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빛 공녀의 이중생활
주인공: 비올레타 아스트레아 (빙의 전: 배덕식)
눈을 뜨는 순간, 천장이 너무 높았다.
'뭐야, 여기.'
온몸이 무거웠다. 이불인지 뭔지 모를 게 몸을 짓눌렀다. 눈앞에 보라색 실크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 위로 펼쳐진 천개에는 금실로 수놓은 문양이 빼곡했다.
'아니, 이게 뭔 개꿈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젯밤 야근하다가 쓰러진 게 기억났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회사 구급실도 아니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비정상적으로 부드러웠다. 명주? 실크? 이런 거 만져본 게 언제였더라.
방 안을 둘러봤다.
말이 안 됐다.
황금 촛대, 대리석 테이블, 벽에 걸린 유화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궁전 같았다.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미친."
꿈이겠지. 그래, 꿈. 과로로 정신이 나간 거야.
벽 쪽에 전신 거울이 보였다.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그리고 멈췄다.
거울 속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눈도 보라색이었다. 올라간 눈썹에 내려간 눈매. 도도하면서도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
'누구야, 이 여자.'
손을 들었다. 거울 속 여자도 손을 들었다.
뺨을 꼬집었다.
"아야!"
아팠다. 진짜로 아팠다.
'이게 대체 무슨...'
그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 쏟아져 들어왔다.
비올레타 아스트레아.
아스트라 제국 4대 공작가, 아스트레아 가문의 외동딸.
황태자 카엘 아스트라의 약혼자.
그리고 마법 재능이 형편없어서 황실에서 무시당하는 처지.
"...뭐?"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몸의 주인이 살아온 17년이 한꺼번에 들어찼다. 유모의 얼굴, 아버지 공작의 차가운 눈빛, 황태자와의 약혼식 날 쏟아진 귀족들의 수군거림.
'마법도 못 쓰는 주제에 황태자비라니.'
'아스트레아 가문도 이제 끝이군.'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중얼거렸다. 내 이름. 진짜 내 이름을 불러봤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여전히 보라색 머리의 미녀가 서 있었다.
'이게... 빙의야?'
웹소설에서나 보던 그 클리셰가 진짜로 일어난 건가. 아니, 근데 나 로판 안 읽는데. 판타지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씨, 이럴 거면 최소한 먼치킨물로 보내주지.'
마법 재능 제로라니. 하필이면 이 세계에서 마법이 곧 권력인데.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낯익은 목소리였다. 아니, 낯익다기보다는... 기억 속에 있는 목소리.
시녀장 마리안.
"어... 어."
대답이 제대로 안 나왔다.
문이 열렸다. 40대쯤 돼 보이는 여자가 들어섰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 흰 앞치마를 두른 검은 드레스.
"아가씨!"
마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 황태자 전하와의 다과회를 잊으셨습니까? 한 시간 뒤입니다!"
"...뭐?"
"어제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오후 2시, 황궁 동쪽 정원에서 다과회가 있다고요."
'아 진짜.'
황태자. 다과회. 이게 뭔 소리야.
마리안이 성큼 다가왔다. 내 팔을 잡아끌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준비하셔야죠."
"아니, 잠깐만—"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평소에도 전하를 뵙는 걸 꺼려하시더니, 오늘은 아예 잊으신 겁니까?"
마리안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평소에 황태자 만나는 거 싫어했나 보네.'
뭐, 이해는 간다. 기억 속 황태자 카엘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약혼자인 비올레타를 대하는 태도도 형식적이기 그지없었다.
시녀 둘이 더 들어왔다. 내 몸을 이끌고 욕실로 갔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그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 진짜야? 꿈 아니고?'
물속에 손을 담갔다. 따뜻했다. 장미 향이 났다.
시녀들이 머리를 감겼다. 수건으로 닦고, 향유를 발랐다. 모든 게 기계적으로 진행됐다.
드레스룸으로 옮겨졌다.
"오늘은 이 드레스가 좋겠습니다."
마리안이 연보라색 드레스를 꺼냈다. 레이스와 리본으로 장식된, 공주님 같은 옷.
'나한테 이런 거 입히는 거야?'
평생 정장 아니면 후드티만 입고 살았는데.
시녀들이 달라붙어 드레스를 입혔다. 코르셋을 조이는데 숨이 막혔다.
"으윽..."
"참으십시오, 아가씨. 거의 다 됐습니다."
'이게 무슨 고문이야.'
겨우 옷을 다 입었다. 거울을 봤다.
동화 속 공주가 서 있었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보라색 머리의 미녀. 허리는 개미처럼 가늘고, 목선은 우아했다.
'...이게 나라고?'
현실감이 없었다.
마리안이 보석함을 열었다. 자수정 목걸이를 꺼내 내 목에 걸었다.
"자,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어..."
마차가 흔들렸다. 코르셋이 갈비뼈를 파고들었다.
'미치겠네, 진짜.'
창밖으로 황궁이 보였다. 흰 대리석 건물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정원마다 분수가 솟구쳤다.
입이 마른 건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됐다.
'황태자를 만나러 간다고?'
기억 속 카엘 드 발레리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은발에 은빛 눈동자. 검술과 마법 모두 최고 수준. 황제의 장남이자 차기 황제.
그리고 비올레타를 대하는 태도는 얼음장 같았다.
'최소한 로판 주인공이면 공략 루트라도 있을 텐데.'
나는 로판을 안 읽는다. 회사에서 기획서나 보고 살았다. 이 세계가 어떤 소설인지,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른다.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마리안이 문을 열었다. 손을 내밀었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일단 오늘만 넘기자.'
마차에서 내렸다. 구두 굽이 높아서 비틀거렸다.
동쪽 정원은 장미로 가득했다. 흰 장미, 붉은 장미, 노란 장미. 중앙에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었다.
카엘 드 발레리안.
은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은빛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와... 진짜 미남이네.'
게임 캐릭터 같았다. 아니, 게임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저런 얼굴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나.
"늦으셨군요, 비올레타 양."
목소리도 차갑다.
"...죄송합니다, 전하."
입에서 자동으로 나왔다. 이 몸의 기억이 반응한 건지, 아니면 내가 회사에서 배운 프로 정신인지.
테이블로 다가갔다. 의자를 빼려는데 시종이 먼저 빼줬다.
'아, 이런 것도 혼자 못 하는구나.'
앉았다. 등을 꼿꼿이 세웠다. 무릎을 모았다. 손은 무릎 위에 포개졌다.
전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카엘이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은 나를 향한 채였다.
"오늘따라 눈빛이 다르군요."
"...예?"
"평소의 당신은 제 눈을 보지 않았습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들켰나.'
아니다. 아직 아니야. 빙의한 걸 알 리 없다.
"기분 탓이시겠죠, 전하."
웃었다. 영업용 미소. 10년 직장 생활로 다진 표정 관리.
카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군요."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종이 다과를 가져왔다. 마카롱, 스콘, 작은 케이크들. 홍차 향이 코를 찔렀다.
"드시죠."
카엘이 말했다.
포크를 들었다. 케이크를 잘랐다. 입에 넣었다.
달았다. 엄청 달았다. 설탕 덩어리 같았다.
'으...'
겉으로는 우아하게 씹었다.
카엘은 케이크를 건드리지 않았다. 찻잔만 들고 있었다.
"어젯밤 일을 들으셨습니까."
갑자기 물었다.
"...무슨 일 말씀이신지요."
"제 침실에 자객이 들었습니다."
숨이 멎었다.
기억이 떠올랐다. 마리안이 했던 말.
'어젯밤 황태자 전하의 침실에 자객이 들었다가 정체불명의 검사에게 당했다더군요.'
"하오나 제가 칼을 뽑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벴습니다."
카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검 솜씨가 수준급이었다고 하더군요."
뒷목이 서늘했다.
'설마.'
내가? 비올레타가? 어젯밤에?
기억이 없었다. 오늘 아침 눈을 뜨기 전까지는 전부 이 몸 주인의 기억이었다.
어젯밤 비올레타가 뭘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 검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시겠군요."
"혹시 비올레타 양은 아십니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찌 제가 알겠습니까, 전하."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조심했다.
카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또렷했다.
"당신은 검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옛날 일입니다."
기억 속 비올레타는 어릴 적 검술을 배웠다. 재능은 없었지만 꾸준히 했다. 그러다 마법 수업에 집중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그만뒀다.
마법 재능도 없으면서.
"옛날이라 해도 10년입니다."
"지금은 잊었습니다."
"과연."
카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은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었다.
"거짓말은 눈에 보입니다, 비올레타 양."
숨이 막혔다.
'이 새끼 뭐야.'
속으로 욕이 나왔다.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했다.
"전하께서 무례하십니다."
"무례한 건 저를 속이려는 당신입니다."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장미 향이 너무 진했다. 머리가 아팠다.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먼저 말했다.
카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는 건가. 비웃는 건가.
"아직은 없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일어섰다. 치맛자락을 잡았다.
"다과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몸이 좋지 않습니다."
"앉으십시오."
명령이었다.
'아 진짜 개빡치네.'
다시 앉았다. 등받이에 기댔다. 팔짱을 끼려다 말았다.
카엘이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했다.
"어제 밤 자정,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침실에서 잤습니다."
"증인이 있습니까."
'이 새끼가 진짜.'
"시녀장 마리안이 증인입니다."
거짓말이었다. 마리안이 뭐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애초에 어젯밤 일은 전부 모른다.
카엘의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자객의 목에 베인 상처를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한 칼이었습니다. 정확히 경동맥을."
손끝이 차가워졌다.
"검도의 기본기입니다. 아스트레아 가문의 검술은 그런 식이죠."
'아, 씨.'
10년 검도. 내가 배운 거였다. 배덕식으로 살 때.
대학 검도부 주장까지 했다. 승부욕 하나는 누구한테도 안 졌다.
근데 그게 이 세계에서도 통한다고?
"제 검술 스승님도 같은 방식을 쓰셨습니다."
카엘이 말을 이었다.
"아스트레아 가문 출신이셨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애도를 표합니다."
"당신 아버지 공작께서 직접 가르치셨다고 들었습니다."
틀렸다. 기억 속 비올레타는 아버지한테 검을 배운 적 없다. 객원 검술 교관한테 배웠다.
근데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옛날 일입니다, 전하."
"반복하시는군요."
카엘이 일어났다.
키가 컸다. 190은 족히 넘어 보였다.
테이블을 돌아 이쪽으로 왔다.
'뭐야, 뭐 하려고.'
숨을 참았다.
카엘이 내 앞에 멈췄다.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시오."
"...왜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얼음장 같았다.
일어섰다. 구두 굽이 높은데도 그는 한참 위였다.
카엘이 내 손목을 잡았다. 소매를 걷었다.
"전하!"
"가만히 계십시오."
손목이 드러났다. 흰 피부에 아무것도 없었다.
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실망? 의심?
"검을 쥐면 굳은살이 생깁니다."
"10년 전 일입니다."
"굳은살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손목을 빼냈다. 소매를 내렸다.
"만족하셨습니까."
"...아니."
카엘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등이 의자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당신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뭘요."
"거짓말하는 눈."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배덕식아, 정신차려.'
10년 회사 생활. 상사 눈치, 클라이언트 비위 맞추기. 거짓말도 수없이 했다.
웃었다. 영업용 미소 최대치로.
"전하께서는 제가 자객을 베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황당하군요."
"그렇습니까."
카엘의 손이 움직였다. 내 턱을 잡았다.
얼굴이 위로 올라갔다. 시선이 마주쳤다.
은빛 눈동자가 나를 해부했다.
"당신은 변했습니다."
"...무슨."
"어제까지의 당신은 제 눈도 못 마주쳤습니다. 말투도 달라졌죠. 더 당당해졌습니다."
'들켰다.'
아니다. 빙의까지는 모를 거야.
"제가 성장한 겁니다, 전하."
"하룻밤 사이에?"
"때로는 그런 일도 일어납니다."
카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엔 확실히 비웃음이었다.
"재미있군요."
손을 놓았다. 한 발짝 물러났다.
"오늘 밤 무도회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몰랐다.
"참석하십시오. 약혼자로서 당연한 의무입니다."
"...예."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카엘이 돌아섰다. 장미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시종들이 따라갔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마리안이 다가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응."
"무도회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
"예. 드레스를 새로 맞춰야 하고, 헤어스타일도 정해야 하고..."
마리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젯밤 내가 뭘 한 거야.'
기억이 없다. 눈 뜬 게 오늘 아침이었다.
그 전은 전부 비올레타의 기억이다.
근데 어젯밤만 비어 있다.
'설마 진짜 내가 자객을 벤 거야?'
말이 안 된다. 나는 검도를 했지 진짜 사람을 벤 적은 없다.
근데 이 몸은?
마차에 올랐다. 궁전이 멀어졌다.
창밖으로 석양이 보였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무도회.'
거기서 뭔가 일어날 거다. 카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함정이다.
---
밤이 왔다.
드레스룸에서 새 드레스를 입었다. 진보라색.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 허리에는 은색 장식.
'완전 야하잖아.'
등이 파였다. 쇄골이 다 보였다.
마리안이 머리를 올렸다. 보석 핀을 꽂았다. 목걸이를 걸었다.
거울을 봤다.
모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아름다운 건 이 몸이지 나는 아니야.'
한숨이 나왔다.
마차가 출발했다. 황궁으로 향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달이 밝았다.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