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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트키 인생, 그러나 대가는 있다

약 14분

치트키 인생, 그러나 대가는 있다

주인공: 한태양

빗줄기가 시야를 가렸다.


"잠깐만, 조금만 버텨."


태양은 서연을 업은 채 병원 입구로 뛰어들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너무 차가웠다. 발이 미끄러졌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응급실 간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환자분 보호자세요?"


"네, 제 여자친구가 피를 토했어요. 빨리 좀..."


간호사의 시선이 서연의 창백한 얼굴을 훑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태양의 심장이 귀를 때렸다.


"보험증 있으세요?"


"그게... 지금 그게 중요해요?"


"일단 신분증이랑 보험증 확인해야 접수가..."


"제발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간호사가 잠깐 멈칫했다가 내선 전화를 들었다. 태양은 서연을 안은 채 무릎이 꺾이는 걸 느꼈다.


'괜찮아. 곧 괜찮아질 거야.'


서연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


의사가 나왔다.


"보호자분?"


"네!"


태양이 벌떡 일어섰다. 대기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일단 응급처치는 했는데요, 정밀검사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근데..."


의사의 시선이 태양의 젖은 작업복을 훑었다.


"입원 보증금이 최소 500만 원은 필요한데, 지금 준비 가능하세요?"


세상이 기울었다.


"지, 지금은 없는데 내일이라도..."


"내일?"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환자분 상태가 그리 여유롭지 않아 보이는데요."


태양의 손이 떨렸다. 주머니를 뒤졌다. 만 원짜리 두 장. 동전 몇 개.


"카드는요?"


"한도가... 다 찼어요."


의사가 간호사를 봤다.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태양은 그 침묵의 의미를 알았다.


"제발, 제발요. 제가 일 더 할게요. 밤새 일해서라도 돈 갖다 드릴게요."


"여기가 자선단체가 아니라서요."


의사가 돌아섰다.


"잠깐만요! 잠깐만!"


태양이 의사의 팔을 잡았다. 의사가 팔을 뿌리쳤다.


"보안요원!"


"제발 좀 살려주세요!"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차가운 타일. 형광등 불빛이 번졌다.


'왜 난 항상 이 모양이지.'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보안요원 두 명이 다가왔다. 태양의 팔을 잡았다. 끌려나가는 동안 복도 끝에 보였다. 침대 위에 누운 서연. 산소마스크를 쓴 얼굴.


"서연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병원 밖.


빗소리만 가득했다.


태양은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손등의 화상 흉터가 빗물에 젖어 붉게 부풀었다. 2년 전 식당 주방에서 뜨거운 기름에 데었을 때 생긴 자국.


'병원비조차 없는 인간이...'


핸드폰을 꺼냈다. 통장 잔액 23,400원. 문자 하나.


[카드대금 연체 3회차. 신용등급 하락 예정]


웃음이 났다. 소리 내서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하, 하하..."


빗속에서 웃는 자신이 얼마나 처량한지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빗소리가 멈췄다.


정확히는, 빗방울이 공중에 박혔다.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허공에 정지한 채 반짝였다. 태양이 손을 뻗었다. 빗방울이 손끝에 닿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절망의 맛은 언제나 달콤하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태양이 고개를 돌렸다. 안개 같은 형체. 노인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반복했다. 얼굴은 없었다. 아니, 있는데 볼 수 없었다.


"누, 누구세요?"


"브로커라고 불러줘도 좋아. 난 거래를 중개하는 사람이거든."


노인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빗방울 사이로 울렸다.


"거래?"


"그래.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교환하는 거지."


태양이 벽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무슨 사기..."


"사기?"


브로커가 손가락을 튕겼다. 공중의 빗방울 하나가 터져 증기가 됐다.


"이게 사기로 보이니?"


태양의 입이 벌어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브로커가 천천히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다. 그냥 갑자기 가까이 있었다.


"한태양. 스물여덟.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와 건설 일용직을 병행하며 월 180만 원을 버는 남자. 통장 잔액 2만 3천 4백 원. 카드빚 830만 원. 그리고..."


브로커의 손이 병원 쪽을 가리켰다.


"죽어가는 연인 한 명."


"어떻게..."


"난 절망한 인간들을 찾아다니거든. 그리고 넌 지금, 아주 완벽하게 절망했어."


태양의 주먹이 쥐어졌다.


"뭘 원하는 거예요."


"직설적이네. 좋아."


브로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종이 한 장. 거기 적힌 숫자 여섯 개.


"다음 주 로또 1등 당첨 번호야. 이걸로 넌 1,127억 원을 받게 될 거고."


태양의 숨이 멎었다.


"대신 대가를 내야지. 등가교환. 공짜는 없어."


"대가가... 뭔데요?"


브로커가 웃었다. 얼굴 없는 웃음이 소름 돋게 선명했다.


"네 시간. 그리고 네 기억."


"시간이랑 기억?"


"돈을 쓸 때마다 네


# 치트키 인생, 그러나 대가는 있다 (2/3)


"돈을 쓸 때마다 네 인생에서 하루씩 사라져."


브로커의 손가락이 태양의 이마를 향했다. 닿지 않았는데도 뭔가 차갑게 스며드는 느낌.


"1억을 쓰면 하루. 10억을 쓰면 열흘. 간단하지?"


"하루가 사라진다는 게..."


"말 그대로야. 네 기억에서, 네 몸에서, 세상에서. 그날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


태양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느 날이 사라지는 건데요?"


"가장 소중했던 날부터."


브로커가 빗방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첫 키스하던 날. 같이 울며 밤을 새우던 날. 손 잡고 걷던 어느 봄날. 그런 것들 말이야."


빗방울이 증발했다.


"그럼 서연이랑..."


"잊게 되겠지. 왜 사랑했는지도, 언제 만났는지도."


태양이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부딪혔다.


"미친... 그게 무슨..."


"등가교환이야. 천억 원이 공짜일 리 없잖아?"


브로커가 종이를 내밀었다. 로또 번호 여섯 개가 붉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글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거부할 수도 있어. 그럼 난 그냥 가지."


태양의 시선이 병원 건물로 향했다. 4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응급실.


'서연이가 저기서 죽어가고 있어.'


손이 떨렸다. 종이를 잡았다. 촉감이 없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야."


브로커가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 빼곡한 글자들이 저절로 움직이며 문장을 만들었다.


"여기 서명만 하면 돼. 피로."


"피요?"


"계약은 원래 그런 거잖아."


태양이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글자가 너무 작았다. 읽으려 하면 번져서 보이지 않았다.


"이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넌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까."


브로커가 손가락을 튕겼다. 태양의 검지 끝에서 피 한 방울이 맺혔다. 아프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자, 여기."


계약서 맨 아래. 서명란.


태양이 손을 뻗다 멈췄다.


"잠깐만요. 만약에... 만약에 돈을 안 쓰면요?"


"안 쓰면?"


브로커가 웃었다. 처음으로 얼굴이 보였다. 주름투성이 노인이 아니었다. 젊은 남자였다. 아니, 여자? 계속 바뀌었다. 수십 개의 얼굴이 겹쳐져 일렁였다.


"그럼 당첨금이 그냥 통장에 쌓이겠지. 근데 넌 안 쓸 수 있을까?"


"쓰지 않으면 되잖아요."


"서연이 퇴원하면? 집 구하고, 밥 먹이고, 옷 사주고 싶지 않을까? 아니면..."


브로커가 태양의 귀에 속삭였다.


"서연이 또 쓰러지면?"


태양의 숨이 걸렸다.


"그때도 참을 수 있어? 돈이 천억 있는데?"


"그건..."


"못 참아. 인간은 원래 그래."


브로커가 물러났다. 빗방울들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돌아오고 있었다.


"10초 남았어. 서명 안 하면 난 사라져."


"기다려요!"


"9초."


태양이 계약서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손에 달라붙었다.


"이거... 취소는 안 돼요?"


"8초. 취소? 당연히 안 되지."


"그럼 다른 방법은..."


"7초. 없어."


빗소리가 커졌다. 브로커의 형체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6초."


태양이 병원을 봤다. 4층 불빛이 깜빡였다.


'서연아...'


"5초."


검지의 피가 뚝 떨어졌다. 계약서에 붉은 점이 번졌다.


"4초."


'미안해.'


"3초."


손이 움직였다. 서명란에 닿았다.


"2초."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한. 태.


"1초."


양.


섬광이 터졌다.


***


정신을 차렸을 때 태양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빗소리. 차가운 아스팔트. 손에 쥐어진 로또 용지.


"뭐야..."


브로커는 없었다. 계약서도 사라졌다. 손가락 끝에 상처도 없었다.


'꿈이었나?'


일어서려는데 주머니에서 뭔가 바스락거렸다. 손을 넣었다. 로또 용지. 거기 적힌 번호 여섯 개.


4, 17, 23, 31, 38, 42.


태양의 심장이 뛰었다. 용지를 구겨 버리려다 멈췄다.


'아니야. 이건 진짜야.'


손이 떨렸다. 용지를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


"보호자분?"


간호사가 태양을 봤다. 아까 그 사람.


"제 여자친구, 서연이요. 어떻게 됐어요?"


"아, 잠시만요."


키보드 소리. 태양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응급처치 끝났고요, 중환자실 옮겼습니다. 보증금은..."


"낼게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간호사가 미간을 찔끔 찌푸렸다.


"최소 3일 안에는 입금하셔야 하는데요."


"3일. 알겠습니다."


태양이 고개를 숙였다.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복도를 걸었다. 중환자실 5호. 문틈으로 서연이 보였다. 산소마스크. 링거. 모니터의 초록 선.


'살아 있어.'


눈물이 났다. 참았다.


# 치트키 인생, 그러나 대가는 있다 (3/3)


중환자실 문 앞.


태양은 유리에 이마를 댔다. 서연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살아 있다는 증거.


'3일. 3일 안에 돈을 만들어야 해.'


주머니 속 로또 용지가 뜨겁게 느껴졌다.


***


편의점.


형광등 불빛 아래서 태양은 로또 용지를 펼쳤다. 번호를 한 칸씩 마킹했다. 손이 떨려서 선이 삐뚤어졌다.


4, 17, 23, 31, 38, 42.


"5천 원입니다."


계산대 알바생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태양이 구겨진 지폐를 내밀었다.


기계음이 울렸다. 로또가 뽑혀 나왔다.


용지를 받아 드는 순간 손끝이 얼었다.


'이게 맞는 걸까.'


아니, 맞다. 브로커는 진짜였다. 빗방울이 멈췄고, 계약서에 피로 서명했다.


'그럼 대가도 진짜야.'


가장 소중한 날이 사라진다는 것. 서연과의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편의점을 나섰다. 새벽 4시.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꼭 살아. 약속해.]


발신 완료.


답장은 없었다. 당연했다. 중환자실에 핸드폰이 있을 리 없으니까.


***


일주일 후.


"당첨자가 나왔습니다!"


TV 화면에 로또 번호가 떴다.


4, 17, 23, 31, 38, 42.


태양의 손에서 리모컨이 떨어졌다. 숨이 막혔다.


"1등 1명. 당첨금 1,127억 원."


웃음이 터졌다. 소리 없이. 어깨가 들썩였다.


'됐어. 진짜 됐어!'


로또 용지를 꺼냈다. 번호가 일치했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은행으로 뛰었다.


***


"신분증 확인됐습니다. 당첨금 입금까지 영업일 기준 3일 소요됩니다."


직원이 말했다.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바짝 말랐다.


"3일이요?"


"네. 세금 처리하고 나면 실수령액은..."


"얼마예요?"


"798억 정도 되시겠네요."


798억.


숫자가 실감나지 않았다. 그냥 글자였다.


은행을 나왔다. 햇빛이 눈부셨다. 하늘이 이렇게 파랬나.


'서연이한테 가야 돼.'


병원으로 달렸다.


***


"수술 성공했어요."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태양의 무릎이 풀렸다.


"정말요?"


"이식 잘됐고, 거부반응도 없습니다. 일주일 정도 안정기 거치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의사가 어깨를 두드렸다.


"보호자분이 잘 버텨주신 덕분이에요."


의사가 가고 나서 태양은 중환자실 문 앞에 섰다. 서연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안색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아. 돈도 생겼고, 넌 살았어.'


그런데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대가는 언제 치르는 거지?'


아직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럼 기억도 안 사라진 거 아닐까?


핸드폰이 울렸다. 은행 앱 알림.


[입금 완료: 79,800,000,000원]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798억.'


다시 봤다. 그대로였다. 0이 아홉 개.


***


3일 뒤.


태양은 병원비 2억을 입금했다.


카드 클릭 한 번. 끝.


"이상하게 허무하네."


혼잣말이 나왔다. 2억이 이렇게 쉽게 나갈 줄이야.


그때 뒷목이 서늘해졌다.


'잠깐.'


2억을 썼다는 건...


"하루가 사라진 건가?"


주변을 둘러봤다. 병실. 링거 소리. 복도에서 들리는 카트 소리. 다 똑같았다.


'뭐가 사라진 거지?'


기억을 더듬었다. 서연이랑 처음 만난 날. 대학교 앞 카페. 아메리카노 쏟았던 것. 다 기억났다.


"브로커 그 새끼가 거짓말한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빗방울이 멈췄던 건 진짜였으니까.


'그럼 뭐가 없어진 거야?'


머리가 아팠다. 생각을 멈췄다.


***


일주일 후.


서연이 눈을 떴다.


"태양아..."


목소리가 가늘었다. 태양이 손을 잡았다.


"응. 나야."


"여기가... 어디야?"


"병원. 수술 잘 끝났어."


서연이 천장을 봤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살았구나..."


"그럼. 약속했잖아."


태양이 웃었다. 서연이 손을 꽉 쥐었다.


"고마워. 어떻게 돈을..."


"됐어.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태양이 서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가웠다.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근데 이상했다.


서연의 얼굴을 보는데 뭔가 어색했다. 손을 잡았는데 감촉이 낯설었다.


'왜 이러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식은땀이 났다.


"태양아, 괜찮아?"


"응? 아, 괜찮아."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봤다. 하늘이 흐렸다.


'뭔가 이상해.'


***


한 달 후.


태양은 서연을 위해 집을 샀다. 강남 펜트하우스. 230억.


"여기가 우리 집이야."


서연이 입을 벌렸다. 통유리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미쳤어? 이게 얼마인데..."


"신경 쓰지 마. 이제 우린 돈 걱정 안 해도 돼."

총 7,065자 · 약 14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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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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