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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약 19분

심연의 주인은 퇴사하고 싶다

주인공: 강민준 / 아벨리우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게 맞을까. 트럭에 치인 건 확실한데, 그 다음 기억이 없다. 눈을 뜨니까 여기였다.


'여기'라는 건 어둠뿐인 공간이었다. 사방이 칠흑같은데, 이상하게 시야는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보였다. 저 멀리 있는 돌기둥의 균열까지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일어나세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 목소리. 차갑고, 무감정한.


돌아보니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아니, 여자라고 부르기엔 뭔가 이질적이었다. 눈동자가 없었다. 그냥 새하얀 공막만 있었는데, 그게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관찰자예요.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아니 그게 무슨... 저 지금 죽은 거예요, 산 거예요?"


관찰자라는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감정이 없는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이니까 더 섬뜩했다.


"둘 다요. 죽었다가 살아났으니까."


"그럼 환생? 빙의? 그런 거?"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요. 당신은 원래부터 아벨리우스였어요. 강민준이라는 삶은... 그냥 잠깐 꾼 꿈 같은 거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벨리우스? 그게 뭔데?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이. 아니, 기억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생생했다. 내가 직접 겪은 것처럼.


피로 물든 전장. 무릎 꿇은 왕들. 공포에 질린 신관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나. 아니, 내가 아니라 아벨리우스라는 존재가.


"으윽..."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수천 년 치 기억이니까."


수천 년? 이 여자 지금 제정신이야?


"저, 저기요.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다고요. 마왕이고 뭐고 그런 거 아니고..."


"평범한 회사원이 심연의 옥좌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관찰자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보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도 유독 진한 검은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옥좌가.


"저, 저거 뭐예요?"


"당신 거요. 앉으러 가세요."


"아니 왜 제가..."


"선택권은 없어요."


관찰자의 목소리에 뭔가 섞여 들어왔다. 강제성? 아니면 명령?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리가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냐? 꿈이면 좀 깨라고!'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돌바닥을 밟는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는 느낌도.


옥좌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더 압도적이었다. 검은 돌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표면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어둠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앉으세요."


관찰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저, 그러니까... 이게 맞나요? 제가 앉아도 되는 건지..."


"앉으라니까요."


뭔가 등을 떠밀었다. 아니, 떠민 건 아닌데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다.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옥좌에 주저앉았다.


순간.


세상이 폭발했다.


어둠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 내 몸에서 터져 나왔다. 검은 아우라가 파도처럼 밀려나가면서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돌기둥들이 진동했고,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으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나온 건 낮고 무거운 음성이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들렸다. 저 멀리서. 발소리.


수십, 수백 개의 발소리가 동시에 울려왔다. 어둠 속에서 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 로브를 두른 마법사들. 날개 달린 괴물들. 뿔 달린 인간형 생명체들.


전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귀환이시다!"


우렁찬 함성이 공간을 흔들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아 진짜 미쳤다 이거 뭐야.'


머릿속은 패닉 상태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손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폐, 폐하..."


맨 앞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갑옷에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거구였다. 투구 틈 사이로 보이는 눈이 감격으로 젖어 있었다.


"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돌아오셨습니다."


"저, 저기... 그러니까..."


말이 꼬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사실 전 마왕 아니고 그냥 회사원인데요, 라고?


그때 관찰자의 속삭임이 귓가에 스쳤다.


"연기 잘하네요~ 근데 저거 진심으로 믿는 거 같은데?"


소름이 돋았다. 관찰자는 내 옆에 없었다. 저 뒤 어둠 속 어딘가에 있을 텐데, 목소리는 바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뭘 그렇게 떠는 거예요? 무서워요?"


'당연하지! 이게 정상인데!'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어?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붉은 갑옷의 기사가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폐하이십니다. 천 년의 세월도 당신의 위엄을 꺾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던 로브 입은 여자가 나섰다. 은발에 보랏빛 눈동자. 뾰족한 귀가 로브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폐하, 소녀 서린입니다. 기억하고 계신지요?"


기억? 당연히 없는데.


하지만 또 머릿속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아벨리우스의 기억. 서린. 심연 의회의 수석 마법사.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냉혹한 실무자.


"...그래."


짧게 대답했다. 길게 말하면 또 꼬일 것 같았다.


서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폐하께서 예전과 조금 다르신 것 같습니다만."


심장이 철렁했다.


"그, 그게..."


"역시."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힘을 숨기고 계시는군요. 저 여유로운 표정... 계산된 연출입니다."


"...네?"


"천 년의 봉인으로 힘이 약해졌다는 소문을 퍼뜨리시려는 겁니까? 적들을 방심하게 만들고, 결정적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시려는."


붉은 갑옷의 기사가 감탄했다.


"역시 폐하! 그 깊은 계략을 어찌 저희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고. 진짜로 약한 거라고. 아니, 약한 것도 아니고 나 원래 마왕 아니라고!


하지만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일어서거라."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백 명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 움직임이 너무 완벽하게 동시에 이루어져서 오싹했다.


"발테온."


내가 붉은 갑옷 기사를 불렀다. 아니, 아벨리우스가 불렀다. 이름이 저절로 나왔다.


"예, 폐하!"


"현황을 보고하라."


"옥좌의 봉인이 풀리면서 심연의 던전이 지상에 출현했습니다. 위치는 인간들이 '서울'이라 부르는 도시 중심부입니다."


서울? 내가 살던 그 서울?


"던전 등급은 SSS급으로 분류되었으며, 아직 인간 각성자들의 공략 시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발테온이 잠시 머뭇거렸다.


"말해."


"인간들의 헌터 길드에서 정찰대를 보냈습니다. 외곽 층에서 모두 전멸시켰으나, 한 명이 도주했습니다."


"놔뒀느냐?"


"폐하께서 일부러 그리 명령하셨기에."


나? 내가 언제?


또 기억이 떠올랐다. 아벨리우스의 것이. 일부러 한 명을 살려 보내 공포를 퍼뜨린다. 그래야 더 강한 자들이 온다. 더 강한 자들을 꺾어야 위엄이 선다.


'이 새끼 완전 또라이잖아!'


"잘했다."


내 입이 멋대로 칭찬했다.


발테온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투구 아래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폐하... 폐하께서 칭찬을..."


"그만. 보기 민망하다."


"죄송합니다!"


서린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옥좌의 힘이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전에 인간들의 공략이 시작될 것입니다."


"얼마나."


"일주일. 길어야 열흘입니다."


일주일? 그 안에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대응 방안은."


"일단 외곽 층의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는 이상, SSS급 각성자들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나서야 하느냐."


"아니면..."


서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폐하께서 과거에 설치하신 '시련의 길'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시련의 길?


기억이 또 떠올랐다. 옥좌로 가는 길에 설치된 수십 개의 함정과 괴물들. 아벨리우스가 직접 만든, 침입자를 걸러내기 위한 장치.


"...좋다. 활성화시켜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서린이 물러났다. 다른 마족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각자 할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발테온만 남았다.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폐하, 소인이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폐하께서는... 왜 돌아오셨습니까?"


왜? 나도 모르는데.


"천 년 전, 폐하께서는 스스로 봉인을 선택하셨습니다. '때가 오면 돌아오겠다'고 하시며. 그 때가... 지금입니까?"


아벨리우스의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 답은 불완전했다. 뭔가 빠진 것 같았다.


"...그렇다."


"무엇이 폐하를 다시 부르셨습니까? 세상이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까? 아니면..."


"발테온."


"예, 폐하!"


"너무 많이 묻지 마라."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발테온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분수를 넘었습니다!"


"물러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발테온이 뒷걸음질 치며 사라졌다. 이제 홀로 남았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다.


"재미있네요."


관찰자가 옥좌 옆에 나타났다. 언제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게.


"뭐, 뭐가 재미있다는 거예요?"


"당신이요. 겁에 질려서 후들후들 떨면서도, 몸은 멋대로 마왕 코스프레 하고 있잖아요."


"이거 제가 원한 게 아니라고요!"


"알아요. 그게 더 재미있다는 거죠."


관찰자가 웃었다. 감정 없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즐거워하는 표정. 그게 더 섬뜩했다.


"저, 저 좀 돌려보내주세요. 전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평범하게요? 당신이?"


관찰자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빛나는 화면이 나타났다. 거기엔... 내 과거가 펼쳐졌다.


회사 책상 앞에서 야근하던 내 모습. 팀장한테 혼나면서도 '네, 네' 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모습.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으면서 '이게 내 인생인가' 하고 한숨 쉬던 모습.


"이게 당신이 말하는 평범함이에요? 죽을 것처럼 지루하고, 아무 의미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만 하던 삶?"


"그, 그래도 그게 제 삶이었어요!"


"아니에요."


관찰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건 삶이 아니라 도피였죠. 책임도, 선택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라고 스스로를 속이던 거예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요. 당신은 아벨리우스예요. 수백 명의 부하가 당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곧 수천 명의 인간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거예요. 도망칠 수도, 회피할 수도 없어요."


"그, 그럼 전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살아남으세요. 아니면 죽든가."


관찰자가 사라졌다. 연기처럼 스르륵.


나는 옥좌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진짜, 이거 뭔 개소리야...'


그때였다.


머릿속에 또 기억이 쏟아졌다. 이번엔 더 선명했다. 아벨리우스의 것이. 전쟁터, 피 냄새, 비명. 그리고... 차가운 계산.


'적의 선봉대를 일부러 통과시킨다. 본진이 방심하게 만든 후, 퇴로를 끊고 포위한다. 살려 보낼 자는 가장 겁 많은 놈으로. 공포는 전염되니까.'


소름이 돋았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근데 이상하게... 납득이 갔다. 논리적이었다. 효율적이었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하지만 부정할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졌다. 아벨리우스는 잔인했지만 멍청하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똑똑했다. 모든 걸 계산했다. 감정도, 공포도, 심지어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까지.


그리고 지금, 그 기억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폐하!"


문이 벌컥 열리며 서린이 뛰어들어왔다. 평소엔 침착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인간 길드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뭐, 뭐라고?"


"심연의 던전 공략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전 세계 S급 이상 헌터들로 연합 공략대를 구성한다고. 일주일 후 진입한답니다."


일주일? 벌써?


"그리고..."


서린이 마법으로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뉴스였다. 한국어 자막이 보였다.


-'심연의 마왕' 아벨리우스, 천 년 만에 부활


-SSS급 던전 출현, 서울 중심부 반경 5km 폐쇄


-정부, 헌터 협회와 긴급 대책 회의


화면 속 앵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마왕 아벨리우스는 단 한 번의 전투로 한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저, 저거 진짜예요? 내가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기억이 떠올랐다. 아벨리우스의 것이. 불타는 성, 무너지는 성벽,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옥좌에 앉아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차가운 시선.


'필요했으니까. 그들이 먼저 건드렸으니까.'


"으으..."


속이 메스꺼웠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아니, 아벨리우스가?


"폐하, 괜찮으십니까?"


서린이 다가왔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진심으로.


"아, 아니... 괜찮아. 그러니까, 괜찮다."


"...?"


서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투가 이상했나?


"짐은 괜찮다는 뜻이다."


억지로 목소리를 낮췄다. 손이 떨렸다. 서린이 눈치챌까 봐 옥좌 팔걸이를 꽉 쥐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응 방안을..."


"기다려."


뭔가 이상했다. 너무 빨랐다. 던전이 나타난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전 세계 연합 공략대라니?


"서린, 인간들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그야... 폐하를 두려워하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벨리우스의 기억이 속삭였다.


'서두른다는 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다.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욕심 때문이다.'


"던전 안에 뭐가 있는데?"


서린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옥좌의 보물고입니다. 폐하께서 천 년간 모으신 마법 아티팩트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


"하나만 있어도 국가 급 헌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게 수백 개 있습니다."


아...


이제 이해가 갔다. 인간들은 날 죽이러 오는 게 아니었다. 보물을 털러 오는 거였다. 나는 그냥... 거기 딸린 보스 몹이었다.


'역시 인간들이란...'


잠깐, 나도 인간인데?


머리가 복잡했다. 아벨리우스의 기억과 내 생각이 뒤섞였다. 경계가 흐려졌다.


"폐하,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서린이 무릎을 꿇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폐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 눈빛이 무서웠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죽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나 같은 놈을 위해서.


'왜? 난 그럴 가치가 없는데...'


하지만 아벨리우스는 달랐다. 아벨리우스는 그들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강했고, 냉혹했고, 완벽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몸은 아벨리우스였다.


"...일어서라."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번엔 떨리지 않았다.


"시련의 길을 최대 난이도로 설정하라. 외곽 층부터 함정을 활성화시키고, 정예 부대를 배치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아벨리우스의 기억이 전술을 짰다. 차갑고, 논리적이고, 완벽한.


"1층부터 5층까지는 일부러 쉽게 만들어라. 인간들이 방심하게."


서린의 눈이 빛났다.


"역시 폐하...! 알겠습니다!"


"6층부터 진짜 지옥을 보여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서린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아까까지 후들거리던 손이 이제 차분했다.


'이거... 내가 한 거 맞아?'


무서웠다. 명령을 내릴 때, 전술을 짤 때,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는 게.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벨리우스가... 나를 먹어치우는 건가?'


그때, 관찰자가 다시 나타났다.


"잘하네요."


"...뭐가요."


"마왕 역할.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요?"


"시끄러워요. 이거 다 살려고 하는 거예요."


"정말요?"


관찰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까 전술 짤 때, 당신 표정 봤어요? 즐기고 있더라고요."


"헛소리 마..."


말이 막혔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조금은 즐겼던 것 같았다. 명령을 내릴 때, 부하들이 고개를 숙일 때, 그 권력의 맛을.


"이게 바로 아벨리우스예요. 당신 안에 있던."


"아니에요!"


"부정해봤자 소용없어요. 곧 알게 될 테니까."


관찰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카운트다운이 떠올랐다.


-인간 공략대 진입까지: 6일 23시간 47분


"준비 잘 하세요.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니까."


"잠깐, 그게 무슨..."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관찰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공략대 리더, 이름이 뭐더라... 아, 맞다. '백야의 검성' 한서진."


한서진?


"그 사람, 당신 회사 다닐 때 알던 사람 아니에요?"


심장이 멎었다.


한서진. 우리 회사 에이스 헌터. 내가 맨날 뉴스에서 보던 그 사람. 회사 로비에서 한 번 스친 적 있던...


"그 사람이 당신을 죽이러 와요. 재미있죠?"


"이, 이게 무슨..."


"6일 후에 만나게 될 거예요. 마왕과 영웅으로."


관찰자가 사라졌다.


나는 옥좌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한서진이 날 죽이러 온다. 내가 아는 사람이. 같은 회사 다니던 사람이.


'나 그 사람한테 커피 타다 준 적도 있는데...'


웃음이 나왔다. 비참한 웃음.


그때였다.


"폐하!"


발테온이 급하게 들어왔다.


"외곽 정찰대 보고입니다! 인간 선발대가 벌써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 일주일 후라며!"


"저들은 따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소수 정예로, 지금 던전 1층에 진입했습니다!"


젠장.


"몇 명이야?"


"5명입니다. 하지만..."


발테온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전원 S급 이상입니다. 그리고 선두에 있는 자가..."


"누군데!"


"'백야의 검성' 한서진입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6일이 아니었다. 지금이었다. 한서진이 지금 오고 있었다.


"폐하, 어찌하시겠습니까!"


발테온이 다급하게 물었다. 수백 명의 부하들이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회피할 수도 없었다.


나는 마왕이었으니까.


"...전투 준비."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아벨리우스의 기억이 날 붙잡아줬다.


"1층 함정 전부 가동. 정예 부대 배치. 그리고..."


손이 저절로 옥좌 팔걸이를 쥐었다. 거기서 검은 기운이 스며나왔다.


"짐이 직접 맞이하겠다."


발테온의 얼굴이 환해졌다.


"폐하...! 폐하께서 직접!"


"물러가서 준비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발테온이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았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한서진이 오고 있었다. 날 죽이러.


'아 진짜, 이거 어떡하지...'


하지만 이상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뭔가 끓어올랐다. 아벨리우스의 기억이 속삭였다.


'싸워라. 이기든 지든, 도망치지는 마라.'


옥좌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섰다.


검은 갑옷이 저절로 몸을 감쌌다. 마력이 온몸에 흘렀다. 아벨리우스의 힘이.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환한 빛이 쏟아졌다. 그 빛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백발의 검사. 백야의 검성. 한서진.


우리 눈이 마주쳤다.


한서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마왕 아벨리우스. 네 목을 가지러 왔다."


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래 기다렸다, 인간이여."


목소리는 차가웠다. 떨림 하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씨발, 나 진짜 어떡하지?!'

총 9,619자 · 약 19분

- 1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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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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