리가 끊겼다.
늙은 민준이 무릎을 꿇었다.
"백한 번째도... 실패인가..."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빛 입자로 분해되었다.
"이번엔... 뭐가 달라질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발테온이 왕좌를 붙잡았다.
"폐하! 폐하아아!"
왕좌도 무너졌다. 발테온이 허공으로 떨어졌다.
민준이 한서진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왔다.
"우리... 죽는 거야?"
"모르겠어."
한서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혼자는 아니잖아."
민준이 피식 웃었다.
"...오글거려."
"닥쳐."
둘이 웃었다. 세계가 무너지는데도.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천천히, 규칙적으로.
민준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실루엣만 보였다. 키가 작았다. 어린아이 같았다.
"재밌었어."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차가웠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웃었네."
민준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너... 누구야..."
"나?"
그 존재가 빛 속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열 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민준과 똑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제로야."
소년이 웃었다.
"첫 번째 루프.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민준을 가리켰다.
"네 원본."
한서진이 민준을 감쌌다.
제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무서워?"
"당연하지..."
민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로가 빙그레 웃었다.
"안심해. 해치려는 거 아니야."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냥 게임 끝났으니까 인사하러 왔어."
"게임?"
"응. 재밌었어. 특히 네가 구슬 깬 거."
제로가 박수를 쳤다.
"예상 못 했거든. 보통은 쓰거나 안 쓰거나 둘 중 하나인데."
민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럼 넌... 뭔데..."
"관리자?"
제로가 턱을 괴었다.
"아니면 버그? 잘 모르겠어. 오래돼서."
어둠이 완전히 걷혔다.
새로운 공간이었다.
하얀 방.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구분이 안 갔다.
제로만 또렷했다.
"여긴 시작점이야."
제로가 말했다.
"모든 루프가 여기서 시작됐어. 너도, 아벨리우스도, 관찰자도."
민준이 한서진을 봤다. 한서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네가 정해."
제로가 손을 펼쳤다.
두 개의 빛 구슬이 떠올랐다.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
"파란색은 리셋. 백두 번째 루프 시작. 기억 전부 지우고 다시."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빨간색은 종료. 루프 끝. 세계도 끝. 너도 끝."
"둘 다 최악이잖아!"
민준이 소리쳤다.
제로가 웃었다.
"그래서 재밌지."
한서진이 끼어들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없어."
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스템이 이미 박살 났거든. 이 두 개밖에 안 남았어."
민준이 두 구슬을 번갈아 봤다.
'리셋하면... 다시 강민준으로 살 수 있어. 근데 기억이 없으면... 그게 나야?'
'종료하면... 끝이야. 근데 최소한 내 선택으로 끝나는 거잖아.'
손이 떨렸다.
제로가 지루한 듯 하품했다.
"빨리 정해. 시간 없어."
"시간?"
"응. 이 공간도 무너지는 중이거든."
바닥에 금이 갔다. 아니,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곳에.
한서진이 민준의 어깨를 잡았다.
"민준아."
민준이 그를 봤다.
"네가 뭘 고르든..."
한서진이 작게 웃었다.
"난 네 편이야."
민준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 사람은... 진짜네.'
손을 뻗었다.
제로가 눈을 반짝였다.
"오, 골랐어?"
민준의 손이 구슬에 닿으려는 순간.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제로의 얼굴이 굳었다.
"...어?"
어둠이 찢어졌다.
누군가 걸어 나왔다.
긴 검은 코트. 가면을 쓴 얼굴.
민준이 그 사람을 봤다.
"너..."
가면 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 기다렸어, 강민준."
가면을 벗었다.
민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상처투성이었다. 한쪽 눈이 없었다.
"나는 백한 번째가 아니야."
그가 피식 웃었다.
"백두 번째야."
민준의 머리가 멍해졌다.
제로가 뒤로 물러섰다.
"이건... 규칙 위반인데..."
"규칙?"
백두 번째 민준이 비웃었다.
"네가 만든 규칙 따위."
검은 코트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슬이었다. 하지만 파랗지도, 빨갛지도 않았다.
검은색이었다.
"이건 세 번째 선택지야."
그가 민준에게 던졌다.
민준이 반사적으로 받았다.
구슬이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쓰면..."
백두 번째 민준이 말했다.
"네가 관리자가 돼."
민준의 눈이 커졌다.
"뭐?"
"시스템을 네가 다시 만드는 거야. 네 마음대로. 루프도, 세계도, 전부."
제로가 소리쳤다.
"안 돼! 그건 금지된 선택지야!"
"닥쳐."
백두 번째 민준이 손을 휘둘렀다.
제로가 벽에 박혔다. 아니, 벽이 없는데 박힌 것처럼 보였다.
"네가 뭔데 금지해. 넌 그냥 AI잖아."
제로가 피를 토했다. 빛으로 된 피였다.
민준이 검은 구슬을 내려다봤다.
속에서 뭔가 속삭였다.
'원하는 대로 해. 전부 네 거야.'
한서진이 민준의 손목을 잡았다.
"민준아, 이거..."
"알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해. 너무 좋은 조건이야."
백두 번째 민준이 웃었다.
"좋은 조건 맞아. 대신..."
눈빛이 차가워졌다.
"네가 나처럼 돼야 해."
민준이 그를 봤다.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