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아이들
주인공: 강민우
동굴 입구를 빠져나온 순간, 민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이 따갑다.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지 모르겠다.
"으으, 눈부셔."
준호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서연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일단 해안가로 가자."
민우가 앞장섰다. 세 사람은 바위투성이 언덕을 따라 내려갔다.
발밑에서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춥네.'
민우는 팔을 감쌌다. 옷은 여전히 낡고 더러웠다.
해안가에 도착하자 녹슨 어선 한 척이 모래밭에 기울어져 있었다.
"저거… 쓸 수 있을까?"
준호가 다가가 선체를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엔진부터 확인해봐."
"어, 알았어."
준호가 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서연은 밧줄을 풀며 주변을 살폈다.
민우는 바다를 보고 섰다.
'여기서 나가면… 뭐가 있을까.'
섬 밖 세상.
기억나는 건 회색 건물과 차가운 복도뿐이었다.
"민우야!"
준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엔진 완전 망가졌어. 부품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부품은 어디서 구해."
"그게… 일단 뜯어봐야 알겠어. 시간 좀 걸릴 거야."
민우는 한숨을 삼켰다.
"괜찮아. 천천히 해."
'괜찮을 리가 없는데.'
준호는 공구함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서연은 밧줄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민우 오빠, 저기 숲 좀 볼게요."
"왜?"
"물 찾으려고요. 목 말라서."
민우는 서연의 얼굴을 봤다.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혼자 가지 마. 위험해."
"금방 올게요. 멀리 안 가요."
서연은 대답도 듣지 않고 숲으로 걸어갔다.
민우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준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괜찮아?"
"응, 이거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배선만 다시 연결하면…"
"그게 아니라."
준호가 손을 멈췄다.
"뭐?"
"몸. 괜찮냐고."
"…아, 응. 괜찮아."
준호는 다시 공구를 집었다.
민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들 괜찮다고만 하네.'
그는 서연이 사라진 숲을 바라봤다.
'어른이라도 있으면…'
아니, 그건 아니다.
어른은 믿을 수 없다.
민우는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
서연은 나무 사이를 걸었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공기가 차갑고 축축했다.
'물소리 안 들리는데…'
그때, 시야 끝에서 뭔가 반짝였다.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빛이었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달빛 같은 빛.
'저게 뭐지?'
호기심이 발을 움직였다. 서연은 빛을 따라 숲 깊숙이 들어갔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다. 서연은 손으로 가지를 치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빛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작은 공터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숨을 멈췄다.
여우였다.
아니, 여우 모양을 한 무언가.
온몸이 은빛으로 빛나는, 투명한 듯 말듯 한 생명체.
"…뭐야."
서연이 중얼거렸다.
여우는 서연을 바라봤다. 동그란 눈이 깜빡였다.
두렵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서연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연의 손끝이 여우의 머리에 닿았다.
따뜻했다.
온기가 손에서 팔로, 팔에서 가슴으로 퍼졌다.
'이게… 뭐지.'
여우는 눈을 감았다.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서연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우를 쓰다듬었다.
"넌… 누구야?"
여우는 대답 대신 빛을 발했다. 온몸이 더 밝게 빛났다.
서연은 손을 떼지 않았다. 빛이 눈부시지 않았다.
'따뜻해.'
여우가 몸을 일으켰다. 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
서연이 물었지만 여우는 멈추지 않았다.
'따라오라는 건가.'
서연은 망설이다 발을 뗐다. 여우는 천천히 숲을 헤쳐 나갔다.
나뭇가지가 스스로 비켜나는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에 무너진 돌기둥이 보였다.
제단이었다.
이끼로 뒤덮인 돌판 위에 낡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야…"
서연이 다가가 손으로 이끼를 쓸어냈다. 글자가 드러났다.
읽을 수 없는 문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의미가 느껴졌다.
'계약… 각성… 정령…'
여우가 제단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빛을 뿜어냈다.
공중에 영상이 떠올랐다.
사람과 동물 모양의 빛들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빛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눈부신 섬광을 만들어냈다.
'이게… 각성?'
영상 속 사람의 몸에서 문양이 피어올랐다. 은빛 무늬가 팔과 목을 타고 퍼졌다.
여우가 낮게 울었다. 영상이 바뀌었다.
회색 건물. 차가운 복도. 주사기를 든 손.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건…'
서연의 손이 떨렸다.
'우리가 당한 거잖아.'
영상 속 아이 중 하나가 일어났다.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눈이 핏빛으로 변했다.
각성자.
하지만 첫 번째 영상과는 달랐다. 따뜻함이 없었다.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여우가 다시 울었다. 영상이 사라졌다.
서연은 여우를 봤다.
"그러니까… 원래 각성은 너희랑 계약하는 거였어?"
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사람들이 억지로 각성하는 방법을 만들어냈고."
여우가 고개를 숙였다. 슬픈 것처럼 보였다.
서연은 제단에 손을 짚었다.
'정령과의 계약…'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할 수 있어?"
여우가 서연을 올려다봤다.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근데 넌… 누구야? 이름은?"
여우가 빛으로 글자를 그렸다.
'루나'
"루나…"
서연이 이름을 불렀다. 루나가 꼬리를 흔들었다.
"루나는… 왜 나한테 이걸 보여준 거야?"
루나가 서연의 손에 코를 비볐다.
따뜻함이 다시 전해졌다.
'…재능이 있어서?'
서연은 자신의 손을 봤다. 평범한 손이었다.
"나 같은 애가?"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단 위에서 빙글 돌았다.
빛이 모여들었다.
공중에 작은 원이 그려졌다.
계약의 문양.
"이걸… 받으면 되는 거야?"
루나가 끄덕였다.
서연은 손을 뻗었다. 손끝이 빛에 닿았다.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으윽!"
서연이 비틀거렸다. 루나가 재빨리 뛰어내려 서연을 받쳤다.
빛이 팔을 타고 올라갔다.
은빛 문양이 피부 위에 새겨졌다.
아프지 않았다.
따뜻했다.
빛이 점점 커지며 서연의 몸을 감쌌다.
숲 전체가 밝아졌다.
나무들이 술렁였다.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
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뭐야, 저거."
숲 쪽에서 빛이 솟아올랐다.
은빛 기둥이 하늘로 뻗어나갔다.
준호도 손을 멈췄다.
"저거… 서연이 간 쪽 아냐?"
민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서연아!"
준호가 뒤따라 뛰었다.
두 사람은 숲으로 뛰어들었다.
가지가 얼굴을 긁었다.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서연이 위험한 건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빛기둥이 사그라들었다.
민우는 숨을 헐떡이며 공터에 도착했다.
서연이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서연아!"
민우가 달려갔다. 준호도 뒤따랐다.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이전과 달랐다.
은빛이 감돌았다.
"오빠…"
서연의 팔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민우는 그 문양을 보며 멈칫했다.
'이게 뭐야.'
"다쳤어?"
"아니요. 괜찮아요."
서연이 일어섰다. 발걸음이 흔들렸다.
민우가 손을 뻗어 잡았다.
"괜찮긴. 얼굴 창백해."
"진짜 괜찮아요. 그냥… 좀 어지러워서."
준호가 서연의 팔을 봤다.
"이거… 각성 문양 아냐?"
"응."
서연이 고개를 끄덄였다. 루나가 서연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여우.
준호가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저거!"
"정령이래요. 루나."
루나가 꼬리를 흔들었다. 준호는 여전히 경계했다.
민우는 루나를 봤다.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령이랑… 계약했다고?"
"네. 루나가 보여줬어요. 원래 각성은 정령이랑 하는 거였대요."
서연이 제단을 가리켰다.
"여기 제단이 있었어요. 루나가 날 이끌었고…"
"그래서 빛이 터진 거구나."
준호가 제단을 살폈다.
"이거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누가 만든 거야?"
"몰라요. 근데 문자가 있었어요. 옛날 사람들이 정령이랑 같이 살았대요."
민우는 서연의 팔을 다시 봤다.
'강제 각성이랑 다르네.'
시설에서 봤던 각성자들.
검은 문양, 핏빛 눈, 비명.
서연은 달랐다.
"아파?"
"아니요. 따뜻해요."
서연이 미소 지었다. 루나가 서연 옆에 바짝 붙었다.
민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때,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해안 쪽이었다.
"뭐야, 저거."
준호가 중얼거렸다.
민우는 달리기 시작했다.
***
어선이 불타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민우는 그 앞에 서서 주먹을 쥐었다.
"누가…"
준호가 헐떡이며 도착했다.
"엔진실이… 완전히 날아갔어."
"수리 가능해?"
"불가능해. 배 자체가 끝났어."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탈출 수단이 없어졌어.'
서연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누가 이런 짓을…"
"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돌아봤다.
남자가 서 있었다.
스물 중반쯤 돼 보이는 얼굴. 낡은 전술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총을 멨다.
민우는 그 얼굴을 알아봤다.
"…지우 형?"
한지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민우야."
"형이… 여기 왜…"
"살아남으려고."
지우가 어선을 봤다.
"너희도 탈출하려던 거지? 배 타고."
준호가 앞으로 나섰다.
"형이 왜 배를 부쉈어요?"
"너희 못 나가게."
"왜요!"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신호탄이었다.
민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형… 설마."
"미안해."
지우가 신호탄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붉은 빛이 폭발하며 하늘을 물들였다.
준호가 소리쳤다.
"왜 이래요! 우린 형 동료잖아요!"
"동료?"
지우가 웃었다.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동료는 날 버렸어. 1년 전에."
"뭐?"
"탈출할 때 날 두고 갔잖아. 기억 안 나?"
민우는 숨이 막혔다.
'그때…'
1년 전.
시설 폭동.
혼란 속에서 민우는 준호와 서연만 챙겼다.
지우는 다른 구역에 있었다.
'찾을 시간이 없었어.'
지우가 말을 이었다.
"난 혼자 빠져나왔어. 총 맞고, 개처럼 기어서."
지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군부가 날 주웠어. 치료해줬고."
"그래서 걔네 편을 드는 거예요?"
준호가 소리쳤다.
"그게 말이 돼요?"
"말이 되든 안 되든, 난 살아야 해."
지우가 총을 내렸다. 겨누지는 않았다.
"너희가 탈출하면 난 끝이야. 군부는 날 처리할 거고."
민우는 한 걸음 다가섰다.
"형. 우리랑 같이 가요."
"어딜?"
"육지로. 같이 도망치면—"
"안 돼."
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군부는 끝까지 쫓아와. 너희도 알잖아."
멀리서 헬기 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벌써…"
"5분 안에 온다."
지우가 시계를 봤다.
"숨을 곳도 없어. 이 섬엔."
민우는 주먹을 쥐었다.
'어떻게든 해야 돼.'
루나가 서연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서연은 루나를 안아 올렸다.
"오빠, 우리…"
"일단 숲으로."
민우가 결정했다.
"헬기 피해서 숨자."
"그게 무슨 소용이야."
지우가 비웃었다.
"서치라이트로 다 뒤질 텐데."
준호가 민우의 팔을 잡았다.
"민우야, 저 형 말이 맞아. 숲에 숨어봤자…"
"그럼 뭐 어쩌라고!"
민우가 소리쳤다.
"여기 서서 잡히라고?"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민우는 지우를 봤다.
"형이 우릴 넘기면 뭐가 달라져요?"
"내가 산다."
"그게 다예요?"
"그게 다야."
지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희한텐 미안하지만, 난 더 이상 동료 따위 안 믿어."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어른들이랑 똑같네.'
시설의 연구원들.
민우를 실험체로 보던 눈빛.
지우의 눈에서 똑같은 게 보였다.
'날 살리려고 남을 버리는 거.'
"형은 비겁해요."
민우가 말했다.
지우는 웃지 않았다.
"그래. 난 비겁해."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서치라이트였다.
헬기가 해안 위로 떠올랐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모래가 날렸다.
확성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견했다. 3명. 한지우도 확인."
민우는 뒤를 돌아봤다.
숲까지 50미터.
'뛸 수 있어.'
"서연아, 준호 형. 뛴다!"
민우가 달렸다.
서연과 준호도 뒤따랐다.
루나가 서연의 품에서 뛰어내려 앞장섰다.
"멈춰!"
확성기가 울렸다.
총성이 터졌다.
모래가 튀었다. 민우는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숲이 눈앞이었다.
그때, 앞에서 빛이 번쩍였다.
민우는 발을 멈췄다.
숲 입구에 사람이 서 있었다.
전술복을 입은 군인.
총을 들고 있었다.
"꼼짝 마."
군인이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민우는 숨을 참았다.
'앞도 막혔어.'
뒤에선 헬기가 내려왔다.
지우가 천천히 걸어왔다.
"끝이야, 민우야."
민우는 고개를 돌렸다.
서연이 떨고 있었다. 준호는 이를 악물었다.
루나가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잡힐 순 없어.'
민우는 주먹을 쥐었다.
각성 없이 싸우는 건 자살이었다.
그래도.
'한 명이라도 보내야 돼.'
민우가 앞으로 나섰다.
"서연이랑 준호 형은 보내주세요."
"민우야!"
준호가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형은 서연이 데리고 가요. 제가 시간 벌게요."
"그게 무슨—"
"빨리요!"
민우가 외쳤다.
군인이 총을 겨눴다.
"움직이지 마. 쏜다."
민우는 움직였다.
군인을 향해 달렸다.
총성이 울렸다.
민우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총알이 어깨를 스쳤다.
뜨거웠다.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놈만 제압하면—'
그때, 서연이 소리쳤다.
"오빠, 안 돼!"
루나가 빛을 내뿜었다.
루나가 빛을 내뿜었다.
은빛 섬광이 군인의 눈을 덮쳤다.
"으윽!"
군인이 비틀거렸다. 총구가 하늘로 향했다.
민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군인의 다리를 걸었다. 군인이 넘어졌다.
총이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민우는 총을 집어 들었다.
"움직이지 마!"
민우가 지우를 향해 총을 겨눴다.
손이 떨렸다. 방아쇠가 무거웠다.
'쏠 수 있어?'
지우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쏘지 못해."
"…왜요?"
"넌 그런 애 아니잖아."
지우가 한 걸음 다가왔다.
민우는 총구를 낮추지 않았다.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뜨겁다기보다 시렸다.
"형, 한 발짝만 더 오면…"
"쏴봐."
지우가 또 한 걸음.
민우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총성은 없었다.
안전장치가 걸려 있었다.
"처음 쥐어보지?"
지우가 총을 빼앗았다.
민우는 저항하지 못했다. 힘이 빠졌다.
'망했어.'
헬기가 완전히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군인 두 명이 뛰어내렸다.
"확보!"
한 명이 준호를 제압했다. 준호가 몸부림쳤다.
"놓으라고!"
"입 닥쳐!"
군인이 준호의 머리를 모래에 눌렀다.
서연은 루나를 끌어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루나…"
루나가 다시 빛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엔 약했다.
'힘을 너무 많이 썼구나.'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또 다른 군인이 서연에게 다가갔다.
"정령 확보. 각성자도 함께."
"싫어!"
서연이 소리쳤다.
루나가 으르렁거렸다. 군인이 멈칫했다.
"위험한데요, 저거."
"마취총 써."
군인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민우는 달려들었다.
"서연이한테 손대지 마!"
지우가 민우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
"놔요!"
"더 버티면 다친다고."
민우는 지우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지우의 힘이 더 셌다.
'각성자… 맞네.'
지우의 눈이 잠깐 붉게 빛났다.
탁.
마취총이 발사됐다.
루나가 쓰러졌다.
"루나!"
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루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작은 옆구리가 가까스로 움직였다.
'살아는 있어.'
군인이 루나를 집어 들었다. 루나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서연이 울음을 터뜨렸다.
"루나… 돌려줘요…"
"각성자 확보. 정령도."
군인이 무전을 쳤다.
헬기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내렸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민우는 그 얼굴을 알았다.
'박 박사…'
시설의 연구원.
민우에게 주사를 놓던 손.
박 박사는 민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 17번."
민우는 입맛이 썼다.
"전 민우예요."
"그래, 민우."
박 박사가 다가왔다.
"1년이나 잘 살았구나. 추적 칩이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뭐?"
"목 뒤에 심어뒀잖아. 잊었어?"
민우의 손이 목덜미로 갔다.
작은 혹 같은 게 만져졌다.
'이게… 칩?'
예전부터 가끔 아팠다. 잠잘 때 베개에 눌리면 욱신거렸다.
민우는 그게 흉터인 줄 알았다.
"칩 신호가 사라졌다가 오늘 다시 잡혔어. 서연이가 각성하면서 전파가 강해진 모양이야."
박 박사가 서연을 봤다.
"자연 각성이라니. 정말 귀한 샘플이 생겼네."
서연이 뒤로 물러났다.
"저한테… 뭐 하려고…"
"검사. 걱정 마. 아프지 않게 해줄게."
"거짓말!"
서연이 소리쳤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근데 주사 맞고 언니가 죽었어요!"
박 박사의 미소가 사라졌다.
"사고였어. 부작용은 어쩔 수 없었고."
"사고요?"
준호가 모래를 뱉으며 말했다.
"사람 죽여놓고 사고라고요?"
"입 다물어."
군인이 준호의 옆구리를 찼다.
준호가 신음했다.
민우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또 시작이야.'
실험실의 냄새가 났다. 소독약과 피가 섞인.
박 박사가 민우의 턱을 잡았다.
"넌 특히 귀하지. 강제 각성 실패 케이스인데도 1년이나 버텼어."
"손 치워요."
"몸 상태 확인 좀 할게."
박 박사의 손이 민우의 목을 짚었다. 맥박을 재는 것 같았다.
민우는 몸을 비틀었다. 박 박사의 손이 떨어졌다.
"여전히 예민하네."
"당연하죠. 전 실험 쥐 아니니까."
"그래도 넌 우리 덕분에 살았어."
박 박사가 말했다.
"부모 없는 애들 데려다 먹이고 재우고. 그것도 공짜로."
민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공짜라고?'
매일 밤 비명 소리.
복도를 지나가는 들것.
흰 천으로 덮인 작은 몸.
"그게 공짜였냐고요."
준호가 말했다.
"애들 죽여놓고."
박 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희생 없는 발전은 없어. 넌 몰라도 돼. 어차피 애송이니까."
"애송이…"
준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민우는 준호를 봤다. 준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형, 각성하려는 거야?'
준호의 손이 떨렸다. 손톱 밑에서 검은 기운이 번졌다.
군인이 총을 겨눴다.
"움직이지 마!"
"쏘지 마."
박 박사가 손을 들었다.
"저 애도 데려가야 돼. 불면증 각성자는 드물거든."
준호가 이를 드러냈다.
"난 안 가."
"선택권 없어."
박 박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군인이 준호의 뒤통수를 쳤다. 준호가 쓰러졌다.
"형!"
민우가 소리쳤다.
지우가 민우를 더 세게 붙잡았다.
"가만히 있어."
"형도 똑같잖아요! 저 사람들이랑!"
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우는 지우의 얼굴을 봤다. 지우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형도… 괴로운 거야?'
아니, 괴로우면 왜 배신을 했냐고.
민우는 입을 열었다.
"형은 시설에서 뭘 당한 거예요?"
지우의 손에 힘이 빠졌다.
"…상관없어."
"있어요. 형도 피해자잖아요."
"피해자면 뭐 어쩌라고."
지우가 민우를 밀쳤다.
"피해자는 살 권리도 없어?"
민우는 넘어지지 않았다. 모래를 밟으며 버텼다.
"살 권리는 있죠. 근데 남을 팔아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지우는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넌 아직 어려서 몰라."
"뭘요?"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 누군가는 죽어야 누군가 살아."
지우가 박 박사를 봤다.
박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자연의 법칙이지."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뭐?"
"그건 법칙이 아니라 변명이에요."
민우가 말했다.
"형이 겁이 나서 우릴 판 거잖아요. 법칙 같은 건 없어요."
지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민우는 계속했다.
"형이 무서운 건 이해해요. 저도 무서우니까. 근데 그렇다고 우릴 넘기는 건…"
"닥쳐."
지우가 돌아섰다.
박 박사가 손뼉을 쳤다.
"좋아. 이제 출발하자. 시간 없어."
군인들이 움직였다.
한 명이 민우의 팔을 비틀었다. 민우는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서연이 끌려갔다. 루나는 군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준호는 들것에 실렸다.
민우은 발버둥 쳤다.
"놔요! 놔달라고!"
"시끄러."
군인이 민우의 입을 막았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기 시작했다. 바람이 더 거세졌다.
민우는 숨이 막혔다.
'이대로 끝이야?'
시설로 돌아가면 끝이다.
다시는 나올 수 없다.
서연도, 준호도, 루나도.
모두 실험대 위에서 죽는다.
민우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니, 뜨겁다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