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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게으름뱅이

약 13분

천하제일 게으름뱅이

주인공: 나태운

귀찮네.


나태운은 아미파 장로전 처마 밑에 등을 기댄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앞에서 세 명의 아미파 검객이 칼춤을 추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만들어내는 궤적은 아미파 삼재검진이라 불리는 합격진법이었지만, 나태운의 눈에는 그저 느릿한 체조처럼 보였다.


"천하의 절대검성이라더니 이게 뭐냐! 우리 아미의 검법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검객의 목이 반쯤 꺾였다. 나태운이 손가락 하나 까딱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울어진 검기가 스쳐지나갔을 뿐.


"시끄러워."


나태운은 하품을 했다. 입을 다물기도 귀찮아 벌린 채로.


아미파 장문인 묘선진인이 노한 얼굴로 전각 위에서 내려왔다. 칠십 평생 수련한 내공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주변의 기와가 들썩였고, 마당의 자갈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네놈이 감히 우리 아미에—"


"아, 모라."


나태운의 손이 움직였다. 정확히는 손목이 0.3초간 회전했다.


묘선진인의 말이 멈췄다. 아니, 목구멍이 사라졌다. 머리와 몸통 사이에 깨끗한 공백이 생겼고, 잠시 후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쿵.


시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나태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럽네."


그는 장로전 처마 밑 그늘로 다시 몸을 기댔다. 햇빛이 눈부셨다. 아미파 정문에서 본진까지 오는 길에 이미 백여 명을 베었는데, 아직도 소란스러운 게 귀찮았다.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구겨진 종이에는 삐뚤빗뚤한 글씨로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아미파 - 침구 좋음

화산파 - 베개 푹신

소림사 - 방석 딱딱함'


나태운의 무림 정복 목록이었다. 정확히는 좋은 잠자리를 찾는 여정의 기록. 10년 전 불면의 저주에 걸린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잠들어본 적이 없었다. 완벽한 승리 후 찾아오는 30분의 수면. 그것이 전부였다.


"귀찮게 왜 저주 같은 걸 걸어. 진짜."


중얼거리며 장로전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방 한가운데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다. 손으로 눌러봤다.


"오."


처음으로 입꼬리가 0.5밀리미터 올라갔다.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푹신했다. 등판이 딱 맞게 가라앉았다. 베개는 메밀이었다. 목 각도가 정확히 15도. 완벽했다.


눈을 감았다.


1초.


2초.


3초.


눈을 떴다.


"아 진짜."


잠이 오지 않았다. 아미파 섬멸이 '완벽한 승리'가 아니었다는 뜻. 어딘가에 살아남은 놈이 있거나, 아니면 저주가 판단하기에 아미파 정도는 승리로 쳐주지도 않는다는 의미였다.


나태운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있었다. 일어나기 귀찮았다. 그냥 이대로 굶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였다.


"상쾌한 아침이네요, 나 도령."


목소리가 들렸다.


나태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니, 정확히는 '또렷해졌다'. 흐릿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생기고, 동공이 날카롭게 수축했다. 10년 만에 듣는 목소리.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이불을 걷어냈다.


창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달빛을 등진 실루엣. 검은 도포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하얀 얼굴, 붉은 입술, 그리고 눈가의 점.


천마 백야린.


"...야린아."


10년 만에 나태운의 입에서 두 음절 이상의 이름이 나왔다.


백야린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발소리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나태운만 들을 수 있는 주파수로 걷고 있었다. 둘만의 약속. 10년 전, 헤어지던 날 만든 신호.


"보고 싶었어요."


백야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태운은 일어나 앉았다. 귀찮았지만 일어났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귀찮음'보다 우선하는 감정이 생겼다.


"나도."


두 글자. 하지만 그 안에 10년이 담겼다.


백야린이 다가왔다. 나태운의 뺨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예전에는 따뜻했는데. 천마가 되면서 체온이 식었다. 나태운을 살리기 위해 무림을 학살하면서.


"많이 여위었네요."


"잠을 못 자서."


"아직도?"


"응."


"미안해요."


백야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10년 전, 나태운을 저주에서 풀어주려다 오히려 더 깊은 저주에 가둔 것. 그것이 백야린의 죄였다.


나태운의 손이 올라갔다. 느린 동작. 하지만 백야린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눈가에 닿았다. 눈물을 닦아줬다.


"귀찮게 왜 울어."


백야린이 웃었다. 10년 만에 듣는 그 말투.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도령도 웃어봐요. 한 번만."


"귀찮아."


"한 번만요."


"..."


나태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1밀리미터. 2밀리미터. 10년 만에 짓는 진짜 웃음.


백야린이 그를 껴안았다. 나태운도 팔을 들어 그녀를 안았다. 귀찮았지만 안았다.


달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그리고 그 달빛 속에서, 백야린의 눈빛이 변했다.


사랑에서 결의로.


"도령."


"응."


"이제 끝내요. 우리."


백야린의 손에서 흑기가 피어올랐다. 천마신공의 극의. 나태운의 등에 손바닥을 댔다. 심장 바로 뒤.


"야린아."


"잘 자요, 도령. 이번엔 영원히."


흑기가 폭발했다.


하지만 나태운은 쓰러지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투명한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절대검성의 호신강기. 무의식중에 발동되는 절대방어.


백야린이 뒤로 튕겨나갔다. 벽에 부딪혀 피를 토했다.


"왜..."


나태운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빛이 다시 흐릿해졌다.


"귀찮게."


두 글자.


하지만 그 안에 배신감, 슬픔, 그리고 여전한 사랑이 섞여 있었다.


백야린이 웃었다. 피를 흘리며.


"역시 안 되네요. 도령을 죽이는 건."


그녀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삼파연합이 도령을 기다려요. 3천 명. 무림의 마지막 저항이래요."


나태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귀찮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사흘 후.


삼파연합 본진.


화산파, 무당파, 개방의 연합군 3천 명이 진을 쳤다. 무림맹의 마지막 자존심. 천하를 뒤흔든 절대검성을 막을 최후의 방벽.


그 앞에 한 사람이 걸어왔다.


나태운.


3천 쌍의 눈이 그를 향했다. 살기가 하늘을 찔렀다.


나태운이 하품을 했다.


"아 진짜. 귀찮게 왜 이렇게 많아."


화산파 장문인이 검을 뽑았다.


"천하의 악인 나태운! 오늘이 네 마지막—"


"닥쳐. 시끄러워."


나태운의 손이 허리춤으로 갔다.


검자루를 잡았다.


그 순간, 3천 명 모두가 느꼈다.


죽음을.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저 세상이 조용해졌다.


바람도, 숨소리도, 심장박동도 멈춘 것 같은 정적. 3천 명의 무인들이 동시에 숨을 참았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검이 완전히 뽑히는 순간, 이곳의 모든 생명이 끝난다고.


"잠깐!"


천둥 같은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무당파 장로 현진자였다. 백발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절대검성. 우리가 제안이 있소."


나태운의 손이 멈췄다. 검은 절반만 빠져나온 상태. 그 상태만으로도 주변의 풀들이 시들어갔다. 검기에 생명력이 흡수당하는 것이었다.


"...제안?"


"그대가 원하는 건 잠. 완벽한 승리 후의 잠이 아니오?"


"그래서."


"우리가 항복하겠소."


순간 삼파연합 진영이 술렁였다. 개방주가 벌떡 일어섰다.


"현진자 장로! 그게 무슨—"


"닥치시오!"


현진자의 호통에 개방주가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눈에는 오직 나태운만 보였다.


"3천 명이 목숨을 내놓겠소. 단 한 가지 조건으로."


나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으로 흥미가 생겼다.


"조건?"


"천마 백야린을 죽이시오."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태운의 손에서 검자루가 떨렸다. 미세한 떨림. 하지만 그것만으로 땅에 금이 갔다.


"무슨 소리야."


"우리는 그대가 무서운 게 아니오. 천마가 무섭소. 그녀는 이미 정파 일곱 문파를 멸문시켰소. 그대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천하를 불바다로 만들 여인이오."


현진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자살 행위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그대를 죽이려 한 이유를 아시오? 그대가 죽어야 학살이 끝나니까. 그대가 영원히 잠들면, 그녀도 멈출 거라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실패했소. 그럼 이제 그녀는 무엇을 할까? 더 많이 죽이겠지. 그대가 잠들 때까지. 무림이 전멸할 때까지."


나태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완전한 무표정.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그래서 내가 야린이를 죽이면, 너희가 항복한다?"


"그렇소. 그리고 그대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오. 천마도 제거하고, 삼파연합도 손에 넣는."


"잠들 수 있다는 거네."


"그렇소."


나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을 완전히 뽑았다.


***


환희봉.


천마신교의 본거지.


백야린이 옥좌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옥좌. 무림 정파의 고수들 뼈로 만든 의자.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교주님."


호법 하나가 무릎 꿇었다.


"삼파연합이 움직였습니다. 3천 명이 집결했고... 절대검성이 그곳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래."


백야린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섬뜩했다.


"그리고 또 하나. 첩보에 의하면 삼파연합이 절대검성에게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교주님을 죽이면 항복하겠다고."


"..."


"교주님, 명을 내려주십시오. 신교 전력을 동원해 삼파연합을 먼저—"


"필요 없어."


백야린이 일어섰다. 옥좌를 박차고 창가로 걸어갔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보름달.


"도령은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교주님!"


"그게 맞아. 그게 효율적이니까. 나 하나 죽이면 3천 명을 얻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잠들 수 있으니까."


백야린이 웃었다. 눈물 없는 웃음.


"도령은 그런 사람이야. 감정보다 효율. 사랑보다 편함. 그게 나태운이라는 인간이지."


호법이 고개를 들었다. 천마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죽이겠지."


백야린의 손에 검이 나타났다. 천마검. 무림을 피로 물들인 마검.


"그리고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교주님?"


"내가 이기면, 도령은 영원히 잠들지 못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니까."


백야린이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지면, 도령은 잠들 수 있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죄책감에 영원히 시달리겠지."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퍼졌다.


"어느 쪽이든, 도령. 당신은 지옥이야."


***


삼일 후.


황천협곡.


무림에서 가장 험한 협곡. 양쪽이 천 길 낭떠러지로 막힌, 폭 10미터의 좁은 길.


그곳에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나태운과 백야린.


"왔구나, 도령."


백야린이 미소 지었다. 10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미소.


나태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고 있었다. 완전히 뽑힌 검. 투명한 검신에서 생명을 빨아들이는 검기가 흘렀다.


"제안 받아들였어?"


"응."


"3천 명의 목숨과 나 하나. 효율적인 선택이네."


"그래."


백야린이 천마검을 뽑았다. 검은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협곡의 바위들이 부서져 내렸다.


"근데 말이야, 도령."


"..."


"나도 효율적인 선택을 했어."


백야린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옥병.


나태운의 눈이 커졌다.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공포.


"그건..."


"맞아. 혼절산."


무림에서 금지된 독. 마시면 즉시 혼절하는 맹독.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혼절 상태에서도 의식은 깨어있다는 것. 몸은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있는 지옥.


"내가 이걸 마시면, 도령은 날 죽일 수 없어. 이미 죽은 사람을 죽이는 건 승리가 아니니까."


"야린아."


"그리고 나는 도령 손에 죽지도 않아. 독으로 죽는 거니까."


나태운이 한 걸음 다가갔다. 백야린이 한 걸음 물러섰다. 뒤는 낭떠러지.


"그러지 마."


"왜? 효율적이잖아. 나는 죽고, 도령은 잠들지 못하고. 완벽한 결말이야."


"야린아."


나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목소리.


"제발."


백야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 도령. 나 정말 미안해. 10년 전에도, 지금도."


그녀가 옥병의 마개를 열었다.


"사랑해."


입으로 가져갔다.


나태운이 움직였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전력으로 움직였다. 귀찮음도, 효율도 없었다. 오직 그녀를 구하겠다는 본능만이.


하지만 늦었다.


백야린이 독을 마셨다.


아니.


마시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옥병을 쳤다.


세 번째 인물.


흰 옷을 입은 여인. 얼굴에 은빛 가면을 쓴.


"누구야!"


백야린이 소리쳤다.


가면의 여인이 웃었다. 낮고 차가운 웃음.


"10년 전, 불면의 저주를 건 사람."


나태운과 백야린이 동시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여인이 가면을 벗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백야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안 돼... 어떻게... 언니?"


나태운의 검이 떨어졌다.


가면 속 얼굴은.


백야린과 똑같았다.

총 6,369자 · 약 13분

- 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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