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전문가의 고등학교 생존기
주인공: 강민석
책상에 엎드린 채로 눈을 뜨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강민석은 목덜미가 뻐근했다. 팔에 베인 자국이 빨갛게 올라와 있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렸다. 학교 종이었다.
'...뭐지?'
고개를 들자 교실이 보였다.
책상 서른 개, 칠판, 게시판. 창밖으로는 운동장이 펼쳐져 있었다. 농구대에 매달린 남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민석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작았다.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손톱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고, 손등에는 샤프 심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농담이겠지."
중얼거린 목소리마저 낯설었다. 갈라지지 않은, 17세의 목소리였다.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구조조정 통보를 받고 소주를 마셨던 기억이 어렴풋했다. 팀장이 건넨 서류 봉투, '명예퇴직 신청서'라는 글자. 20년을 일한 회사가 한 장짜리 서류로 끝났다.
그런데 지금은?
"야, 강민석."
옆자리에서 누군가 툭 쳤다.
민석이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안경을 쓴 남학생이었다. 이름표에는 '박지훈'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 또 잤어? 담임 쌤 오신대."
"...담임?"
"어, 조회 시간이라니까."
지훈은 민석의 멍한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야, 너 진짜 어제 몇 시에 잤어?"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탁 앞으로 중년 남교사가 들어섰다. 안경을 고쳐 쓰며 출석부를 펼쳤다.
"자, 다들 자리 앉아. 신학기 첫날인데 정신 좀 차리자."
교실이 술렁거렸다. 학생들이 우르르 자리로 돌아왔다.
민석은 창밖을 봤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복도를 지나갔다. 여학생 둘이 킥킥거리며 뭔가를 속닥였다. 남학생 하나는 복도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짜네.'
손끝이 차가웠다.
"좋아, 그럼 신학기 목표 발표부터 하자. 1학년 1반, 성진고의 자랑스러운 신입생 여러분."
담임교사는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만든 것 같은 미소였다.
"한 명씩 일어나서 올해 목표 말해봐. 꿈이어도 좋고, 성적 목표여도 좋아."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첫 번째 학생이 일어났다.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저는 올해 전교 10등 안에 들고 싶습니다."
박수 소리가 터졌다.
두 번째 학생이 일어났다. 키 큰 남학생이었다.
"저는 의대 진학이 목표입니다."
또 박수가 터졌다.
민석은 눈을 감았다.
'이게 뭐야.'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학생들은 저마다 목표를 외쳤다. 서울대, 연대, 고대, 의대, 약대. 누군가는 학생회장을 꿈꿨고, 누군가는 전교 1등을 외쳤다.
민석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가 회사였나?'
"자, 다음. 강민석."
담임교사가 민석을 가리켰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시선이 쏠렸다.
민석은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목표?"
"응, 올해 목표. 뭐든 좋아."
담임교사는 격려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석은 창밖을 봤다. 운동장 끝에 있는 나무 그늘. 거기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털을 핥고 있었다.
"칼퇴요."
교실이 터졌다.
"하하하!"
"뭐래, 쟤?"
"미쳤나봐!"
학생들이 책상을 치며 웃었다. 민석은 무표정하게 앉았다.
담임교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 강민석 학생 유머 감각 좋네. 좋아, 다음."
지훈이 민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너 진짜 웃기다."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긴 건 너희야.'
***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이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들은 복도로 쏟아져 나갔다. 누군가는 매점으로 달려갔고, 누군가는 화장실로 향했다. 여학생 몇 명은 창가에 모여 뭔가를 속닥거렸다.
민석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교과서 몇 권, 공책, 샤프, 지우개. 그리고 학생증 하나.
'강민석. 2007년생. 성진고등학교 1학년 1반.'
2007년생이라니.
민석은 학생증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게 꿈이면 좋겠는데.'
지훈이 돌아왔다. 손에는 초코우유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야, 하나 먹어."
민석은 받아 들었다.
"고마워."
"근데 너 진짜 칼퇴가 목표야?"
"응."
"...왜?"
민석은 빨대를 꽂으며 대답했다.
"야근 싫어서."
지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야, 여기 학교야. 무슨 야근?"
"야자 있잖아."
"...그건 야근이 아니라 자율학습이지."
민석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똑같은데."
지훈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게시판에 포스터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학생회장 선거', '1학년 대표 모집', '동아리 박람회 안내'. 그 아래에는 '이달의 우수 학급' 순위표가 걸려 있었다.
민석은 포스터를 훑어봤다.
'공약', '비전', '조직도'.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도 똑같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교복 와이셔츠 위에 학생회 배지를 달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빨랐다.
민석은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여학생이 민석 앞에 섰다.
"1반 강민석 맞죠?"
"...응."
"저 학생회 총무 이지민이에요.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민석은 게시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신입생 대표 추천받고 있거든요. 담임 선생님이 추천하셨어요."
"패스."
지민은 눈을 깜빡였다.
"...지금 거절하시는 거예요?"
"응."
"이유라도 들을 수 있을까요?"
민석은 한숨을 쉬었다.
"야근 싫어서."
"...네?"
"학생회 회의 방과 후에 하잖아. 그거 야근이야."
지민의 입이 벌어졌다. 뭔가 말하려다가 참았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돌아섰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훈이 민석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너 진짜 미쳤어?"
"왜."
"학생회 총무가 직접 왔는데 그렇게 말해?"
"그게 돈이 돼?"
지훈은 말문이 막혔다.
민석은 다시 게시판을 봤다. '학생회 예산 집행 계획'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붙어 있었다.
- 동아리 지원금: 500만원
- 축제 운영비: 300만원
- 학생 복지비: 200만원
'복지비가 제일 적네.'
민석은 공책을 꺼냈다. 펜을 눌렀다.
'예산 항목별 비율 — 동아리 50%, 축제 30%, 복지 20%. 복지비 사용처 불명확.'
지훈이 옆에서 힐끔거렸다.
"야, 너 뭐 써?"
"...아무것도."
"거짓말. 나 다 봤어."
민석은 공책을 덮었다.
"그냥 심심해서."
"예산 분석이 심심풀이야?"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었다.
급식실은 전쟁터였다. 학생들이 줄을 서서 밀고 당겼다. 배식대 앞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야, 새치기하지 마!"
민석은 줄 끝에 섰다. 앞에 서른 명쯤 있었다.
'이럴 거면 편의점 도시락이 낫지.'
지훈이 옆에 붙었다.
"야, 오늘 메뉴 뭐래?"
"몰라."
"너 급식 안 먹어?"
"줄 서는 게 비효율적이야."
"...그럼 뭐 먹을 건데?"
"매점에서 빵 사 먹으면 5분 컷."
지훈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야, 그래도 급식이 더 싸잖아."
"시간이 돈이야."
"...너 진짜 특이하다."
민석은 줄에서 빠져나왔다. 매점으로 향했다.
매점은 한산했다. 학생 몇 명이 음료수를 고르고 있었다.
민석은 식빵 한 봉지를 집었다. 바나나우유도 하나 집었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였다.
"잠깐만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여학생이 서 있었다. 긴 생머리에 또렷한 눈매. 교복 위에 학생회장 배지가 달려 있었다.
최서연이었다.
"1반 강민석 맞죠?"
"...응."
서연은 민석의 손에 든 빵을 봤다.
"점심 안 먹어요?"
"이게 점심인데."
"급식실 가면 따뜻한 밥 나오는데."
민석은 우유를 계산대에 올렸다.
"줄 서는 게 싫어서."
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효율 따지는 스타일이네요."
"...그렇게 보여?"
"아침 조회 때 칼퇴 얘기하셨잖아요. 재밌더라고요."
민석은 카드를 긁었다.
"농담 아니었는데."
서연의 눈빛이 변했다.
"진심이었어요?"
"응."
"...왜요?"
민석은 빵을 집어들었다.
"야근 싫어서."
서연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민석을 가만히 쳐다봤다.
"학생회 들어올 생각 없어요?"
"없어."
"이유는?"
"그게 돈이 돼?"
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민석은 매점을 나섰다.
***
학교 뒤편 골목이었다.
담벼락 아래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민석은 그곳에 앉았다.
빵 봉지를 뜯었다. 한 장을 꺼내 입에 넣었다.
"야옹."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얼룩 고양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침에 운동장에서 봤던 그 고양이였다.
민석은 빵 한 장을 떼어 바닥에 놓았다.
"여기."
고양이가 다가와 빵을 핥았다. 민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봤다.
'이게 제일 편하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떨어졌다.
민석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회사 다닐 때도 이랬지.'
점심시간에 혼자 편의점 도시락 먹고, 옥상에서 담배 피우고,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20년이 그랬다.
'그런데 왜 다시 여기야.'
고양이가 빵을 다 먹고 민석을 올려다봤다. 민석은 한 장을 더 떼어줬다.
"너는 좋겠다. 밥만 주면 되니까."
고양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빵을 물고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다.
민석은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조용히 3년만 버티자.'
그때였다.
"여기 있었네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민석은 고개를 돌렸다.
최서연이 서 있었다. 손에는 민석의 공책이 들려 있었다.
"...그거."
"교실 책상에 놔둔 거 맞죠?"
민석은 일어섰다.
"왜 남의 거 가져와."
서연은 공책을 펼쳤다.
# Part 3: 위기-결말부
"예산 항목별 비율, 동아리 50%, 축제 30%, 복지 20%. 복지비 사용처 불명확."
서연이 공책을 읽었다.
민석은 손을 뻗었다.
"돌려줘."
"이거 어디서 봤어요?"
"게시판."
"게시판에는 이렇게 자세히 안 나와요."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학생회 내부 자료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알았어요?"
민석은 공책을 낚아챘다.
"추측이야. 추측."
서연은 한 걸음 다가섰다.
"1학년이 첫날 예산 분석을 추측으로 해요?"
"취미야."
"거짓말."
민석은 한숨을 쉬었다.
"믿든 말든."
돌아서려는데 서연이 팔을 잡았다.
"잠깐만요."
"왜."
"이거 누구한테 보여줬어요?"
"아무도."
"진짜요?"
민석은 서연을 쳐다봤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뭐지, 이 반응.'
"왜 그래. 들킬 거라도 있어?"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없어요."
"그럼 놔줘."
서연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거 어디 올리지 마요."
"올릴 데가 어딨는데."
"SNS든 뭐든."
민석은 피식 웃었다.
"학생회 예산 분석 올리면 조회수라도 나와? 그게 돈이 돼?"
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장난 아니에요."
"나도 장난 아니야. 그냥 심심해서 쓴 거라고."
서연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민석은 공책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려는데 서연이 다시 말했다.
"강민석."
"왜 또."
"학생회 안 들어올 거면 조용히 지내요."
민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
교실로 돌아왔을 때 지훈이 달려왔다.
"야, 너 어디 갔었어?"
"매점."
"한 시간 동안?"
민석은 자리에 앉았다.
"산책."
"...미쳤나."
오후 수업이 시작됐다. 수학 시간이었다.
교사가 칠판에 수식을 적었다. 학생들은 노트에 받아 적었다.
민석은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이 한창이었다. 학생들이 트랙을 돌고 있었다.
'20년 전에도 똑같이 뛰었지.'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석은 슬쩍 꺼내봤다. 문자였다.
[발신: 학생회]
[1학년 전체 조회. 5교시 후 체육관 집합. 필참.]
민석은 핸드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패스.'
***
5교시가 끝나자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체육관 간대."
"뭐 하는 건데?"
"학생회 공지 아니야?"
민석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훈이 민석을 흔들었다.
"야, 안 가?"
"안 가."
"필참이래."
"그게 출석 체크해?"
"...몰라. 근데 다들 가잖아."
민석은 책상에 엎드렸다.
"난 자야겠어."
지훈은 혀를 찼다.
"너 진짜 특이하다."
교실이 텅 비었다.
민석은 눈을 감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조용해서 좋네.'
10분쯤 지났을까.
문이 열렸다.
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최서연이 서 있었다.
"왜 안 왔어요?"
"자고 있었는데."
"필참이라고 했잖아요."
"그게 강제야?"
서연은 교실로 들어왔다. 민석의 책상 앞에 섰다.
"1학년 전체가 모였어요."
"그래서?"
"혼자만 안 오면 눈에 띄잖아요."
민석은 하품을 했다.
"눈에 띄면 어때. 그게 돈이 돼?"
서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왜 이렇게 삐딱해요?"
"삐딱한 게 아니라 효율적인 거야."
"효율?"
"쓸데없는 집합에 시간 쓰는 게 비효율이지."
서연은 말없이 민석을 내려다봤다.
"강민석."
"왜."
"진짜 조용히 못 지내요?"
민석은 일어났다.
"조용히 지내고 싶은데 자꾸 찾아오는 건 누군데."
서연의 입술이 떨렸다. 뭔가 말하려다가 참았다.
민석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난 간다."
"어디?"
"집."
"아직 6교시 남았는데."
"조퇴."
민석은 교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었다.
뒤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민석!"
민석은 멈추지 않았다.
***
교문을 나서는데 경비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학생, 어디 가?"
민석은 학생증을 꺼내 보였다.
"조퇴요."
"담임 허락받았어?"
"...네."
경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봤지만 그냥 보내줬다.
민석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게 맞지.'
편의점이 보였다. 민석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알바생이 인사했다. 20대 초반쯤 돼 보였다.
민석은 삼각김밥 두 개를 집었다. 바나나우유도 하나 집었다.
계산대 앞에 섰을 때 알바생이 물었다.
"학생이에요?"
"네."
"학교 끝났어요?"
"...비슷하게."
알바생은 웃었다.
"부럽다. 나도 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민석은 카드를 건넸다.
"안 부러워요."
"왜요?"
"여기랑 똑같거든요."
알바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민석은 김밥을 집어 들고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발신: 담임교사]
[강민석, 무단조퇴 확인. 내일 아침 교무실로.]
민석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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