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아래의 검
주인공: 비올레타 아스트레아 (빙의 전: 배덕식)
무도회장 샹들리에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 비올레타 언니. 소문 들었어요?"
레이첼 공작영애였다. 금발을 높이 틀어 올린 그녀가 부채를 펼치며 다가왔다.
"어젯밤 뒷골목의 검사 말이에요."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파도처럼 번져갔다.
"혹시 언니 아니세요?"
'아 진짜 개빡치네, 저 금발 여우.'
비올레타는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호라, 재미있는 농담이시군요."
목소리는 우아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이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농담이라뇨. 전 진심인데요."
"마법도 못 쓰는 제가 암살자를 베었다고요? 레이첼 양께서는 정말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그러게요. 이상하죠?"
레이첼이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주변 귀족들도 따라 웃었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여긴 회사 회식 자리 아니야.'
비올레타는 속으로 자신의 본명을 되뇌며 심호흡했다.
바로 그때였다.
"공녀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카엘 발레리우스. 황태자였다.
은발이 샹들리에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은빛 눈동자가 비올레타를 내려다봤다.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비올레타는 손을 내밀었다. 카엘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둘은 무도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귀족들이 길을 비켰다.
왈츠 선율이 흘러나왔다.
카엘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비올레타의 등이 순간 긴장으로 굳었다.
"오늘 밤은 연기를 잘 해주십시오."
카엘이 낮게 속삭였다. 입술이 그녀의 귀 가까이 스쳤다.
'뭐? 연기?'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어 카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음악이 빨라졌다.
카엘이 발을 내디뎠다. 비올레타도 따라 움직였다.
하나, 둘, 셋.
'왈츠는 3박자지. 중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잖아.'
하지만 머리와 몸은 달랐다.
발이 꼬였다.
쿵.
비올레타의 구두 굽이 카엘의 구두를 찍었다.
"......"
카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비올레타가 황급히 말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프지 않습니다."
카엘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달랐다.
'당신 진짜 누구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10년 전에는 춤을 완벽하게 췄는데요."
카엘이 덧붙였다. 비올레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망했다. 원래 비올레타는 춤을 잘 췄나 보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요."
"그렇습니까."
카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감싼 손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유튜브로 왈츠 영상 봤어야 했는데.'
비올레타는 속으로 후회하며 카엘의 리드를 따랐다.
다행히 더 이상 발을 밟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엘의 눈빛은 끝까지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음악이 끝났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올레타는 카엘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테라스였다.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비올레타는 난간에 손을 짚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치겠네. 진짜.'
무도회장 안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왔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테라스는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었다. 정원 너머 어둠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비올레타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엔 검이 없었다. 당연했다. 무도회에 검을 차고 올 수는 없었다.
'누구지?'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비올레타는 난간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그림자가 다가왔다.
검은 망토를 두른 인물이었다. 얼굴은 두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은 보였다.
호박색 눈동자.
"공녀님."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등이 난간에 닿았다.
"누구십니까."
"잊으셨습니까."
검은 망토의 인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달빛이 그의 눈동자를 비췄다.
"아직도 그분을 지키려 하십니까."
"무슨 말씀을..."
"예전의 당신이라면 이미 제 목을 베었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 실망이 섞여 있었다. 배신감도 느껴졌다.
비올레타의 손이 부채를 향했다. 하지만 부채로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람 누구야? 원래 비올레타를 아는 사람인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로판 지식이 없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공녀님."
검은 망토의 인물이 두건을 벗었다.
젊은 남자였다. 호박색 눈동자에 흉터가 턱선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3일 전, 공녀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뭐?'
비올레타는 난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차가운 대리석이 손바닥에 박혔다.
"제게 황태자 전하의 목을 가져오라 하셨죠."
"저는 그런 적이..."
"증거가 있습니다."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단 손수건이었다. 은실로 아스트레아 가문의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비올레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이건 진짜 비올레타 거잖아.'
"이제 기억나십니까."
남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하지만 어젯밤, 공녀께서는 오히려 저를 막아섰습니다.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아, 망했다. 완전 망했어.'
비올레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썼다.
"왜죠."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망토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사랑이라도 하신 겁니까."
"그런..."
"10년 전, 공녀께서는 황태자를 증오하셨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분이 공녀의 오빠를 죽였다고."
비올레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오빠? 원래 비올레타한테 오빠가 있었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로판 지식이 없으니 이런 설정도 몰랐다.
"아직도 잊지 못하셨을 텐데요."
남자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칼자루였다.
"왜 이제 와서 그분을 지키려 하십니까."
"손 치우세요."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카엘이었다.
테라스 입구에 서 있었다. 은발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남자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망토 자락이 휘날렸다.
"전하."
카엘이 비올레타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뭐야, 왜 갑자기.'
비올레타는 놀라 카엘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남자를 향해 있었다.
"공녀는 내 약혼자입니다."
카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명령조였다.
"손대면 죽습니다."
남자의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하께서는 모르시는군요."
"뭘 말입니까."
"이분이 누구신지."
남자가 비올레타를 가리켰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10년 전, 공녀의 오빠 에드먼드 아스트레아 경을 죽인 건 전하가 아닙니다."
카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공녀 본인이 죽였습니다."
비올레타의 숨이 멎었다.
'뭐라고?'
"거짓말입니다."
카엘이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제가 목격했습니다. 아스트레아 저택 정원에서."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공녀께서 오빠의 심장에 칼을 꽂는 걸."
비올레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카엘의 손이 그녀를 더 세게 붙잡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공녀님."
남자의 목소리에 슬픔이 섞였다.
"에드먼드 경은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셨는데."
"닥치세요."
카엘이 차갑게 말했다.
"더 이상 말하면 목이 날아갈 겁니다."
"전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당신 곁에 있는 그 여자를."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테라스 난간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요했다.
바람 소리만 들렸다.
카엘이 비올레타를 돌아보게 했다.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어봤다.
"사실입니까."
"아닙니다."
비올레타는 즉각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전 제 기억은 흐릿합니다."
"흐릿하다뇨."
카엘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강제로 눈을 마주치게 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비올레타 아스트레아입니다."
"거짓말."
카엘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스쳤다. 차가운 촉감이었다.
"3일 전부터 당신은 달라졌습니다."
비올레타는 숨을 참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춤도 못 추고, 말투도 이상하고."
카엘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코끝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심지어 저를 보는 눈빛도 다릅니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이러다 진짜 들킨다.'
비올레타는 속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전하."
그녀는 카엘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저는 여전히 비올레타 아스트레아입니다."
"증명해보십시오."
"어떻게요."
"10년 전 일을 말해보십시오."
카엘이 한 발짝 물러섰다. 팔짱을 꼈다.
"당신 오빠가 죽던 날 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비올레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는데. 진짜 모르는데 어떡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럼 3일 전은요."
"그것도..."
"어젯밤 뒷골목에서 당신이 검을 휘두를 때."
카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당신 눈빛은 살아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 검을 잡은 사람처럼."
비올레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등이 차가운 난간에 닿았다.
"전하, 저는..."
"거짓말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카엘이 다가왔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당신이 누구든, 무슨 목적이든."
그가 멈췄다. 두 사람 사이 거리는 한 뼘도 안 됐다.
"이미 늦었습니다."
비올레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흘렀다.
'망했어. 완전히 망했어.'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왜 믿어야 합니까."
카엘의 손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차가운 손가락이 피부를 타고 내려갔다.
"당신 체온도 예전과 다릅니다."
'체온까지 기억해?'
비올레타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사람은 변합니다."
"3일 만에요?"
카엘이 비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슬픔 같은 것.
"전하."
비올레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검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으로요."
"예."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가 누구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진심이었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거야, 배덕식아.'
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쇳소리가 들렸다.
비올레타는 본능적으로 카엘을 밀쳤다. 둘 다 바닥에 굴렀다.
쿵.
화살이 난간에 박혔다. 깃털이 바람에 떨렸다.
"전하!"
비올레타가 소리쳤다. 하지만 카엘은 이미 일어서고 있었다.
"엎드려 있으십시오."
그가 차갑게 말했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휘익.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카엘이 단검으로 쳐냈다.
"정원 쪽입니다."
비올레타가 말했다. 시선은 어둠을 향해 있었다.
"궁수가 두 명."
"어떻게 아십니까."
"화살 각도가 다릅니다."
비올레타는 일어섰다. 치마를 걷어 올렸다.
허벅지에 묶인 단검이 드러났다.
'무도회에 검은 못 차도, 이건 가능하지.'
카엘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공녀께서 그런 걸 차고 다니시다니."
"요즘 세상이 위험해서요."
비올레타가 단검을 뽑았다. 손에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10년 검도.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거였나.'
휘익.
세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비올레타가 몸을 숙였다. 화살이 머리 위를 스쳤다.
"마차로 가십시오."
카엘이 말했다. 하지만 비올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전하 혼자 두고 못 갑니다."
"명령입니다."
"거부하겠습니다."
비올레타는 카엘 옆에 섰다.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검도 자세. 중단.'
카엘이 한숨을 쉬었다.
"고집이 세시군요."
"원래 그랬습니다."
"거짓말. 예전 당신은 순종적이었습니다."
'그건 원래 비올레타고.'
비올레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스락.
덤불이 흔들렸다. 검은 그림자 두 개가 튀어나왔다.
복면을 쓴 자객들이었다.
"전하, 저쪽."
"보입니다."
카엘이 단검을 휘둘렀다. 첫 번째 자객이 막아냈다.
쟁!
불꽃이 튀었다.
비올레타는 두 번째 자객을 향해 달려들었다. 치마가 걸렸다.
'아 진짜, 이 드레스!'
자객의 칼이 내려왔다. 비올레타는 옆으로 굴렀다. 잔디에 이슬이 묻었다.
"공녀!"
카엘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도 첫 번째 자객과 싸우느라 여유가 없었다.
비올레타는 일어서며 단검을 위로 올렸다. 자객의 칼을 막아냈다.
쟁!
팔이 저렸다. 힘이 달랐다.
'이 사람 진짜 강한데?'
자객이 칼을 빼며 다시 내리쳤다. 비올레타는 뒤로 물러서며 막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바닥이 얼얼했다.
"공녀님."
자객이 낮게 말했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왜 그분을 지키십니까."
'이 목소리... 아까 그 남자?'
호박색 눈동자의 남자였다.
"대답하십시오."
남자가 칼을 거뒀다. 하지만 경계는 풀지 않았다.
"당신은 10년 전, 황태자를 증오했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비올레타는 단검을 내리지 않았다.
"10년이면 충분합니다."
"거짓말."
남자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당신 오빠를 죽인 건 황태자입니다."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증거가 있습니다."
남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편지였다.
"에드먼드 경이 죽기 전날 밤, 공녀께 보낸 마지막 편지."
비올레타의 손이 떨렸다.
"거기에 모든 진실이 적혀 있습니다."
남자가 편지를 던졌다. 편지가 바람에 날려 비올레타 발치에 떨어졌다.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뭘 말입니까."
"당신이 왜 오빠를 죽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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