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검은 구슬이 손바닥 위에서 맥박처럼 떨렸다.
"이건..."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구슬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아니, 낯설다기보단 너무 익숙했다. 마치 거울 속 자신이 먼저 웃기 시작한 것 같은 기분.
백두 번째 민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관리자 권한이야. 이걸 받아들이면 넌 이 세계의 시스템을 건드릴 수 있어."
"대가는?"
한서진이 낮게 물었다. 백두 번째 민준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인간성."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
"말 그대로야. 이 권한을 쓸 때마다 네 감정이 조금씩 지워져. 처음엔 사소한 거야. 좋아하던 음식의 맛이 안 느껴지고, 웃는 게 어색해지고."
백두 번째 민준이 자신의 가슴을 톡 쳤다.
"그다음엔 사람 얼굴 구분이 안 돼. 누가 죽어도 슬프지 않아. 마지막엔..."
그가 민준을 똑바로 봤다.
"네가 누군지 잊어버려."
민준의 손이 떨렸다. 구슬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지만, 이상하게도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며 잡아챘다.
'뭐야, 이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지는 세 개야."
백두 번째 민준이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 구슬을 받아들이고 관리자가 돼. 루프를 끊을 수 있지만, 넌 더 이상 강민준이 아니게 돼."
"둘은?"
"거부해. 그럼 이 루프는 계속돼. 백세 번째, 백넷 번째, 영원히."
한서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셋은..."
백두 번째 민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날 죽여. 그럼 시스템이 리셋되면서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 넌 다시 회사원이 되고, 이 모든 기억은 사라져."
"그게... 그게 말이 돼?"
민준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셋 다 개같은 선택지잖아!"
"응, 그렇지."
백두 번째 민준이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난 백두 번 동안 하나도 안 골랐어. 대신 제로를 해킹했지."
제로의 몸이 비틀거렸다.
"경고. 시스템 무결성 손상. 복구 불가."
그의 얼굴에서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형광등처럼.
"너... 뭘 한 거야?"
관찰자가 뒤로 물러섰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그는 항상 여유로웠는데, 지금은 명백히 겁먹은 얼굴이었다.
"간단해. 제로의 코어에 바이러스를 심었어.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거야."
"미쳤어?! 그럼 이 세계 전체가—"
"사라지겠지. 근데 원래 가짜잖아."
백두 번째 민준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공간이 찢어지며 코드들이 흘러나왔다. 0과 1로 이루어진 문자열. 민준은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래밍 언어.
"이 세계는 누군가 만든 게임이야. 넌 플레이어고, 나도 마찬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가 민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난 백두 번 플레이했다는 것뿐."
민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슴이 아팠다. 숨이 안 쉬어졌다.
'이건 공포가 아니야.'
직감이 속삭였다.
'인식이야.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의.'
한서진이 민준의 팔을 잡았다.
"정신 차려. 저 새끼 말에 넘어가면 안 돼."
"하지만..."
"넌 진짜야. 내가 봤어. 네가 겁먹고, 떨고, 도망치려던 거. 그게 데이터였으면 난 진작 눈치챘을 거야."
한서진의 손이 따뜻했다. 민준은 그 온기에 집중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 그러니까..."
입버릇이 튀어나왔다. 민준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벨리우스의 말투. 민준은 스스로도 놀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었지?
"난 안 골라."
"뭐?"
백두 번째 민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셋 다 네가 원하는 답이잖아. 어떤 걸 골라도 넌 이기는 거고."
민준이 구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이 다시 떨렸지만, 이번엔 의지로 눌렀다.
"그럼 난 네 번째 선택지를 만들 거야."
"불가능해. 시스템은 정해진 루트만—"
쾅!
문이 박살 났다.
발테온이 들어섰다. 검에서 푸른 빛이 흘렀다. 그의 얼굴은 살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폐하를 위협하는 자는..."
그가 백두 번째 민준을 노려봤다.
"용서치 않는다."
검이 내려찍었다. 빛이 공간을 갈랐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충격은 오지 않았다.
눈을 떴다.
백두 번째 민준이 손가락 하나로 검을 막고 있었다. 검날이 피부에 닿아 있었지만,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발테온. 너 데이터야."
"...뭐?"
"내가 만들었어. 백여덟 번째 루프에서. 폐하를 지키는 충직한 기사 캐릭터. 스탯은 충성도 100, 지능 30."
발테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짓말이다."
"확인해봐. 네 기억 중 백여덟 번째 루프 이전 게 있어?"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발테온은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폐하를 섬겼다."
"응, 그렇게 입력했거든."
백두 번째 민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발테온의 몸에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스탯 창.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표.
민준의 입이 바짝 말랐다.
'저게... 진짜야?'
숫자들이 깜빡였다. 충성도 100. 지능 30. 전투력 9,847. 그리고 맨 아래, 작은 글씨로 적힌 문구.
[제작자: 강민준(102nd)]
발테온이 무릎을 꿇었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소리를 냈다.
"그럼 나의... 모든 기억은..."
"가짜야."
한서진이 앞으로 나섰다.
"닥쳐. 넌 지금 사람 하나 부수고 있어."
"사람?"
백두 번째 민준이 피식 웃었다.
"쟨 프로그램이야. 감정도 입력된 알고리즘일 뿐이고."
"그게 무슨 차이야?"
한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느끼면 진짜야. 고통받으면 살아있는 거고."
공기가 무거워졌다. 민준은 한서진을 봤다. 그녀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분노가 아니었다. 두려움.
'저 사람도... 혹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한서진도 데이터일까? 아니, 그럼 나는? 백두 번째 민준은?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지?
머리가 아팠다.
"생각 그만해."
한서진이 민준의 어깨를 쳤다.
"네 얼굴 보면 다 보여. 나 진짜야. 확인하고 싶으면..."
그녀가 민준의 손을 잡아 자기 목에 갖다 댔다.
"맥박 짚어봐."
두근. 두근.
규칙적이고 따뜻한 박동. 민준의 손끝에 생명이 전해졌다.
"데이터는 이렇게 안 뛰어."
한서진이 웃었다. 억지로 짓는 웃음이었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고맙..."
"감동은 나중에 하고."
한서진이 백두 번째 민준을 노려봤다.
"네 목적이 뭐야? 세계 부수는 게 재밌어?"
"재미? 그런 감정 백 번째 루프에서 잃어버렸어."
백두 번째 민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 민준은 소름이 돋았다.
'저게... 내 미래?'
"난 그냥 끝내고 싶어. 이 반복을."
"그럼 구슬 받아들이면 되잖아. 관리자 되면 루프 끊을 수 있다며."
"대가가 너무 비싸."
백두 번째 민준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여기 아무것도 안 남았거든. 더 줄 게 없어."
제로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몸에서 코드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코드들이 글리치처럼 깜빡였다.
"경고. 시스템 붕괴 79%. 복구 불가. 월드 소멸까지 4분 23초."
관찰자가 뒤로 물러섰다.
"이건... 예상 밖이야."
그의 손이 떨렸다. 민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너도 몰랐구나. 이렇게 될 줄."
"나는 관리자야. 모든 걸 알고—"
"거짓말."
민준이 한 발 다가섰다. 아벨리우스의 인격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진짜 관리자였으면 백두 번째 루프를 막았겠지. 근데 못 막았어. 왜?"
관찰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권한이 없으니까."
백두 번째 민준이 끼어들었다.
"쟨 중간 관리자야. 위에 진짜 플레이어가 따로 있어."
천장이 갈라졌다.
아니, 천장이 아니었다. 세계 자체가 찢어지고 있었다. 균열 너머로 뭔가 보였다. 거대한 눈. 아니, 렌즈? 카메라?
민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저게... 뭐야."
"관객이야."
백두 번째 민준이 허공을 올려다봤다.
"우릴 지켜보는 존재들. 이 모든 게 그들한테는 그냥 게임이거든."
한서진이 뒷걸음질 쳤다.
"미쳤어. 그럼 우린..."
"응. 캐릭터."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발밑의 타일이 픽셀 단위로 바스러졌다. 민준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대로 끝나는 거야?'
손에 든 검은 구슬이 뜨거워졌다. 아니, 뜨겁다기보단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심장처럼.
"받아들여."
백두 번째 민준이 속삭였다.
"그게 유일한 탈출구야."
"거짓말 하지 마."
민준이 이를 악물었다.
"넌 백두 번 동안 안 받아들였잖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영리하네."
백두 번째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으로 진짜 웃음 같았다.
"맞아. 구슬 받아들이면 넌 관리자가 돼. 루프도 끊겨. 근데..."
그가 균열 너머의 거대한 눈을 가리켰다.
"저것들의 장난감이 되는 거야. 영원히."
민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모르겠어. 나도 백두 번 동안 답 못 찾았거든."
바닥이 완전히 사라졌다. 민준은 허공에 떠 있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민준의 몸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였다. 구슬을 향해.
'안 돼!'
머릿속으로 소리쳤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검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감촉.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
"오."
백두 번째 민준이 눈을 빛냈다.
"시스템이 직접 개입했네."
한서진이 민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민준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돌처럼.
"놔! 제발!"
한서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민준은 대답하고 싶었다. 입술이 떨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이 아니야.'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이건 마비가 아니었다. 조종. 누군가 민준이라는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구슬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검은 빛. 민준의 팔을 타고 번졌다.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차갑고 끈적한 감각.
"시스템 복구 시작. 플레이어 강민준, 관리자 권한 부여 절차 개시."
제로의 목소리. 하지만 톤이 달랐다. 기계음이 아니라 사람 목소리에 가까웠다.
"거부!"
민준이 소리쳤다. 아니, 소리치려 했다. 입에서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
"수락한다."
목소리가 낮았다. 아벨리우스의 말투. 하지만 민준이 한 게 아니었다.
'누가... 내 입을 움직인 거야?'
한서진이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민준아. 정신 차려."
"정신은 멀쩡해요."
민준의 입이 웃었다. 민준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히려 처음으로 명확해졌달까."
발테온이 검을 집어 들었다. 날이 푸르게 빛났다.
"폐하가 아니시군."
"예리하네."
민준의 몸이 돌아섰다.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민준은 평소에 이렇게 움직인 적이 없었다.
"난 폐하가 아니야. 그냥 임시 사용자."
백두 번째 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왔구나. 진짜 플레이어."
균열이 넓어졌다. 렌즈 너머로 뭔가 보였다. 손? 아니, 커서. 마우스 포인터.
그게 민준을 가리켰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민준은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꼭두각시였다.
"재밌지?"
민준의 입이 허공을 향해 말했다.
"백두 번 동안 지켜봤잖아. 이번엔 직접 해보고 싶었던 거지?"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커서가 움직였다. 민준의 손을 조종해 하얀 구슬을 집어 들게 했다.
"안 돼!"
한서진이 달려들었다. 민준의 팔이 휘둘러졌다. 한서진이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서진아!'
민준이 비명을 질렀다. 속으로만.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 엔딩 보는 중이야."
하얀 구슬이 빛났다. 검은 구슬과 공명하듯 진동했다. 민준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파. 누가... 누가 좀...'
발테온이 검을 들어 올렸다.
"용서하라."
검이 내려왔다. 민준의 목을 향해.
쾅!
검이 튕겨 나갔다. 민준의 몸에서 장벽이 펼쳐진 거였다. 투명한 막. 관리자 권한의 방어 시스템.
"쓸데없는 짓."
민준의 손이 발테온을 향해 펼쳐졌다. 손가락에서 빛줄기가 뻗어 나갔다.
발테온의 몸이 공중에 떴다. 그리고 산산조각 났다.
아니, 산산조각이 아니었다. 픽셀 단위로 분해됐다. 0과 1로.
"발테온!"
한서진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발테온은 코드 더미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민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죽였어. 내 손으로.'
하지만 입은 계속 웃고 있었다.
"하나 삭제. 다음은..."
민준의 시선이 한서진에게 향했다.
"안 돼. 제발. 제발!"
민준이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1밀리미터. 겨우 그만큼.
"오?"
민준의 입이 중얼거렸다.
"저항하네. 재밌는데."
커서가 민준의 이마를 찍었다. 클릭. 메뉴가 떴다.
[의지 수치: 87%]
[권한 충돌 감지]
[강제 동기화 Y/N?]
민준의 손가락이 Y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 마!"
백두 번째 민준이 끼어들었다. 그가 민준의 팔을 잡았다.
"이거 누르면 넌 완전히 사라져. 껍데기만 남는 거야."
"상관없어."
민준의 입이 대답했다.
"어차피 데이터잖아."
"데이터라도 의지는 있어."
백두 번째 민준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
"난 백두 번 봤어. 네가 겁먹고 떨고 도망치는 거. 그게 프로그램이었으면 패턴이 보였을 거야. 근데 매번 달랐어."
민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게..."
"증거야. 넌 진짜야."
백두 번째 민준이 민준의 어깨를 쳤다.
"싸워. 네 몸이잖아."
민준은 눈을 감았다.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 빛이 보였다. 아니, 코드. 끊임없이 흐르는 문자열.
그 사이로 뭔가 보였다.
'나.'
강민준. 회사원. 아벨리우스. 절대자.
둘 다 진짜였다. 둘 다 가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