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약 14분 · 총 6,796자

도망치는 밤

주인공: 윤해준

복도 끝에 있어야 할 비상구가 없었다.

해준은 멈춰 섰다. 평소 같으면 저 모퉁이를 돌면 철제 문이 나왔다. 녹슨 손잡이를 돌리면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고, 그게 퇴근이었다.

"이상한데."

중얼거림이 복도에 흡수됐다.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벽을 따라 늘어선 서랍들이 평소보다 많아 보였다. 착각일까.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소년의 폐기를 본 뒤로 계속 이랬다. 집중이 안 됐다.

'그냥 다른 길로.'

뒤돌아섰다. 복도는 여전히 길었다. 오던 길을 되짚어 가면 분명 다른 출구가 있을 거였다. 이 건물엔 비상구가 세 개 있었으니까.

발소리가 울렸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 형광등 불빛이 또 깜빡였다. 해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앞만 봤다.

"윤해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K가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소리 없이 나타나 필요한 말만 했다.

"왜요."

"출구를 찾고 계신가요?"

"당연하죠. 퇴근 시간 넘었는데."

K가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표정은 평온했다. 늘 그랬듯.

"규정 확인하셨나요?"

"무슨 규정이요?"

"신규 관리자는 자신의 파일을 확인해야 퇴근할 수 있습니다."

해준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처음 듣는 소리예요."

"오늘부터 적용됩니다."

"...말이 돼요, 그게?"

K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복도 저편을 가리켰다. 형광등 아래로 서랍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다른 서랍들과 달리 손잡이가 은색으로 반짝였다.

"저기 있습니다. 윤해준 님의 파일."

심장이 세게 뛰었다. 아니, 뛰는 게 아니라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가슴 한복판이 무거워졌다.

"싫은데요."

"거부하실 수 있습니다."

K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대신 출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농담이죠?"

"규정입니다."

해준은 뒤돌아 달렸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저 서랍만 열지 않으면 됐다. 다른 길이 있을 거였다. 이 건물이 아무리 이상해도 출구가 하나뿐일 순 없었다.

복도가 계속 이어졌다. 모퉁이를 돌았다. 또 모퉁이가 나왔다. 숨이 거칠어졌다. 형광등은 여전히 깜빡였고, 서랍들은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이상해. 분명 여기 창문이 있었는데.'

벽만 있었다. 서랍만 있었다. 해준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K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복도만 계속 이어졌다.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배터리는 80%였는데.

"미친."

욕이 저절로 나왔다. 해준은 다시 달렸다. 이번엔 서랍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지나갔다. 혹시 비상구로 연결된 서랍이 있을지도 몰랐다.

파일 #0782. 파일 #0783. 파일 #0784.

번호만 계속 올라갔다. 해준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체력이 없었나.

"잠깐만."

멈춰 섰다. 앞에 서랍 하나가 열려 있었다.

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니, 김이었다. 뜨거운 차 냄새가 났다. 얼그레이. 해준은 한 발 물러섰다.

"들어오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나이 든 목소리.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달리기만 하면 지치잖아요."

서랍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중년 여성이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옷차림은 평범했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파일 #1203. 영원한 조연이에요. 기억하세요?"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할 리 없었다. 여기 파일이 몇 개인데.

"기억 못 하시는군요."

그녀가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다들 그래요. 조연은 원래 기억 안 되니까."

"...무슨 얘기예요?"

"저는 주인공을 위해 죽는 역할이었어요. 매번요. 작가님들이 저를 만들 때마다 똑같았죠. 희생. 희생. 희생."

그녀가 찻잔을 내밀었다.

"한 모금 하세요. 따뜻해요."

"됐어요."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곳은 당신 마음속이니까요. 달리면 달릴수록 가까워져요. 당신 파일한테."

해준의 발이 저절로 뒤로 물러났다.

"무슨 소리예요."

"경험담이에요. 저도 처음엔 도망쳤거든요. 제 파일이 싫어서요. 근데 알았어요. 여긴 그런 곳이 아니에요. 마주해야 나갈 수 있어요."

"난 안 그럴 건데."

해준은 돌아서 다시 뛰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후회할 거예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달렸다. 복도는 여전히 끝이 없었고, 서랍들은 계속 늘어났다.

숨소리만 들렸다. 자기 숨소리. 발소리. 형광등 깜빡이는 소리.

'이상해. 왜 이렇게 좁아지지?'

복도 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복도 양쪽 벽이 안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니, 기울었다기보다는 서랍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하나둘씩. 손잡이가 해준의 어깨를 스쳤다. 차가웠다.

"뭐야, 이거."

발을 헛디뎠다. 바닥이 울퉁불퉁해지고 있었다. 서랍 일부가 바닥까지 삐져나와 있었다. 해준은 비틀거리며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손바닥에 닿은 건 벽이 아니었다.

서랍이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 뭔가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글자였다.

'파일 #1087 — 끝까지 쓰이지 못한 고백.'

손을 떼려는데 서랍이 덜컹 열렸다.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구겨진 편지지. 해준은 그걸 보지 않고 지나쳤다.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편지가 펼쳐지는 소리.

"읽어주세요."

누군가 속삭였다.

해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앞만 봤다. 복도는 여전히 이어졌지만 이제 천장이 낮아지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야 할 것 같았다.

"싫어요."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몰랐다.

서랍들이 계속 열렸다. 양쪽에서 동시에. 덜컹. 덜컹. 덜컹. 리듬이 있었다. 심장 박동 같았다.

안에서 무언가 쏟아져 나왔다. 종이들. 사진들. 녹음기. 낡은 노트. 모두 바닥에 흩어졌다. 해준은 그걸 밟으며 지나갔다. 발밑에서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

생각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왜 미안한지 몰랐다.

앞에서 불빛이 보였다. 은색. 반짝이는.

"아니."

해준은 멈춰 섰다.

저 서랍이었다. K가 가리켰던. 윤해준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왜 여기 있어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분명 반대 방향으로 달렸는데. 출발점에서 멀어지려고 했는데.

서랍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 돼."

해준은 뒤돌아 달렸다. 이번엔 정말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옆구리가 쑤셨다. 신경 쓰지 않았다.

복도가 휘어졌다. 오른쪽으로. 해준은 모퉁이를 돌았다. 또 복도. 왼쪽으로 꺾였다. 또 복도.

"출구. 출구가 어디 있어요."

소리쳤다. 메아리가 돌아왔다. 자기 목소리. 왜곡돼서.

형광등이 모두 깜빡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불빛이 사라졌다 돌아왔다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사람 그림자.

여럿.

"윤해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윤해준."

이번엔 여자 목소리. 아이 목소리도 섞였다.

"윤해준. 윤해준. 윤해준."

사방에서 이름이 들려왔다. 해준은 귀를 막았다. 소용없었다.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불이 완전히 꺼졌다.

칠흑.

숨소리만 들렸다. 자기 숨소리. 아니, 다른 숨소리도 섞여 있었다. 여럿이 함께 숨 쉬는 소리.

"불 켜요.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손을 뻗었다. 벽을 더듬었다. 서랍 손잡이가 만져졌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저렸다.

불이 켜졌다.

형광등 하나만. 희미하게.

해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윤곽만 있었다. 희미한 형체. 투명한 실루엣. 그들은 모두 해준을 보고 있었다.

"우리도 도망쳤어요."

파일 #1203이었다. 찻잔을 든 여자. 그녀가 해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온 건지 몰랐다.

"당신처럼요."

다른 목소리가 이어받았다. 소년이었다. 교복을 입은. 폐기됐던 그 아이.

"도망치면 더 무서워요."

"숨으면 더 커져요."

"외면하면 따라와요."

목소리들이 겹쳤다. 해준은 뒷걸음질 쳤다. 등이 뭔가에 부딪혔다.

서랍이었다.

은색 손잡이. 차갑고 매끈한.

이름표가 눈앞에 있었다.

'윤해준 — 미완성.'

"싫어요."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파일 #1203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해준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아니, 차가웠다. 온도를 알 수 없었다.

"함께 가요."

그녀가 말했다.

"혼자는 무서우니까."

해준은 손을 뿌리치려 했다. 힘이 안 들어갔다. 손가락이 떨렸다.

"놔요."

"괜찮아요. 다 그래요. 처음엔."

소년이 반대편에서 해준의 다른 손을 잡았다.

"저도 무서웠어요. 폐기될 때."

"놔 달라고요."

목소리가 커졌다. 소리쳤다. 메아리가 없었다. 목소리가 공간에 흡수됐다.

서랍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하얀 빛. 눈이 부셨다. 해준은 고개를 돌렸다. 소용없었다.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뭔가 들렸다.

목소리.

어린아이 목소리.

"형."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해준은 눈을 감았다. 빛이 너무 강했다.

"형, 왜 나를 버렸어?"

목소리가 또렷했다. 누구 목소리인지 알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중얼거렸다. 눈을 뜬 채로.

서랍 안에서 빛이 약해졌다. 이제 볼 수 있었다. 안에 뭔가 있었다. 노트. 낡은 스프링 노트. 표지가 해져 있었다.

파일 #1203이 해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열어봐요."

"싫어요."

"열어야 나갈 수 있어요."

소년도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해준을 서랍 쪽으로 밀었다. 아니, 미는 게 아니었다. 그냥 서 있었다. 해준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노트가 가까워졌다.

"그만."

말했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세 걸음. 네 걸음.

주변 사람들, 실루엣들이 모두 다가왔다. 원을 그리며. 해준을 중심으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조용히. 슬프게.

'왜 슬픈 얼굴이야.'

생각이 튀어나왔다. 화가 났다. 이유를 몰랐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노트를 집었다. 표지에 글씨가 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씨. 어린아이 글씨.

'윤해준 & 윤해성의 이야기 공책'

손이 떨렸다. 노트가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간신히 붙잡았다.

"해성이..."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처음이었다.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파일 #1203이 뒤에서 말했다.

"동생이었군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형이 작가가 되면 내 이야기 써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노트 안에서. 아니, 머릿속에서.

"약속이야. 꼭."

해준은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이 있었다. 두 명. 큰 사람 하나, 작은 사람 하나. 손을 잡고 있었다.

밑에 글씨.

'형아는 천재 작가. 나는 형아 이야기 속 주인공.'

페이지를 넘겼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두 번째 페이지. 줄 노트. 연필로 쓴 글씨.

'해성이의 모험 — 1화. 해성이는 용감한 기사다. 형이 그렇게 만들어줬다.'

세 번째 페이지.

'2화. 해성이는 마법사를 만났다. 형이 목소리 연기도 해줬다.'

네 번째.

'3화. 해성이는...'

글씨가 중간에 끊겼다. 그 뒤로 빈 페이지만 계속됐다.

해준은 노트를 덮었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계속 읽어요."

파일 #1203이 말했다.

"싫어요."

"왜요?"

"끝이 없으니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3화에서 끝났어요. 그 뒤론 안 썼어요. 못 썼어요."

"왜 못 썼어요?"

소년이 물었다.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입원했어요. 해성이가."

"그래서요?"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자기 입에서. 비웃는 투로.

"그래서 뭐요? 형은 끝까지 안 썼어요. 약속 안 지켰어요."

노트를 바닥에 던졌다. 쿵 소리가 났다. 페이지가 펼쳐졌다. 빈 페이지들이 보였다.

"3화에서 멈췄어요. 해성이가 '형, 4화는 언제 써?' 물어봤는데 대답 안 했어요. 무서웠으니까. 끝을 쓰면 진짜 끝일 것 같아서."

주변 실루엣들이 흔들렸다. 윤곽이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졌다.

"그래서 도망쳤어요."

파일 #1203이 조용히 말했다.

"작가 안 됐어요. 이야기 안 썼어요. 해성이 약속 지킬까 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 났다. 메말라 있었다.

"지키면 끝나니까요. 해성이 이야기 완성하면, 그 애도 끝날 것 같았어요."

"미신이에요."

소년이 말했다.

"알아요."

해준이 대답했다.

"근데 못 썼어요. 그 뒤로 아무것도."

서랍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리듬이 빨라졌다. 복도 전체가 진동했다.

K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마주하셨습니까?"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선택하십시오."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이 갔다. 해준의 발밑에서부터. 금은 빠르게 퍼졌다. 거미줄처럼.

"뭘 선택해요?"

소리쳤다.

"완성하거나, 폐기하거나."

K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당신의 파일을요."

금이 넓어졌다. 틈이 벌어졌다. 아래가 보였다. 어둠. 끝없는.

실루엣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파일 #1203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린 완성되길 기다렸어요. 당신도 그럴 거예요."

그녀도 사라졌다.

소년만 남았다. 그가 해준을 봤다. 슬픈 눈으로.

"형도 미완성이에요. 우리처럼."

바닥이 완전히 무너졌다.

해준은 떨어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어둠 속으로. 아래로. 끝없이.

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니, 속삭임이었다. 여러 목소리.

"끝내요."

"완성해요."

"도망치지 마요."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차피 어두웠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갑자기 멈췄다.

총 6,796자 · 약 14분

- 2 화 끝 -

AI 생성 콘텐츠 · 작가 케뤼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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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공포#심리#미스터리
케뤼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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