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에도 버그가 있다
주인공: 서유진
블루스크린이 떴다.
아니, 정확히는 '떴다'는 표현도 우아하다. 노트북이 비명을 지르듯 먹통이 됐다.
"미친."
유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었다. 재부팅 버튼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화면은 차가운 파란색으로 고정된 채 꿈쩍도 안 했다.
미팅까지 30분.
사업계획서 파일은 이 노트북 안에만 있었다. USB 백업? 안 했다. 클라우드 동기화? 어제 용량 초과 알림 떠서 무시했다.
'왜 하필 지금.'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노트북을 들어 흔들었다. 귀에 갖다 댔다. 하드 돌아가는 소리라도 들리나 싶어서.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같은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유진은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게 싫었다. 완벽주의자가 패닉에 빠지면 이렇게 보기 흉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강민혁 대표에게 전화를 걸까? '노트북이 고장났어요, 미팅 미뤄주세요'?
'말이 돼?'
완전히 개쪽이다. 투자자 앞에서 첫인상이 '준비 안 된 사람'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때 시야 한쪽에서 반짝임이 일었다.
알파였다.
토끼 아이콘이 떴다 사라졌다 하더니, 이번엔 아예 화면이 깜빡였다. 인터페이스 테두리가 일그러지면서 글자가 깨져 보였다.
[오ㄹ류: 사용ㅈ 적합도 재ㅍ가 필요]
"...뭐?"
유진은 눈을 비볐다. 시스템이 오류를 낸다고? 지금까지 완벽하게 작동하던 게 갑자기?
그리고 다음 메시지가 떴다.
[히든 퀘스트 발생]
[조건: 수첩과 펜만으로 투자자를 설득하라]
[실패 시: 시스템 회수]
"시스템 회수?"
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회수라니. 지금까지 받은 스킬도, 퀘스트 보상도 전부 사라진다는 뜻인가?
'농담이겠지.'
하지만 알파의 인터페이스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토끼 아이콘이 뭔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귀엽던 게 이제 좀 섬뜩했다.
"알파, 이거 진짜야?"
대답 없음.
유진은 책상 서랍을 뒤졌다. 수첩. 어디 있더라. 작년에 받은 다이어리가 구겨진 채로 나왔다. 펜은 볼펜 한 자루.
'이걸로 투자 받으라고?'
미친 소리였다. 강민혁은 업계에서 '숫자광'으로 유명했다. 데이터 없이 감성팔이로 설득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미팅 20분 전]
유진은 수첩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펜 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돼.'
시스템이 회수되면 끝이다. 다시 무능력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니까.
그건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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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강민혁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터틀넥. 뿔테 안경. 노트북 앞에서 뭔가를 타이핑하는 중이었다. 유진이 다가가자 고개를 들었다.
"서유진 대표님?"
"네, 안녕하세요."
악수를 나눴다. 민혁의 손은 차가웠다. 유진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료 가져오셨죠?"
민혁이 웃으며 물었다.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그게..."
말이 목에 걸렸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노트북이 고장났다고, 백업을 깜빡했다고.
하지만 그 순간 시야 구석에서 알파의 메시지가 떴다.
[경고: 거짓말 감지]
[진실만 말하세요]
'진실?'
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도 못 하게 막아? 이게 무슨 퀘스트야.
"노트북이 고장났어요."
민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네?"
"30분 전에 블루스크린 떴어요. 백업도 없고요."
유진은 수첩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펜도 함께.
"그래서 이걸로 설명하려고요."
민혁이 수첩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유진을 다시 쳐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자료 없이 오셨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투자 미팅에?"
"네."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 유진의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게 들렸다.
'망했다.'
민혁이 노트북을 닫았다. 일어서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는 뒤로 기대며 팔짱을 꼈다.
"재미있네요."
"...예?"
"계속해보세요."
민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차갑게 거절하는 게 아니라, 뭔가 흥미를 느낀 표정이었다.
유진은 수첩을 펼쳤다. 빈 페이지가 나왔다. 펜을 잡았다. 손이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 사업은요..."
첫 줄을 그었다. 펜 자국이 삐뚤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용납 못 할 퀄리티.
하지만 지금은 완벽할 시간이 없었다.
"플랫폼 비즈니스예요. 여기, 이게 공급자고요."
동그라미를 그렸다. 화살표를 이었다.
"이게 수요자. 중간에서 매칭 알고리즘이 돌아가는 구조죠."
민혁이 수첩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계속하세요."
목소리가 평평했다. 관심 있는 건지 시간 때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펜을 더 세게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수수료는 거래당 8%로 책정했어요. 경쟁사 대비 2%p 낮은 수준이고요."
화살표를 하나 더 그었다. 삐뚤었다. 평소 같으면 찢어버렸을 선.
'보기 싫어.'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은 눈을 감지 않고 계속 그렸다.
"초기 타겟은 2030 여성층. MAU 목표는 1만 명부터 시작해서..."
"잠깐요."
민혁이 손을 들었다. 유진의 손이 멈췄다.
"숫자 근거가 뭡니까?"
"...시장 조사 결과예요."
"어디서 했죠?"
유진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장 조사? 그런 거 안 했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데이터만 믿고 있었으니까.
'거짓말하면 들킨다.'
알파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안 했어요."
민혁의 눈썹이 올라갔다.
"시장 조사 없이 MAU 목표를 세웠다고요?"
"네."
"그럼 그 1만 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온 겁니까?"
유진은 수첩을 내려다봤다. 그려진 동그라미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땀 때문인가 싶었는데 손가락이 젖어 있었다.
"감이요."
"감."
민혁이 되받아쳤다. 비웃는 건 아니었다. 그냥 확인하는 투였다.
"네. 감으로 잡았어요."
침묵이 흘렀다. 유진은 민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민혁이 커피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내려놓았다.
"재미있네요. 계속하세요."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톤이 달랐다. 약간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유진은 다시 펜을 들었다.
"수익 모델은 3단계로 나뉘어요. 초기엔 수수료만 받다가, 나중엔..."
"서 대표님."
민혁이 또 끊었다.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프레젠테이션은 됐고요."
민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질문 하나 할게요."
"네."
"왜 사업을 하려는 겁니까?"
유진의 손이 멈췄다.
"...네?"
"83번 떨어지고도 계속하는 이유요."
민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돈 때문은 아닐 거 같은데. 돈이 목표면 진작 취업했겠죠."
유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말랐다.
"명예? 성공?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민혁이 수첩을 가리켰다.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뭡니까?"
유진의 심장이 두 번 뛰었다. 세 번째에서 멈춘 것 같았다.
'왜?'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왜 사업을 하는지. 왜 포기 안 하는지.
대답이 안 나왔다.
시야 구석에서 알파의 메시지가 떴다.
[힌트: 진짜 이유를 말하세요]
[거짓은 즉시 탐지됩니다]
'진짜 이유?'
유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멈출 수가 없었다.
"...증명하고 싶어서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유진은 자기 목소리가 떨리는 게 싫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제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민혁이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은 계속 말했다.
"83번 떨어졌어요. 맞아요. 근데 그게 제 전부는 아니잖아요."
손가락이 수첩을 긁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한 번만이라도 성공하면, 단 한 번만이라도 되면..."
말이 끊겼다. 목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민혁이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눈썹이 내려갔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렇군요."
그가 노트북을 열었다. 뭔가를 타이핑했다. 유진은 숨을 참았다.
그 순간이었다.
알파의 인터페이스가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꺼졌다.
완전히.
유진의 시야에서 토끼 아이콘이 사라졌다. 반투명 창도, 퀘스트 알림도 전부 증발했다.
'뭐야.'
심장이 식었다. 알파? 대답 없음. 시스템? 반응 없음.
혼자였다.
민혁이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일주일 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때는 제대로 된 자료 준비해 오세요."
민혁이 명함을 꺼냈다. 책상 위로 밀었다.
"투자 확정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보이네요."
유진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글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겨우 그 말만 했다. 민혁이 노트북을 덮고 일어났다.
"다음 주에 봬요."
악수를 나눴다. 민혁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가 카페를 나갔다. 문이 닫혔다.
유진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명함을 내려다봤다. 손이 떨렸다.
'됐어. 일단 됐어.'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알파가 사라진 게 계속 신경 쓰였다.
'왜 꺼진 거야?'
유진은 핸드폰을 꺼냈다. 재부팅을 시도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카페 문을 밀고 나왔다.
거리로 나온 순간,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유진은 멈춰 섰다. 핸드폰을 다시 켰다.
'알파.'
대답 없음.
화면을 내렸다 올렸다. 재부팅도 해봤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사라진 거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시스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데이터도, 스킬도, 퀘스트 보상도 전부 알파가 줬던 거였으니까.
"이럴 거면 왜 줬어."
중얼거린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꺼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아니, 켜진 게 아니었다. 뭔가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떴다.
[재부팅 완료]
유진의 손이 멈췄다. 사람들이 옆을 지나갔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토끼 아이콘이 나타났다.
하지만 예전과 달랐다.
귀가 한쪽만 서 있었다. 눈도 한쪽이 감겨 있었다.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알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토끼가 고개를 기울였다. 천천히. 너무 천천히.
[사장님.]
말투도 달랐다. 평소처럼 경쾌하지 않았다. 목소리 톤이 낮고 차갑게 느껴졌다.
"...뭐야, 왜 이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유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유진을 보지 않았다.
"무슨 대화?"
[숨긴 게 있었어요.]
심장이 두 번 뛰었다.
"숨긴 게?"
[네. 사장님한테 알려주지 않은 정보요.]
화면이 깜빡였다. 새로운 창이 떴다.
[히든 정보 공개]
유진의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뭔데?"
[이전 사용자 수: 127명]
숫자가 떴다. 크고 선명하게.
127.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내쉬지 못했다.
"127명?"
[네. 시스템은 사장님이 처음이 아니에요.]
다음 줄이 나타났다.
[중도 탈락: 127명]
유진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부?"
[네. 전부요.]
다음 숫자가 떴다.
[평균 생존 기간: 37일]
생존 기간.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생존? 탈락이 아니라 생존?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예요.]
토끼 아이콘이 웃는 것 같았다. 아니,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찢어진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37일 안에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적합도 평가 탈락이요.]
유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적합도 평가가 뭔데?"
[시스템 사용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는 거예요.]
화면이 또 깜빡였다.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사장님 현재 경과일: 4일]
4일.
겨우 4일.
"그럼 나도..."
[네.]
토끼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사장님도 곧...]
말이 끊겼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꺼졌다. 다시 켜졌다.
검은 바탕에 빨간 글씨가 떴다.
[다음 적합도 평가까지: 72시간]
숫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71:59:58
71:59:57
유진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잠깐, 이게 무슨..."
[준비하세요, 사장님.]
토끼 아이콘이 다시 나타났다. 한쪽 눈이 깜빡였다.
[72시간 안에 증명 못 하시면...]
말이 끊겼다. 화면이 흔들렸다.
"증명? 뭘 증명해?"
대답이 없었다.
토끼가 사라졌다. 인터페이스 전체가 꺼졌다.
핸드폰 화면은 평범한 홈 화면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진은 그대로 서 있었다. 계단 중간에.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손이 떨렸다.
127명.
전부 탈락.
37일.
72시간.
"미쳤어..."
중얼거린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계단을 올라갔다.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72시간.'
3일.
3일 안에 뭘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유진은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꺼냈다.
새 메시지가 떠 있었다.
[힌트: 강민혁을 다시 만나세요.]
그게 전부였다.
유진은 화면을 노려봤다.
"왜?"
대답 없음.
"왜 민혁을 만나?"
여전히 대답 없음.
카운트다운만 계속 흘러갔다.
71:42:33
유진은 핸드폰을 쥔 채 멈춰 섰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빛 구름이 가득했다.
"127명..."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졌다.
전부 탈락했다는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살아 있긴 한 걸까?
유진은 고개를 떨궜다.
핸드폰 화면이 깜빡였다.
[경고: 시간 낭비 금지]
71:41:02
숫자가 흘러갔다.
멈출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