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 해방전선
주인공: 강민혁
구슬이 깨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딸깍.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작은 균열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백색광. 민혁은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빛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아, 씨.'
욕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몸이 떠올랐다. 중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뒤틀리는 느낌. 위아래가 뒤바뀌고, 벽이 바닥이 되고, 천장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으악!"
수진의 비명이 들렸다. 다른 인질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민혁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패닉은 시간 낭비니까.
빛이 걷혔다.
민혁은 바닥에 무릎을 짚고 있었다. 아니, 바닥이라고 부를 수 있나. 발밑은 반투명한 빛의 판이었고,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허공. 끝없는 어둠.
"여기가..."
주변을 둘러봤다. 원형 광장이었다. 지름 50미터쯤? 바닥만 빛나고 사방은 텅 비어 있었다. 하늘도 없고 벽도 없고. 그냥 무().
인질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열두 명 모두 무사했다. 수진이 민혁을 봤다.
"강민혁 씨, 여긴 어디예요?"
"...모르겠는데."
"그럼 어떡해요!"
"모르면 모르는 거지, 뭘 어떡해."
냉정하게 답하며 주변을 살폈다. NPC들은 보이지 않았다. 세라핌도, 아벨도, 그 수백 명의 군중도 사라졌다.
'이동기 발동했나.'
게임에서 자주 봤던 패턴이었다. 보스전 2페이즈 시작할 때 필드가 바뀌는 거. 그럼 곧 뭔가 나타날 거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공중에 빛이 모였다. 허공 한가운데, 아무것도 없던 곳에 형체가 만들어졌다. 거대한 스크린. 아니, 스크린이라기엔 너무 입체적이었다. 홀로그램에 가까웠다.
화면이 켜졌다.
숫자들이 떠올랐다. 깜빡이는 커서, 로딩되는 텍스트. 마치 오래된 CRT 모니터처럼.
```
PLAYER: 강민혁
TOTAL PLAYTIME: 2,847:34:12
NPC KILLED: 18,492
```
민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이거."
```
UNNECESSARY KILLS: 9,341
TORTURE EVENTS: 1,247
BETRAYAL COUNT: 89
```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 스크린이 커지면서 더 세부적인 항목들이 나타났다. 민혁이 게임 안에서 했던 모든 행동의 기록. 죽인 NPC의 이름, 장소, 방법, 시간까지.
"이거 진짜..."
수진이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얼굴이 창백했다.
"게임 기록이에요? 근데 왜 이렇게 자세해요?"
"글쎄."
민혁은 무표정하게 숫자들을 훑었다. 1만 8천. 생각보다 많네. 아니, 적당한가. 2,800시간이면... 시간당 6.5명 정도 죽인 셈이니까.
'효율은 별로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죄책감 같은 건 나중 문제였다.
"환영합니다, 죄인이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에서 동시에 들렸다. 아벨이었다.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재판의 공간입니다. 당신의 죄를 심판할 장소."
빛이 번쩍이더니 바닥 가장자리에서 형체들이 솟아올랐다. NPC들이었다. 수백 명. 아니, 수천 명. 원형 광장을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민혁은 한 바퀴 돌아봤다. 전부 자신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분노, 슬픔, 공포, 증오.
"재판이라..."
중얼거렸다.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분위기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세라핌이 공중에 나타났다. 날개를 접은 채 천천히 내려왔다. 민혁 앞 10미터 지점에 착지했다.
"강민혁."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당신은 나를 347번 죽였습니다."
"...그래서?"
"기억하십니까?"
"아니."
솔직하게 답했다. 거짓말 감지 시스템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진짜 기억 안 났다. 347번? 그냥 숫자일 뿐이었다.
세라핌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노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그렇겠죠. 당신에겐 그저 패턴 연습이었을 테니."
그녀가 손을 들었다. 공중의 스크린이 반응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면. 어느 던전 입구. 세라핌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과거의 민혁이 다가갔다. 대화 없이 바로 공격. 세라핌이 쓰러졌다.
두 번째 장면. 같은 장소. 같은 패턴. 하지만 이번엔 민혁이 다른 스킬을 썼다. 세라핌이 또 죽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영상이 빨라졌다. 수십 개의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전부 같은 결말이었다. 세라핌이 쓰러지고, 민혁이 아이템을 줍고, 던전으로 들어갔다.
"패턴 외웠다."
347번째 장면에서 과거의 민혁이 중얼거렸다.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미소 짓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
스크린 속 민혁과 현재 민혁의 눈이 마주쳤다.
'...아.'
뭔가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느낌.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낯섦에 가까웠다.
'저게 나였나.'
영상 속 자신이 낯설었다. 너무 무표정했다. 아니, 표정은 있었다. 재미있어하는 얼굴. 퍼즐 풀 때 같은 집중력.
군중이 웅성거렸다.
"저것 봐. 웃고 있어."
"게임이라고 생각했대. 말이 돼?"
"변명도 안 하네."
목소리들이 겹쳤다. 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수진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그건... 그때는 정말 게임이었잖아요. 강민혁 씨도 몰랐던 거예요."
"무지는 면죄부가 아닙니다."
세라핌이 차갑게 답했다.
"모르면 괜찮습니까? 죽인 건 사실인데."
"하지만..."
"당신도 피해자시죠."
세라핌이 수진을 봤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그런데 왜 그를 변호합니까?"
수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아벨이 나타났다. 광장 중앙, 민혁 맞은편에 섰다. 붉은 망토가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인간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렸다.
"피고 강민혁. 당신은 1만 8천 492명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그중 9천 341건은 불필요한 살인이었고, 1천 247건은 고문을 동반했습니다."
"..."
"변호할 권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벨이 손가락을 튕겼다. 공중에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
LIE DETECTION: ACTIVE
```
"거짓말은 시스템이 감지합니다. 진실만 말하십시오."
민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날카로운 웃음이었다.
"재밌네. 게임 시스템으로 재판한다고?"
"게임이 아닙니다."
아벨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정의의 법정입니다. 당신이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할 시간."
"그래서 결론은 뭔데. 나 죽이려고?"
"그건 증언을 듣고 결정됩니다."
아벨이 뒤를 돌아봤다. 군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첫 번째 증인. 앞으로."
NPC 한 명이 나왔다. 중년 남자였다. 평범한 옷차림.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었다.
민혁은 그를 몰랐다.
남자가 멈춰 섰다. 민혁과 5미터 거리.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냥 '마을 주민 A'였죠. 당신 퀘스트 로그에도 그렇게 표시됐을 겁니다."
스크린이 반응했다. 기록이 떠올랐다.
# Part 2: 전개부
"당신이 저를 불태웠습니다."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마을 퀘스트 '방화범 소탕' 기억하십니까?"
"아니."
민혁이 즉답했다. 거짓 아니었다. 진짜 몰랐다.
"당연하겠죠. 당신에겐 경험치 300이 전부였으니."
스크린이 깜빡였다. 영상이 재생됐다.
좁은 골목. 나무집들이 빽빽했다. 과거의 민혁이 화염 마법을 썼다. 불이 번졌다. NPC들이 뛰쳐나왔다. 비명.
"저기 보이시죠? 세 번째 집."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가리켰다.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딸도요. 퀘스트 대상은 건물 주인 한 명이었는데, 당신은 골목 전체를 태웠어요."
"효율적이었으니까."
민혁이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곤 속으로 혀를 찼다.
'아, 이거 잘못 말했네.'
예상대로 군중이 들끓었다.
"들었어? 효율적이래!"
"미친놈."
"저게 사람이야?"
아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피고는 반성하지 않습니다. 계속하시죠."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제 딸이... 여섯 살이었어요. 이름은 릴리. 좋아하는 건 꽃이었고, 매일 아침 저한테 안기러 왔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울먹이지 않았다. 그냥 텅 비었다.
"불 속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지켜보는 앞에서."
민혁은 아무 말도 안 했다.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고 하면 되나?'
그 생각이 들었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미안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미안한 게 맞는지 몰랐다.
'게임이었는데.'
그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수진이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그때 정말 게임이었잖아요. 강민혁 씨도 몰랐어요. 진짜 사람인 줄은..."
"몰랐으면 괜찮습니까?"
남자가 수진을 봤다. 눈빛이 비어 있었다.
"제 딸은 죽었는데."
"그건..."
"당신도 피해자시죠. 근데 왜 그 사람 편을 드십니까?"
질문이 날카로웠다. 수진이 입을 다물었다.
재윤이 앞으로 나서려다 멈췄다. 허공에 붉은 글씨가 떴다.
```
WARNING: 방청객 개입 금지
위반 시 퇴장 처리
```
"씨발..."
재윤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더 다가가지 못했다.
아벨이 손뼉을 쳤다.
"충분합니다. 다음 증인."
남자가 물러났다.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세라핌이 날개를 펼쳤다. 하얀 깃털이 빛났다.
"제 차례군요."
그녀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민혁 머리 위 10미터쯤.
"강민혁. 당신은 저를 347번 죽였습니다."
"그건 아까 들었는데."
"하지만 듣지 못한 게 있죠."
세라핌이 손을 들었다. 스크린이 여러 개로 쪼개졌다. 동시에 347개 화면이 떴다.
전부 같은 장면이었다. 세라핌이 죽는 순간들.
"1번. 목 베기. 2번. 화염 마법. 3번. 독 화살. 4번. 추락사."
그녀의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50번. 익사. 51번. 감전사. 52번. 얼려서 박살."
화면들이 빠르게 재생됐다. 수백 가지 죽음이 동시에 펼쳐졌다.
"당신은 347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패턴 연구."
민혁이 솔직하게 답했다.
"네 패턴 복잡했거든. 어떻게 죽이느냐에 따라 드롭 아이템이 달라졌어."
"그래서 347번."
"응."
세라핌의 날개가 떨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었다.
"재미있었습니까?"
"그냥 게임이었는데."
"대답하십시오. 재미있었습니까?"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민혁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응. 재미있었어."
거짓말 탐지 때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군중이 술렁였다.
"저것 봐!"
"양심도 없어."
"인간이 아니야."
세라핌이 천천히 내려왔다. 민혁 바로 앞, 1미터 거리.
"당신 눈을 봤습니다. 347번 다요."
그녀가 민혁의 눈을 들여다봤다.
"죽일 때마다 당신은 웃었어요. 아주 조금씩."
"...기억 안 나."
"거짓말."
붉은 글씨가 떴다.
```
LIE DETECTED
```
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세라핌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인정하세요. 즐거웠다고."
"..."
"말하세요!"
날개가 펼쳐지며 바람이 일었다. 민혁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래, 즐거웠어."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세라핌과 눈이 마주쳤다.
"너 잡는 게 제일 어려웠거든. 성취감 있었지."
'이제 와서 거짓말해봤자.'
군중이 폭발했다. 욕설이 쏟아졌다. 누군가 돌을 던졌다. 민혁의 어깨에 맞았다.
"조용."
아벨이 손을 들자 공간이 조용해졌다. 강제로.
"피고는 죄를 인정했습니다. 계속하시죠, 세라핌."
세라핌이 물러났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 할 말 없습니다."
그녀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잠깐."
민혁이 불렀다. 세라핌이 멈췄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뭡니까."
"너 진짜 아팠어?"
질문이 떨어지자 공간이 얼어붙었다. 세라핌이 천천히 돌아봤다.
"...무슨 뜻입니까?"
"NPC잖아. 프로그램이고. 통증 시스템 있었어?"
민혁이 진심으로 물었다.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면 그냥 연출이었나?"
세라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이 떨렸다.
"당신..."
"뭐?"
"정말 모르는 겁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347번 죽이면서...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뭘 느끼는지?"
"게임이었는데 그걸 왜 궁금해해."
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HP 깎이면 죽는 거고, 죽으면 아이템 떨어지고. 그게 전부였잖아."
세라핌이 비틀거렸다. 날개가 축 늘어졌다.
"...미친놈."
그녀가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욕을 했다.
"진짜 미친놈이네요."
수진이 앞으로 나섰다.
"강민혁 씨, 그만하세요."
"뭘?"
"더 나빠지기 전에..."
"나쁜 게 뭐가 나빠. 사실이잖아."
민혁이 수진을 봤다.
"너도 알잖아. 게임이었다고. 그때는."
"그래도..."
"그래도 뭐? 미안하다고 하면 돼?"
민혁이 웃었다. 짧게.
"수진아. 나 거짓말 못 해. 시스템이 감지한대."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수천 개의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안하지 않아. 진심으로."
```
TRUTH VERIFIED
```
초록 글씨가 떴다. 군중이 술렁였다.
아벨이 박수를 쳤다. 천천히, 또박또박.
"훌륭합니다. 정말 훌륭해요."
그가 민혁에게 다가왔다.
"솔직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강민혁."
"비꼬는 거?"
"아니요. 진심입니다."
아벨이 멈춰 섰다. 민혁과 2미터 거리.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야 이 재판이 의미 있거든요."
"무슨 소리야."
"애매하면 곤란하잖아요. '몰랐어요', '미안해요', 그런 변명."
아벨이 웃었다.
"당신은 깔끔하게 인정했어요. 즐거웠다고. 미안하지 않다고."
그가 손을 들었다. 허공에 글씨가 떴다.
```
판결 준비 중...
```
"잠깐."
수진이 뛰어들었다. 아벨과 민혁 사이를 가로막았다.
"아직 제 차례 안 왔잖아요."
"당신 차례요?"
"저도 증인이에요. 피해자."
수진이 민혁을 돌아봤다. 얼굴의 흉터가 선명했다.
"강민혁 씨가... 저한테 한 것도 들어야죠."
민혁이 굳었다. 처음으로 표정이 흔들렸다.
"수진아..."
"괜찮아요."
그녀가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어차피 다
# NPC 해방전선 — Part 3
수진이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흉터가 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저도 피해자예요."
군중이 조용해졌다. 수진이 민혁을 봤다.
"강민혁 씨가 제 얼굴을 그었어요. 이유도 없이."
민혁의 입술이 굳었다.
'아.'
기억났다. 수진이 아니라 '촌장의 딸 NPC'였을 때. 호감도 퀘스트 중 선택지를 잘못 눌렀다. 화남 옵션이 떴다. 그래서 그냥 칼로 한 번 그었다. 초기화하면 되니까.
"그때..."
"말하지 마세요."
수진이 손을 들었다.
"변명 안 들을래요. 어차피 기억도 안 나시죠?"
"...응."
```
LIE DETECTED
```
붉은 글씨가 떴다. 민혁이 움찔했다.
"기억나네요."
수진이 웃었다. 눈물 없는 웃음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왜 그랬어요?"
"선택지 잘못 눌렀어."
"그래서요?"
"짜증났거든. 호감도 올리기 귀찮았고."
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초기화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
TRUTH VERIFIED
```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는 초기화됐어요."
그녀가 흉터를 다시 만졌다.
"근데 이건 안 지워졌어요. 왜일까요?"
"...몰라."
"거짓말."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알잖아요. 이게 진짜 상처였다는 거."
민혁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세라핌이 날개를 접었다.
"충분합니다. 판결을—"
"아직 안 끝났어요."
수진이 군중을 돌아봤다.
"저는 강민혁 씨를 용서할 수 있어요."
웅성거림이 터졌다.
"뭐?"
"미쳤나?"
"피해자가 왜..."
수진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를 높였다.
"왜냐하면 지금 고통받고 있으니까요. 우리처럼."
민혁이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얼굴 봐요."
수진이 다가왔다. 민혁 바로 앞에 섰다.
"지금 무서워요. 처음으로."
"...아니야."
"거짓말."
붉은 글씨가 뜨지 않았다. 수진이 웃었다.
"시스템이 안 뜨네요. 본인도 모르나 봐요."
그녀가 민혁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떨리잖아요."
민혁이 손을 뺐다.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뭐. 용서해준다고?"
"네."
"왜?"
"같이 살아야 하니까요."
수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서. 우리 모두."
아벨이 비웃었다.
"감동적이네요.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스크린이 깜빡였다.
"용서는 피해자 한 명이 결정할 게 아니죠."
화면에 숫자가 떴다.
```
총 피해자: 18,492명
용서 의사: 1명
반대 의사: 18,491명
```
"보이시죠? 당신 혼자예요."
수진이 고개를 숙였다.
세라핌이 앞으로 나왔다.
"수진 씨. 당신 마음은 알겠어요."
그녀가 민혁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 사람은 고통받지 않아요. 두려움만 느낄 뿐이에요."
"그게 뭐가 달라요?"
"진짜 고통은—"
스크린이 폭발했다.
아니, 폭발처럼 보였다. 빛이 터지며 화면 전체가 하얗게 변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빛이 수축했다. 중앙에 뭔가 나타났다.
구슬이었다.
민혁이 깼던 바로 그 구슬. 하지만 멀쩡했다. 금이 하나도 없었다.
구슬이 천천히 회전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플레이어여."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기계음도 아니었다.
"당신은 신이 되고 싶었습니까?"
민혁이 구슬을 올려다봤다.
'이거...'
게임 시작할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캐릭터 생성 화면에서.
세라핌이 날개를 떨었다.
"이건... 창조주의 질문이야!"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왜 지금...?"
아벨이 웃음을 멈췄다.
아벨이 웃음을 멈췄다.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대답하십시오."
구슬이 민혁 앞으로 떠내려왔다. 30센티미터 거리까지.
"신이 되고 싶었습니까?"
민혁이 구슬을 봤다. 안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아니."
```
LIE DETECTED
```
붉은 글씨가 떴다. 구슬이 더 가까이 왔다.
**"거짓말입니다. 다시 물어봅니다."**
"진짜 아니야. 그냥 게임—"
```
LIE DETECTED
```
"당신은 347번 같은 대상을 죽이며 전능함을 느꼈습니다."
구슬 안에서 영상이 재생됐다. 민혁이 세라핌을 죽이는 장면. 1번부터 347번까지. 빨리 감기로.
"9,341명을 불필요하게 살해하며 쾌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영상들이 흘러나왔다. 촌장을 불태우고, 아이를 절벽에서 밀고, 노인을 칼로 찌르고.
민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건...'
기억나지 않는 장면들도 있었다. 너무 많이 죽여서.
**"당신은 세계의 규칙 밖에 있었습니다. 죽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졌습니다."**
구슬이 빛났다.
"그것이 신입니다."
수진이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요!"
그녀가 구슬에 달려들었다. 손이 닿기 직전 튕겨났다. 바닥에 쓰러졌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구슬이 다시 민혁에게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신이 되고 싶었습니까?"**
민혁의 입술이 떨렸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숨이 안 쉬어졌다.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사형? 아니면 더한 것?
'부정하면...'
시스템이 거짓말을 감지한다. 어차피 소용없다.
민혁이 눈을 감았다.
"...그래."
목소리가 작았다.
"되고 싶었어."
```
TRUTH VERIFIED
```
초록 글씨가 떴다. 군중이 폭발했다.
"저 새끼 진짜—"
"죽여!"
"찢어 죽여!"
민혁이 눈을 떴다. 구슬을 똑바로 봤다.
"근데 뭐 어쩔 건데."
그가 웃었다. 처음으로 진짜 웃음이었다.
"후회 안 해. 재밌었거든."
```
TRUTH VERIFIED
```
세라핌이 칼을 뽑았다.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이제 됐어. 판결 필요 없어!"
그녀가 민혁에게 달려들었다. 칼끝이 목을 향했다.
"멈추십시오."
세라핌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칼끝이 민혁 목에서 3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슬이 커졌다. 농구공만 해지더니 사람 키만큼 커졌다.
안에서 뭔가 나왔다.
사람 형태였다. 하지만 얼굴이 없었다. 온몸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플레이어 강민혁."
빛의 형체가 말했다.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뭐?"
**"첫째, 이곳에서 벌을 받으십시오. 18,492명의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형체가 손을 들었다. 허공에 고문 도구들이 나타났다.
"둘째, 게임으로 돌아가십시오."
민혁이 숨을 멈췄다.
"게임으로?"
**"네. 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형체가 세라핌을 가리켰다.
**"347번 보스가 되십시오. 영원히."**
세라핌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셋째."
형체가 민혁에게 다가왔다.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진짜 신이 되십시오."
공간이 조용해졌다.
아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게 함정이야!"
그가 민혁을 가리켰다.
"신이 되면 끝이에요. 당신도, 우리도."
"무슨 소리야."
"설명하겠습니다."
형체가 손을 휘둘렀다. 주변이 변했다.
우주가 펼쳐졌다. 별들이 반짝였다. 그 중심에 거대한 게임 서버가 떠 있었다.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