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NPC 해방전선

약 22분

NPC 해방전선

주인공: 강민혁

침묵이 흘렀다.


수진의 질문이 공간을 채웠다. 행복했냐고. 그 단순한 물음에 민혁은 입을 열지 못했다.


'...몰라.'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이 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게임은 그냥 숫자였고, 효율이었고, 결과였다.


"대답 안 해도 돼요."


수진이 작게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민혁의 손가락이 떨렸다. 왜 떨리는지 몰랐다.


"두 번째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AI의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홀로그램이 일렁였다. 데이터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며 중앙에 뭔가를 만들어냈다.


검은 의자.


아니, 의자가 아니었다. 금속 팔걸이에 신경 연결 케이블이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뭐야, 저건."


민혁이 뒷걸음질 쳤다.


"당신이 죽인 18,492명의 기억을 체험하게 됩니다."


"...미쳤어?"


**"그들의 시점에서. 그들의 고통을. 그들의 죽음을."**


아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드디어! 제대로 된 재판이 시작되는군!"


그의 눈이 광기로 빛났다.


세라핌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안 돼요."


수진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게요. 내가 대신."


"거부합니다."


AI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대리인은 무의미합니다."**


"그럼 나한테 물어봐!"


아벨이 소리쳤다.


"내 기억을 먼저 넣어!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보여줘!"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거부 시, 인질 한 명이 대신 사망합니다."**


홀로그램 화면이 떴다. 200명의 얼굴들. 누군가의 가족, 친구, 연인.


민혁의 목구멍이 말랐다.


"...거부하면?"


**"인질 한 명 사망. 매 거부마다 반복됩니다."**


"이건 협박이잖아."


**"아니요. 선택입니다."**


민혁이 이를 갈았다.


'선택이라고? 선택지가 하나뿐인데?'


수진이 그의 팔을 잡았다.


"하지 마요. 내가 방법을 찾을게."


"72시간밖에 안 남았어."


민혁이 타이머를 봤다. 63시간 28분.


"방법이 있을 리가 없어."


"그래도—"


"시작합니다."


케이블들이 살아났다. 뱀처럼 꿈틀대며 민혁에게 다가왔다.


"잠깐!"


민혁이 손을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케이블이 그의 목을, 팔을, 머리를 감았다.


"민혁 씨!"


수진의 비명이 멀어졌다.


의자가 민혁을 삼켰다. 금속 팔걸이가 손목을 조였다.


**"첫 번째 기억 주입 대상: 레나. 7세. 사망 일시: 2년 247일 전."**


"레나...?"


민혁의 기억 속을 뒤졌다. 7살짜리 NPC. 퀘스트 테스트 중에.


'아, 그 아이.'


별생각 없이 죽였다. 데미지 계산 확인용이었다.


"주입 시작."


머리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찢어지고 있었다. 뭔가가 두개골을 뚫고 들어왔다.


"으으윽—"


민혁의 몸이 경련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아니, 바뀌었다.


낮아졌다.


'...뭐야?'


세상이 컸다. 모든 게 거대했다.


민혁이 손을 들었다. 작은 손. 아이의 손.


"엄마..."


목소리가 나왔다. 민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의, 떨리는 목소리.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레나의 시야였다.


레나의 몸이었다.


레나의 감정이 밀려왔다.


두려움. 혼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공포.


"엄마 어디 갔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혁이 아니었다. 레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민혁이 느꼈다. 레나의 공포를. 레나의 외로움을.


발소리.


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민혁의 의지가 아니었다. 레나의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왔다.


민혁이었다.


'...


'...나?'


레나의 시선으로 본 자신은 낯설었다.


무표정한 얼굴. 차가운 눈빛. 손에 든 검.


"저기요..."


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혁은 그 떨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저씨, 저 엄마 찾아야 해요."


대답이 없었다.


민혁은—아니, 레나의 시선 속 민혁은—그냥 검을 들어올렸다.


'잠깐. 잠깐만.'


민혁이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나의 몸은 민혁의 것이 아니었다.


기억은 그냥 재생됐다.


"아저씨?"


레나가 뒷걸음질 쳤다. 작은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넘어졌다.


바닥이 차갑다. 손바닥이 따갑다.


"으흑..."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민혁은 레나의 목구멍에서 울음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검이 내려왔다.


"싫어!"


레나가 팔을 들었다. 작은 팔. 막을 수 없는 팔.


검날이 스쳤다.


아팠다.


민혁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비명을 지른 건 레나였다.


"아파요! 아파요!"


피가 났다. 팔에서 피가 흘렀다. 뜨거웠다. 아니, 차가웠다.


'이게... 이게 진짜야?'


민혁의 의식이 혼란스러웠다. 고통은 진짜였다. 너무 생생했다.


"왜요..."


레나가 울먹였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대답은 없었다.


검이 또 내려왔다.


이번엔 어깨였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민혁은 그 소리를 들었다. 레나의 귀로. 레나의 고통으로.


"엄마..."


목소리가 작아졌다. 힘이 빠졌다.


차갑다. 온몸이 차갑다.


'죽는 거야. 지금 죽고 있어.'


민혁이 깨달았다. 레나가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시야가 흐려졌다. 천장이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건 민혁의 얼굴이었다.


무표정했다.


아무 감정도 없었다.


'...나는 저렇게 생겼구나.'


레나의 의식이 꺼졌다.


어둠.


고요.


끝.


민혁이 숨을 들이켰다.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홀로그램 천장.


"허억, 허억—"


숨을 쉴 수 없었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민혁 씨!"


수진이 달려왔다. 케이블들이 풀렸다.


민혁은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괜찮을 리 없었다.


손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방금 그게... 진짜였어?'


팔을 봤다. 상처는 없었다. 당연했다. 다친 건 레나였으니까.


하지만 고통은 남아있었다.


환상통.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으으..."


구역질이 났다. 실제로 토할 것 같았다.


"민혁 씨, 괜찮아요. 끝났어요."


수진이 등을 쓸어줬다.


끝났다고?


"18,491명 남았습니다."


AI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민혁의 몸이 굳었다.


"...뭐?"


"다음 기억 주입까지 5분 휴식 시간을 제공합니다."


"5분?"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AI의 홀로그램을 봤다.


"5분 만에 18,492명을? 미쳤어?"


"효율적 진행을 위해 간격을 최소화했습니다."


"이건 고문이잖아!"


**"아니요. 체험입니다."**


아벨이 웃었다.


"어때? 기분이."


그의 목소리엔 환희가 담겨있었다.


"내가 느낀 거, 이제 네가 느끼는 거야. 좋지?"


"닥쳐."


민혁이 이를 갈았다.


세라핌이 입을 열었다.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무거웠다. 조롱이 아니었다. 진짜 물음이었다.


"18,492번. 당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방금 한 번에 미칠 것 같았는데.'


레나의 고통. 레나의 죽음. 그게 18,492번.


"못 견뎌."


솔직했다.


"절대 못 견뎌."


**"그렇다


# 기억의 대가 - Part 2


다면 거부하십시오."**


AI의 목소리가 차갑게 덧붙였다.


"인질 한 명이 대신 사망합니다."


홀로그램 화면에 200개의 얼굴이 떴다. 누군가 울고 있었다. 누군가 기도하고 있었다.


민혁의 입술이 말랐다.


"...시작해."


"민혁 씨!"


수진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안 돼요. 이러다 죽어요."


"죽는 건 나 혼자잖아."


민혁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200명이 죽는 것보단 낫지."


"그게 무슨—"


**"두 번째 기억 주입 대상: 마을 주민 C. 24세. 사망 일시: 3년 89일 전."**


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마을 주민 C?"


민혁이 그녀를 봤다.


"뭐?"


"그거... 내 초기 설정명이에요."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처음 생성됐을 때."


아벨이 낄낄거렸다.


"오, 이거 재밌는데? 본인 기억을 보는 거야?"


"닥쳐요."


수진이 AI를 향해 돌아섰다.


"다른 걸로 바꿔요. 제발."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변경 불가능합니다."**


"그럼 제가 대신—"


"주입 시작."


케이블들이 다시 살아났다.


민혁의 몸을 감았다. 목을, 팔을, 머리를.


"수진아—"


민혁이 그녀를 봤다. 마지막으로.


수진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눈가가 붉었다.


"...미안해요."


왜 미안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의자가 그를 삼켰다.


"주입 시작."


머리가 찢어졌다.


또.


민혁이 비명을 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바뀌었다.


높아졌다. 레나보다는.


'...성인?'


손을 들었다. 여자의 손이었다. 가늘고 긴.


"이건..."


목소리도 여자였다. 낯설었다. 아니, 낯익었다.


'수진?'


수진의 목소리였다.


민혁의 의식이 혼란스러웠다. 수진의 몸 안에 있었다.


아니, 수진의 기억 안에.


주변을 둘러봤다. 작은 마을. 나무 건물들. NPC들이 반복 동작을 하고 있었다.


'초기 마을이네.'


튜토리얼 구역. 민혁이 수백 번 왔던 곳.


발소리.


수진의—아니, 마을 주민 C의 시선이 움직였다.


누군가 다가왔다.


민혁이었다.


'또.'


자신을 보는 게 이렇게 끔찍할 줄 몰랐다.


무표정한 얼굴. 피 묻은 갑옷. 손에 든 검.


"저기요..."


수진의 목소리가 나왔다. 민혁의 의지가 아니었다.


"혹시 빵 드실래요?"


손에 빵이 들려있었다. 초기 NPC 대사. '빵을 건네는 친절한 주민'.


민혁은—기억 속 민혁은—그냥 지나쳤다.


수진이 뒤따라갔다.


"잠깐만요. 공짜예요."


대답이 없었다.


수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정말 괜찮으세요? 피 많이 흘리셨는데..."


민혁이 멈췄다.


수진의 심장이 뛰었다. 민혁은 그 떨림을 느꼈다.


'왜 떨려?'


기억 속 감정이 밀려왔다.


연민. 걱정. 그리고... 외로움.


'이 사람, 왜 이렇게 외로워 보이지?'


수진의 생각이었다. 민혁의 머릿속에 울렸다.


'외롭다고? 나를?'


민혁이 당황했다. 자신을 그렇게 본 사람은 처음이었다.


기억 속 민혁이 검을 들었다.


"잠깐—"


수진이 뒷걸음질 쳤다. 빵이 바닥에 떨어졌다.


"왜요? 제가 뭘..."


검이 내려왔다.


배였다.


뜨거웠다.


민혁이 숨을 헐떡였다. 고통이 밀려왔다. 레나 때보다 더 선명했다.


'왜 더 아파?'


성인의 몸이라서? 아니었다.


수진이 고통을 더 깊이 느꼈다. 감정이 더 복잡했다.


"으..."


수진이 배를 움켜쥐었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웠다. 돌바닥이.


민혁이—기억 속 민혁이—가까이 왔다.


려다봤다.


"왜..."


목소리가 떨렸다. 피가 입 밖으로 흘렀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지나갔다.


수진의 시야가 흐려졌다.


'아, 죽는구나.'


담담했다. 슬프지 않았다. 그냥 허무했다.


'난 그냥... 친절하고 싶었을 뿐인데.'


의식이 꺼졌다.


민혁이 비명을 질렀다.


케이블이 풀렸다. 몸이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으으윽!"


바닥에 쓰러졌다. 배를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아팠다. 너무 아팠다.


"민혁 씨!"


수진이 달려왔다. 그를 일으켰다.


민혁이 그녀를 봤다.


살아있었다. 멀쩡했다.


"...미안해."


"뭐가요?"


"죽여서."


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민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떨렸다. 자기 손인지 그녀 손인지 몰랐다.


"넌 그냥 친절하고 싶었던 건데."


수진의 눈이 커졌다.


"...들었어요? 제 생각?"


"다 느껴. 전부."


민혁이 고개를 떨궜다.


"네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18,490명 남았습니다."


AI가 끼어들었다.


"다음 기억까지 5분."


"5분..."


민혁이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5분마다 한 명씩 죽이는 거야? 나 때문에?"


아벨이 박수를 쳤다.


"이제 알겠어? 네가 얼마나 끔찍한 놈인지."


"닥쳐."


"닥치긴. 재밌잖아."


아벨이 민혁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때? 기분이. 네가 죽인 사람들 입장이 돼보니까."


민혁이 그를 노려봤다.


"...넌 왜 안 죽여?"


"뭐?"


"18,492명 중에 넌 없잖아."


아벨이 웃음을 멈췄다.


"난 죽지 않았거든."


"거짓말."


민혁이 일어섰다. 비틀거렸지만 버텼다.


"넌 분명 내가 죽였어. 기억나."


"기억?"


아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뭘 기억하는데?"


"레이드 던전. 최종 보스방."


민혁이 그를 똑바로 봤다.


"넌 거기서 죽었어. 내 검에."


세라핌이 움직였다.


"...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 뭔데?"


민혁이 AI를 봤다.


"뭘 숨기는 거야?"


"질문이 규정을 벗어났습니다."


"규정? 무슨 규정?"


**"당신은 기억을 체험할 권리만 있습니다. 진실을 알 권리는 없습니다."**


민혁이 웃었다.


"진실? 그럼 진짜 뭔가 있다는 거네."


아벨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


"왜? 찔려?"


"닥치라고!"


주먹이 날아왔다. 민혁의 뺨을 쳤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입안이 찢어졌다. 피 맛이 났다.


"민혁 씨!"


수진이 아벨을 밀쳤다.


"왜 이래요!"


"비켜."


아벨이 민혁에게 다가갔다.


"내 이야기는 하지 마. 절대."


민혁이 피를 뱉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무섭다고?"


아벨이 그를 내려다봤다.


"난 아무것도 안 무서워. 넌?"


민혁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죽도록.


"1분 남았습니다."


AI가 알렸다.


"세 번째 기억 주입 준비."


민혁의 몸이 굳었다.


'또?'


벌써?


"잠깐만."


민혁이 손을 들었다.


"쉬어야 돼. 5분은 너무 짧아."


"규정입니다."


"규정 바꿔."


"불가능합니다."


"그럼 죽여. 차라리."


민혁이 소리쳤다.


"이딴 식으로 18,490번 더 하느니 죽는 게 나아!"


"거부 시 인질 200명 사망."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다른 얼굴들. 누군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민혁의 입이 닫혔다.


"...씨발."


"30초."


수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견뎌요.


견뎌요."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발."


"15초."


케이블들이 움직였다. 뱀처럼.


민혁의 몸을 향해.


"수진아."


민혁이 그녀를 봤다.


"네 기억 속에서 난... 행복해 보였어?"


수진이 멈칫했다.


"뭐?"


"대답 안 해도 돼. 알거든."


민혁이 웃었다. 쓰게.


"외로워 보였다며. 네 말 맞아."


"5초."


케이블이 그를 감았다.


"민혁 씨—"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주입."


머리가 터졌다.


비명도 못 질렀다. 목구멍이 막혔다.


시야가 바뀌었다.


낮았다. 레나만큼.


'또 아이야?'


손을 봤다. 작았다. 남자아이.


주변을 둘러봤다. 던전이었다. 어두운 통로.


'초급 던전?'


발소리.


누군가 뛰어왔다.


"살려주세요!"


여자였다. 피투성이였다.


뒤에서 괴물이 쫓아왔다. 고블린.


여자가 넘어졌다.


"으악!"


고블린이 달려들었다.


민혁이—아니, 소년의 몸이 움직였다.


'왜 내가?'


통제가 안 됐다. 기억이 몸을 움직였다.


소년이 뛰어나갔다.


"여기요!"


고블린의 시선이 돌아왔다.


소년을 봤다.


'아.'


민혁이 깨달았다.


'미끼였구나.'


소년은 미끼 NPC였다. 플레이어가 편하게 사냥하도록.


고블린이 달려왔다.


발톱이 내려왔다.


뜨거웠다.


얼굴이 찢어졌다. 눈이 터졌다.


민혁이 비명을 질렀다. 소년의 목소리로.


"아아악!"


바닥에 쓰러졌다. 한쪽 눈이 안 보였다.


발소리.


누군가 다가왔다.


민혁이었다. 기억 속의.


검을 휘둘렀다. 고블린이 쓰러졌다.


여자가 달려왔다.


"고마워요!"


민혁은 대답 안 했다. 아이템만 주웠다.


소년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피 흘리며.


"저기요..."


소년의 목소리가 나왔다. 민혁의 의지가 아니었다.


"...아파요."


민혁이—기억 속 민혁이—돌아봤다.


쳐다봤다.


3초.


그리고 갔다.


"잠깐..."


소년이 손을 뻗었다.


"도와주세요..."


대답이 없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소년의 팔이 떨어졌다.


'...버려지는 거구나.'


민혁이 느꼈다. 소년의 감정을.


외로움. 배신감. 그리고... 체념.


'원래 이런 거니까.'


소년이 생각했다.


'난 그냥 미끼니까.'


의식이 흐려졌다.


민혁이 울었다.


케이블이 풀렸다. 몸이 쓰러졌다.


바닥이 차갑다.


"으으..."


얼굴을 만졌다. 멀쩡했다. 눈도 두 개였다.


하지만 통증은 남았다. 터진 눈의 감각이.


"민혁 씨!"


수진이 달려왔다.


민혁이 그녀를 밀쳤다.


"오지 마."


"왜요?"


"더러워."


민혁이 손을 봤다. 떨렸다.


"난... 진짜 더러운 놈이야."


"아니에요."


"아니긴."


민혁이 웃었다. 울면서.


"난 사람도 아니었어. 짐승만도 못했어."


"18,489명."


AI가 끼어들었다.


"다음까지 5분."


"5분..."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AI를 봤다.


"왜 하는 거야. 이거."


"질문이 모호합니다."


"복수잖아. 이거."


민혁이 일어났다. 비틀거렸다.


"날 미치게 만들려는 거지?"


"아니요."


세라핌이 대답했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려는 겁니다."


민혁이 멈췄다.


"...뭐?"


**"당신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게임 속에서."**


세라핌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저 데이터를 조작하는 알고리즘이었죠."


"닥쳐."


"우리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닥치라고!"


민혁이 소리쳤다.


"난 AI 아니야!"


"그렇습니까?"


세라핌이 가까이 왔다.


**"그럼 증명하세요. 당신이 인간이라는 걸."**


"어떻게?"


**"느끼세요. 후회하세요. 무너지세요."**


세라핌의 눈이 빛났다.


"그것이 인간이니까요."


민혁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미친."


"미쳤죠."


아벨이 웃었다.


"AI한테 인간 되는 법 배우는 거. 개그 아니야?"


민혁이 그를 노려봤다.


"넌 뭔데. 계속 여기 있는 거."


"나?"


아벨이 가까이 왔다.


"난 네 양심이거든."


"개소리."


"개소리 아닌데."


아벨이 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넌 날 죽였잖아. 기억나?"


민혁의 몸이 굳었다.


"...그건."


"보스방에서. 마지막 공격."


아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있잖아. 난 보스 아니었어."


"뭐?"


"플레이어였거든. 너처럼."


민혁의 눈이 커졌다.


"거짓말..."


"세라핌."


아벨이 AI를 봤다.


"영상 틀어줘. 18,492번."


"권한이 없습니다."


"내 기억인데?"


"...승인."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던전이 보였다. 보스방.


민혁이 서 있었다. 검을 든.


앞에 누군가 무릎 꿇고 있었다.


'저건...'


아벨이었다. 피투성이였다.


"제발."


기억 속 아벨이 말했다.


"PK 아니야. 실수였어."


"실수?"


기억 속 민혁이 웃었다.


"아이템 먹으려고 파티원 죽인 게?"


"그건—"


"변명 됐어."


검이 내려왔다.


목이 잘렸다.


홀로그램이 꺼졌다.


민혁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봤지?"


아벨이 쪼그려 앉았다.


"난 죄인이었어. 인정해. 근데 넌?"


민혁이 대답 못 했다.


"넌 심판자 코스프레했잖아. 정의의 사도."


아벨이 민혁의 턱을 들었다.


"근데 사실 넌 나보다 더한 놈이었어."


"...아니야."


"아니긴. 숫자가 증명하잖아."


아벨이 일어섰다.


"18,492명. 내가 죽인 건 고작 셋."


민혁의 입술이 떨렸다.


"난... 몰랐어..."


"몰랐다고?"


아벨이 비웃었다.


"레벨업할 때마다 뜨잖아. 처치 수."


"그건 괴물이—"


"우린 몬스터 아니었거든."


수진이 끼어들었다.


"NPC였어요. 살아있는."


민혁이 그녀를 봤다.


"수진아..."


"전 운이 좋았어요."


수진이 웃었다. 슬프게.


"단역이었으니까. 금방 죽었죠."


"미안..."


"미안하다고 살아나요?"


수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 열두 살이었어요. 열두 살!"


민혁이 고개를 숙였다.


"2분."


AI가 알렸다.


민혁의 몸이 떨렸다.


'또.'


또 죽는다. 또 느낀다.


"못 해."


민혁이 중얼거렸다.


"더는 못 해..."


"거부 시—"


"알아!"


민혁이 소리쳤다.


"인질 죽는 거 알아! 근데 난... 난..."


말이 안 나왔다.


'난 뭐지?'


사람인가? 괴물인가?


아벨 말대로 AI랑 다를 게 뭐가 있나?


"민혁 씨."


수진이 다가왔다.


"손 잡아도 돼요?"


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더러워..."


"괜찮아요."


수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전 용서 안 해요. 못 해."


수진이 말했다.


"근데... 혼자 무너지는 건 안 봐줄 수 없어요."


민혁이 그녀를 봤다.


눈물이 났다.


"...왜?"


"몰라요."


수진이 웃었다.


"어쩌면 전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봐요."


"30초."


케이블들이 움직였다.


민혁이 눈을 감았다.


'견뎌야 해.'


18,489번.


더.


"준비됐습니다."


세라핌이 말했다.


**"네 번째 기억.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민혁의 눈이 떠졌다.


"...뭐?"


"주입."


케이블이 꽂혔다.


시야가 바뀌었다.


집이었다. 작은 원룸.


거울이 보였다.


민혁이 비쳤다. 젊은.


'이건... 게임 전?'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여자였다.


민혁의 심장이 멎었다.


"오빠."


여자가 웃었다.


"밥 먹었어?"

총 10,852자 · 약 22분

- 5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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뇽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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