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실패작들의 역전
주인공: 윤해준
새벽 세 시, 지하철역 끝.
윤해준은 비상구 앞에 서 있었다.
"여기?"
휴대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채용 문자에 적힌 주소는 분명 이곳이었다. 하지만 비상구 너머로 보이는 건 어둠뿐이었다.
'또 사기겠지.'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 차가웠다.
열었다.
회색 복도가 펼쳐졌다.
"뭐야, 이거."
형광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깜빡이는 불빛을 따라 복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벽도 없었다. 그저 회색 바닥과 형광등만이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해준은 뒤를 돌아봤다.
비상구 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진짜 미쳤네."
중얼거리며 걸었다. 발소리만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 감각이 흐려졌다. 손목시계를 봤지만 초침이 멈춰 있었다.
그때 앞에 뭔가 보였다.
서가였다.
아니, 서가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했다.
천장 없는 공간에 수백만 개의 파일 박스가 쌓여 있었다. 회색 금속 선반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각 박스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해준은 가장 가까운 박스를 집어 들었다.
'파일 #12984 — 폐기 예정일: 2025.01.15 — 사유: 개연성 부족'
"...뭐지, 이거."
박스를 내려놓으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윤해준 씨?"
돌아봤다.
누군가 서 있었다. 정확히는 '서 있다'고 표현하기 애매했다. 윤곽이 흐릿했다. 사람 형태지만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당신이 신입 관리자입니까?"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K입니다. 여기 관리 시스템을 담당하고 있죠."
K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불분명했다.
"관리자요?"
"네. 당신의 업무는 폐기 예정 파일을 심사하고, 재기회 부여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겁니다."
"...그래서요?"
해준의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K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물러서며 손짓했다.
"첫 대상은 파일 #0247입니다. 폐기까지 72시간 남았습니다."
형광등이 한 줄 더 켜졌다. 빛을 따라가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낡은 파일 박스가 있었다.
해준은 박스를 열었다.
순간 빛이 터져 나왔다.
---
소년이 걸어 나왔다.
불완전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왼쪽 어깨 보호대는 없었고, 망토는 찢어져 있었다. 투구는 반쪽만 남아 있었다.
소년은 해준을 올려다봤다.
"저도... 주인공이 될 수 있나요?"
해준은 시선을 피했다.
'뭔 소리야, 이게.'
K가 옆에서 말했다.
"파일 #0247. 미완의 판타지 소설 주인공입니다. 작가가 출판사에 투고했으나 1차 심사에서 탈락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거예요."
소년이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작가님이 저를 만들다가... 끝내지 못했어요."
해준은 소년을 봤다. 갑옷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게 한눈에 보였다.
"재기회를 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K에게 물었다.
"스스로 찾으세요."
"...뭐?"
"규정상 힌트는 드릴 수 없습니다."
K는 그대로 사라졌다. 흐릿한 윤곽이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해준과 소년만 남았다.
"앉아요."
해준이 먼저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년도 따라 앉았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름은요?"
"...없어요."
"없다고요?"
"작가님이 짓다가 말았어요. 그냥 '주인공'이라고만 불렸어요."
해준은 한숨을 쉬었다.
'완벽하게 만들려다 아무것도 완성 못 하는 거.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인데.'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왜 실패했는지 아세요?"
"모르죠. 근데 궁금하긴 하네요."
"작가님이 저를 너무 완벽하게 만들려고 했대요. 출판사에서 그렇게 말했대요. 약점이 없는 주인공은 재미없다고."
해준은 소년의 갑옷을 봤다. 불완전한 조각들이 겨우 붙어 있었다.
"완벽하게 만들려다 이렇게 됐다?"
"네."
소년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검을 휘두를 수도 없고, 마법도 못 써요. 그냥 여기 서 있는 것만 가능해요."
"그럼 뭘 할 수 있어요?"
"...꿈꿀 순 있어요."
해준은 소년을 다시 봤다.
"꿈이요?"
"네. 제가 완성됐다면 어떤 모험을 했을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을지. 그런 거요."
소년의 눈에 빛이 스쳤다.
"작가님이 저한테 준 유일한 것.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요."
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상만 할 수 있는 주인공이라.'
문득 자신이 떠올랐다.
---
5년 전.
해준은 소설을 쓰고 있었다.
완벽한 소설이어야 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까지 흠 없이 매끄러워야 했다. 그래서 첫 문장을 백 번도 넘게 고쳤다.
결국 한 줄도 끝내지 못했다.
친구가 물었다. '왜 안 써?'
해준은 대답했다. '쓸모없으니까.'
친구는 웃었다. '넌 네가 쓸모없다
친구는 웃었다. '넌 네가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만, 난 네 첫 문장이 제일 좋았어.'
해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파일을 삭제했다.
---
"저 같은 거 살려서 뭐 해요?"
소년이 물었다.
해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요?"
"...네?"
"그래서 뭐. 쓸모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소년이 입을 다물었다.
해준은 일어섰다. 무릎을 털었다.
"재구성실이라는 거 있다며."
"어떻게 아세요?"
"K가 말했어요. 스스로 찾으라고."
해준은 주변을 둘러봤다. 끝없는 서가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저기."
소년이 따라 일어섰다. 갑옷이 덜컹거렸다.
둘은 빛을 따라 걸었다. 형광등이 하나씩 꺼지고 다시 켜졌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복도 끝에 문이 나타났다.
'재구성실 — 무단 출입 금지'
해준은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가도 돼요?"
소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모르죠. 근데 다른 방법 있어요?"
문을 밀었다.
삐익—
경보음이 울릴 줄 알았다. 하지만 조용했다.
안은 더 넓었다.
천장이 보이지 않는 건 똑같았지만, 여긴 회색이 아니었다. 바닥 여기저기에 빛나는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소년이 파편 하나를 주웠다.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어."
여자 목소리였다. 떨리고 있었다.
소년이 깜짝 놀라 파편을 떨어뜨렸다. 목소리가 멈췄다.
"대사예요."
해준이 다른 파편을 집었다.
"—성문이 무너진다! 모두 대피하라!"
남자 목소리. 다급했다.
"버려진 대사들이네요."
소년이 주변을 둘러봤다. 수천 개의 파편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해준은 걸으며 파편들을 하나씩 집었다 놓았다. 매번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해."
"—다시는 안 볼 거야."
"—넌 충분해."
마지막 대사에서 해준의 손이 멈췄다.
'넌 충분해.'
소년이 다가왔다.
"이것들로 뭘 하는 거예요?"
"조합하는 거죠. 네 이야기를 만드는 거."
"제 이야기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가 가진 것만으로 만들어보자고요."
소년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해준은 대답 대신 파편을 주웠다. 하나, 둘, 셋. 빛나는 조각들을 모았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종이였다.
아니, 종이 더미였다. 수백 장이 눈처럼 쏟아졌다.
해준은 한 장을 잡았다.
'폐기된 플롯 #48291 — 주인공이 스승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장면'
"이것도 쓸 수 있어요."
소년이 다른 종이를 집었다.
'폐기된 배경 #10029 — 무너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석양'
둘은 파편과 종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책상 위에 조각들이 쌓였다.
해준은 노트북을 켰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빈 문서가 떴다.
"이제 뭐 해요?"
"쓰는 거죠."
"...쓴다고요?"
"네 이야기. 시작부터 끝까지."
소년이 해준 옆에 섰다. 투구 없는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해준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뭘 쓰지?'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5년 전처럼.
"...안 되네요."
중얼거렸다.
소년이 조용히 물었다.
"왜요?"
"모르겠어요. 뭘 써야 할지."
"그럼 제가 말할게요."
"뭐라고요?"
소년이 눈을 감았다.
"제 꿈이요. 제가 완성됐다면 어떤 모험을 했을지."
해준은 소년을 봤다.
"...말해봐요."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는요. 성벽 위에 서 있었어요. 석양이 지고 있었고요. 바람이 불었어요."
해준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주인공은 성벽 위에 섰다. 석양이 무너진 틈새로 스며들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어요. 제 앞에서요."
'스승의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 강했다.'
"저는 울지 않았어요. 울 수 없었어요. 완벽한 주인공은 우는 법이 없으니까요."
해준의 손이 멈췄다.
"근데요."
소년이 눈을 떴다.
"저는 울고 싶었어요."
해준은 소년을 봤다. 불완전한 갑옷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주인공은 울지 못했다. 하지만 가슴속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소년이 계속 말했다.
"저는 복수를 다짐했어요. 스승님을 죽인 자를 찾겠다고요."
'검을 쥐었다. 손잡이가 차가웠다.'
"근데 검을 휘두를 수 없었어요. 작가님이 그 장면을 안 써줬거든요."
해준의 타자가 빨라졌다.
'검을 들어 올렸지만 내려치지 못했다. 아직 배우지 못한 기술이었다.'
"그래도 괜찮았어요. 언젠가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주인공은 성벽에서 내려왔다. 발걸음은 느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소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요. 완벽하지 않아도...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해준은 마지막 문장을 쳤다.
'그는 불완전했다. 하지만 진짜였다.'
엔터를 눌렀다.
파일이 저장됐다. 화면 상단에 진행 바가 떴다.
'업로드 중 — 12%'
소년이 해준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봤다.
"이제... 끝난 건가요?"
"아직."
해준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떨리고 있었다.
'왜 떨려. 내 이야기도 아닌데.'
거짓말이었다. 알고 있었다.
소년의 이야기는 자기 이야기였다.
진행 바가 올라갔다. 48%. 61%.
갑자기 화면이 깜빡였다.
빨간 글씨가 떴다.
'오류 — 완성도 부족. 재기회 부여 불가.'
소년의 얼굴이 하얘졌다.
"뭐예요, 이게?"
"...모르겠어요."
해준은 화면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오류 항목: 결말 미작성. 주인공의 목표 달성 여부 불명확.'
"결말이 없어서 그래요."
소년이 작게 말했다.
"제 이야기에 끝이 없어요. 작가님이 안 써줬거든요."
해준은 키보드를 다시 잡았다.
"그럼 지금 쓰면 되죠."
"...뭐라고 써요?"
"네가 원하는 거."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떨궜다.
"저는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행복한 결말을 원하지 않아요."
해준의 손이 멈췄다.
"왜요?"
"거짓말 같아서요. 완벽하지 않은 주인공이 행복해질 리 없잖아요."
"누가 그래요?"
"...작가님이요. 출판사 사람들도요. 다들 그렇게 말했대요. 이런 주인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해준은 소년을 봤다. 투구 반쪽만 남은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 뭘 원해요?"
"...계속 걷고 싶어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패해도, 완성되지 않아도. 그냥 계속 이야기 속에 있고 싶어요."
해준은 화면을 봤다. 빨간 글씨가 깜빡이고 있었다.
'폐기까지 00:14:22'
14분.
"시간이 없어요."
소년이 해준의 팔을 잡았다.
"괜찮아요. 이미 충분해요."
"충분하긴. 아직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년이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저 처음으로 누군가한테 들었어요. 제 이야기를."
해준은 소년의 손을 뿌리쳤다.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왜요?"
"...짜증 나니까."
거짓말이었다. 무서웠다.
'이 녀석이 사라지면 나도 끝이야.'
문득 깨달았다.
소년을 살리려는 게 아니었다. 자기를 살리려는 거였다.
5년 전 삭제한 파일. 완성하지 못한 첫 문장. 쓸모없다고 포기한 이야기들.
전부 이 소년이었다.
"안 돼요."
중얼거렸다.
"안 되는 게 뭐예요?"
"이렇게 끝나면 안 돼요. 난 아직..."
말이 끊겼다.
소년이 해준을 똑바로 봤다.
"아직 뭐예요?"
"...용서 못 받았어요."
해준은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서요. 내가 버린 것들한테서."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해준은 키보드를 잡았다. 손이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주인공은 끝내 복수하지 못했다. 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걸었다.'
'불완전한 갑옷을 입은 채로. 이름도 없는 채로.'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해준의 타자가 빨라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누군가 기억하는 한.'
엔터를 눌렀다.
진행 바가 다시 올라갔다. 89%. 94%.
'업로드 완료.'
화면이 바뀌었다.
'심사 중...'
소년이 숨을 멈췄다. 해준도 마찬가지였다.
10초가 지났다. 20초.
삐—
'심사 결과: 가능성 수치 49%.'
소년의 얼굴이 무너졌다.
'재기회 부여 기준 미달. 폐기 절차 진행.'
"안 돼."
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말이 돼요? 49%면 거의 통과 아니에요?"
K가 나타났다. 여전히 흐릿했다.
"규정입니다. 50% 미만은 폐기 대상입니다."
"1% 차이로요?"
"네."
"그럼 다시 써요. 한 문장만 더 추가하면—"
"불가능합니다."
K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이미 제출된 파일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 규정 제7조."
소년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천천히.
"안 돼요!"
해준이 소년을 붙잡았다. 손이 빛을 통과했다.
"제발... 다른 방법 없어요?"
K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저었다.
소년이 해준을 봤다.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전..."
소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처음으로 완성됐거든요. 끝이 있는 이야기가 됐어요."
"그게 무슨..."
"고마워요."
소년이 웃었다. 빛이 어깨까지 올라왔다.
"당신 덕분에 저는 실패작이 아니었어요."
해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년이 사라졌다.
빛 알갱이들만 허공에 남아 천천히 떨어졌다.
해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K가 다가왔다.
"첫 업무 실패입니다."
"...그렇네요."
"다음 파일은 내일 밤 배정됩니다."
해준은 고개를 들었다.
"다음이요?"
"네. 보관소에는 아직 2,847개의 파일이 남아 있습니다."
"전부 실패작이에요?"
"네."
해준은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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