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왕관의 소년
주인공: 한서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서윤은 교실 뒷문에 기대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8시 47분. 담임이 오기까지 13분. 그 시간이면 복도를 관찰하기에 충분했다.
패턴을 읽는 건 서윤의 습관이었다. 누가 누구 옆에 앉는지, 누가 먼저 웃는지, 누가 시선을 피하는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익힌 기술이었다. 그땐 몰랐다. 반 아이들이 자기 사물함에 쓰레기를 넣는 게 '우연'이 아니란 걸. 그들이 돌아가며 역할을 나눠 맡고 있다는 걸.
그 뒤로 서윤은 관찰자가 됐다. 감정보다 데이터를 믿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행동은 거짓말을 못 했다.
"야, 2학년 3반에 전학생 왔대."
복도 끝에서 여학생 둘이 속삭였다. 서윤은 시선을 고정한 채 귀만 기울였다.
"남자래. 완전 찐따 느낌."
"오지은 언니가 벌써 찍었대."
'오지은.'
서윤은 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2학년 서열 3위. 민준혁의 측근. 겉으론 학생회 홍보부장이지만 실제론 '크라운 시스템'의 집행자. 서윤은 노트에 이미 오지은의 패턴을 18가지 기록해뒀다.
종이 울렸다.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이 들어왔다. 그 뒤로 한 남학생이 고개를 숙인 채 따라왔다.
"전학생 강태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인사를 마친 태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두꺼운 뿔테 안경이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키는 185센티미터쯤 됐다. 어깨는 넓었지만 등은 굽어 있었다.
서윤은 노트 한쪽에 짧게 적었다.
'새 전학생. 체격 좋음. 눈 안 마주침. 방어적 자세.'
태준은 맨 뒷자리로 걸어갔다. 창가 끝자리.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곳. 서윤의 자리에서 정확히 세 줄 앞이었다.
수업이 시작됐다. 서윤은 태준의 뒷모습을 힐끗 봤다. 그는 교과서를 펴지 않았다. 손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손등엔 희미한 흉터가 여러 개 보였다.
'이상해.'
점심시간이 되자 태준은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갔다. 서윤은 5초 뒤 따라 일어났다.
복도에서 오지은 무리가 태준을 가로막았다.
"야, 전학생."
오지은이 웃으며 다가갔다. 뒤에 남학생 셋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우리 학교 처음이지? 선배들한테 인사 안 해?"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우리 착하니까 봐준다."
오지은이 태준의 어깨를 툭 쳤다.
"근데 점심 뭐 먹으려고? 혼자 먹기 그러면 우리랑 같이 먹자. 빵 사오고."
"...네."
태준은 대답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지은 무리가 킥킥대며 교실로 돌아갔다.
서윤은 복도 구석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노트에 짧게 적었다.
'첫날부터 타겟. 저항 없음. 계산이 안 맞아.'
태준은 10분 뒤 빵 세 개를 들고 돌아왔다. 오지은 무리에게 건네고 다시 교실을 나갔다. 서윤은 그를 따라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조용했다. 태준은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편의점 삼각김밥을 꺼냈다.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눈을 감았다.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서윤은 세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책을 펼쳤지만 시선은 태준에게 고정돼 있었다.
태준의 손이 떨렸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는 김밥을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표정은 없었다. 그냥 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서윤은 알았다. 저 사람은 지금 참고 있다.
'뭘 참는 거지?'
서윤은 노트에 적으려다 멈췄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떨렸다. 갑자기 숨이 답답했다. 초등학교 5학년, 급식실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
'이건... 이상해.'
서윤은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왔다. 복도에서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서윤은 노트를 정리하며 교실에 남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하나둘 나갔다. 태준도 가방을 태준도 가방을 들고 나가려다 복도에서 멈췄다. 오지은 무리가 계단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야, 강태준. 옥상 좀 가자."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네."
서윤은 펜을 놓고 그들을 바라봤다. 오지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웃고 있지만 눈이 차가웠다.
'패턴이 바뀌었어.'
서윤은 노트를 가방에 넣고 천천히 일어났다. 복도로 나가려는데 오지은이 돌아서며 말했다.
"한서윤, 너도 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요?"
"궁금한 거 있어서. 올라와."
오지은이 계단을 올라갔다. 태준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따라갔다. 서윤은 가방 끈을 꽉 쥐고 뒤를 따랐다.
옥상 문이 열렸다. 바람이 차가웠다. 석양이 건물 너머로 지고 있었다.
오지은이 서윤에게 다가왔다.
"너 맨날 노트에 뭘 적어?"
"...제 거예요."
"보자."
오지은이 손을 뻗었다. 서윤은 가방을 뒤로 뺐다.
"안 돼요."
"안 돼?"
오지은이 웃었다. 뒤에 있던 남학생 둘이 서윤의 팔을 잡았다.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오지은이 노트를 꺼냈다.
"오, 진짜 빡빡하게 적었네. 이게 뭐야? 학생 이름에 번호? 너 혹시 찐따라서 친구 못 사귀니까 관찰 일기 쓰는 거야?"
서윤의 얼굴이 하얘졌다. 손이 떨렸다.
"...돌려줘요."
"돌려줘요?"
오지은이 노트를 펼쳤다. 첫 장을 찢었다. 찢어진 종이가 바람에 날렸다.
"이런 거 쓰지 마. 기분 나빠."
두 번째 장을 찢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았다. 울면 안 됐다. 울면 끝이었다.
'참아. 참아. 그냥... 참으면 돼.'
손가락 끝이 저렸다. 숨이 가빠졌다. 초등학교 5학년, 사물함이 열리던 순간. 쏟아지는 쓰레기. 웃음소리. 자기 이름이 적힌 낙서. 그 기억이 목을 조였다.
노트가 반쯤 찢어졌을 때 옥상 문이 열렸다.
태준이 들어왔다.
그는 계단 아래로 심부름을 다녀온 척했지만,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눈빛이 달랐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서윤을 향했다.
오지은이 비웃었다.
"뭐야, 찐따가 영웅 놀이 하려고? 너도 맞을래?"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와 바닥에 떨어진 노트 조각을 하나 집어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플래시백이 스쳤다. 여동생의 일기장이 찢어지던 날. 복도에 흩어진 종이 조각들. 동생이 무릎 꿇고 울던 모습. 그 옆에서 웃던 아이들.
태준의 손이 멈췄다.
"...그만둬."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오지은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 야, 이 새끼 진짜—"
오지은이 태준의 어깨를 밀려는 순간, 태준의 손이 움직였다.
0.5초.
아무도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오지은의 손목이 뒤로 꺾였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태준이 놓았다. 오지은은 주저앉아 손목을 부여잡았다.
"미친... 너..."
남학생 둘이 얼어붙었다. 태준은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었다.
서윤은 숨을 멈췄다.
태준의 눈이 보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하지만 어딘가 텅 빈 눈. 그 눈빛 속엔 무언가가 꺼져 있었다.
"다시는 건드리지 마."
태준이 오지은 무리를 지나쳐 서윤에게 다가왔다. 바닥에 흩어진 노트 조각들을 하나씩 주웠다. 손이 떨렸다. 그는 조각들을 모아 서윤에게 건넸다.
"...미안해요. 늦었어요."
서윤은 그 조각들을 받아들었다. 손끝이 태준의 손가락에 닿았다. 차가웠다. 아니,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 뭔가 숨기고 있어.'
오지은 무리가 계단을 내려갔다. 옥상에 서윤과 태준만 남았다. 바람이 불었다. 찢어진 노트 조각 하나가 난간 너머로 날아갔다.
서윤은 조각들을 꽉 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고마워요."
태준은 안경을 다시 썼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다시 텅 비었다.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가 돌아서려는데 서윤이 말했다.
"저기."
태준이 멈췄다.
"이름이... 뭐예요?"
"강태준이요."
"...한서윤이에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옥상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서윤이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서윤은 찢어진 노트 조각들을 내려다봤다. 손끝이 떨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사람... 대체 뭐지?'
그날 밤, 서윤은 새 노트를 펼쳤다. 첫 장에 이름을 적었다.
'강태준.'
그 아래 짧게 적었다.
'계산이 안 맞아. 이상해. 패턴이 없어.'
창밖으로 달이 떠올랐다. 서윤은 펜을 놓고 손등의 떨림을 바라봤다.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자기 편이 되어준 건.
아니, 편이 아니었다. 태준은 그냥... 자기를 봤다.
서윤은 노트를 덮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태준의 떨리는 손이 계속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은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은 비어 있었다. 태준의 자리도 비어 있었다.
8시 50분, 태준이 들어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쓴 채.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세 줄 뒤에서 그의 뒷모습을 봤다.
수업이 시작됐다. 1교시, 2교시. 점심시간이 되자 태준은 다시 가방을 들고 나갔다. 서윤은 따라 나가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교정 구석, 나무 그늘 아래서 태준이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혼자. 햇빛이 그를 비췄다.
서윤은 노트를 펼쳤다. 적으려다 멈췄다. 손이 떨렸다.
'이건... 뭐지?'
오후 수업이 끝나고 서윤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태준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는 척하지만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서윤은 세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30분이 지났다. 태준이 일어났다. 서윤도 일어났다. 복도에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태준이 먼저 인사했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손목 괜찮아요?"
"네."
"...그렇게 배운 거예요? 그거."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우연이었어요."
거짓말이었다. 서윤은 알았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어제."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그가 돌아서려는데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민준혁이었다.
학생회장. 3학년. 성원고 서열 1위. 그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 2학년 전학생이지? 강태준?"
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네."
"잘 적응하고 있어? 우리 학교 처음이라 힘들지?"
"...괜찮습니다."
민준혁의 시선이 서윤에게 향했다.
"한서윤 학생도. 잘 지내지?"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잘 지내. 어려운 일 있으면 학생회실로 와."
그가 지나갔다. 복도에 그의 향수 냄새가 남았다. 서윤은 노트를 꺼내 짧게 적었다.
'민준혁. 진짜 적은 이 사람.'
태준이 그 글씨를 힐끗 봤다. 서윤은 노트를 덮었다.
민준혁은 계단을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학생이 두 명이나 있네."
# 후반부
민준혁이 계단을 올라간 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서윤은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뭐가요?"
"민준혁 선배요. 그 사람은..."
태준이 말을 멈췄다. 서윤은 그의 얼굴을 봤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준이 돌아섰다. 서윤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굳어 있었다.
'뭔가 알고 있어.'
서윤은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민준혁. 3학년 학생회장. 겉으로는 완벽한 모범생. 하지만 오지은 무리가 민준혁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패턴이 보였다. 두려움. 복종. 그리고 은밀한 거래.
'크라운 시스템. 민준혁이 정점에 있어.'
서윤은 교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봤다. 교정 한쪽에서 민준혁이 몇몇 학생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천사 같은 미소. 하지만 그 학생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서윤은 노트를 꺼냈다. 새 페이지를 펼쳤다.
'민준혁. 관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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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점심시간, 서윤은 도서관에 갔다. 태준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서윤은 그 옆자리에 앉았다.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혼자 먹기 심심해서요."
서윤이 삼각김밥을 꺼냈다. 태준은 잠시 망설이다 자기 김밥도 꺼냈다. 둘은 말없이 먹었다.
5분이 지났다. 서윤이 물을 마시다 말했다.
"태준 씨는... 전학 오기 전에 뭐 했어요?"
태준의 손이 멈췄다.
"...그냥요."
"그냥?"
"...공부했어요."
거짓말이었다. 서윤은 알았다. 태준의 손등에 희미한 흉터가 있었다. 칼자국 같았다. 하지만 깊게 묻지 않았다.
"...저도 그랬어요. 그냥 공부만."
태준이 서윤을 봤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쳤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요?"
"친구 없었거든요."
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나랑 같아.'
서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때 도서관 문이 열렸다. 민준혁이 들어왔다. 그는 둘을 보고 미소 지었다.
"어, 여기 있었네. 강태준 학생."
태준이 일어났다. 몸이 굳었다.
"...네."
"학생회에서 전학생 환영회 준비 중이거든. 잠깐 학생회실로 올래? 5분이면 돼."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혁의 미소가 깊어졌다.
"아, 한서윤 학생도 같이 올래? 너도 우리 학교 적응하는 데 도움 필요하잖아."
서윤은 노트를 덮었다. 민준혁의 눈빛을 봤다. 차가웠다. 미소와 눈빛이 따로 놀았다.
"...괜찮아요."
"그래? 그럼 태준 학생만."
민준혁이 태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준의 어깨가 떨렸다. 서윤은 그 떨림을 봤다.
'이상해. 태준 씨가 왜 저렇게...?'
태준이 민준혁을 따라 나갔다. 도서관 문이 닫혔다. 서윤은 자리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손이 떨렸다.
'뭔가 잘못됐어. 계산이 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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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실. 민준혁은 문을 닫았다. 태준은 창가에 섰다. 민준혁이 책상에 기댔다.
"전학 온 지 사흘 됐지?"
"...네."
"적응은 잘돼?"
"...네."
민준혁이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거짓말 잘하네. 너 같은 애들은 적응 못 해. 난 알아."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혁이 일어나 태준에게 다가왔다.
"어제 옥상에서 오지은 손목 꺾었지?"
태준의 손이 떨렸다.
"...우연이었어요."
"우연? 0.5초 만에 손목을 꺾는 게 우연이야?"
민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필요 없어. 난 네가 궁금해."
민준혁이 태준의 안경을 벗겼다. 태준이 움찔했다. 민준혁은 그 눈을 봤다.
"오, 이래서 안경 쓰고 다니는 거야? 눈빛이 너무 # 후반부 (계속)
"오, 이래서 안경 쓰고 다니는 거야? 눈빛이 너무 세."
민준혁이 안경을 돌려줬다. 태준은 안경을 받아 썼다. 손이 떨렸다.
"너, 전학 오기 전에 뭐 했어?"
"...공부했습니다."
"거짓말."
민준혁이 태준의 손목을 잡았다. 손등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이건 싸움 흔적이야. 많이 싸웠구나."
태준이 손을 뺐다. 민준혁은 웃었다.
"도망칠 생각 마. 우리 학교엔 크라운 시스템이라는 게 있거든. 네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나한테 잘 보여야 해."
"...전 그냥 조용히 지낼게요."
"조용히? 어제 오지은 손목 꺾어놓고? 이미 소문 다 퍼졌어. 2학년 전학생이 일진 박살냈다고."
민준혁이 창밖을 봤다.
"너 같은 애들은 선택해야 해. 내 편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돌아섰다.
"짓밟히거나."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혁이 문을 열었다.
"생각해봐. 시간은 많아."
태준이 학생회실을 나왔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댔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빠졌다.
'또 시작이야. 또...'
플래시백이 스쳤다. 전학교 복도. 동생을 둘러싼 아이들. 웃음소리. 그리고 자기 주먹에 묻은 피.
태준은 눈을 감았다. 숨을 고르려 했지만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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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은 도서관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태준이 벽에 기대 서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태준 씨?"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흔들렸다.
"...괜찮아요."
"거짓말."
서윤이 다가갔다. 태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요? 민준혁이."
"...아무것도요."
"또 거짓말."
서윤은 태준의 눈을 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깨질 것 같았다.
"태준 씨는... 왜 자꾸 거짓말해요?"
태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한 발 물러섰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캐물었네요."
"아니에요."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서윤을 똑바로 봤다.
"서윤 씨는... 왜 저한테 말 거세요?"
"...뭐가요?"
"다들 저 피하는데. 서윤 씨는 안 그래요."
서윤은 잠시 생각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저도 그랬거든요. 초등학교 때. 다들 저 피했어요."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서요. 태준 씨 보면... 옛날 제 모습 같아서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오지은 무리가 나타났다. 오지은은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녀가 태준을 봤다.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야, 강태준."
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오지은이 다가왔다.
"너 때문에 손목 삐었어. 병원 다녀왔거든?"
"...죄송합니다."
"사과로 끝나? 너 진짜—"
서윤이 오지은 앞을 막아섰다.
"그만하세요."
오지은이 비웃었다.
"뭐야, 찐따가 영웅 놀이?"
"태준 씨가 사과했잖아요."
"사과로 끝나냐고!"
오지은이 서윤의 어깨를 밀었다. 서윤이 뒤로 비틀거렸다. 태준이 서윤을 붙잡았다. 손이 서윤의 팔을 감쌌다. 따뜻했다.
서윤은 태준의 얼굴을 봤다. 안경 너머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차갑게. 날카롭게.
"...놓으세요."
태준이 낮게 말했다. 오지은이 웃었다.
"뭐? 또 때릴 거야?"
"놓으라고요."
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지은 무리가 뒤로 물러섰다.
그때 민준혁이 계단에서 내려왔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오지은이 돌아섰다.
"회장님, 이 새끼가—"
"그만해."
민준혁이 차갑게 말했다. 오지은이 입을 다물었다. 민준혁이 태준을 봤다.
"강태준 학생. 학교에서 싸우면 안 돼. 알지?"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혁이 미소 지었다.
"다음엔 조심해. 두 번은 없어."
민준혁이 오지은 무리를 데리고 갔다.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태준이 서윤을 놓았다. 손이 떨렸다.
"...괜찮아요?"
서윤이 물었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굴이 창백했다.
"저... 집에 갈게요."
태준이 돌아섰다. 서윤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이 사람... 뭔가 참고 있어.'
서윤은 노트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적었다.
'강태준. 폭력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킬 땐 주저하지 않는다. 왜?'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나를 지켰다. 두 번이나.'
서윤은 노트를 덮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끝이 따뜻했다. 태준이 자기 팔을 잡았을 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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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서윤은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민준혁에 대한 관찰 기록을 정리했다.
'민준혁. 학생회장. 3학년. 겉으로는 완벽한 모범생. 하지만 오지은 무리를 통제한다. 크라운 시스템의 정점.'
서윤은 펜을 멈췄다. 창밖을 봤다. 달이 떠 있었다.
'태준 씨를 노리고 있어. 왜?'
다음 날 아침, 서윤은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태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교시가 시작됐지만 태준은 오지 않았다.
2교시, 3교시. 점심시간이 됐다. 태준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서윤은 도서관으로 갔다. 태준이 앉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서윤은 그 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5교시가 끝나고 서윤은 교무실로 갔다. 담임 선생님에게 물었다.
"강태준 학생 어디 갔어요?"
"아, 태준이? 오늘 결석이야. 편찮다고 연락 왔어."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거짓말이야. 어제 멀쩡했는데.'
서윤은 학교를 나섰다. 태준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학생부 명단을 몰래 봤다.
30분을 걸어 작은 원룸 건물 앞에 도착했다. 3층. 서윤은 계단을 올라갔다. 302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서윤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노트를 꺼냈다. 적으려다 멈췄다.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10분이 지났다. 문이 열렸다. 태준이 나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이 충혈돼 있었다.
"...서윤 씨?"
"왜 학교 안 왔어요?"
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이 일어났다.
"편찮다고 거짓말했죠?"
"...아니에요."
"거짓말."
서윤이 태준의 눈을 봤다. 안경 너머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일 있어요?"
태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민준혁 선배가요."
"뭐라고 했어요?"
"...제 과거를 알아냈대요."
서윤의 손이 떨렸다.
"과거요?"
태준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저 전학교에서 애들 많이 때렸어요. 동생 괴롭힌다고. 그래서... 쫓겨났어요."
서윤은 숨을 멈췄다. 태준이 계속 말했다.
"민준혁 선배가 그거 알아냈어요. 그리고... 협박했어요. 말 안 들으면 소문 퍼뜨린다고."
"뭘 하라고요?"
태준이 서윤을 봤다. 눈빛이 깨질 것 같았다.
"...서윤 씨 노트 가져오래요."
서윤의 심장이 멎었다.
"제 노트요?"
"네. 민준혁 선배가... 서윤 씨가 자기 관찰한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노트 내용 보고 싶대요."
서윤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래서요? 줄 거예요?"
태준이 고개를 저었다.
"안 줄 거예요."
"왜요?"
"...서윤 씨 노트는 서윤 씨 거니까요."
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서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참았다. 울면 안 됐다.
"...바보예요."
"...네."
"왜 그렇게까지 해요? 저 때문에 괴롭힘당할 건데."
태준이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슬프지만 따뜻했다.
"...서윤 씨는 저 지켜줬잖아요. 어제."
서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