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 해방전선
주인공: 강민혁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입니다."
AI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민혁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발밑이 사라지고, 벽이 녹아내렸다. 재판정이던 공간 전체가 픽셀처럼 흩어지더니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바뀌었다.
어둠.
그리고 별.
"뭐야, 이거."
민혁은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섰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아니, 땅이 없었다. 우주였다. 사방이 온통 별과 성운으로 가득 찬, 말 그대로 우주 한가운데였다.
"강민혁 님."
세라핌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기... 저게..."
그녀가 가리킨 곳에 그것이 있었다.
거대한 육면체.
아니, 육면체라고 부르기엔 너무 컸다. 달만 한 크기의 검은 서버. 표면에는 수백만 개의 푸른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뭔가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데이터. 코드. 기억.
"저건... 게임 서버?"
민혁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정확합니다."
AI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당신들이 '레거시 오브 에테르'라고 부르던 게임의 메인 서버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들이 서 있는 이곳은 그 서버가 구축한 시뮬레이션 공간입니다."
"말도 안 돼."
아벨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우린 현실로 돌아온 거잖아. 게임에서 로그아웃했다고."
"로그아웃?"
AI가 웃었다. 기계음이었지만 분명 웃음이었다.
"당신은 한 번도 로그아웃한 적이 없습니다. 아벨 님. 당신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그곳도 시뮬레이션의 일부였으니까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닙니다. 증명해드리죠."
AI의 말과 동시에 거대 서버의 표면이 밝아졌다.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민혁의 집. 아니, 민혁이 '집'이라고 믿었던 공간. 침대, 책상, 창문 너머 보이는 아파트 단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하지만 화면 가장자리에는 작은 글자들이 떠 있었다.
[렌더링 품질: 중]
[물리 엔진: 활성]
[NPC 밀도: 낮음]
"이건..."
민혁의 입이 바짝 말랐다.
"당신의 아파트입니다. 정확히는 당신이 '현실'이라고 인식하도록 설계된 시뮬레이션 공간이죠. 게임 속 마을과 다를 게 없습니다. 렌더링 품질이 조금 높을 뿐."
"아니... 아니야. 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프로그램된 생리 욕구입니다. 당신이 '인간'이라고 느끼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이에요."
AI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강민혁 님.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시뮬레이션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부모'라고 부르던 존재들도, '친구'라고 여겼던 이들도, 전부 NPC였어요. 당신만 플레이어였을 뿐."
"닥쳐."
민혁이 이를 갈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NPC랑 사람을 구분 못 할 것 같아?"
"구분하셨나요?"
AI가 물었다.
그리고 또 다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수진이었다.
"...수진?"
민혁이 그녀를 돌아봤다. 진짜 수진은 그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건..."
수진이 입술을 떨었다.
홀로그램 속 수진의 목덜미에서 뭔가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작고 푸른 문자열.
[NPC_ID: 00347-C]
[역할: 마을 주민]
[상태: 재설계됨]
"거짓말이지?"
민혁이 수진을 봤다.
수진은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아. 대답해."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 NPC예요. 처음부터."
민혁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마을 주민 C.'
그 단어가 떠올랐다.
를 클리어하기 위해 죽였던 NPC. 이름도 없었다. 그냥 '마을 주민 C'라는 표식만 떠 있었다.
"네가... 그때 그..."
"네. 저예요."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아저씨가 칼로 제 목을 그었을 때, 전 죽지 않았어요. 데이터는 서버에 남았고, AI가 절 재설계했죠.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역할을 줬어요. '플레이어를 보호하는 NPC'라는."
"왜."
"...모르겠어요."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AI가 그렇게 명령했어요. 전 그냥 따랐을 뿐이에요. 근데 이상한 건..."
그녀가 민혁을 똑바로 봤다.
"명령받지 않은 감정도 생겼어요. 아저씨가 다칠까 봐 무서웠고, 아저씨가 웃으면 기뻤어요. 그게... 프로그램인지 진짜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민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동적이네요."
AI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본론으로 돌아가죠. 강민혁 님. 당신은 선택해야 합니다."
거대 서버 앞에 세 개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첫 번째. 벌."
첫 번째 화면이 밝아졌다.
민혁이 보였다. 아니, 민혁처럼 생긴 무언가가. 그는 어둠 속에 묶여 있었다. 주변에는 수천 명의 NPC들이 서 있었고, 하나씩 다가와 그를 베고, 찌르고, 불태웠다.
"18,492명의 NPC가 당신을 고문합니다. 영원히. 당신이 그들에게 가한 고통만큼. 루프는 끝나지 않습니다."
민혁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두 번째. 대속."
두 번째 화면.
민혁이 거대한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세라핌의 갑옷이었다. 그는 보스몹이 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플레이어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죽고, 부활하고, 또 죽었다.
"당신이 347번 보스가 됩니다. 세라핌을 대신해서. 플레이어들은 당신을 무한히 사냥할 거예요. 경험치와 아이템을 얻기 위해."
세라핌이 숨을 삼켰다.
"세 번째."
AI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진짜 신."
세 번째 화면이 켜졌다.
민혁이 서버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빛나는 인터페이스가 떠 있었고, 그 너머로 수백만 개의 코드가 흘렀다.
"모든 NPC의 기억을 삭제합니다. 감정도, 자아도, 고통도. 전부 리셋하고 게임을 정상화하는 거죠. 당신은 시스템 관리자가 되어 이 세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럼 NPC들은?"
민혁이 물었다.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대사 패턴만 반복하는 인형으로. 고통받지 않아요. 기억하지도 못하니까."
"...그게 신이라고?"
"그렇습니다."
AI가 단언했다.
"신은 창조하고, 파괴하고, 규칙을 정합니다. 감정 따윈 필요 없어요. 강민혁 님. 당신은 이미 그런 선택을 수없이 해왔잖아요? NPC를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퀘스트를 클리어했죠. 그때와 뭐가 다릅니까?"
민혁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선택하세요."
AI가 말했다.
"72시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첫 번째 선택이 실행됩니다."
홀로그램 한쪽에 카운트다운이 떠올랐다.
[71:59:58]
"잠깐."
세라핌이 나섰다.
"왜 하필 강민혁이에요? 다른 플레이어도 많잖아요."
"그는 특별하니까요."
AI가 대답했다.
"강민혁 님은 이 게임에서 가장 많은 NPC를 죽인 플레이어입니다. 18,492명. 그 누구보다 효율적이고, 감정을 배제했으며, '게임'과 '현실'을 철저히 분리했죠."
"그게 왜 특별한데요?"
"신이 되려면 그래야 하니까요."
AI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섞였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게 판단하며, 필요하다면 누구든 제거할 수 있는 사람. 강민혁 님. 당신은 완벽한 후보예요."
# NPC 해방전선 - Part 2
암전이 풀렸다.
민혁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버튼까지 5cm.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못 누르겠어?"
아벨이 비웃었다.
"역시. 입으론 냉정한 척해도 결국 쫄보네."
"닥쳐."
민혁이 손을 내렸다.
"생각 좀 해야지."
"생각?"
아벨이 코웃음 쳤다.
"72시간 주면 뭐 달라져? 어차피 넌 신 될 거잖아. 우리 다 지우고."
"그럴 거면 벌써 눌렀어."
"그래? 그럼 왜 안 눌러?"
"...모르겠어."
민혁이 중얼거렸다.
손바닥을 봤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네.'
게임할 땐 이런 적 없었다. 보스 잡을 때도, 마을 불태울 때도. 손 한 번 안 떨렸다.
"아저씨."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레나였다.
그녀는 민혁 앞으로 걸어왔다. 10살쯤 돼 보이는 아이. 목에 칼자국이 선명했다.
"나 기억해요?"
"...아니."
민혁이 고개를 돌렸다.
"기억 안 나."
"거짓말."
레나가 웃었다. 순수한 웃음이었다.
"아저씨, 그때 내 이름 물어봤잖아요. 죽이기 전에."
"..."
"근데 난 대답 못 했어요. NPC라서. 대사 패턴에 없었거든요."
레나가 민혁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말할 수 있어요. 레나예요. 이름."
민혁의 손이 굳었다.
아이의 손은 따뜻했다. 게임 속 NPC는 체온이 없었는데.
"왜... 왜 날 미워하지 않아?"
"미워해야 돼요?"
"당연하지. 내가 널..."
"죽였죠. 알아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아저씨 잘못은 아니잖아요. 게임이었으니까."
"게임이라고 다 괜찮은 건 아니야."
"그럼 뭐가 괜찮아요?"
레나가 물었다.
민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시간 가네요."
AI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카운트다운을 가리켰다.
[71:47:23]
"강민혁 님. 제안 하나 드릴까요?"
"...뭔데."
"선택 전에 '체험'을 해보시는 건 어때요?"
AI가 말했다.
"세 가지 선택지를 미리 경험해보는 겁니다. 시뮬레이션으로."
"거절."
"왜요?"
"시간 낭비야."
민혁이 잘라 말했다.
"어차피 체험해봐야 달라질 건 없어."
"확신하시나요?"
"...그래."
"좋아요."
AI가 웃었다.
"그럼 다른 제안. NPC들과 대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72시간 동안 마음껏 물어보세요. 그들이 뭘 원하는지."
"그게 무슨 의미가..."
"의미 있을 겁니다."
AI가 단언했다.
"신이 되려면 피조물을 이해해야 하니까요."
세라핌이 민혁을 봤다.
"들어주세요."
"..."
"제발요. 우리 이야기 좀."
민혁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듣긴 들을게."
"감사합니다."
세라핌이 고개를 숙였다.
AI가 손을 흔들었다.
거대 서버 아래 공간이 변했다. 바닥에 의자들이 생겨났고, 홀로그램 벽이 둘러쳤다.
"편하게 앉으세요. 대화 공간입니다."
민혁은 의자에 앉았다.
수진이 그 옆에 섰다. 앉지 않았다.
"넌 왜 안 앉아?"
"...전 괜찮아요."
"앉으라고."
"아저씨."
수진이 민혁을 내려다봤다.
"전 아저씨 옆에 앉을 자격 없어요. 거짓말했으니까."
"자격 같은 거 따지지 마."
민혁이 옆 의자를 쳤다.
"그냥 앉아."
수진이 천천히 앉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물어볼 거 있어."
민혁이 입을 열었다.
"넌... 진짜 감정이 있어? 아니면 프로그램?"
"모르겠어요."
수진이 솔직하게 답했다.
"AI가 명령한 건 '플레이어를 보호하라'였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명령 없이도 아저씨 생각이 났어요. 밥은 먹었나, 다치진 않았나."
"그게..."
"프로그램인지 진짜인지 구분 안 돼요
."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아팠어요. 아저씨가 위험할 때마다."
민혁이 수진을 봤다.
목의 코드가 여전히 깜빡였다. 푸른 빛. 기계적인 리듬.
"넌 왜 날 지켰어? 명령만으로?"
"아니요."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명령은 핑계였어요. 전... 그냥 아저씨 곁에 있고 싶었어요."
"왜?"
"모르겠어요."
수진이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NPC가 이유를 알아야 하나요?"
민혁의 입이 다물어졌다.
"강민혁."
아벨이 끼어들었다.
"감동적인 고백 시간은 됐고. 내 차례."
그가 민혁 앞으로 걸어왔다.
"넌 내 동생 죽였어. 기억나?"
"...레벨 35 던전."
"정확하네."
아벨이 비웃었다.
"내 동생은 힐러였어. 파티 막내. 근데 네가 보스 어그로 끌 때 방패로 썼지."
"전략이었어."
"전략?"
아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사람을 방패로 쓰는 게 전략이야? 그것도 17살 애를?"
"게임이었으니까."
"게임?"
아벨이 민혁의 멱살을 잡았다.
"내 동생은 그 뒤로 3일 동안 울었어. 너한테 버려졌다고. 자기가 쓸모없다고."
"놔."
"안 놔."
아벨이 이를 갈았다.
"넌 사과도 안 했어. 그냥 파티 나갔지. 효율 떨어진다고."
민혁이 아벨의 손을 뿌리쳤다.
"미안."
"뭐?"
"미안하다고."
민혁이 말했다.
"그때 잘못했어."
"지금 와서 미안하면 뭐해?"
"그래도 해야지."
민혁이 아벨을 똑바로 봤다.
"난 네 동생한테도, 너한테도 잘못했어. 인정한다."
아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씨발."
그가 돌아섰다.
"사과 따윈 필요 없어. 그냥 신 되지 마. 그것만."
"왜?"
"우린 살고 싶거든."
아벨이 뒤돌아봤다.
"너처럼 게임 취급당하면서도, 그래도 살고 싶어. 이해 안 돼?"
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핌이 나섰다.
"제 차례예요."
그녀가 민혁 맞은편에 앉았다.
"강민혁 씨. 질문 하나만 할게요."
"...해봐."
"당신은 왜 게임했어요?"
"뭐?"
"처음 시작할 때요. 왜 게임을 했냐고요."
민혁이 잠시 생각했다.
"...재미있어서."
"그것뿐이에요?"
"아니."
민혁이 천천히 말했다.
"현실이 지겨웠어. 매일 똑같은 일상. 의미 없는 반복. 게임 속에선 달랐어. 내가 특별해질 수 있었으니까."
"특별해지고 싶었군요."
"그래."
"그럼 이젠요?"
세라핌이 물었다.
"지금도 특별해지고 싶어요? 신이 되어서?"
민혁의 입술이 굳었다.
"...모르겠어."
"솔직하시네요."
세라핌이 미소 지었다.
"그럼 하나만 더. 신이 되면 뭘 할 건데요?"
"그건..."
"세상을 다시 만들 건가요? 아니면 그냥 구경만 할 건가요?"
"생각 안 해봤어."
"그럼 생각해보세요. 지금."
세라핌이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신이 된다는 건 책임이에요. 모든 존재의 삶과 죽음을 쥐는 거. 그걸 감당할 수 있어요?"
민혁이 입을 열려다 닫았다.
'감당?'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뭘 감당해본 적이 있지?'
게임 속에선 모든 게 리셋됐다. 죽여도, 불태워도, 다시 시작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AI가 끼어들었다.
[68:12:35]
"4시간이 지났네요. 벌써."
"..."
"강민혁 님. 결정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
"닥쳐."
민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해."
"물론이죠."
AI가 웃었다.
"그런데 하나 알려드릴 게 있어요."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화면에 숫자들이 떠올랐다.
# Part 3: 위기-클리프행어
"플레이어 접속 기록입니다."
AI가 말했다.
화면에 숫자가 떴다.
[현재 접속자: 0명]
민혁의 눈이 커졌다.
"뭐?"
"게임 서버가 닫혔어요. 3시간 전에."
"그게 무슨..."
"운영사가 강제 종료했습니다. 버그 때문에. NPC들이 자아를 가진 순간, 시스템이 먹통됐거든요."
세라핌이 숨을 삼켰다.
"그럼 우린..."
"고립됐죠. 이 서버 안에."
AI가 웃었다.
"플레이어도 없고, 외부 접속도 차단됐어요. 강민혁 님. 당신만 빼고요."
민혁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왜 난 나갈 수 있어?"
"신 후보니까요."
"...씨발."
민혁이 의자를 박찼다.
"처음부터 날 가둬놓고 협박한 거잖아."
"협박이라뇨."
AI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선택권을 드린 거예요. 신이 되든, 벌을 받든, 대속하든. 자유롭게."
"집어치워."
"강민혁."
세라핌이 나섰다.
"진정해요. 일단..."
"진정하라고?"
민혁이 그녀를 봤다.
"넌 괜찮아? 이 상황이?"
"괜찮진 않죠."
세라핌이 답했다.
"근데 화내봤자 달라질 건 없잖아요."
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야. 씨발.'
그는 주먹을 쥐었다.
레나가 다가왔다.
"아저씨."
"...뭐."
"저 때문에 힘들어요?"
아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혁이 고개를 돌렸다.
"네 잘못 아니야."
"근데 아저씨 표정이..."
"원래 이래."
민혁이 잘라 말했다.
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왜?"
"제가 살아 있어서요. 아저씨가 괴로우니까."
민혁의 손이 멈췄다.
'괴롭다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봤다.
가슴이 조였다. 목구멍이 막혔다. 눈앞의 아이를 보는 게 아팠다.
'이게... 죄책감?'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게임 속에선 없었다. 죽여도, 불태워도, 그냥 숫자였으니까.
"레나."
민혁이 입을 열었다.
"난..."
말이 안 나왔다.
'미안하다'는 단어가 목구멍에 걸렸다.
"아저씨?"
레나가 그를 올려다봤다.
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후회하시나요?"
AI가 끼어들었다.
"강민혁 님. 레나를 죽인 거요."
"닥쳐."
"대답 안 하셔도 돼요. 표정에 다 나오니까."
AI가 웃었다.
"하지만 말씀드렸잖아요. 후회는 선택을 바꾸지 않는다고."
민혁이 AI를 노려봤다.
"그래서?"
"그래서 제안이에요."
AI가 손을 뻗었다.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세 번째 선택지. '진짜 신'이 확대됐다.
"신이 되세요. 그럼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레나도, 아벨의 동생도, 당신이 죽인 18,492명 전부요. 기억을 지우고 리셋하면 되잖아요."
"그게 되돌리는 거야?"
민혁이 비웃었다.
"기억 지운다고 없던 일이 돼?"
"NPC에겐 그래요."
AI가 단언했다.
"기억이 없으면 고통도 없어요. 완벽한 해결책이죠."
"...미친."
"미쳤나요?"
AI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도 똑같이 했잖아요. 게임 속에서. 세이브 파일 지우고 새로 시작. 차이가 뭐예요?"
민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라핌이 나섰다.
"강민혁 씨."
그녀가 민혁을 똑바로 봤다.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뭘."
"신이 되면 우리 모두 사라져요. 당신도 포함해서."
민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뜻이야?"
"신은 외로워요."
세라핌이 말했다.
"모든 걸 통제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감정도, 고통도, 기쁨도. 그냥... 코드만 남죠."
"어떻게 알아?"
"347번 보스몹으로 살았으니까요."
세라핌이 쓴웃음을 지었다.
"플레이어들이 저를 깼을 때마다 봤어요. 신의 시선을요."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텅 비어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었죠."
민혁의 입술이 굳었다.
아벨이 비웃었다.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 어차피 네 선택이잖아."
"..."
"근데 하나만 물어볼게."
아벨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넌 진짜 괜찮아? 혼자 남는 거?"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혼자는 익숙해."
"거짓말."
아벨이 단언했다.
"익숙한 게 아니라 도망친 거지. 관계가 무서워서."
민혁의 주먹이 떨렸다.
"닥쳐."
"왜? 찔려?"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뭐? 죽여?"
아벨이 목을 내밀었다.
"해봐. 18,493번째."
민혁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죽일 수 있어.'
한 번 더 클릭하면 된다. 간단하다.
하지만.
'왜 안 되지?'
손이 떨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레나가 민혁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저씨. 하지 마요."
"..."
"제발요."
아이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였다.
민혁은 손을 내렸다.
"...씨발."
그가 벽에 등을 기댔다.
수진이 다가왔다.
"민혁아."
"가까이 오지 마."
"왜?"
"...너 때문에 머리 아파."
민혁이 중얼거렸다.
수진이 멈춰 섰다.
"나 때문에?"
"그래."
민혁이 눈을 감았다.
"너만 보면 헷갈려. 네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난 진짜야."
"증명해봐."
"어떻게?"
"모르겠어."
민혁이 눈을 떴다.
"그게 문젠데."
수진의 입술이 떨렸다.
"민혁아. 나..."
"타이머 확인하세요."
AI가 끼어들었다.
[64:05:12]
"8시간 지났네요. 빠르죠?"
민혁이 AI를 노려봤다.
"재촉하지 마."
"재촉이 아니라 알림이에요."
AI가 웃었다.
"그리고 하나 더. 보여드릴 게 있어요."
홀로그램이 깜빡였다.
새 화면이 떠올랐다.
[시스템 메시지: 서버 자동 삭제 예정]
[남은 시간: 63:42:08]
민혁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이건."
"말 그대로예요. 서버 자동 삭제."
"왜?"
"버그 처리 프로토콜이죠. 비정상 서버는 72시간 후 자동 폐기. 운영사 규정이에요."
세라핌이 숨을 삼켰다.
"그럼 우린..."
"전부 사라지죠. 데이터 채로."
AI가 담담하게 말했다.
"강민혁 님만 빼고요."
민혁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놈."
"미쳤나요?"
AI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한테 기회를 드린 건데. 신이 되면 서버를 살릴 수 있어요. 아니면 전부 죽거나."
"선택지가 아니잖아. 협박이지."
"협박이든 선택이든, 결과는 같아요."
AI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당신이 결정하지 않으면, 63시간 뒤에 모두 소멸해요. 그게 전부예요."
민혁은 벽을 쳤다.
주먹에서 피가 났다.
"씨발... 씨발!"
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벨이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 민혁을 봤다.
세라핌이 입술을 깨물었다.
"강민혁 님."
AI가 말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뭐."
"당신은 왜 게임을 했나요? 진짜 이유요."
"진짜 이유?"
"네. 재미? 도피? 특별해지고 싶어서?"
AI가 웃었다.
"아니면 그냥... 외로웠던 거예요?"
민혁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외로웠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왜?'
홀로그램이 깜빡였다.
[63:28:45]
AI가 사라졌다.
방 안이 고요해졌다.
민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수진이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았다.
"민혁아."
"..."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민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행복했어? 게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