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약 14분 · 총 7,246자

거래의 시작

주인공: 강민석

교무실 창문 너머로 체육 시간 축구하는 애들이 보였다.

공 하나에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민석은 턱을 괴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강민석, 듣고 있어?"

담임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네."

"3교시 시작 10분 만에 조퇴? 이유가 뭐야?"

'두통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픈 건 사실이었다. 다만 진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닐 뿐.

"병원은 갔어?"

"약국에서 약 사 먹었어요."

담임이 한숨을 쉬었다. 민석은 그 한숨 소리를 20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았다.

'자네, 이렇게 대충대충 살면 나중에 후회해.'

부장이었나, 차장이었나.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상사가 했던 말.

결국 먼저 잘린 건 그 상사였지만.

"2학년 되면서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 1학년 때는 안 그랬잖아."

'1학년 때 저는 17살이 아니라 마흔이었거든요.'

물론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니었다.

"앞으로 조퇴 한 번만 더 하면 학부모 호출이야. 알았지?"

"네."

담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쪽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어. 금방 올게."

문이 닫히자 교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책상 위에 서류 몇 장이 펼쳐져 있었다.

'학생 상담 기록.'

슬쩍 눈길이 갔다. 이름이 보였다.

2학년 3반 최서연.

'학생회장.'

민석의 시선이 멈췄다.

—가정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 아버지와의 갈등 심화. 완벽주의 성향이 오히려 본인을 압박하는 것으로 보임. 추가 상담 필요.

손이 먼저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셔터음이 나지 않게 무음으로 설정해둔 게 이럴 때 쓸모 있었다.

'왜 찍는 거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쓸 데가 있어서? 아니면 그냥 습관?

회사 다닐 때 배운 거였다. 일단 기록하고 보는 것. 언제 어디서 쓸지 모르니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민석은 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담임이 들어왔다.

"가봐. 그리고 다음부터는 아프면 보건실 먼저 가."

"...네."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는 한산했다. 4교시가 한창이었다.

'점심시간까지 어디서 때우지.'

도서관은 사서 선생이 까다로워서 패스. 옥상은 잠겨 있고.

'그냥 화장실에서 폰이나 보다 가자.'

그때였다.

학생회실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예산 문제는 처리했으니까 걱정 마."

여자 목소리. 차갑고 단호했다.

민석은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형들한테 들키면 큰일 나는데."

남자 목소리. 떨리는 게 확연했다.

'형들?'

민석은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최서연이 보였다. 학생회장. 언제나 깔끔한 교복에 단정한 자세.

그 앞에 부회장 박지훈이 서 있었다.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로.

"형들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서연의 목소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형들이 누군데?'

민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학교에 선배들 말고 다른 '형들'이 있나?

'...아, 설마.'

그 순간 서연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민석과 눈이 마주쳤다.

"강민석?"

서연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민석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들킨 건가.'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서연이 복도로 나왔다.

민석은 멈춰 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지나가는 중."

"지나가는 중에 문 앞에 서 있었다고?"

민석은 천천히 돌아섰다.

서연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는 민석보다 작았지만 기세는 확실히 위였다.

"들어봤어?"

"뭘요."

"방금 대화."

민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관심 없어요. 그냥 화장실 가는 길이었는데."

서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럼 들어와."

"...네?"

"학생회실. 들어와."

민석은 잠시 망설였다.

'거절하면 더 수상해 보이겠지.'

그는 한숨을 쉬고 학생회실로 들어갔다.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긴 회의 테이블과 의자들, 벽면에 붙은 각종 일정표와 예산안.

박지훈이 구석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서연이 문을 닫았다.

"앉아."

민석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서연이 그 앞에 섰다.

"강민석. 2학년 5반."

"...네."

"학생회 예산안에 관심 많더라?"

민석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떻게 알지?'

"지난주 게시판에 붙은 예산안 앞에서 한참 서 있었잖아. 사진도 찍고."

"...그게 문제예요?"

"문제는 아니지. 근데 궁금하더라. 왜 그랬는지."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회의 테이블로 가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공책이었다.

민석의 공책.

'어떻게?

# Part 2: 전개

서연이 공책을 펼쳤다.

민석의 필체가 빼곡했다. 숫자, 도표, 메모.

"이거 네 거 맞지?"

"...네."

"어떻게 가져갔어요?"

질문이 튀어나왔다. 민석은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롭다는 걸 깨달았다.

서연이 미소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눈은 웃지 않는 표정.

"담임 선생님이 주셨어. 네가 교무실에서 조퇴할 때 책상에 두고 갔다면서."

'망했다.'

민석은 속으로 욕을 뱉었다.

서연이 특정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교사별 수업 시간 분석. 김OO 교사 주당 18시간, 이OO 교사 주당 22시간. 시간당 수당 환산 시 연간 약 200만원 차이 발생 추정.

"이게 뭐야?"

"...심심해서 적은 거예요."

"심심해서?"

서연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고등학생이 교사 수당 계산을 심심풀이로 한다고?"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박지훈이 구석에서 중얼거렸다.

"회장,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냐?"

"닥쳐."

서연의 한마디에 지훈이 움찔했다.

민석은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 완전히 잡혀 있네.'

서연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급식 업체 계약 내역 추정. A업체 연간 계약 금액 2억 3천. 타 학교 평균 대비 15% 높음. 재계약 사유 불명.

"이건?"

"...급식이 맛없어서 알아봤어요."

"그래서 타 학교 계약 금액까지 조사했어?"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공책을 덮었다. 손가락으로 표지를 톡톡 두드렸다.

"강민석. 너 대체 뭐야?"

"...학생이요."

"학생이 이런 거 할까?"

"그럼 뭔데요."

서연이 의자를 끌어와 민석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회의 테이블이 놓였다. 마치 협상 테이블처럼.

"너 학생회 예산안 본 거 기억하지?"

"네."

"그때 표정이 이상하더라. 뭔가 잘못됐다는 듯이."

민석은 침묵했다.

서연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말해봐. 뭐가 잘못됐어?"

'이거 대답하면 끝이야.'

민석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입을 열면 서연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걸.

하지만 침묵하면?

'더 의심받겠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축제 예산이요."

"축제?"

"작년 대비 30% 늘었던데, 항목은 똑같더라고요."

서연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문제야?"

"물가 상승률이 연 2%인데 예산이 30% 늘었으면 어딘가 새는 거 아닌가요?"

민석이 말을 마치자 학생회실에 정적이 흘렀다.

지훈이 창백한 얼굴로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은 표정이 없었다. 마네킹처럼.

"...너 정말 학생 맞아?"

"졸업장 보여드릴까요?"

"입 조심해."

서연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민석은 뒤로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거렸다.

"그래서요? 저한테 뭘 원하는데요?"

"입 다물어줬으면 좋겠어."

"...패스."

"뭐?"

"귀찮아요. 저 그냥 조용히 살고 싶거든요."

서연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조용히 살고 싶은 애가 학교 예산을 분석해?"

"취미예요."

"취미?"

"네. 숫자 보는 게 좋아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민석은 정말로 숫자를 좋아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서연이 다시 공책을 펼쳤다.

이번엔 뒷부분.

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교사 평가 시스템 분석. 학생 만족도 조사 결과와 실제 인사 이동 상관관계 0.3. 평가 기준 불명확. 교장 재량권 과다 추정.

"이건 뭐야?"

서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해서 교장 선생님 인사권까지 분석했어?"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했다.'

회사 다닐 때 버릇이었다. 조직 구조를 파악하는 것. 누가 실권자인지, 어디로 보고 라인이 올라가는지.

그게 생존 방법이었으니까.

서연이 공책을 덮었다.

"이거 교장 선생님한테 가면 어떻게 될까?"

"...협박이에요?"

"협박? 아니. 제안이지."

서연이 팔짱을 꼈다.

"너 학생회 들어와."

"싫은데요."

"왜?"

"귀찮아요. 그리고 전 조직 생활 안 맞아요."

"조직 생활?"

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등학생이 무슨 조직 생활?"

민석은 말실수를 깨달았다.

'젠장.'

"아무튼 싫어요. 그냥 제 공책 돌려주세요."

"안 돼."

"왜요?"

"이거 증거니까."

"증거요?"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학생회 예산이 새는 거 알았지? 그럼 다른 것도 알 거야."

"...뭘요."

"그 돈이 어디로 가는지."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예산안을 보면서 이상한 항목들이 눈에 띄었다.

—외부 용역비. 항목 불명. 연간 800만원.

'용역이 뭔데?'

고등학교 학생회가 무슨 용역을 쓴다는 건지.

서연이 창가로 갔다.

"너 아까 들었지? 지훈이랑 내가 한 얘기."

"...아뇨."

"거짓말."

서연이 돌아섰다.

"형들 얘기 들었을 거야."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 Part 3: 위기-결말부

"형들이 누군데요?"

민석이 먼저 물었다.

서연의 눈썹이 올라갔다.

"궁금해?"

"아니요. 근데 제 공책 돌려받으려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서연이 픽 웃었다.

"너 진짜 재밌네. 지금 협상하는 거야?"

"...그냥 물어본 건데요."

"물어본 것치고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네."

서연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3학년들이야."

"선배들요?"

"응. 작년 학생회장이랑 부회장."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했을 텐데?'

"졸업했는데 왜 아직도 학교 일에 관여해요?"

"관여가 아니라..."

서연이 말을 멈췄다. 지훈을 힐끗 봤다.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서연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네가 알 바 아니야."

"그럼 제 공책도 제가 알 바 아니네요."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려주세요. 아니면 담임 선생님한테 분실 신고할게요."

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앉아."

"싫은데요."

"앉으라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석은 멈춰 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화났네.'

서연이 숨을 골랐다.

"...미안. 너무 예민했어."

민석은 천천히 돌아섰다.

서연이 이마를 짚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지쳤나?'

"앉아줄래? 제발."

민석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서연이 공책을 밀어냈다.

"가져가."

"...진짜요?"

"대신 조건이 있어."

'역시.'

민석은 공책을 집어 들지 않았다.

"뭔데요?"

"이번 주 금요일까지 학생회 예산안 전체를 다시 검토해줘."

"왜요?"

"감사 때문에."

민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감사요?"

"교육청에서 나와. 다음 달에."

"학생회 예산을요?"

"응. 작년에 문제가 좀 있었거든."

서연이 창밖을 봤다.

"그때 회장이었던 선배가... 처리를 제대로 안 했어. 그래서 이번엔 확실하게 해야 돼."

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형들이 신경 쓰이는구나.'

"근데 왜 저요? 회계 담당 있잖아요."

"걔는 못 믿어."

서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훈이도?"

"지훈이는... 숫자에 약해."

지훈이 구석에서 고개를 숙였다.

민석은 잠시 생각했다.

'귀찮긴 한데.'

예산안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어디서 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조건이 뭔데요?"

"검토만 해줘. 학생회 들어오라는 건 아니야."

"시간은요?"

"금요일까지. 3일 남았어."

민석은 공책을 집어 들었다.

"...생각해볼게요."

"생각?"

서연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거 제안이 아니야. 강민석."

"그럼 뭔데요?"

"거래지."

서연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네 공책에 있는 거, 특히 교사 평가 시스템 분석. 그거 교장 선생님한테 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민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협박이네요."

"협박이 아니라 사실이야."

서연이 미소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눈은 웃지 않는 표정.

"교장 선생님 인사권 분석한 학생. 재밌겠다?"

민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망했다.'

공책을 쥔 손이 떨렸다. 화가 났다.

'이래서 조직이 싫다고.'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요일까지. 예산안 검토 부탁해."

"거절하면요?"

"거절? 못 하지."

서연이 민석에게 다가왔다. 눈을 마주쳤다.

"넌 이미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강민석."

민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문을 열었다.

"가봐. 점심시간 끝나간다."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책을 주머니에 넣었다.

복도로 나서는데 뒤에서 서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민석이 멈춰 섰다.

"당신, 학생회 예산만 분석한 게 아니네요."

등골이 서늘해졌다.

천천히 돌아섰다.

서연이 문틈 사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 정도 분석력이면 학교 전체 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뜻이죠. 특히..."

서연이 손에 든 종이를 펼쳐 보였다.

민석의 공책을 복사한 것이었다.

"이 부분."

—교사 평가 시스템 분석. 실제 인사 이동과 학생 만족도 조사 결과 불일치. 교장 재량권 과다. 특정 교사(김OO, 이OO) 승진 속도 비정상.

민석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교장 선생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서연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낮았다.

민석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어떻게 복사했어요?"

"중요한 게 그거야?"

서연이 웃었다.

"넌 지금 교장 선생님을 건드린 거야. 강민석."

민석은 주먹을 쥐었다.

'이게 함정이었나.'

공책을 돌려준 게 아니었다.

이미 복사해뒀으니까.

서연이 문을 닫으려 했다.

"금요일까지. 잊지 마."

민석은 서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학생들이 교실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석은 주머니에서 공책을 꺼냈다.

펼쳤다.

가장 뒷장.

거기 적혀 있던 건—

—최서연 상담 기록.

총 7,246자 · 약 14분

- 2 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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