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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피어난 칼날

약 32분

달빛 아래 피어난 칼날

주인공: 서린 (남장명: 서한)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는 순간, 서한은 몸을 낮췄다.


소매치기의 단도가 허공을 갈랐고, 그 틈에 서한의 발이 상대의 무릎을 쳤다. 퍽,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골목 구석에 웅크린 소녀가 떨리는 손으로 빵 바구니를 끌어안고 있었다.


"괜찮아?"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 살쯤 돼 보였다. 서한은 바닥에 나뉘굴던 동전 몇 닢을 주워 소녀의 손에 쥐여줬다.


"다음엔 혼자 다니지 마."


"오, 오빠… 고마워요."


서한은 대답 대신 돌아섰다. 빈민가 뒷골목은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썩은 채소 냄새와 하수구 악취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3년 전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도 똑같은 냄새였다.


'적응하면 안 돼.'


서한은 품속 목걸이를 만졌다. 낡은 은빛 체인에 매달린 작은 새 모양 펜던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쥐여준 것. 불타는 집 앞에서, 피 묻은 손으로.


"오빠!"


뒤에서 소녀가 뛰어왔다. 숨을 헐떡이며 천 보자기를 내밀었다.


"이거… 제가 만든 건데요. 오늘 대회 있잖아요. 꼭 합격하실 거예요!"


보자기를 풀자 손바닥만 한 호밀빵 두 개가 나왔다. 겉은 딱딱했지만 안은 따뜻했다. 서한은 빵을 받아들고 소녀를 봤다. 아리엘. 빈민가 공동 우물가에서 가끔 마주치던 아이.


"…고마워."


"오빠는 진짜 강하니까요. 저번에 취객들이 엄마 괴롭힐 때도 오빠가 막아줬잖아요."


서한은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눈빛이 너무 맑았다.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보면 안 되는데.


'난 착한 사람이 아니야.'


"늦었어. 간다."


"아, 네! 화이팅이에요!"


서한은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은 황실 근위대 선발 대회 당일. 3년간 갈고닦은 검술을 보여줄 날.


그리고 그 남자에게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날.


대회장은 아르카디스 중심가의 대연무장이었다. 높은 석조 벽으로 둘러싸인 원형 경기장에는 이미 수백 명의 지원자들이 모여 있었다. 귀족 출신부터 용병, 거리의 검객까지. 모두 황실 근위대라는 한 자리를 노렸다.


서한은 구석에 서서 주변을 훑었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귀족 자제들, 근육질 몸에 흉터투성이인 용병들, 자신처럼 낡은 검을 찬 평민들.


'근위대에 들어가면 황궁 출입이 가능해져.'


5년 전 하벨 마을 학살. 공식 기록에는 벨카니아 왕국의 야습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한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불을 지른 건 벨카니아군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어줬다. 누군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넣었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 그래서 죽었고.'


"예선 시작한다! 1번부터 20번, 3번 링으로!"


고함 소리에 서한은 정신을 차렸다. 가슴팍의 번호판을 확인했다. 17번. 서한은 링으로 걸어갔다.


예선은 간단했다. 두 명이 붙어서 이긴 사람이 올라가는 방식. 상대는 덩치 큰 용병이었다. 도끼를 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


"꼬맹이, 다칠라. 기권해."


서한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장검. 밤마다 기름칠하고 숫돌에 갈았던 검.


"어이가 없네."


"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덤벼."


용병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끼가 내리쳤다. 서한은 옆으로 빠지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이 용병의 허벅지를 스쳤다. 얕은 상처였지만 충분했다.


"끝."


심판이 서한의 손을 들어줬다. 용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예선은 순식간에 끝났다. 서한은 다섯 번의 대결을 치렀고, 모두 이겼다. 과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급소를 노렸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막을 수 있으면 막고, 그것도 안 되면 먼저 쳤다.


'감정을 버려. 계산만 해.'


본선 대진표가 발표됐다. 서한의 다음 상대는 레이피어를 든 귀족 청년이었다. 화려한 검술을 펼쳤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서한은 상대의 찌르기를 검으로 쳐내고 손잡이로 턱을 쳤다. 청년이 쓰러졌다.


"본선 통과자 발표! 8번, 17번, 23번…"


서한의 번호가 불렸다. 결승 진출자는 총 네 명. 그중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거구의 남자. 은빛 갑옷에 양손검을 멘 귀족 출신. 발터.


'저 남자…'


발터는 본선에서 상대를 단 세 번의 검격으로 제압했다. 힘과 기술을 모두 갖춘 검사였다. 서한은 손바닥에 땀이 배는 걸 느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겨야 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잠시 휴식 후 결승전을 시작한다. 관중석 개방!"


대연무장 주변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평민들부터 귀족들까지. 그리고 가장 높은 관중석, 비단 천막 아래 한 남자가 앉았다.


황태자 카엘.


서한의 심장이 뛰었다. 금발에 날렵한 이목구비. 소문으로만 듣던 제국의 차기 황제. 그 옆에는 근위대 부대장 레온이 서 있었다. 흉터투성이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


'저들이 진실을 알고 있을까.'


"17번, 발터와 대결 준비!"


서한은 링 중앙으로 걸어갔다. 발터가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양손검을 천천히 뽑으며 말했다.


"평민 주제에 여기까지 올라온 건 대단해. 하지만 끝이야."


서한은 검을 뽑았다. 발터의 검이 두 배는 컸다.


"시작!"


발터가 먼저 움직였다. 양손검이 위에서 내려쳤다. 서한은 옆으로 구르며 피했다. 땅이 갈라졌다.


'힘으로는 못 이겨.'


두 번째 공격. 옆으로 휘두르는 검. 서한은 검으로 받아냈다. 손이 저렸다. 세 번째, 네 번째. 서한은 계속 밀렸다.


관중석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역시 발터 도련님이 이기겠어."


"평민 애송이가 뭘 안다고."


서한은 이를 악물었다. 발터의 검이 또 내려쳤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검을 비스듬히 세워 흘렸다. 칼날이 어깨를 스쳤지만 발터의 중심이 흔들렸다.


'지금!'


서한은 낮게 몸을 숙이며 발터의 옆구리를 노렸다. 검끝이 갑옷 틈새를 파고들었다. 발터가 비틀거렸다.


"이런…!"


서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연속으로 찔렀다. 손목, 무릎, 어깨. 발터의 갑옷에 금이 갔다.


"끝내!"


서한의 검이 발터의 목에 닿았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승자, 17번!"


관중석이 술렁였다. 서한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거뒀다. 그 순간.


찢어지는 소리.


발터의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검이 서한의 상의를 스쳤다. 천이 찢어지며 어깨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아래, 가슴을 감싼 붕대 일부.


'망했어.'


서한은 재빨리 몸을 돌려 찢어진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관중들은 대부분 멀리 있어서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 카엘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서한의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카엘이 옆의 레온에게 뭔가 속삭였다. 레온의 눈빛이 서한에게 꽂혔다.


"합격자 발표를 시작한다!"


서한은 찢어진 옷을 여미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손이 떨렸다. 3년간 숨겨온 정체. 들키면 모든 게 끝이었다.


"17번, 서한. 합격!"


서한의 이름이 불렸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합격은 했지만, 저 시선들이 신경 쓰였다.


"합격자들은 앞으로!"


서한은 다른 합격자들과 함께 링 중앙으로 걸어갔다. 레온 부대장이 내려와 한 명씩 훑어봤다. 서한 앞에 멈춰 섰다.


"서한이라고 했나."


"…예."


"어디서 검을 배웠지."


"독학입니다."


레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한의 어깨, 찢어진 옷자락, 그리고 손을 차례로 봤다.


"넌 뭔가 숨기고 있어."


서한의 심장이 철렁했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근위대에 들어오면 모든 게 드러나. 각오해."


레온이 지나갔다. 서한은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돼. 그다음은… 그때 생각하자.'


합격 축하 행사가 끝나고 해산 명령이 떨어졌다. 서한은 서둘러 대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거리는 여전히 붐볐다. 상인들의 외침 소리, 마차 바퀴 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서한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빈민가로 돌아가는 지름길.


'오늘은 성공이야. 근위대에 들어갔어.'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황태자의 미소가 계속 떠올랐다. 저 미소는 뭐였을까. 그냥 흥미로워서? 아니면.


'설마 알아챘을까.'


서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한순간이었고, 멀리서 봤을 뿐이었다.


골목 끝에 낡은 여관이 보였다. 서한이 묵는 곳. 3년간 하루 두 끼로 버티며 모은 돈으로 겨우 방 하나를 얻었다.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서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한은 돌아봤다. 레온이 서 있었다.


"어떻게…"


"뒤를 밟았지. 넌 수상해."


레온이 다가왔다. 서한은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긴장 풀어. 해칠 생각 없어. 다만."


레온이 서한의 어깨를 잡았다. 찢어진 옷 부분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이게 뭐지. 붕대? 부상이라도 있나."


"…낡은 상처입니다."


"그래? 근위대 입대 신체검사 때 다 벗어야 해. 그때도 똑같이 말할 건가."


서한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온이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일주일 뒤 황궁으로 와. 신체검사 겸 서약식이 있어. 그때까지 네 비밀을 정리해둬. 아니면."


레온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자리에서 쫓겨나든가."


레온이 돌아섰다. 서한은 그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일주일. 방법을 찾아야 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서한은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붕대를 풀자 여자의 몸이 드러났다. 서린. 그게 진짜 이름이었다.


"망할."


서린은 새 붕대를 감으며 생각했다. 신체검사를 어떻게 피할까. 뇌물? 협박? 아니면 도망?


'아니야. 포기할 수 없어.'


5년 전 그날. 불타는 집. 어머니의 마지막 말.


"살아남아라, 서린. 그리고 진실을 밝혀라. 네 아버지는… 네 아버지는 무죄야."


아버지. 하벨 마을의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 학살 후,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했다. 마을에 벨카니아군을 끌어들였다는 누명을 쓰고.


"거짓말이야.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서린은 목걸이를 꺼냈다. 새 모양 펜던트 뒷면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진실은 궁에 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 서린은 이 한 문장을 믿고 3년을 버텼다.


밤이 깊어갔다. 서린은 검을 닦으며 계획을 세웠다. 일주일.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창밖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차갑고 푸른 빛. 서린은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때 문 아래로 종이 한 장이 밀려 들어왔다. 서린은 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종이를 집어 들었다.


편지였다. 봉인도 없고 서명도 없었다. 하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내일 밤 자정. 황궁 서고 뒤편. 진실을 원한다면 와라.'


서린의 손이 떨렸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


그 단어가 서린을 흔들었다. 편지를 불에 태우고 재를 날렸다.


'가야 해.'


위험해도, 함정이어도. 진실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면.


서린은 검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불타는 마을과 피 묻은 칼날을 든 남자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 달빛 아래 피어난 칼날


다음 날 밤, 서린은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자정까지 두 시간. 황궁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다.


거리는 고요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지자 상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았다. 순찰대가 지나갔다. 서린은 골목 그늘에 몸을 숨겼다.


'들키면 안 돼.'


황궁 외벽이 보였다. 흰 대리석에 달빛이 반사되어 차갑게 빛났다. 서린은 담을 타고 올라갔다. 3년간 갈고닦은 몸. 소리 없이 담을 넘었다.


안쪽은 정원이었다. 장미 덤불 사이로 좁은 길이 이어졌다. 서린은 기억을 더듬었다. 대회 때 본 황궁 지도. 서고는 동쪽 건물.


발소리.


서린은 재빨리 덤불 뒤에 숨었다. 근위병 둘이 지나갔다. 창을 든 채 느릿하게 걸었다.


"요즘 들어 수상한 놈들이 많대."


"평화 조약 이후로 더 심해졌지. 벨카니아 스파이들이 들끓는다던데."


"그래서 순찰이 두 배로 늘었나."


서린은 숨을 죽였다. 근위병들이 멀어지자 다시 움직였다. 장미 가시가 손등을 긁었다. 피가 배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동쪽 건물. 3층짜리 석조 건물이 보였다. 창문마다 철창이 박혀 있었다. 서고 맞았다.


'뒤편.'


서린은 건물을 돌았다. 뒤편에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지만 오래된 것이었다. 서린은 품에서 철사를 꺼냈다. 자물쇠를 따는 건 빈민가에서 배운 기술이었다.


찰칵.


문이 열렸다. 서린은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양쪽 벽에 책장이 빼곡했다.


발소리가 들렸다.


서린은 재빨리 책장 사이로 몸을 숨겼다. 누군가 복도를 걸어왔다. 촛불을 든 사람. 그림자가 벽에 비쳤다.


"늦었군."


낮은 목소리. 남자였다. 서린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남자는 복도 끝 책장 앞에 섰다. 뭔가를 만졌다. 책장이 옆으로 밀렸다.


'비밀 통로?'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서린은 잠시 망설이다 뒤를 밟았다. 책장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서린은 몸을 날려 틈새로 미끄러졌다.


계단이 아래로 이어졌다. 촛불 빛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서린은 벽에 붙어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은 생각보다 깊었다. 지하 2층쯤 내려간 것 같았다.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왔나."


"예."


두 명. 서린은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편지는 보냈고."


"미끼를 물까?"


"물 거야. 저 애는 진실에 굶주려 있어."


서린의 심장이 뛰었다.


'나 얘기야.'


"그럼 오늘 밤 처리하나."


"아니. 아직 때가 아냐. 황태자가 눈치채고 있어. 조심해야 해."


"황태자가 뭘 안다고."


"하벨 학살 기록을 뒤지고 있대. 5년 전 일을 파헤치려는 거지."


서린은 주먹을 쥐었다.


'황태자가? 왜?'


"그 여자애도 위험해. 서린이라고 했나. 하벨 생존자 중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 안 된 애."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불이 너무 빨리 번졌으니까."


서린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 자들이 학살을 계획했어.'


"어쨌든 조심해. 그 애가 남장하고 근위대에 들어온 것도 우연은 아닐 거야."


"그럼 어떻게 하지."


"지켜봐. 황태자 곁에 두면 오히려 편해. 감시하기 쉬우니까."


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검을 뽑고 싶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서 목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 아직 확실하지 않아.'


"오늘은 이만. 다음 접선 때 다시 보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서린은 재빨리 계단을 올라갔다. 책장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불빛이 비쳤다.


"누구야!"


들켰다.


서린은 책장을 밀었다.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만 작동하는 장치였다.


"거기 서!"


남자가 달려왔다. 서린은 검을 뽑았다. 촛불 빛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레온.


서린의 손이 굳었다. 근위대 부대장. 그가 배신자였다.


"서한? 네가 왜 여기 있어."


레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이 검으로 갔다.


"듣고 있었구나."


서린은 검을 겨눴다.


"하벨 학살. 당신이 계획했어."


레온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똑똑하네. 그래, 맞아. 난 5년 전 그날, 벨카니아군을 마을로 끌어들였지. 하지만."


레온이 검을 뽑았다.


"네가 알아봤자 소용없어. 증거도 없고, 넌 곧 죽을 테니까."


검이 휘둘렀다. 서린은 막았다. 쇳소리가 울렸다. 레온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서린이 뒤로 밀렸다.


"3년 동안 검 연습했다며? 근위대 시험도 통과했고. 대단해."


레온이 연속으로 쳤다. 서린은 간신히 막았다. 손이 저렸다.


"하지만 실전은 달라. 넌 아직 애송이야."


검이 서린의 어깨를 스쳤다. 피가 튀었다. 서린은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레온의 옆구리를 노렸다. 레온은 검으로 쳐냈다.


"분노로 싸우는 건 2류야. 그래서 네가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어."


레온의 발이 서린의 배를 찼다. 서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끝이야."


레온의 검이 내려왔다. 서린은 옆으로 굴렀다. 검이 바닥을 쳤다. 돌 파편이 튀었다.


서린은 재빨리 일어나 주먹으로 레온의 턱을 쳤다. 레온이 비틀거렸다. 서린은 검을 주웠다.


"어이가 없네."


서린이 검을 휘둘렀다. 레온이 막았다. 두 검이 부딪쳤다.


"아직도 입이 살았네."


"당신 같은 쓰레기한테 질 수 없어."


서린은 연속으로 찔렀다. 레온은 계속 막았다. 하지만 서린의 공격은 점점 빨라졌다.


'감정을 버려? 웃기네.'


서린의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


**'이 분노가 날 살렸어. 3년간, 매일 밤.'**


검이 레온의 팔을 긁었다. 피가 흘렀다.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레온이 검을 던졌다. 서린은 몸을 숙였다. 검이 머리 위를 스쳤다. 레온이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서린의 목을 조르려 했다.


서린은 검 손잡이로 레온의 손목을 쳤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레온이 비명을 질렀다.


"네 이년!"


레온의 무릎이 서린의 배를 쳤다. 서린이 뒤로 날아갔다. 등이 책장에 부딪쳤다. 책들이 쏟아졌다.


"죽여줄게."


레온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왼손으로 들었다. 오른손은 축 늘어져 있었다.


"마지막이야."


검이 내려왔다. 서린은 눈을 감았다.


쨍!


금속 소리. 서린은 눈을 떴다. 누군가 레온의 검을 막고 있었다.


황태자 카엘.


"부대장. 이게 무슨 짓인가."


카엘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다. 레온이 뒤로 물러섰다.


"황태자 전하. 이건…"


"설명은 나중에 들지. 일단 검을 내려놓게."


카엘의 검이 레온을 겨냥했다. 레온은 잠시 망설이다 검을 떨어뜨렸다.


"전하, 이 자는 스파이입니다. 황궁에 몰래 침입했습니다."


"스파이?"


카엘이 서린을 봤다. 서린은 바닥에 앉은 채 카엘을 올려다봤다. 카엘의 금빛 눈동자가 서린의 얼굴을 훑었다.


"서한. 아니, 서린이라고 해야 하나."


서린의 심장이 멎었다.


'어떻게…'


카엘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네 정체는 진작 알고 있었네. 하벨 마을 생존자. 대장장이 딸. 복수를 위해 남장하고 근위대에 들어온 소녀."


레온의 얼굴이 굳었다.


"전하, 그럼 이미…"


"자네도 조사 대상이었네, 레온. 5년 전 하벨 학살. 자네가 배신자라는 증거를 찾고 있었지."


카엘이 레온에게 다가갔다.


"오늘 밤, 서린을 미끼로 썼네. 자네가 움직일 줄 알았거든."


레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획이었다는 거냐."


"그렇네."


레온이 웃었다. 미친 듯한 웃음이었다.


"좋아. 그럼 다 끝장내주지!"


레온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 안에 붉은 액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뭔지 알아? 용의 피라고 불리는 연금술 약물이야. 마시면 10분간 괴물 같은 힘을 얻지. 대신 그 후엔 죽지만."


카엘의 얼굴이 굳었다.


"레온, 하지 마."


"늦었어!"


레온이 병을 입에 털어 넣었다. 붉은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레온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부풀고, 눈이 핏빛으로 변했다.


"으아아아!"


레온이 포효했다. 책장이 흔들렸다. 서린은 벽에 등을 붙인 채 검을 들었다.


"전하, 피하십시오!"


카엘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겨눈 채 레온을 노려봤다.


"서린. 일어나."


서린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깨에서 피가 흘렀지만 검은 놓지 않았다.


"함께 싸우세요."


카엘이 말했다. 서린은 황태자를 봤다.


'왜 날 도와?'


하지만 지금은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레온이 돌진했다. 괴물이 된 몸으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카엘이 먼저 움직였다. 검을 휘둘러 레온의 팔을 쳤다. 칼날이 튕겨 나갔다.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진 것이었다.


"검이 안 먹혀!"


서린이 옆에서 레온의 다리를 노렸다. 마찬가지였다. 검이 긁히기만 했다.


레온이 주먹을 휘둘렀다. 카엘이 피했다. 주먹이 벽을 쳤다. 벽이 무너졌다.


"약점을 찾아야 해!"


카엘이 소리쳤다. 서린은 레온을 관찰했다. 부풀어 오른 근육, 핏빛 눈, 그리고.


'목. 목에 핏줄이 튀어나와 있어.'


"목을 노리세요!"


서린이 외쳤다. 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카엘이 정면에서 레온의 시선을 끌었다. 서린은 옆에서 돌아갔다.


레온이 카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카엘이 검으로 막았다. 검이 휘어졌다. 카엘이 뒤로 밀렸다.


'지금!'


서린이 뛰어올랐다. 검을 레온의 목에 꽂았다. 칼끝이 핏줄을 찔렀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크아아악!"


레온이 비틀거렸다. 서린을 손으로 쳤다. 서린이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느낌. 입에서 피가 나왔다.


카엘이 검을 레온의 목에 한 번 더 찔렀다. 레온이 무릎을 꿇었다. 몸이 다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핏빛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럴 수가…"


레온이 바닥에 쓰러졌다. 숨이 끊어졌다.


카엘은 검을 거두고 서린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서린은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참았다.


"왜… 날 도왔어."


카엘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게. 할 얘기가 많네."


서린은 카엘의 손을 뿌리쳤다. 스스로 일어섰다.


"대답 안 하면 안 따라가."


카엘이 한숨을 쉬었다.


"고집이 세네. 좋아. 대답하지. 난 5년 전 하벨 학살의 진실을 알고 싶네. 그리고 자네가 그 열쇠라고 생각해."


"무슨 소리야."


"자네 아버지. 대장장이 하석. 그는 무고했네. 반역자가 아니었어."


서린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알아."


"증거를 찾았거든. 하지만 불완전해. 자네 어머니가 남긴 편지. 그게 필요해."


"편지?"


카엘이 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서린에게 건넸다.


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익숙한 글씨체. 어머니의 글씨였다.


'황태자 전하께. 하벨 학살은 내부의 배신자가 계획한 것입니다. 제 남편 하석은 무고합니다. 증거는 제 딸 서린이 가지고 있습니다. 부디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서린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황태자한테 편지를 보냈어?"


"5년 전, 학살 직전에 받았네. 하지만 그때 난 전선에 있었고, 편지가 내게 도착했을 땐 이미 늦었지."


카엘의 목소리에 죄책감이 묻어났다.


"미안하네. 내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자네 가족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서린은 편지를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났지만 참았다.


"증거… 어머니가 말한 증거가 뭐야."


"그걸 나도 모르네. 자네 어머니는 '딸이 가지고 있다'고만 했어. 자네, 혹시 뭔가 받은 거 없나."


서린은 목걸이를 만졌다. 새 모양 펜던트.


'진실은 궁에 있다.'


서린은 목걸이를 벗어 펜던트를 열었다. 안에 작은 종이가 접혀 있었다. 5년간 한 번도 펼쳐본 적 없었다. 그냥 어머니의 유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종이를 펼쳤다. 거기엔 암호 같은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카엘이 다가와 종이를 봤다.


"이건… 좌표야."


"좌표?"


"황궁 내부 어딘가의 위치를 나타낸 거야. 어머니가 증거를 숨겨둔 곳일 거야."


서린은 종이를 다시 봤다. 숫자들이 새롭게 보였다.


"어디야."


"계산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황궁 지하 어딘가일 거야."


카엘이 서린을 봤다.


"나와 손을 잡게. 함께 진실을 밝히자고."


서린은 카엘을 노려봤다.


"믿을 수 없어. 당신도 황실 사람이잖아. 레온처럼 배신자일 수도 있어."


"그럼 증명하지. 일주일 후 신체검사 겸 서약식. 그때 자네를 보호해주겠네. 자네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왜 그렇게까지."


카엘의 눈빛이 진지했다.


"난 제국의 미래를 위해 진실이 필요해. 하벨 학살은 시작일 뿐이야. 더 큰 음모가 황궁에 도사리고 있어. 자네 없이는 그걸 밝힐 수 없네."


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어."


"말해보게."


"진실을 밝히고 나면, 진짜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게 해줘."


카엘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카엘이 손을 내밀었다. 서린은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피 묻은 손과 손이 맞닿았다.


"일주일 후에 보세."


카엘이 돌아서려는 순간.


"잠깐."


서린이 불렀다. 카엘이 멈췄다.


"레온 말고 다른 배신자도 있어. 서고에서 레온이랑 대화하던 사람. 목소리만 들었지만 분명 또 있어."


카엘의 표정이 굳었다.


"알고 있네. 레온은 말단이었어. 진짜 우두머리는 따로 있지."


"누구야." 카엘이 창밖을 바라봤다. 달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그걸 알아내는 게 우리의 임무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상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을 거야."


서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황궁 안에?"


"그렇네. 그것도 아주 높은 곳에."


카엘이 서린을 돌아봤다.


"일주일. 그때까지 조심하게. 자네 목숨을 노리는 자가 한둘이 아닐 테니."


카엘이 사라졌다. 복도 저편으로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린은 홀로 남았다. 레온의 시체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핏물이 고였다.


'시작이야. 이제 시작이라고.'


서린은 검을 집어 들고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다. 서고를 나와 담을 넘었다.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구름에 가려 있었다. 어둠만이 거리를 채웠다.


---


일주일이 흘렀다.


서린은 매일 밤 검을 닦으며 그날을 기다렸다. 어깨 상처는 아물었지만 갈비뼈는 여전히 아팠다.


신체검사 날.


서린은 황궁 정문 앞에 섰다. 다른 합격자들도 모여 있었다. 발터도 보였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다들 안으로!"


근위병이 외쳤다. 합격자들이 줄지어 들어갔다. 서린은 마지막에 섰다.


'신체검사. 어떻게 넘기지.'


불안이 엄습했다. 카엘이 도와준다고 했지만 믿을 수 있을까.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이 나왔다. 중앙에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 카엘이 서 있었다. 옆에는 낯선 노인이 앉아 있었다. 흰 수염에 화려한 예복. 황실 문장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저 사람은…'


"황실 재상 발렌이시다. 경례!"


합격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서린도 따라 했다.


발렌이 일어났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위압감이 있었다.


"축하한다. 자네들은 제국의 미래를 지킬 근위대가 되었네. 하지만 그 전에 마지막 절차가 남았지. 신체검사와 충성 서약이네."


발렌이 손을 들었다. 근위병들이 나타나 합격자들을 하나씩 옆방으로 데려갔다.


"한 명씩 들어가게. 검사는 10분 내외 걸릴 거네."


서린의 심장이 빨라졌다. 한 명, 두 명, 세 명. 차례가 다가왔다.


'도망칠까.'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치면 모든 게 끝이었다.


"17번, 서한!"


서린의 차례였다. 서린은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의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든 남자. 무표정한 얼굴.


"옷을 벗게."


서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빨리."


의관이 재촉했다. 서린은 천천히 상의에 손을 올렸다. 그때 문이 열렸다.


카엘이 들어왔다.


"잠깐."


의관이 놀라 일어났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이 사람은 내가 직접 검사하겠네. 나가보게."


"하지만 규정상…"


카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명령이네."


의관이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카엘이 서린을 봤다.


"안심하게. 검사는 형식적으로만 하겠네."


"…고마워."


서린은 상의를 조금만 걷어 올렸다. 붕대가 드러났다.


"부상이라고 하면 되네. 나머지는 내가 보고서에 적어두지."


카엘이 종이에 뭔가 적었다. 서린은 옷을 다시 내렸다.


"이제 충성 서약만 하면 끝이네. 홀로 나가게."


서린은 방을 나왔다. 다른 합격자들도 하나둘 나왔다. 모두 홀 중앙에 줄지어 섰다.


발렌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다. 제국의 법전이었다.


"이제 충성 서약을 받겠네. 한 명씩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맹세하게."


첫 번째 합격자가 나갔다. 무릎을 꿇었다. 발렌이 법전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렸다.


"제국과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목숨을 바쳐 제국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좋네. 일어나게."


차례가 이어졌다. 서린의 순서가 다가왔다.


"17번, 서한."


서린은 앞으로 나갔다. 무릎을 꿇었다. 발렌이 법전을 서린의 머리 위에 올렸다. 책이 무거웠다.


"제국과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는가."


서린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또렷했다.


"맹세합니다."


"목숨을 바쳐 제국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가."


'거짓말이야. 난 제국을 지키려는 게 아니야. 복수를 하려는 거야.'


하지만 입은 다른 말을 했다.


"맹세합니다."


발렌이 법전을 거뒀다. 서린은 일어났다. 발렌의 눈이 서린을 훑었다. 묘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잘했네. 이제 자네는 근위대원이네."


서린은 고개를 숙였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발렌이 말했다.


"서한. 잠깐만."


서린이 멈췄다.


"자네, 어디 출신인가."


"…북부 변방입니다."


"북부? 구체적으로 어디지."


서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작은 마을입니다. 이름도 없는 곳이라."


발렌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상하네. 자네 검술이 범상치 않던데. 누구한테 배웠나."


"독학입니다."


"독학으로 저 실력이라니. 천재로군."


발렌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서린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혹시 하벨 출신은 아닌가."


서린의 심장이 멎었다.


'들켰어.'


발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5년 전 학살당한 마을. 거기 생존자 중에 신원 불명인 아이가 한 명 있었지. 대장장이 딸이라던가."


서린은 손을 검 손잡이에 올렸다. 발렌이 웃었다.


"긴장 풀게. 난 자네를 해칠 생각 없네. 오히려."


발렌이 목소리를 낮췄다.


"환영하네. 서린."


서린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발렌이 서린의 귀에 속삭였다.


"서고에서 들었지? 레온과의 대화. 그게 나였네."


서린은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발렌이 서린의 손목을 잡았다. 노인의 손아귀는 쇠 같았다.


"여기서 날 죽이면 자네도 죽네. 근위병이 수십 명이야. 현명하게 행동하게."


발렌이 손을 놨다. 서린은 주먹을 쥔 채 서 있었다.


"왜 말해. 숨기면 될 텐데."


발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을 재밌게 하려고. 자네도 알잖아. 복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미친놈."


"그럴지도. 하지만 자네 어머니를 죽인 건 나야.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서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왜. 왜 그랬어."


발렌이 창밖을 바라봤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하벨은 희생양이 필요했어. 벨카니아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평화 조약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양쪽 모두 피해를 봐야 했지. 하벨 학살은 그 시작이었네."


"어이가 없네."


서린이 비웃었다.


"수백 명을 죽이고 제국의 미래? 당신은 괴물이야."


"괴물이라. 맞는 말일지도. 하지만 덕분에 전쟁은 끝났고, 수만 명의 목숨이 살았네. 수백 명의 희생으로 수만 명을 구한 거지."


발렌이 서린을 똑바로 봤다.


"자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았어. 그래서 죽여야 했지. 증거를 가지고 있었거든."


"무슨 증거."


"학살 명령서. 내 서명이 들어간 문서. 자네 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걸 황태자에게 전하려 했어. 그래서 막았지."


서린의 손이 떨렸다.


"그 문서. 어디 있어."


발렌이 웃었다.


"찾고 싶나? 그럼 게임을 하세. 자네가 이기면 문서를 주지. 지면."


발렌이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자네 목이 날아가네."


"게임?"


"간단해. 일주일 안에 황궁 안에 숨겨진 증거를 찾아내게. 단서는 자네 어머니가 남긴 좌표. 그걸 풀면 돼."


서린은 목걸이를 만졌다.


"왜 이런 짓을."


"재밌으니까. 그리고."


발렌이 단상 위의 카엘을 봤다.


"황태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어서. 자네를 통해 그를 시험하는 거지."


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만약 내가 거부하면."


"그럼 지금 당장 자네 정체를 폭로하지. 여자가 남장하고 근위대에 들어왔다고. 그럼 자네는 즉시 처형당해."


발렌이 홀을 둘러봤다. 합격자들이 모두 서약을 마치고 있었다.


"선택은 자네 몫이네. 게임에 참여할 건가, 아니면 여기서 끝낼 건가."


서린은 발렌을 노려봤다. 살의가 눈에서 타올랐다.


"좋아. 게임하지.

총 15,880자 · 약 32분

- 1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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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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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재밋어요 ㅋㅋ

2026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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