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검이 목을 스쳤다.
아니, 스치지 않았다.
민준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오른발이 반 걸음 물러났다. 마치 오래 연습한 무용수처럼 매끄럽게. 한서진의 검끝이 민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공중에 흩날렸다.
'뭐야, 뭐야, 뭐야!'
민준은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이미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왼손이 허공을 그으며 보라색 마력진을 펼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도 마력이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육각형 문양이 공중에 떠오르며 희미하게 빛났다.
"방어막?"
한서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검이 멈춰 섰다. 날카로운 시선이 민준의 얼굴을 훑었다.
"아니... 이건..."
한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은 채 한 발짝 옆으로 이동했다. 민준의 몸도 따라 움직였다. 자동으로.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정확한 각도로.
"너... 진짜 아벨리우스가 맞나?"
한서진의 목소리에 의심이 섞여 들어왔다.
민준은 대답하려 했다. '아니에요, 저 그냥 회사원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렸는데 엉뚱한 말이 나왔다.
"짐을 의심하는가."
차갑고 낮은 목소리. 민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민준의 성대에서 나오긴 했는데 음색이 달랐다. 더 깊고, 더 위압적이고, 더... 오래된 느낌.
'아, 아니, 잠깐! 내가 말한 거 아닌데!'
민준은 패닉에 빠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런데 몸은 여전히 태연했다. 등은 곧게 펴져 있고, 표정은 차분했으며, 시선은 한서진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서진이 검을 아래로 내렸다. 완전히 거두진 않았지만, 공격 자세는 풀었다.
"눈빛이 이상해."
그가 말했다.
"공포와 살의가 동시에 보여. 마치..."
한서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한 몸에 들어있는 것처럼."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민준이 웃으려 한 게 아니었다. 그냥 올라갔다.
"예리하군."
또 그 목소리가 나왔다. 민준은 자신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느꼈지만 제어할 수 없었다.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제발 그만 좀!'
민준이 내면에서 소리쳤다. 그 순간,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냉소적인 미소가 일그러졌다. 한서진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인격 침식?"
한서진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검을 완전히 내렸다. 민준의 몸은 여전히 경계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공격하지 않았다.
"빙의형 던전 보스인가. 아니면..."
한서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원래 주인과 보스가 따로 있는 건가."
'맞아요! 맞아요! 저 원래 주인 아니에요!'
민준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몸속 어딘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낮고 차가운 음성. 민준의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네가 떠들수록 제어가 어려워진다.'*
'누, 누구야?!'
*'누구긴. 너다.'*
'말도 안 돼! 난 강민준이야! 너는 누구야?!'
*'나는 아벨리우스다. 그리고 너이기도 하다.'*
민준의 의식이 아득해졌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소리가 멀어지고, 감각이 무뎌졌다.
그때 한서진이 움직였다.
그는 검을 완전히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제스처.
"일단 진정해."
한서진이 말했다.
"네가 누구든, 지금 상태가 정상은 아니야. 마력 패턴이 계속 흔들리고 있어."
민준의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잠시 물러난 것 같았다.
"나, 나는..."
민준의 진짜 목소리가 나왔다. 떨리고 불안정했지만, 분명 민준의 목소리였다.
"도와줘요..."
한서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네 의지로 말하는 거야?"
"네... 아니, 잠깐..."
민준의 입이 다시 닫혔다.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다시 그 차가운 목소리.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한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엉망이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푸른빛이 도는 유리구슬 같았다.
"마력 측정기야. 던전 보스 분석용이지."
한서진이 구슬을 민준 쪽으로 향했다. 구슬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빛이 일정하지 않았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번갈아 깜빡였다.
"이건..."
한서진의 눈이 커졌다.
"마력 패턴이 두 개야."
구슬이 더 빠르게 깜빡였다. 푸른색, 보라색, 푸른색, 보라색. 마치 두 개의 신호가 충돌하는 것처럼.
"한 몸에 두 개의 마력원. 이건 빙의가 아니라..."
한서진이 중얼거렸다.
"융합?"
민준의 몸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무릎이 꺾였다. 한서진이 재빨리 다가가 민준의 팔을 잡았다.
"야, 정신 차려."
"으으..."
민준이 신음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물러서라, 이 몸은 내 것이다.'*
'아니야, 내 몸이야! 돌려줘!'
*'네 몸이 맞다. 그리고 내 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다.'*
'말도 안 돼! 난 너를 모른다고!'
*'모를 리 없다. 네 기억 속에 내가 있다. 네 본능 속에 내가 있다. 네 두려움 속에 내가 있다.'*
민준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주변 풍경이 뒤틀렸다. 한서진의 얼굴이 여러 개로 겹쳐 보였다. 아니, 겹쳐진 게 아니라... 시간이 여러 겹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였다.
젊은 한서진. 아니, 다른 누군가.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검을 든 채 민준을... 아니, 아벨리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엔 네가 죽을 차례다, 아벨리우스."*
환영 속 기사가 말했다. 목소리가 한서진과 비슷했지만 더 거칠었다.
*"인류를 위해, 네 존재를 지워주겠다."*
환영이 사라졌다. 민준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한서진이 민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야! 정신 차려!"
"하아, 하아..."
민준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방금... 뭘 본 거야?"
한서진이 물었다.
"당신... 당신이..."
민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에... 아벨리우스를..."
한서진의 표정이 굳었다.
"뭐?"
"당신이... 아니, 당신 같은 누군가가... 아벨리우스를 죽이려..."
"말도 안 돼."
한서진이 민준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난 아벨리우스를 만난 적 없어. 역사 기록으로만 알지."
"하지만..."
민준의 입이 다시 멋대로 열렸다.
"한세리온."
차갑고 확신에 찬 목소리. 아벨리우스였다.
"네 전생의 이름이다."
한서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라고?"
"기억하지 못하는가. 짐의 심장에 검을 꽂았던 그날을."
한서진이 뒤로 물러났다. 손이 자동으로 검 손잡이로 향했다.
"헛소리..."
"헛소리가 아니다."
민준의 몸이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지 않았다. 완벽하게 균형을 잡았다.
"네 혼에 새겨진 검술. 네 본능에 남은 살의. 모두 그날의 흔적이다."
"닥쳐."
한서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머리에 이상한 생각 집어넣지 마."
"생각이 아니다. 진실이다."
민준의 눈빛이 변했다. 동공이 보랏빛으로 빛났다. 한서진이 검을 뽑았다.
"더 가까이 오면 진짜 벤다."
"해봐라."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완벽한 냉소.
"하지만 네 검은 짐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전생에도 그랬듯이."
한서진이 검을 휘둘렀다. 빠른 베기. 민준의 목을 노렸다.
민준의 몸이 움직였다.
아니, 폭발했다.
보라색 마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서진의 검이 마력 장벽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동시에 민준의 주변 바닥이 갈라졌다. 거미줄처럼 금이 퍼져나가며 돌바닥이 들썩였다.
"크윽!"
한서진이 뒤로 날아갔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착지했다. 검을 땅에 박아 중심을 잡았다.
"이건... 본능적 방어 반응이야."
한서진이 중얼거렸다.
"제어하지 못하고 있어. 완전히 폭주 상태잖아."
민준의 몸에서 마력이 계속 흘러나왔다. 제멋대로. 통제 불가능하게. 보라색 빛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며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그만, 그만 좀 해!'
민준이 내면에서 소리쳤다.
'이러다 진짜 사람 죽여!'
*'죽이지 않는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대답했다.
*'저자는 강하다. 이 정도론 죽지 않는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조종당하고 있다고!'
*'조종이 아니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섞였다.
*'네 생존 본능이 나를 불렀다. 네가 원한 것이다.'*
'거짓말! 난 그런 거 원한 적 없어!'
*'의식적으론 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무의식은 달랐다. 네 깊은 곳에서 울부짖었다. 살고 싶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누군가 대신 싸워주길 바란다고.'*
민준은 할 말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두려움 앞에서 누구나 도망치고 싶어 한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너는 약하다. 그리고 그게 잘못은 아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일단 진정해라. 네 감정이 흔들릴수록 내 힘도 불안정해진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민준이 심호흡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하지만 폐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호흡 리듬이 엉망이었다.
한서진이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엔 자세가 달랐다. 검을 거꾸로 쥐고, 칼날을 아래로 향했다.
"제압술로 간다."
그가 낮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두면 성 전체가 무너질 것 같아서."
한서진이 바닥을 박찼다. 엄청난 속도로 민준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아니라 몸 전체가 무기였다. 어깨로 들이받으려는 자세.
민준의 몸이 반응했다. 오른손이 허공을 그었다. 새로운 마력진이 펼쳐졌다. 이번엔 육각형이 아니라 원형이었다. 회전하는 보라색 원.
"공간 왜곡?"
한서진의 눈이 커졌다.
"설마 S급 마법을..."
원 안쪽 공간이 일그러졌다. 한서진의 몸이 느려졌다. 아니, 느려진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늘어난 것 같았다. 1미터를 가는 데 10미터를 가야 하는 것처럼.
"이건..."
한서진이 중얼거렸다.
"시공간 마법이잖아. 이거 쓸 수 있는 마법사가 전 세계에 다섯 명밖에..."
민준의 입이 열렸다.
"짐은 그 다섯 명보다 먼저 이 마법을 만들었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인간들이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한서진이 공간 왜곡 안에서 몸부림쳤다. 검을 휘둘렀지만 허공만 갈랐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제길..."
그때 민준의 머릿속에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차가운 푸른색 반투명 창. 관찰자의 창.
[오류: 예상 시나리오 이탈 감지]
[인격 융합률: 58%]
[경고: 융합률 60% 초과 시 원본 인격 소멸 위험]
민준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원본 인격 소멸?'
[강민준 인격 잔존율: 42%]
[아벨리우스 인격 우세]
[권장 사항: 즉시 분리 프로토콜 실행]
'뭐야, 이게 무슨...'
민준이 패닉에 빠졌다. 그 순간 몸의 제어권이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자신이 투명 상자 안에 갇힌 것 같았다. 밖은 보이는데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민준의 몸이 천천히 한서진에게 다가갔다. 공간 왜곡을 무시하고. 마치 공간 자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이제 끝이다, 한세리온."
완전히 아벨리우스의 목소리. 민준의 흔적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도 네가 지는구나."
한서진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그가 검을 역으로 쥐었다. 칼날을 자신의 손바닥에 댔다. 피가 흘렀다.
"피의 계약, 각성."
한서진의 몸에서 붉은 빛이 폭발했다. 공간 왜곡이 찢어졌다. 그가 민준에게 돌진했다.
두 사람의 주먹이 동시에 날아갔다.
충돌.
폭발.
천장이 무너졌다.
# 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폭발의 중심에서 두 사람이 튕겨나갔다.
한서진은 벽에 등을 부딪혔다. 돌가루가 쏟아졌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민준의 몸은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착지했다. 완벽한 균형. 발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아, 안 돼...'
민준은 자신의 몸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술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투명한 감옥. 그 안에 갇혀 밖을 보는 것만 가능했다.
한서진이 천천히 일어섰다. 팔이 떨렸다. 검을 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대체... 뭐야, 너..."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벨리우스가 맞긴 한 거야?"
민준의 입이 열렸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차갑고 낮은 목소리. 완전히 아벨리우스였다.
"지금 이 몸은 둘이면서 하나다."
한서진이 검을 세웠다. 방어 자세.
"무슨 소리야."
"그대로의 뜻이다."
민준의 발이 앞으로 나아갔다. 천천히. 위압적으로.
"강민준이라는 그릇에 아벨리우스라는 술을 부은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릇과 술이 같은 재료였다."
한서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환생이란 소리야?"
"비슷하지만 다르다."
민준의 손이 허공을 가리켰다. 보라색 마력이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혼의 파편. 그것이 윤회하며 다른 육체에 깃든다. 기억은 사라져도, 본질은 남는다."
"그럼 저 안의 강민준은..."
"**이미 나였다. 처음부터.**"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잔혹한 미소.
"다만 기억하지 못했을 뿐."
'거짓말이야!'
민준이 내면에서 소리쳤다.
'난 너랑 달라! 난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
*'평범?'*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비웃었다.
*'네가 왜 다른 사람들보다 마력 적응도가 높았는지, 왜 전투 본능이 남달랐는지 생각해봤나?'*
'그건... 그냥 운이...'
*'운이 아니다. 혼에 새겨진 경험이다. 수천 번의 전투. 수백 번의 죽음. 그 모든 것이 네 무의식에 남아 있다.'*
민준은 할 말을 잃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한서진이 검을 내렸다.
"그럼 대화는 의미 없겠네."
그가 검을 칼집에 넣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도망치는가?"
"도망이 아니야."
한서진이 민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전략적 후퇴지. 지금 네 상태로는... 이기든 지든 의미가 없어."
"무슨 뜻이냐."
"**너도 모르잖아. 지금 네가 뭔지.**"
한서진의 말에 아벨리우스가 잠시 멈췄다.
"네 안의 강민준이 사라지면, 넌 완전체가 되는 거야? 아니면 그냥 껍데기만 남는 거야?"
침묵.
민준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답 못 하는 거야?'
민준이 물었다.
*'...모른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불확실함이 섞였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한서진이 뒤로 물러났다.
"다음에 올 때는 '진짜 너'와 싸우고 싶으니까."
그가 손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푸른 빛의 원이 생겼다. 포털.
"그때까지 답 찾아놔."
한서진이 포털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사라졌다.
민준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섰다.
'뭐야... 왜 안 쫓아가?'
*'쫓아봤자 의미 없다.'*
아벨리우스가 대답했다.
*'저자는 이미 성 밖으로 나갔다. 여기선 내 힘이 절대적이지만, 밖에선 다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네가 선택해라.'*
'뭘?'
*'나와 융합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민준의 시야에 다시 푸른 창이 떠올랐다.
관찰자의 창.
[융합률: 61%]
[경고: 임계점 초과]
[강민준 인격 잔존율: 39%]
[추정 소멸 시간: 47분]
'47분?'
민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47분 후에 내가... 사라진다고?'
[선택지 제공]
[A: 융합 수용 - 아벨리우스와 완전히 하나가 됨. 강민준의 기억과 감정은 보존되나 주도권 상실]
[B: 강제 분리 - 두 인격을 물리적으로 분리. 성공률 23%. 실패 시 양쪽 모두 소멸]
[C: 제3의 길 - ??? (조건 미달)]
'제3의 길? 그게 뭔데?'
[정보 부족. 현재 시스템으로 분석 불가]
[권장 사항: A 선택]
'A를 선택하라고? 그럼 난 사라지는 거잖아!'
[주도권은 상실하나 존재 자체는 유지됨]
[완전한 소멸과는 다름]
'그게 그거야!'
민준이 패닉에 빠졌다. 손이 떨렸다. 아니, 손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아벨리우스가 말했다.
*'선택해라. 아니면 내가 선택하겠다.'*
'잠깐, 잠깐만! 생각 좀 하게!'
*'생각할 시간은 이미 충분했다.'*
민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걸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왕좌의 방.'*
'왕좌의 방?'
*'내 힘의 핵심이 있는 곳. 거기서 융합을 완성한다.'*
'안 돼! 난 아직 결정 안 했어!'
*'네 무의식은 이미 결정했다.'*
아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살고 싶다고. 힘을 원한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그건...'
민준은 부정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복도가 점점 넓어졌다. 천장이 높아졌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보랏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10미터는 족히 되는 문. 표면에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민준의 손이 문을 향해 뻗어졌다. 손바닥이 문에 닿았다.
마법진이 빛났다.
문이 열렸다.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보랏빛 빛이 희미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민준의 발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봤다.
왕좌.
거대한 검은 돌로 만들어진 왕좌. 등받이에는 용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팔걸이는 해골 모양이었다.
왕좌 뒤편으로 거대한 수정이 떠 있었다. 보랏빛 수정. 그 안에서 무언가가 맥박치고 있었다.
'저게... 뭐야?'
*'내 심장.'*
아벨리우스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내 마력의 핵심. 육체가 사라진 후에도 남은 것.'*
수정이 점점 밝게 빛났다. 맥박이 빨라졌다.
민준의 몸이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안 돼, 안 돼!'
민준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몸은 듣지 않았다.
한 발. 또 한 발.
왕좌가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폐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발테온이었다.
그는 피투성이였다. 갑옷이 찢어져 있었다. 한쪽 팔을 질질 끌고 있었다.
"폐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민준의 몸이 돌아섰다.
"물러서라, 발테온."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
"이건 방해받을 수 없다."
"하지만..."
발테온이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몸이... 버티지 못합니다... 융합은... 너무 위험..."
"네가 뭘 안다고."
민준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 보라색 마력이 발테온을 밀쳐냈다.
발테온이 벽에 부딪혔다.
"크윽!"
그가 신음했다. 피를 토했다.
'안 돼! 발테온!'
민준이 내면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발테온은 내 편이야! 날 지키려고 한 거라고!'
*'알고 있다.'*
아벨리우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융합이 완성되어야 한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
아벨리우스가 침묵했다.
민준은 깨달았다.
'너도... 두려운 거야?'
*'무슨 소리냐.'*
'두렵잖아. 불완전한 채로 남는 게. 나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는 거야.'
*'닥쳐라.'*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에 균열이 생겼다.
'너도 나만큼 불안한 거야.'
민준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만...'*
'혼자는 무섭잖아. 나도 그래. 우린 똑같아.'
순간, 민준의 몸이 흔들렸다.
제어권에 틈이 생겼다.
민준은 재빨리 그 틈을 파고들었다. 오른손 검지. 겨우 그것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검지가 구부러졌다.
왕좌의 팔걸이를 향해.
'안 앉는다. 절대.'
*'이 미련한 놈!'*
아벨리우스가 분노했다.
*'융합하지 않으면 우리 둘 다 사라진다!'*
'그럼 같이 사라지자.'
민준이 웃었다. 쓴웃음.
'회사 다닐 때도 그랬어. 혼자 책임지는 것보단, 차라리 팀 전체가 망하는 게 나았어. 최소한 억울하진 않으니까.'
*'제정신이냐!'*
'아니, 제정신 아니야. 나 원래 이래.'
민준의 다리가 뒤로 물러났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왕좌에서 멀어졌다.
수정의 빛이 흔들렸다. 맥박이 불규칙해졌다.
[경고: 융합 프로세스 중단 감지]
[양쪽 인격 모두 붕괴 위험]
[생존 확률: 8%]
'8%면 충분해.'
민준이 생각했다.
'복권 당첨보단 높잖아.'
*'미쳤구나, 정말로.'*
아벨리우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황이 섞였다.
*'이러다 진짜 죽는다!'*
'그럼 죽는 거지, 뭐.'
민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진짜 민준의 의지로.
"어차피 퇴사는 하고 싶었어."
그 순간.
수정이 폭발했다.
보라색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민준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니, 끌려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뭐야, 이게!'
*'시스템이... 개입하고 있다!'*
아벨리우스가 소리쳤다.
*'이건 내 힘이 아니다!'*
민준의 시야에 푸른 창이 여러 개 떠올랐다. 동시에. 겹쳐서.
[긴급: 시스템 권한 충돌 발생]
[알 수 없는 제3자 개입 감지]
[게임 마스터 권한 일부 상실]
[강제 이벤트 발동: ???]
창들이 깨졌다.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의 것도, 아벨리우스의 것도 아닌.
"재밌네."
차갑고, 즐거워하는 목소리.
공간이 일그러졌다. 왕좌의 방 전체가 뒤틀렸다.
관찰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손에 든 태블릿이 깨져 있었다.
"야, 이거..."
관찰자가 중얼거렸다.
"내 시나리오 아닌데?"
민준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릎을 짚었다. 온몸이 떨렸다.
"뭐가... 무슨 일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왕좌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민준도 아니고, 아벨리우스의 환영도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인물.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후드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그 인물이 말했다.
"강민준. 아니, 아벨리우스."
목소리가 울렸다. 공간 전체가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후드 아래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두 개의 눈.
"우리 셋 모두."
민준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셋?'
관찰자가 뒤로 물러났다.
"이건... 설정에 없는 캐릭터야..."
검은 로브의 인물이 천천히 일어섰다.
"설정?"
그가 웃었다. 낮고 불쾌한 웃음.
"이 세계에 설정 같은 건 없어."
손을 들어 올렸다. 후드가 벗겨졌다.
민준은 숨이 멎었다.
그 얼굴.
자신의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과 아벨리우스의 중간쯤 되는 얼굴.
한쪽 눈은 민준의 갈색. 한쪽 눈은 아벨리우스의 은색.
"만나서 반갑다."
그가 민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네가 될 뻔했던 존재야."
민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관찰자의 창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오류오류오류오류오류]
[시스템 재부팅 필요]
[경고: 게임 마스터 권한 완전 상실]
[이 시나리오는 더 이상 제어 불가능]
발테온이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설마... 원본이신 겁니까..."
검은 로브의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첫 번째 융합의 결과물."
그가 민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강민준과 아벨리우스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을 때 태어날 뻔했던."
또 한 걸음.
"하지만 실패했지. 그래서 나는 이 틈새에 갇혔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넌... 뭐야..."
"좋은 질문이야."
그가 민준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두 눈이 마주쳤다.
갈색과 은색.
"나는 네가 두려워하는 미래야."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민준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간절히 원하는 힘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