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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 거래소

약 14분

수명 거래소

주인공: 한태양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닥에 부딪혔다.


태양은 손목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거.'


반투명한 숫자가 피부 위에 떠 있었다.


[18,250:00:00]


문신도 아니고, 타투 스티커도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눌러봤지만 번지지 않았다.


"미친..."


태양은 수건으로 손목을 박박 문질렀다. 숫자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았다. 거울 속 남자는 여전히 가난했던 시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펜트하우스 욕실이 아무리 넓어도,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냥 착각이겠지. 피곤해서.'


손목의 숫자는 깜빡이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태양은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거실로 나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 너머로 서울 야경이 펼쳐졌다. 한강이 검은 띠처럼 흐르고, 불빛들이 숨 쉬듯 깜빡였다.


'이게 다 서연이를 위한 거야.'


그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까르띠에.


뚜껑을 열자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이거 하나면... 서연이가 웃어줄까."


태양은 핸드폰을 꺼내 쇼핑몰 앱을 켰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손목이 따끔했다.


숫자가 움직였다.


[18,250:00:00] → [18,240:00:00]


"...뭐?"


10시간이 사라졌다.


태양은 숨이 막혔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시 눌러봤다. 결제 취소.


숫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그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숫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선명하게. 냉소적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장난이겠지. 누가 해킹한 거야. AR 앱 같은 거.'


하지만 핸드폰을 꺼도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태양은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알 수 없음.


"...여보세요?"


"축하드립니다, 한태양 고객님."


남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기계처럼 정확했다.


"누구세요?"


"계약 담당 브로커입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태양은 손목을 들어 올렸다.


"이게... 이게 뭐예요? 이 숫자가."


"아, 카운터 말씀이시군요."


브로커는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는 것뿐인데 소름이 돋았다.


"고객님의 남은 시간입니다. 현재 18,240시간이시네요. 약 2년 정도 되시겠습니다."


"2년...?"


"네. 고객님께서 대출하신 금액이 상당하셨으니까요."


태양의 입이 바짝 말랐다.


"무슨 소리예요? 나 대출 안 받았는데."


"기억 안 나시나요?"


브로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6개월 전, 강남역 2번 출구 앞에서 명함 받으셨죠. '원하는 만큼 드립니다'라고 쓰인."


태양은 숨이 턱 막혔다.


기억났다.


그날 밤, 서연이 응급실에 실려 갔던 날.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비 8천만 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고객님께서 직접 전화하셨습니다. '얼마든지 갚을 테니 지금 당장 돈을 달라'고요."


태양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서 저희가 드렸죠. 8천만 원. 수술비로."


"그럼 그냥 대출이잖아요! 왜 내 수명을—"


"대출이 아닙니다."


브로커의 목소리가 칼처럼 잘랐다.


"시간 선지급입니다. 고객님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구매하신 겁니다."


태양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계약서 3조 2항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급된 금액의 사용은 곧 미래 시간의 소진을 의미한다.' 고객님께서 서명하셨죠."


"...미친."


"욕설은 삼가 주시죠."


브로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리고 수술비만이 아닙니다. 이 펜트하우스 보증금 5억, 서연 씨 명의로 구입하신 수입차 8천만 원, 매달 나가는 생활비까지. 모두 합치면..."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계산하는 소리.


"약 5년 치 시간을 이미 쓰셨네요. 남은 건 2년 정도."


태양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목의 숫자가 흐릿하게 번졌다. 눈물 때문이었다.


"안 돼... 서연이는 아직..."


"걱정 마십시오."


브로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방법이 있습니다."


태양은 고개를 들었다.


"...뭐?"


"오늘 밤 11시. 강남 K백화점 본관 뒤편 주차장으로 오십시오.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거기서 뭐 하는데요?"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곳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태양은 한동안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초대장이 발송되었습니다. 유효시간: 3시간]


첨부된 이미지는 검은 카드였다. 금빛 글씨로 한 줄만 적혀 있었다.


'Time Auction'


태양은 손목을 봤다.


[18,240:00:00]


숫자가 째깍거리며 줄어들고 있었다.


59분. 58분. 57분.


"미친... 진짜 줄어들어."


# Part 2: 전개


시계를 봤다. 10시 47분.


태양은 소파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검은 코트를 꺼내 입으며 손목을 다시 확인했다.


[18,237:12:43]


'3시간이 사라졌어.'


그냥 앉아 있기만 했는데.


현관문을 열려던 손이 멈췄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편지지가 보였다.


서연의 글씨였다.


'오빠, 나 친구들이랑 저녁 먹고 올게. 늦지 않을게. 사랑해♥'


태양은 편지지를 구겼다가, 다시 펼쳤다.


"...미안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창백했다.


'경매장에서 뭘 하는 거지? 시간을 되찾는다는 게 말이 돼?'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


벤틀리 키를 꺼내려다 멈췄다.


'아니지. 차도 빚이야.'


태양은 택시를 잡았다.


"K백화점 본관이요."


기사가 룸미러로 힐끗 쳐다봤다.


"손님, 거기 3년 전에 폐업했는데요?"


"...뒤편 주차장이요."


"거긴 왜요? 거기 아무것도 없어요."


태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만 만지작거렸다.


택시가 강남대로를 달렸다. 네온사인들이 흘러갔다.


차창 밖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커피를 들고, 손을 잡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만 이상한 건가?'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 서연


태양은 화면을 꺼버렸다.


받을 수 없었다. 지금은.


택시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이 깜빡이다 꺼졌다.


"여기예요."


기사가 차를 세웠다.


K백화점 뒷골목. 철문에는 '출입금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손님, 진짜 여기 맞아요?"


태양은 돈을 건네며 내렸다.


"...네."


택시가 떠났다. 고요했다.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철문 옆에 작은 패널이 있었다. 카드 리더기.


태양은 핸드폰을 꺼내 초대장 이미지를 띄웠다. 화면을 갖다 댔다.


삐—


철문이 열렸다.


'진짜네.'


안은 어두웠다. 비상등만 깜빡였다.


태양은 한 걸음 들어섰다. 철문이 뒤에서 닫혔다.


복도가 이어졌다. 벽에는 오래된 백화점 안내판이 녹슬어 있었다.


'지하 13층...'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버튼이 하나만 빛났다.


[B13]


누르지 않았는데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10층, 11층, 12층...


심장이 귀를 때렸다.


13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렸다.


"...뭐야, 이게."


눈앞에 펼쳐진 건 폐허가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이 빛났다.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황금빛을 쏟아냈다.


복도 양쪽으로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정장 차림, 드레스 차림, 모두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태양은 뒤를 돌아봤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버튼이 사라졌다.


"초대받으셨습니까?"


여자의 목소리.


돌아보니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목에 명찰: 'Auctioneer'.


"저, 저기..."


"손목을 보여주세요."


태양은 떨리는 손으로 손목을 내밀었다.


여자는 스캐너를 갖다 댔다. 빛이 번쩍였다.


"한태양 고객님. 확인됐습니다. 이쪽으로."


복도 끝으로 안내됐다.


거대한 문이 열렸다.


숨이 멎었다.


원형 극장 같은 공간. 중앙에는 무대가 있고, 주변으로 좌석이 계단식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수백 명.


모두의 손목에서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5,280:00:00]


[12,045:33:21]


[892:15:09]


태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사람들 전부..."


"네. 고객님들입니다."


안내원이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곧 시작됩니다."


태양은 비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남자가 힐끗 쳐다봤다. 손목: [3,672:00:00].


"첫 경매예요?"


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비웃었다.


"표정 보니 알겠네. 조언 하나 해줄게요. 여기선 욕심부리지 마세요."


"...무슨 뜻이에요?"


"입찰하면 시간이 바로 빠져요. 낙찰 실패하면 안 돌려줘요."


남자는 손목을 들어 보였다.


"전 원래 10년 있었어요. 지금은 4년 남았죠. 5번 입찰했거든요."


"5번 다 실패했어요?"


"4번 실패, 1번 성공. 그걸로 1년 벌었으니까 본전치기는 했죠."


남자는 무대를 가리켰다.


"저기 봐요. 저 VIP석."


2층 발코니에 붉은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저기 앉은 사람들은 진짜 부자예요. 시간으로."


"얼마나요?"


"최소 50년. 어떤 사람은 100년도 넘어요."


태양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50년...'


조명이 어두워졌다.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턱시도 차림. 얼굴에는 흰색 마스크.


"신사 숙녀 여러분, 환영합니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크 없이.


"제128회 타임 옥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수 소리.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첫 품목입니다."


무대 중앙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품목: 시간 6개월 / 시작가: 3개월]


태양은 숨을 참았다.


"입찰하시겠습니까?"


사방에서 손이 올라갔다. 좌석 팔걸이에 달린 버튼이 일제히 빛났다.


"3개월. 4개월. 5개월..."


경매사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낙찰. 5개월에 VIP 7번 고객님."


박수 소리. 2층 커튼 뒤에서 누군가 일어섰다.


무대로 내려온 건 중년 남자였다. 얼굴이 핼쑥했다.


경매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스캐너를 갖다 댔다.


빛이 번쩍였다.


남자의 손목에서 숫자가 깜빡이더니 변했다.


[2,190:00:00 → 6,570:00:00]


6개월이 더해진 것이다.


남자는 손목을 쓸어내리며 돌아갔다.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진짜야...'


태양은 손이 떨렸다.


"다음 품목."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품목: 시간 2년 / 시작가: 1년]


이번엔 더 많은 손이 올라갔다.


"1년 2개월. 1년 5개월. 1년 8개월..."


"낙찰. 1년 9개월에—"


옆자리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쥔 채.


"젠장..."


손목을 보니 숫자가 줄어들어 있었다.


[3,672:00:00 → 2,100:00:00]


1년 반이 사라진 것이다.


"입찰했어요?"


태양이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음엔 따야 하는데."


목소리가 잠겼다.


태양은 손목을 감쌌다.


'입찰만 해도 빠진다고?'


경매가 이어졌다.


10분, 20분, 30분...


품목이 계속 나왔다. 시간 3개월, 1년, 5년.


어떤 건 낙찰됐고, 어떤 건 유찰됐다.


태양은 한 번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2년밖에 없는데 함부로 쓰면...'


그때였다.


무대 조명이 꺼졌다.


"특별 품목입니다."


경매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홀로그램이 천천히 떠올랐다.


[품목: 미상 / 시작가: 1년]


웅성거림이 퍼졌다.


"미상이 뭐야?"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태양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2층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개하시죠."


여자 목소리. 차갑고 날카로웠다.


경매사가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 V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홀로그램이 확대됐다.


태양의 심장이 멎었다.


화면에 떠오른 건 사진이었다.


서연의 얼굴.


"...뭐?"


[대상자: 서연 / 남은 수명: 72:00:00]


3일.


서연에게 남은 시간은 3일이었다.


"안 돼..."


태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경매사는 태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품목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홀로그램 아래 글씨가 추가됐다.


[경매 품목: 생명 연장권 3년분 / 낙찰 시 대상자에게 즉시 이전]


태양은 무대로 달려가려 했다.


안내원이 팔을 잡았다.


"앉으세요."


"놓으라고요!"


"소란 피우시면 퇴장 조치됩니다."


힘이 셌다. 태양은 끌려가듯 자리에 앉혔다.


"품목 특이사항."


경매사가 계속 말했다.


"대상자는 본인의 수명이 거래되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낙찰자는 익명이 보장됩니다."


태양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서연이가 3일밖에...'


"입찰 시작합니다. 1년."


손이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1년 3개월."


"1년 6개월."


"1년 8개월."


태양은 버튼을 노려봤다.


'내가 입찰하면 되잖아.'


하지만 손이 떨렸다.


'지금 내 시간은 2년. 1년을 쓰면 1년밖에 안 남아.'


"2년."


VIP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태양은 고개를 들었다. 커튼 뒤 실루엣.


"2년 1개월."


다른 VIP가 응수했다.


'저 사람들은 여유가 있으니까...'


"2년 3개월."


"2년 5개월."


태양은 이를 악물었다.


'입찰하면 안 돼. 떨어지면 시간만 날리는 거야.'


하지만 서연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72시간...'


"2년 8개월. 더 이상 없습니까?"


경매사가 물었다.


"없으시면 낙찰—"


"3년!"


태양은 버튼을 눌렀다.


손목이 뜨거워졌다. 숫자가 깜빡였다.


[18,237:00:00 → -8,523:00:00]


마이너스.


'잠깐, 이게 뭐야?'


경매사가 태양을 봤다.


"한태양 고객님. 보유 시간이 부족합니다. 입찰이 취소됩니다."


"기다려요! 그럼 어떻게—"


"대출 옵션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태양은 입을 다물었다.


"추가 대출 시 이자율 300%. 상환 기한 6개월. 연체 시..."


경매사가 잠시 멈췄다.


"사망 처리됩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옆자리 남자가 속삭였다.


"미친 짓이에요. 대출받으면 끝이에요."


태양은 손목을 봤다. 마이너스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빚을 더 지면...'


"10초 드리겠습니다."


경매사의 목소리.


"10, 9, 8..."


태양은 서연을 떠올렸다.


아침마다 웃으며 커피를 내려주던 얼굴.


'오빠, 오늘도 힘내.'


"7, 6, 5..."

총 7,151자 · 약 14분

- 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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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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